|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알랭 투렌은 이를 탈산업사회라고 불렀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제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이 말의 뜻에 대한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왜나하면 이 용어는 하나의 완성된 시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인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용어의 의미에서도 나타나듯이 포스트모던은 다양성의 시대이며, 상대성의 시대이다. 즉 거대 이야기가 힘을 잃고 작은 이야기들이 힘을 가지는 시대, 전체보다는 개인이 중요시되는 시대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지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먼저 모던적인 사회 개념과 포스트모던적인 사회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모던이 단일성 내지는 이원성의 사회개념이 지배했다면 이제는 다양성의 개념이 사회적 유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 견해에 대부분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사회가 거대 집단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지배되던 사회라면 현재는 이러한 것이 자리를 잃은 시대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단순한 도식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이미 과거에도 존재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신약성서의 교회이다. 그러나 저자가 정의하는 포스트모던과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일치라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성의 사회가 불일치의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 진리이다. 다양성의 사회는 신약교회와 같이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진, 일치가 전제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차이가 인정되고자 한다면 서로를 인정하고자 하는 일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치 아래 불일치가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런 일치가 없다면 차이(불일치)는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저자는 지식을 과학적 지식과 이야기적 지식으로 나눈다. 과학적 지식은 지시적이며, 이야기적 지식은 비지시적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과학적 지식은 통시적인 반면, 이야기적 지식은 공시적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지식은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이야기적 지식이 강조된다. 이러한 관점은 성서의 비평학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성서의 비평학을 보면 과거 통시적인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공시적인 문학비평적 관점으로 바뀌어 왔다. 이것은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변화가 성서 해석학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티는 의미상실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 중심적이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이래 이루어진 언어철학에 잘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예일을 중심으로 한 성서 해석학이 서사성 상실에 대한 유감을 표현하고 서사비평을 발전시킨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리오타르의 통찰은 그가 현시대를 잘 읽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의 또다른 통찰은 지식의 위상이 변함과 동시에 주체도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거대 이야기의 배포자가 주체였다면 이제는 작은 이야기의 소유자가 그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권력에 의해 실행성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얼마나 많은 주체의 변이가 일어났는지는 더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보다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권력의 출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권력 구조(주체)의 등장 말이다. 아직 이 사회가 소수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계층간의 차이가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 이것을 잘 말해 준다. |
|
사실 제목 전면의 타이틀인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는 제목보다는 부제로 딸려있는 <정보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이라는 제목이 보다 더 내용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듯 하다. 화용론(pragmatic-실제 맥락에서 사용되는 말에 기능에 주목하는 영역)적인 견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도구로 사용하여 지식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사회 전체를 설명해 낼 수 있는 거대담론이 부재하고, 사회 현상 혹은 집단들 사이에 공유하는 공통분모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이야기적인(narratif) 지식이 다시 주목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줄거리의 뼈대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초창기격으로 이 책이 불리우는 까닭은 단순히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기 보다는, 사회의 구조화된 체계성이나, 이성의 일관된 단일성을 현실상황 속에서 부정하고, 이러한 현실 인식의 틀 위에서 연구를 했다는 점에서 나왔으리라 추측한다.
책의 두께는 얇지만, 본디 논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논증구조와 방법론에 관해서도 튼튼한 골격을 유지하고는 있다. 그와 동시에, 책이 쉽게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지하철에서 서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편안히 읽다가 앞뒤 문맥을 잊어 다시 읽기도 수차례 했다는 사실을 고백해 둔다. 다시 말하지만, 개설서라고 보기엔 쉽지 않으므로 개설서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어느 한 곳이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말하기는 늘 쑥쓰러운 부분이지만, 8장과 9장을 중심으로 틀이 짜여져있다는 생각이 들고, 이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독서를 해도 좋을듯 하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므로 이야기적인 것에 호소하는 것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과학의 언어 게임은 진술의 진리성을 추구하지만, 스스로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경우에 환원 불가능한 역사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는 바,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억과 기획의 필요성(역사성의 필요성, 악센트의 필요성)이 아니라, 반대로 망각의 필요성(운율의 필요성)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정보사회에서의>포스트모던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