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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1권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 중 하나가 난이 중국에 갈 걸 고려해 틈틈이 모은 마흔 박스 분량의 책을 모두 나눠주거나 버리는 부분이었다. 난은 그 고통을 매우 실체적으로 느낀다. 그 고통이 내게까지 전해져 가슴이 아팠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에 틈틈이 아껴 모았을 그 책들을 도서관에 기증도 못하고(전문서적들이어서 읽을 독자가 없을 거라는 이유로 받아주질 않았다. 기증이라도 했다면 한결 마음이 편했을텐데) 버릴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다행히 2권에서 난은 집도 사고(책을 보관할 곳이 생겼다), 여유도 생기면서(책들 살 돈이 생겼다) 다시 책을 사 모은다. 대개는 헌책방이나 도서관의 도서판매대처럼 책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을 택하긴 했지만. 그 책 수집이 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지 알기에 뭉클해졌다. 10분 정도 다림질만 해도 그 수증기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인데, 습한 지역에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불 앞에서 (중국 요리를 위해 사용되는 웍은 고온에서 사용된다는 점을 상기하자) 일을 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하루도 쉬지 않고 생계를 위해 날마다 그 일을 해야 한다면. 너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이고, 그나마 덜 피곤한 날 자기 전 한 시간 정도 책 읽는 게 가능한 상황에서 짬짬이 생기는 여유 시간에 열 일을 다 제치고 책을 구입한다는 건 일종의 ‘리츄얼’이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난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것 하나로 족했다.
그는 밤에 집에 오면, 샤워를 하고 시를 몇 편 읽은 후, 한 시간도 안 되어 잠이 들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이제 강해진 걸 느꼈다. 그러나 마음은 텅 빈 것 같았다. 쓰는 것은 고사하고, 뭘 생각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어떤 점에서 그는 이러한 상태가 좋았다. 고대의 시인 도연명의 시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은 똑같이 흐르네/ 그것의 목적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난은 마음이 평화로웠다. 그는 자신의 땅에 굳건히 서서 헌신적인 가장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p.17) 솔직히 말해서 2권은 (원서는 번역서처럼 분권이 아닐테니 5부부터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1권과 달리 완전히 몰입하기는 힘들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다. 이민자의 삶을 택한 난은 고국인 중국에 대해서는 매우 냉정하고 분석적인 견해를 가진다. 그리고 그의 비판은 대부분 수긍할 수 있는 것들이다—예를 들어 중국 관료들의 부정부패, 타이완이나 티베트, 신장 위구르 지역 등에 대한 견해에 있어 난은 매우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견지한다. 난이 십 몇 년만에 중국에 돌아가 부모와 형제를 만나고 변한 중국을 보면서 느끼는 소감이나 회한 같은 것들 역시 이민자들이 종종 고백하는 것과 일치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돈을 펑펑 많이 써야 좋아하지, 일주일만 넘어봐. 엄청 귀찮아해. 고향이 따로 있고 고국이 따로 있나. 배우자 있는 데가 고향이고, 내 새끼 내 가족 있는 데가 고국인거야.” 지리적 거리만큼 정서적 거리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걸 피부로 느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가장 가까웠던 혈육들이 현재의 내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차할 수밖에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은 이민자라면 모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난이 미국에 대해 보이는 우호적인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어떻게 보면 이게 이민자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부분 부분 거부감이 든 건 사실이다. 달리 보자면 난은 미국에 정착하는 게 최우선이 목표였기 때문에, 중국의 단점을 보는 것만큼 의식적으로 미국의 장점을 보려고 했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하 진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작가가 가진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자유로운 삶』은 중국만큼 객관적으로 미국에 대해 서술하지는 못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난이 계속 조지아에 살면서 9.11과 금융위기를 모두 미국에서 경험했다면, 그 후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국 중국이 G2가 되고, 심지어 미국을 추월해 세계 제1의 국가로 부상하는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이 독서 중간 중간에 하염없이 끼어드니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재밌는 것은 그 덕분에(?)『자유로운 삶』을 끝내자마자 조정래의『정글만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난이 지금 시점에서 다시 중국을 방문한다면 현재의 중국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이제 미국 시민이 되었을 난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미국과 중국의 변화된 위상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내게 있어『정글만리』 읽기는 ‘난’으로 대표되는 중국계 미국인들과 더 넓게는 아시안계 미국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중국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샌프란시스코인데, 미국 서부가 아닌 동(남)부(뉴욕과 조지아)를 배경으로 택한 것도 흥미로웠다. 아마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했다면, 중국 이민사의 연원에 맞닿았을테고, 지식인들 중심이 아니라 좀더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좀더『허삼관 매혈기』와 유사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난에게 있어 조국 중국은 “너무 비열하고 잔인한 나라”였고, 그는 자유를 선택한 대신 그만큼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하진은『자유로운 삶』의 말미에 에필로그를 배치했다. 에필로그는 ‘난 우의 시작노트 발췌’와 ‘난 우의 시’로 구성되었는데, 꽤 많이 수록된 시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인간 ‘난 우’를 직면하게 된다. 고독하지만 강건한 한 남자를.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그의 시 한 수와 함께 이 글을 마감하려 한다. 이 시 속에서 그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난 우’가 스스로 되고자 했던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다.
찬사
그래, 칭찬이라—그런 사람을 생각해보자. 고통 속에 있음에도 아직도 행복을 자신의 타고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 장갑을 어디 뒀는지 헛되이 찾다가 손이 없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쳐다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신들한테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사람, 시합에 졌지만 자기를 방금 이긴 사람에게 인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번잡한 거리에서도, 먼 언덕에 있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사람, 많은 사람들과 섞일 수 있어도 그들의 소란스러움에 당황하지 않는 사람, 나라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압도하지 못하는 사람, 재앙과 승리를 똑같이 받아들이고 어느 쪽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 리무진을 운송 수단으로 생각하고 궁전을 거주지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고관과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도 신성한 공기를 마시러 문밖으로 나가는 걸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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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막 세상에 태어나와 엉금엉금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본능적 감각과 요구를 노출된 언어로 의사소통하고 조모와 이웃. 어른들에게 흘려들은 옛말과 아이들과 뛰어놀며 터득한 새로 생성된 어린 언어를 함께 들으면서 말에 대한 미묘한 차이들을 감지해낸 모국어, 민감하고 감수성 짙은 청소년기에 밤을 밝히며 빠져들었던 사랑과 번뇌에 대한 언어, 학창시절 수많은 지식들을 배우기 위해 터득한 온갖 종류의 언어,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말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언어적 뉘앙스를 구분짓게 하고, 화자와 청자 사이의 시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십대도 아닌 때, 이미 수많은 시간동안 형성된 이질적 구조의 언어 표현이 굳어진 성인이 타언어권에서 기존의 언어를 쓰는 가족과 살면서 삼십세 이상의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읽기와 듣기로 주로 습득한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의 노력이 필요로 되는 것일까.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단어 사용의 주고받음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와 음성으로 소리냈을 때 받는 느낌이 빚어내는 언어감각은 그 언어를 제2 언어로서 배운 사람에게는 메우기 어려운 커다른 구멍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어떻게 '맑은'과 '해맑은'과 '말간'의 차이를 잡아낼 수 있을까. 구멍 뚫린 언어가 그것을 메꾸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고유성도 이민자 언어로서 현재 언어의 다앙성과 풍성함에 기여하는 것일까. 이디스 그로스먼이 <번역예찬>에서 영어는 다른 모든 언어와 융합하고 교류해야 풍성한 언어적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그만큼 다양한 언어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미국 사회에서 영어는 모국어로서의 언어 뿐만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상실된 언어 감각을 다른 형태로 메꾼 이민자들의 언어로서도 다양성과 풍성함을 포함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영어의 생명력이 모든 종류의 이국적인 에너지를 동화시키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연휴하고(p.448)'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난은 또한 문학권력에서 자유롭고자 했다. 우리나라의 일부 기성 정치인들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체포되고 실형을 선고받은 것을 하나의 훈장처럼 여기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유명세를 얻기 위해 중국 당국으로서는 건드릴 수 없는 미국의 시민권을 획득한 다음 일부러 귀국을 하여 체포당하는 코스프레를 통해 훈장을 받아내는 행위를 역겨워한다. 시와 문학이란 것이 순수하게 이를 행함으로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문학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대중의 기호 충족과 시대적 흐름과 유행에 기대어 선 앏은 문학과 기성작가의 편견과 출판업계의 이익에 좌우되는 문학의 시대상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으며, 삶의 자유로서의 시를 쓰는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 집과 가게 빚을 단 몇년만에 소유하게 되 댓가는 자신과 자아에 대한 침혹한 자각이었다. 대부분의 이민 1세대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헌신하여 2세대가 싹이 트고 뿌리내리게 할 수 있도록 토양을 가꾸는데 평생을 다하고 살아가는 데 비해 그가 사업과 집을 위해 빚을 모두 갚고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었을 때는 겨우 마흔살이었다. 아직 살 날이 많이 있었고, 그 많은 시간을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던 일을 하는 데 모두 바쳐버렸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는 이제 시를 쓰지 않을 핑계가 없어져버렸다고 느꼈다. 평생을 목표로 이루가면서 삶의 이유가 되어 주었어야 할 경제적 자립이 불과 몇년만에 끝나자 그는 다시 자신에 대해 아프게 자각했고 시를 쓰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 자립과 가족을 안전한 층 위에 올려놓은 성취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시를 배반했던 그 시간동안 벌레처럼 살았다고 느꼈다. 그는 핑핑과 가족에게 헌신한 시간들이 시를 빼앗아갔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사랑 베이나에 대한 환상이 현실의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건져 시에 대한 영감을 살려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가 베이나를 만나러 가는 건 슬픈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필요한 일이었다. 시에 대한 영감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있는 것이라면 깨어져야 했다. 난은 영어로 시를 쓰기로 한다. 그는 미국에서 적응하고 살기로 했다. 그는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애국심이라는 명목과 중국 문화의 보존이라는 구실로 과거 찬란했던 중국 역사의 허상에 갇혀 현재의 문화를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중국 남자들을 소인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공감한다. 그러나 한편, 남자들이 처한 환경은 어디서나 같다고 느낀다. 생존을 위해 벌어야 하는 엄청난 몸부림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절름발이가 되고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이 되어, 심하게 고통을 겪은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그리고 웹스터 영영사전을 끼고 다니면서 틈틈히 영단어와 표현을 익히고 영어로 시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그는 자신이 조름씩 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는 시 속에 자신이 지켜야 할 철학을 간직했다. 그는 아직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고, 어쩌면 역사에 남을만큼 문학적으로 훌륭한 시인이 되지는 못랄지도 모른다. 소설 속 기간 동안 난의 가장 큰 성장은 베이나라는 첫사랑의 몽상적 이상을 버리고 현실 속에서 핑핑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처럼 그의 시를 베이나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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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아직 작가의 전 작품을 읽지 못했지만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로 하진을 꼽곤 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자국의 천안문 사태 소식을 듣고 절망해 그대로 미국에 살게 됐다는 하진은 이민자로서 외국어로 글을 쓰게 된다. 그런 그에게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지, 아니면 부던히 노력한 덕분인지 짧고 간결하고 쉽고도 쉽고도 쉬우면서 품위 있는 문장을 구사해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만다. 외국어로 소설을 쓴다는 건 정말 말로만 쉬운 일이다. 난 소설을 읽을 때 문장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읽는 편은 아니고 하진의 문장이 정독이 요구될 만큼 미학적이진 않지만 읽을 때마다 참 본받고 싶은 문장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영미권, 특히 미국 문학의 투박함과 중국 문학의 우아함이 혼합됐기 때문일까? 일전에 난 작가의 단편집 <멋진 추락>을 읽고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란 비유를 했는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정말 맛있는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진은 그간 영어로 하여금 중국의 이야기를 썼는데 <자유로운 삶>이란 작품을 기점으로 미국에도 시선을 돌렸다고 한다. 미국, 그 중에서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민자들의 사회에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진이라면 이민자 사회에 대한 남다른 통찰이 있을 터다. 그래서 이 1,000페이지 가량의 소설을 읽는 게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작품답게 금방 읽히고 실제로 적잖은 생각과 감동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렇게 길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아니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힐 수밖에 없다. 주인공 난 우도 마찬가지로 작가의 분신이란 생각이 안 들 수 없고. 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은 난 우에 비하면 운이 꽤 편이라고 했는데 역자 후기에 적힌 내용을 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중국 정부가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친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작가의 처지에 주목하면 난 우와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아픔의 결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역자 후기를 읽고나선 작가와 주인공이 별개의 인물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전엔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너무나도 디테일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극적이면서도 일상적이다. 난 우가 아내와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힘겹게, 때론 도움도 받아가고 차근차근 안정을 찾아가지만 마음 어딘가가 허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와 인물의 행복에 깊이 관여한 키워드는 바로 자유다. 주인공이 고국을 등지고 미국에 살게 된 건 자유 때문이나 다름없다.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채 부패하지 않은 국가에서 개인이란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주창하는 자유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난 우는 그런 자유를 손에 넣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아무리 절망하고 또 아무리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어도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는 그가 중국인임에도 타지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아이러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해서 무지하긴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자뻑이 심한 한편으로 자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많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체제 때문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강제로 수그러지는 사회인 것도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작중에선 타국에 살면서도 여전히 자의로든 타의로든 중국의 그늘에 가려진 이민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난 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중국어로 글을 쓰는 것에 더 이상 미련도 없을 정도라 시를 쓰는 것을 포기했고 나중에 시간이 오래 지나 펜을 다시 잡을 때도 영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렇게 중국을 등지려는 그의 모습에 미국내 중국인 이민자 사회의 사람들은 비웃고 경멸하길 서슴지 않는다. 난 우도 강단이 있는 인물이지만 자신의 출신과 현재 살고 있는 미국이란 장소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 고립이 반갑지만은 않다. 이는 타인에 대한 고립이자 자기 스스로의 본심을 고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자학적인 언행을 보이는 그를 보면 그 내면의 고통이란 게 충격적인 수준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작중의 중국과 미국에 대한 인식은 전적으로 작가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견해에 기반한 것이므로 약간 불편함을 느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나 난 우의 의견에 적잖이 공감했는데, 국가가 국가를 위해 개인에게 자유를 우선하지 못하게끔 한다면 무구한 역사가 있건 국민의 수가 얼마나 되건 어딘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 역시 동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특정 나라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난 우의 고통을 무려 1,000페이지 동안 접했기에 내 의견을 감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자전적인 얘기이자 가장 잘 쓸 수 있는 얘기일 것 같아 읽기 전에 기대를 좀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디테일해 깜짝 놀랐다. 중간엔 비슷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고 느껴질 정도로. 책의 뒷표지에 '두 걸음 나아갔다 다시 한 걸음 물러서는'이란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전개였다. 길고 디테일한 전개 덕분에 주인공 내면에 대한 이해는 넘칠 정도로 가능했는데 일상적이고 게다가 쉽고도 쉬운 문체도 계속 이어졌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턴 집중력이 점점 떨어지기도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분량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병상련의 원리에 따른다면 이 부분엔 그다지 동의 못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선 짧다고 느낄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란 국가에 지배되지 않는 삶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아무리 길고 지루했어도 일단 이 작품은 좋은 이야길 담고 있었고 아직은 다소 생소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하진의 작품 중 가장 중국을 많이 얘기하는 작품이었는데 덕분에 이웃 나라에 보다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기회가 닿는 즉시 작가의 작품은 물론이고 다른 중국 문학도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중국이란 나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작품의 어떤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와 인민을 따로 본다는 것이다. 나라와 사람은 많이 다른 것이지 않은가. 문화도 마찬가지다. 인상 깊은 구절 애국에 관한 헛소리는 작작해요. 애국주의는 당국이 휘두르는 마지막 회초리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걸로 때리죠. - 1권 161p 자유란 그것을 활용하는 법을 모르면 의미가 없는 거죠. - 1권 214p 내 인생이 엉망이 될지도 몰라요. 그건 흔한 일이죠. - 2권 144p 그래요, 독불장군이 되겠다는 거겠죠. 맞아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보다 우리가 품위 있는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 2권 253p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삶을 허비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각오를 하고 시를 쓰는 데 전념할 정도로 용감해져야 했다. - 2권 436p 시인의 작품은 늘 시인보다 좋아야 한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다. - 2권 44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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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체제에 넌더리가 난 반체제 인사들을 중심으로 톈안먼 사건 1주기를 맞이하여 강의를 하기도 하고 모임도 갖게 된다.또한 난은 티벳 라마 불교의 상징인 달라이라마도 접견하기도 하면서 중국인민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해를 안기는 체제는 절대 반대라는 입장이다.꼬마였던 타오타오도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 들게 되면서 이성을 알아 가게 된다.부자집 딸인 리비아와 타오타오가 좋아가게 되는데,신분 및 경제적인 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격지심에서인지 난은 타오타오가 리비아와의 관계를 한사코 반대를 한다.부인 핑핑도 대학졸업할 때까지는 이성을 생각하지 말고 학습에 전념하라고 충고를 한다.결국 타오타오는 여친으로만 생각하기로 한다.고국을 떠나 이국 만리땅에서 뭔가라도 쟁취하고 획득해야 가문의 명예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미첼 부부는 입양아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수속과 절차,공산당원의 관료주의의 일에 대한 늑장부리기에도 불구하고 미첼 부부는 인내심을 갖고 입양아를 얻게 되니 그 기쁨이 배가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경제력과 부양능력만 있다면 버려진 고아를 자식으로 삼아 얼마든지 훌륭한 인격과 사회성 우등생으로 키워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한편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당한 반체제 인사 중에는 자신을 통제하고 괴롭히는 국가 장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가 없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즉 기존의 틀,체제가 없으면 삶의 의미,방향도 잃어버린다고 자책하면서 노스탤지어병,고통,애국주의를 은연 중에 찬미하는 이중적인 인격자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이럴 때 느끼는 점은 개인의 사고가 확고하지 않은 모순과 오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난의 부부관계는 조금씩 탄력을 받아가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잠자리를 갖게 된다.핑핑의 가슴 속에 묵혀져 있던 복잡한 심경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얼굴을 붉히게 되고 둘은 부부의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난은 계간지 잡지사를 통해 알았던 사람들과도 관계가 좋아지고,아들 타오타오는 어엿한 청년으로 변모하여 대학준비에 몰입하게 된다.하루 하루가 힘들고 고역의 세월이었지만 난은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핑핑은 수학을 가르칠 정도의 교육열도 높다.타오타오의 여친인 리비아가 가출하면서 타오타오는 걱정반 우려반하지만 결국 리비아가 식당에 나타나 그간의 걱정과 우려를 말끔히 불식시키기도 한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이지만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존재한다.미국과 같이 돈과 물질이 절대적인 나라에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채 살아가던 난의 부부는 식당을 팔고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호화주택까지 구입했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았다.난은 이제 고국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이 절실히 드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을 왔다 갔다할 수 있는 왕복 비행기 표가 당첨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어렵사리 취득한 여권과 비자를 갖고 고향 땅을 밟게 된다.부모님께 두둑하게 용돈을 드리는 난에게 어머니는 자신을 미국에 함께 가고 싶어한다.식당에서 시급으로 일을 하고 싶고 용돈이라도 벌 요량인데 요는 며느리 핑핑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난은 어쩔 수 없이 반대한다.그리고 꿈에서도 못잊고 있는 여친 베이나를 만나려 여럽사리 그녀의 주소지를 찾아 가지만,베이나는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간 상태이다.친척이 알려준 주소로 베이나를 찾아 나선다.12년의 세월이 흘러 둘다 중년의 모습으로 변하고 냉엄한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상황에서 물과 기름과 같은 형식적인 얘기만 하고 작별을 고하게 된다.다시 만날 기약은 커녕 난은 차라리 만나지 않은게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다.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꽃이 시들어 가듯 몸과 마음도 멀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난의 부부는 반체제 인물로 미국땅에 망명을 하여 20여 년을 고단하지만 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한 보람이 멋진 결실로 나타나게 되었다.아메리칸 드림이 실감나기도 한다.난은 시인으로서 주로 글쓰기에 주력하는 모습과 관련된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들려 주고 있는데,난의 역할은 아마도 하 진작가의 본모습이 어느 정도 담겨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반체제 인물로 낯설고 푸대접 받는 미국땅에서 좌충우돌하는 난의 초창기 생활 단상과 중.후반부에 부부관계도 좋아지고 식당사업도 번창하여 집도 장만하고,아들 타오타오도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니 자유,생명,인권이라는 단어가 새삼 고귀하고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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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리뷰]자유로운 삶 2권, 하진
"미국에서 그가 잃은 것과 얻은 것들- 이민자들의 자전적인 초상화"
-작가는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었지만 '난 우'는 본인이 아니라고 한다. 굳이 하자면, 그는 본인이 '운이 더 좋은' 난 우 라고 한다. 난 우가 그랬듯, 미국에 살기로 하면서 작가는 동시에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이 소설은 작가를 참 많이 닮았다.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 보면 1권은 '난 우'라는 인물과 그의 주변, 그의 삶을 독자에게 설명해 주기 위한 <프롤로그>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천안문 사태 전에 중국을 떠나 미국에 왔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고, 남들보다 빨리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하고, 번뇌가 많은 인물이다. 학자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성격을 보다보면 그가 경비원을 하고 요리사를 하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2권에서는 난 우 가족에게 파란이 인다. 40이 넘은 핑핑이 임신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태어나지 못한다. 부부는 아이에 대한 상실감에 사로잡히는데, 특히 난 우는 '너무 일찍 성공해버린' 자신의 삶의 돌파구가 되어줄 거라 생각했던 딸의 상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이해도 되지만, 완전히 수긍하기 힘들었던 건 그 생각이 단순히 혈육을 얻는 순수한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위해 딸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우는 그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그가 겪은 것들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중국인 난 우가 더이상 아니다. 그를 보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나중에 난 우가 쓴 시를 보면서 결국 그가 살고, 그의 아이를 키우게 되는 곳이 그의 조국이 될 거라는 말에 공감했다. 그의 출신은 세월이 지나면서 무색해진다. 결국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기대듯이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재일동포를 생각했다. 타향에서 그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 잊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약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계속 '남의 나라'에서 살 결심을 할 수 있었을지 나는 '난 우'를 통해 조금이나마 짐작했던 것 같다.
미국에 살다가 중국에 갔을 때, 부모와 친구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그는 다시 중국에 오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다른 나라에 산다면 바뀌는 것은 나일지, 아니면 내 주위의 사람들일지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미국에 정착한 이후 계속 중국 방문을 신청했지만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아 그의 부모의 죽음도 지키지 못했다. 씁쓸했다. 그가 잃은 것은 중국에서 얻은 것들이다. 중국에 놓고온 것들.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은 중국에서 주지 않았던 것들이다. 미국에 원래 있던 것들.
자유다.
그 자유가, 성인이 된 중국인 작가가 영어로 소설 활동을 하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2세대도 아니고, 중국어에 완전히 익숙할 나이에 영어를 다시 배우고 그 영어로 소설을 쓰고 표현을 하는 작가의 역량과 노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그가 얻은 '자유'의 가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삼, 이 작가의 글과 그의 삶이 궁금해진다.
한편 이 책 속의 삶을 살았던 '리샤'와 '웬'이 그의 아내와 외동아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들이 견뎌낸 세월의 무게가 와닿아 책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고 편하게 읽히는, 잔잔한 감동과 묵직한 환기를 안겨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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