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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의 미친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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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은 주연인 선덕여왕보다 조연인 미실이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배우의 카리스마나 연기력 때문에 그렇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후궁여럿이 임금 하나를 두고 총애를 다투는 사극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능력 있는 미실이 여러 남편을 거느리고 신라를 좌지우지한다는 설정은 신선하다 못해 파격이었다.   이번에 읽은 책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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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은 주연인 선덕여왕보다 조연인 미실이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배우의 카리스마나 연기력 때문에 그렇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후궁여럿이 임금 하나를 두고 총애를 다투는 사극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능력 있는 미실이 여러 남편을 거느리고 신라를 좌지우지한다는 설정은 신선하다 못해 파격이었다.

 

이번에 읽은 책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만화, 웹툰, 논픽션, 사극 등 여러 매체와 장르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쓰는 전혜진 작가의 신간이다.

바리데기 설화>, <숙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이학사전>, <방한림전>, <홍계월전>... 모두 알만한 이야기부터 처음 보는 낯선 이야기까지. 한결같이 고달픈 여성의 이야기이다. 영웅은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다지만 고전 속 그녀들은 남성이라면 겪지 않을 고통까지도 으레껏 짊어진다. 그녀들의 삶은 왜 그렇게 고단했을까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대왕은 아들을 기대하지만 계속 딸만 태어나자, 일곱 번째 공주를 내다 버리라 명령한다. 숙향의 아버지 김전은 피란 중에 다섯 살밖에 안 된 딸을 두고 도망친다. 동화책에서는 흔히 생략되지만, 계모에게 구박받던 콩쥐에게도, 계모와 이복동생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장화와 홍련에게도 아버지는 있었다.

(p.88)

 

바리데기 설화>, <심청전>,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미혼여성이고, 아버지 복이 없다는 것.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바리공주. 그녀는 친부인 오구대왕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양부모와 이별하고 아버지를 구할 약을 찾아 저승으로 떠나 수년간 고생하고 아버지를 살린다. 딸의 효심에 감동한 왕은 바리를 딸로 인정하고 나라의 반을 주겠다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의 신이 된다. 그녀를 두 번씩이나 고난에 빠뜨리는 존재는 친부모다. 그 중에서도 친아버지 오구대왕. 물론 남편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딸을 옥함에 담아 버린 친어머니도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남편이 하늘이던 시대였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아버지다. 오구대왕은 바리공주 덕에 살아났으면서도 진심어린 사과나 반성은 하지 않고, 나라의 반을 주겠다, 외손을 후계자로 삼겠다, 하며 자신의 죄를 유야무야 덮으려 한다. 최고 권력자라는 위치 덕에 현실에서는 딱히 그를 벌할 사람이 없고, 죽어서도 벌 받았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 고대소설의 주제라지만 아버지, 그중에서도 친부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아버지 복 없기로는 심청도 못지않다. 그녀의 아버지 심학규는 오구대왕처럼 잔인하지는 않아도 참 무능하고 이기적이다. 죽어 제삿밥을 먹어야한다며 책임질 수 없는 자식을 바라고, 심청이 아주 어릴 때는 양육을 위해 젖동냥을 하지만, 딸이 혼자 구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오히려 부양을 받는다. 그나마 가만히 계시기나 하면 좋겠는데 눈뜨고 싶다는 욕망에 공양미 삼백 석 시주를 덜컥 약속하고, 딸이 죽은 후에도 아들을 얻겠다며 뺑덕어미에게 끌려 다닌다.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과 가정에 대한 무관심으로 딸의 죽음을 방관한 장화와 홍련의 아버지 배좌수. 소설의 끝에 계모와 의붓 형제는 벌을 받지만 사건의 실질적 배후 배좌수는 젊고 어여쁜 부인과 재혼해서 행복하게 산다. 콩쥐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계모와 팥쥐는 벌을 받지만, 아버지는 또다시 현숙한 규수를 만나 재혼한다.

 

제사를 모시고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만을 소망한 채 딸에게 무관심하거나, 어린 딸에게 돌봄 노동을 전가하고, 때로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딸을 버리는 아버지들, 그리고 나약한 어머니와 사악한 계모로 상징되는 어머니들은 가부장제적 세계관 속에서 딸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에게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큰 고통이 있다. 바로 혼인에 따르는 고통이다.

(p.132)

 

가부장제의 질서 속에서 어린 시절을 암울하게 보낸 그녀들. 결혼하면 나아질까 

사씨남정기숙영낭자전을 통해 조선시대 여성의 결혼생활을 살펴보자.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 사씨남정기>. 주인공 사정옥은 요조숙녀이고 시댁에서도 인정받는 완벽한 며느리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남편의 첩도 들이고 첩이 아들을 낳아도 투기 하지 않는다. 가부장제가 바라는 모든 요건을 갖춘 그녀. 하지만 남편의 변덕으로 지위가 위태로워진다.

 

시가의 인정을 받는 사씨부인도 쫓겨나는 판에 당시 금기시되던 결혼으로 (말하자면 연애결혼)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숙영낭자의 처지는 더욱 애처롭다. 사씨부인과 숙영낭자를 진짜 힘들게 하는 건 남편과 시어른들이지만 감히 그들에게 따질 수 없으니 작품 속에는 만만한 원망의 대상이 등장한다. 뒷배 없는 첩이나 종같은 하위계급의 인물이 모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걸로 징악(懲惡)이 마무리된다. 개운치 않은 마무리다. 다르게 전개할 수는 없을까 

 

저자는 남편의 배신에 좌절하거나 가부장제의 이상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이야기로 네이버 웹툰 재혼황후를 언급한다. <재혼황후에는 인현왕후와 비슷한 처지의 황후, 나미에가 등장한다. 나미에는 유능하며 책임감 강한 황후지만 남편 소비에슈는 애첩의 아이를 적자로 삼기위해 나미에와 이혼한다. 인현왕후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나미에의 선택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이웃나라 황제와 재혼하고 능력을 살려 존경받는 황후가 된다. 애첩과 불화한 전남편이 이혼을 후회하며 나미에를 그리워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저자는 재혼황후가 현대적 관점에서는 진보적이진 않지만 지고지순한 여성을 이상으로 삼았던 과거와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가부장제의 그늘에서 희생되거나 순종하는 여성이 다수지만 고전 속에는 남성을 능가하는 여성들도 적잖이 존재한다. <박씨전>, <홍계월전>, <이학사전에는 가사일과 시서화는 물론 무예까지도 탁월해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왕에게 인정받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도술을 부리는 것보다 여자가 벼슬을 하는 일이 더 불가능하던 시대지만, 소설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담장 안에서 갇혀 지내야했지만 신분과 성별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만은 간절했던 그녀들은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나누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지금도 고전은 여러 매체와 장르로 재해석되며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고, 소망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한계에 맞서는 딸들의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YES마니아 : 로얄 s*****e 2023.08.24. 신고 공감 1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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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의 여성들에게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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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정말 좋아하는데,거기서 나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구비문학 속의 아련한 여신이거나 남편을 두고 다투는 쟁총형 처첩 캐릭터라는 것이 불만이었어요.이 책 덕에 몰랐던 고전 속 여성 캐릭터를 많이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연구와 번역이 활발히 진행되어서 여성서사가 더 주목받으면 좋겠어요!지고지순하고 양순한 여성보다 주체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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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정말 좋아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구비문학 속의 아련한 여신이거나 남편을 두고 다투는 쟁총형 처첩 캐릭터라는 것이 불만이었어요.
이 책 덕에 몰랐던 고전 속 여성 캐릭터를 많이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연구와 번역이 활발히 진행되어서 여성서사가 더 주목받으면 좋겠어요!
지고지순하고 양순한 여성보다 주체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로 주인공을 내세운 서사물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t********3 2025.01.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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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의 미친 여자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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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그랬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존재이며,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곳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러니 유사 남성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24쪽)   이 말은 이제껏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정해놓은 여성의 삶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또 책에선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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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그랬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존재이며,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곳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러니 유사 남성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24쪽)

 

이 말은 이제껏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정해놓은 여성의 삶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또 책에선 이렇게 덧붙인다.

 

"신화가 (중략) 영웅의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 신과 같은 강인한 혈통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도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 (24쪽)

 

그래. 신화에는 어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련이 등장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동경하는 결과를 손에 넣"는 신화 속 영웅들은 개인의 꿈을 대신 이뤄준다. 신화 대부분에는 남성이 주인공이지만 여성이 주인공일 때도 똑같다. 옛날 옛적에 살던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 존속되어 억압받아왔다. 하지만, 신화에서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이루며 당시 생각했을 때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이 책에서 바리데기 이야기를 시작으로 숙향전, 심청전, 장화홍련, 사씨남정기, 당금애기, 운영전 등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접하고 다시 복기했다. 

우리나라 옛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하나의 목표가 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함,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함, 사랑하기 위함, 아이를 살리기 위함, 가부장제를 뒤집기 위함 등등. 그 큰 목표는 어찌보면 가부장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그 자체로 페미니즘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신화 속 여성들이 욕망하는 것들은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신화와 다를 것이 없다고 봐야하는 게 핵심이다. 『규방의 미친 여자들』 덕분에 내가 모르고 있던 수많은 여성들의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s****i 2023.09.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