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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동시에 한 인간의 고통과 절망은 희망과 사랑과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미 열어버린 절망의 보석함에 남아있는 작은 희망을 보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그래도 밀려오는 고통과 후회, 두려움 속에서 인간은 눈물 짓는다.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의미없는 쾌락을 쫓아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것도 잠시 ‘죽음’은 어디에 숨어있는 인간이라도 찾아내어 그의 앞에 무릎꿇게 만든다. ‘끝나지 않는 패배’ 인간은 죽음이 버티고 있는 한 끝나지 않는 패배를 맛보는 게임을 계속한다.
같은 운명을 타고난 다른 인간의 존재도 위로가 되지만 그들에게서 절대적인 위로를 찾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에서 위안받고자 한다. 희망을 가지고 시간을 살아내며 위로를 찾아헤맨다. 인간의 지혜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과학, 계몽, 문명, 지혜 등 우리의 삶 주변에는 모두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들로 가득하다. 몇몇 단어는 그 의미나 색깔이 퇴색해져버렸지만 희미하게나마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 중 전통이 가장 빛바랜 것이 위로 아닐까?
오늘날 위로는 ‘패배자의 언어’이자 ‘병자들을 위한 치료약’으로 소모된다. 위대한 언어, 신의 존재, 음악과 미술 그리고 위로의 철학은 더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떤 경험은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상실과 상처 그리고 흉터의 존재를 노래하는 위로가 사라지면서 더 큰 비극이 인간을 내리누르고 있다. 넘치는 정보와 쾌락은 일시적인 멈춤 버튼일 뿐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은 전통적인 ‘위로’를 통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의 질서와 화해하는 삶을 알려준다. 그리고 마주칠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한계와 실패, 패배의 순간에 환상으로 도주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1. ‘체념’이라는 거짓 위로를 거부해야 한다. - 욥기
욥기는 욥의 신앙심을 이유없이 시험하는 신의 이야기이다. 욥에게 갖은 고통으로 주어 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길 원하는 악마는 욥의 건강, 가족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욥에게는 그 어떤 위로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욥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통에 ‘의문’을 갖는다.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문제를 직면한다는 것이고, 문제를 직면함으로써 ‘거짓 위로’를 거부할 수 있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 일은 당연히 일어났어야 하며, 이 고통은 나의 것’이라는 체념과는 다르다. 이유없는 죄책감과 의미없는 운명을 인간은 부여받지 않았다.
2. 스스로에게 진실한 말을 건네야 한다. -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온갖 권모술수를 보면서 성장한 그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매순간 ‘황제’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무질서한 그의 생각을 솔직히 기록했다. 그의 솔직한 고백은 황제라는 존재조차 고통과 고난에 시들렸음을,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음을 그리고 모든 존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위안을 후세에게 남긴다.
3. 다른 이들을 위한 시간은 흐른다. -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시간’은 모든 것의 답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상실의 허무감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기 마련이다. 모든 아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르는가? 종교에서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어우러져 세계를 함께 구성한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기독교 신앙의 시간관념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당대에 이르는 대표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의 ‘현재’ 속에 공존한다.
이런 시간의 공존은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줄까? 미래만이 희망이 아님을 지금이야말로 이 고통과 상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개인의 시선으로 시간을 인식하지 말고 다른 이들의 시간 역시 의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외에도 음악이 주는 위로의 효과(유동성 지향성)이나 죽음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슬리 손더스의 일화를 읽을 수 있었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고통은 실험실에서 구현되고 치료제가 ‘발명’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 역시 심리학책이나 뇌과학책을 읽으며 인간의 고통과 상실이 과학적으로 치료될 수 있는 질병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을 찾아들으면서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규명되기에는 너무나 거룩하고 긴 역사의 시간 속에서 인류의 몸 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위로’였다. 그것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무모한 용기이기도 했다.
성과주의, 자본만능주의 시대가 무르익어가면서 ‘진정한 위로’가 패배와 같은 이름으로 발붙일 곳 없을 때 이런 책을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으며 진정한 위로를 얻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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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절망에 빠지면 나만 이런 일을 겪고 있다는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 보아도 내 상황이 제일 힘들어 보이고, 나에게만 특별한 불행이 닥친 것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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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위안을 얻기 위해서 투쟁했던 서구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키케로, 아우렐리우스, 단테, 몽테뉴, 흄 등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친 이 위대한 인물들 역시 삶이 주는 시련을 치열하게 겪어냈음을 알게 된다. 특수한 동시에 보편적 의미가 있는 삶의 시련 속에서 비범한 생각과 의의가 어떻게 탄생하지는 지를 보여준다. 이 위대한 인물들은 암담한 시기를 견디며 예술, 철학,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발견해왔다. 그들의 작품은 시간을 거슬러 오늘날 우리에게 읽히며 위로의 건네준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이 위대한 인물들이 전해준 위로의 전통을 물려받았음과 동시에 그 전통에 반발한 세기의 상속자라고 한다. 과거 수천 년간 서구 세계에서 천국은 희망을 구체화한 형식으로 존재했지만 16세기에 이르자 유럽인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21세기 현재에 이러한 불신은 모두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다. 비서구권에 살고 있는 동양 세계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한때 종교적 전통에 의지했던 의미들을 잃었다. 성공을 좇는 문화는 실패나 패배 혹은 죽음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위로는 패배자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생의 절망에 빠졌을 때 운이 좋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보통 혼자 애쓴다. 좀 더 적극적인 경우에는 불행에 빠진 다른 이들을 찾거나 전문 의료인의 도움을 구한다. 의사들은 고통을 회복이 필요한 질병으로 간주한다. 이 고통은 증상별로 분류되어 각각 서로다른 구체적인 병명이 부여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서 진정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는 역사적 인물들에게서 위로를 발견하고 독자에게 전달한다. 저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위대한 이들의 생애 속에서 시련의 순간을 모으고 모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민족과 전쟁을 치르면서 밤마다 자신을 위해서 글을 썼다. 우리는 그 글을 <명상록> 이라는 제목으로 알고 있는데 원고에 원래 붙은 제목은 그리스어로 <혼잣말>이라고 한다. 황제는 칠흑 같은 고독 속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을 물리쳐가며 고백의 형식으로 위안을 구했다. 그는 늙어가는 황제로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럴 상대가 없었다. 가족도 신하도 모두 위로의 대상이 아니었다 . 아내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였고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가 쇠약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즉위의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금욕적이고 탈세속적인 태도를 가진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였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은 통제할 수 없었다. 위로를 얻고 싶지만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글을 썼다. 황제가 쓴 글은 외부로 유출되어선 안된다. 오로지 본인만 볼 수 있고 보아야 할 은밀한 글을 쓰며 희망은 아니더라도 계속 살아갈 의지를 구했다. 그의 글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가 발견한 위로는 혼자 있는 시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황제로서 짊어진 역할, 의무, 책임으로부터 나온다는 역설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글은 수 세기 동안 잊혔다가 어느 수도원에서 필사되었고 그가 살아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목적을 부여받았다. 황제조차 지배할 수 없는 혼란과 번민에 빠진 삶이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 것이다.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위대한 모범으로 인정받으며 오래도록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명상록>이 우리에게 여전히 위로가 되는 이유는 책에 담긴 가르침이 아니라 잠재울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외로움과 좌절감, 공포와 상실을 비할 데 없이 솔직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위로를 얻는다. 아무런 권력도 재능도 명예도 없이 늙어가는 범속한 나는 오래전 먼저 살다간 황제의 혼잣말을 읽으며 그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고통인 순간, 위로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계속하여 만난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은 점점 많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견뎌야 한다. 이 고통을 그럴듯하게 해석하는 거짓 위로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죄책감을 거부하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 순간은 결코 빨리 오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내야한다. 실패는 계속된다. 실패 이후에는 자기 연민이 뒤따른다. 더 나쁜 상황도 발생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한다. 나의 최선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음을 안다. 이 책에서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은 다음의 문장이다. P 367 그러나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하벨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때 나였던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노력에 약간의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몫의 실패에만 책임을 저야 한다는 것을 결국 깨닫는다. 이 느리고 간접적이고 거의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어쩌면 실패로 인해서 나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되었음에 감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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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하건대 지극히 쉽게 얻을 수 있는 위로의 형식이 있네. 우리는 이것들을 입술에, 가슴속에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하네. 우리는 인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법칙 안에서 삶은 운명이라는 화살과 돌팔매의 과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네. 그와 같은 조건 속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어떤 예언으로도 피할 수 없는 불운에 참을성 없이 분개하는 것도 가당찮은 일이네. 다만 우리는 다른 이에게 닥친 불행을 떠올림으로써,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또한 전혀 새로운 것이 없음을 반추 해볼 수 있다네.' -키케로
기원전 48년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편에 섰던 키케로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의 깃발을 들어 올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극적으로 화해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권력의 무게에만 정신을 쏟으며 키케로에게 원로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뼛속 까지 공화주의자 였던 키케로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마저 포기 하고 로마 제국의 견고함을 유지 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아 부었지만 카이사르가 완전한 권력을 손에 쥐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공화정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그토록 바랬던 로마 제국이 흔들리고 있던 순간, 그의 삶의 터전인 가정도 붕괴 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큰 딸 툴리아는 아버지의 바램 대로 결혼을 했지만 세 번의 결혼 모두 불행으로 끝나버렸다. 로마의 법정과 원로원을 쉼 없이 오고 갔던 키케로는 삼십년 동안 유지 했던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60세 나이에 대부 관계를 맺은 18세 푸블리아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는 여전히 모든 일을 큰 딸 툴리아와 상의 하며 인생의 최고의 순간 부터 최악의 순간 까지 딸과 함께 한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첫 아이를 임신한 툴리아는 출산 도중에 사망하고 딸의 죽음에 큰 충경을 받은 키케로는 딸의 시신과 갓 태어난 손주를 가사 노예들에게 맡겨 버리고 로마 남쪽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 별장에 은신한다.
언어의 연금 술사 키케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삶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토록 강건한 키케로가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은신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키케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 술피키우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라고 지시한다. '왜 그런 개인적인 슬픔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지금까지 운명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생각해보게, 인간에게 자식만큼 소중한 국가, 명예, 지위 같은 온갖 정치적 영예를 우리가 빼앗겼다는 사실을 떠올려보게. 하필 지금 그 상실이 자네의 감정을 특별히 더 상하게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금까지도 자네 마음이 모든 지각을 잃고, 다른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자네의 슬픔이 정녕 딸 때문인가?' -술피키우스
카이사르의 지시를 받고 이 편지를 쓴 술피키우스는 재빨리 회신하는 답장으로 위장해서 진심을 담은 편지를 키케로에게 보낸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장악하고 원로원들을 하나 둘 씩 내쫓는 순간에 술피키우스는 주요 도시들을 둘러보다 큰 충격을 받는다. 한 때는 번성했던 도시들이 도적질과 범죄 집단 그리고 이민자 무리들에 의해 시민들이 착취와 억압을 당하며 노예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온 술피키우스 그는 친구의 슬픔을 위로 하면서도 정적들이 나약해진 키케로에게 언제 어느 순간에 칼을 들이 댈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정신을 차리라며'아버지의 영광과 명예에 올라타서 온갖 것을 누릴 만큼 누렸던 딸의 인생은 딱 여기 까지라며 키케로의 유일한 혈육인 갓난쟁이 손주의 미래를 위해서 다시 일어서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는 회신하는 답장에 적어 보냈다. 친구가 보낸 두 가지 종류의 편지의 뜻을 알아차린 키케로가 친구 술피키우스에게 보낼 답장을 쓰는 동안 로마 전역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진 키케로가 술독에 빠져 살고 있다는 소문이 급속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곧바로 이 소문의 진위 파악에 나선 브루투스는 키케로가 카토의 준엄한 자기 통제를 잃어 버렸다며 원로원 회의장에서 맹 비난을 퍼붓는다. 키케로의 둘도 없는 친구들은 서둘러 괴소문의 진화에 나섰고 원로원의 글을 대필 하는 작가들은 서둘러 로마 시내 전역에 퍼져 있는 키케로의 명문이 담긴 연설문을 수거 하는데 전력 질주를 가한다.
키케로는 지난 날 자신이 쓴 모든 편지 속에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로'와 '위안'의 말들로 가득 채웠고 내전이 발발했던 순간에도 적의 심리를 뒤 흔들기 위해 거짓 위로와 위안으로 위장하며 공화정의 운명을 쥐락 펴락 했다. 그는 추방 당하는 순간에도 적들에게 포위되어 사유지를 박탈 당하는 순간에도 그리고 보복 살인 현장에서도 모든 운명 앞에 초연한 자세로 적의 심장을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언어로 말했고 글을 썼다. 그는 공화정이 존속 되는 동안 권력이 요동 쳐도 어떤 싸움도 붙어 볼 만 했고 어떤 적들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딸의 죽음 앞에서 키케로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 였던 현란한 언어를 잃어버린 키케로는 자신의 슬픔을 위로할 그 무엇을 찾지 못한다.
'나에게는 늘 도망칠 안식처, 피난처가 있었네. 다정한 대화로 나의 온갖 불안과 슬픔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네. 집에도, 법정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네. 더 이상 국가로 인한 슬픔을 가정 생활을 통해서 위로 할 수 없고, 가정에서 생긴 슬픔을 국가를 통해서 위로 할 수도 없네.' -키케로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올렸던 모든 노력들이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한 키케로는 책장을 샅샅이 뒤져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 해방 노예 출신의 서기 티로가 쓴 글을 찾아 낸다. 그는 3개월 동안 스스로를 가학적일 정도로 몰아 붙이며 마침내 <위안>이라는 제목의 책을 완성한다.
'위안에 이르는 길은 많지만, 가장 곧은 길은 이것이다. 이성으로 시간의 힘을 믿고 그 결과를 따르는 것.'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키케로는 자신 앞에 남아 있는 생을 걸고 독재에 저항하는 길만이 딸을 잃은 슬픔을 극복 할 수 있다 믿었다. 그는 이제 가족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전제적인 독재 정권 통치 아래서 권력에 아부 하지 않고 공화정 수호를 위해 고귀한 대의를 위한 삶, 죽음 조차 두렵지 않았다. 로마로 돌아 오자 마자 키케로는 카이사르 통치에 반대 하는 투쟁을 벌이는 로마 시민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3월 15일 드디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원로원을 행해 칼 끝을 겨누는 순간, 키케로는 날카로운 언어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키케로는 정치 권력 앞에서 극도로 계산적인 기회주의자였지만 딸을 잃고 난 후 담대 하게 독재 권력에 맞서며 피로 물들인 원로원 회의장에서도 폭력을 규탄했다. 그는 공화정의 운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해서 군사력을 합치는 순간 그의 이름은 살생 명부에 올라간다. 키케로는 가사 노예들이 급히 마련한 가마에 올라타자마자 딸의 죽음을 슬퍼했던 남부 지역 사유지로 도망칠지 아니면 저 멀리 그리스로 도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코 앞에 암살자들이 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마에서 내려 그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암살자들은 도착하자 키케로의 목과 두 손을 잘라 즉각 로마로 보냈고 그의 머리는 안토니우스 집으로 보냈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잘려 나간 머리를 보자 마자 혀를 잘라 내서 바늘로 수 십 번을 찔러 버릴 정도로 그동안 자신을 공격했던 키케로의 날 선 언어, 그가 내뱉은 말에 저주를 퍼부었다.
'나의 용기는 이제 모든 희망을 잃은 덕분에 놀라우리 만치 단단 해졌다네.'
한 때 키케로는 는 자신의 높은 지위 덕분에 개인의 소소한 슬픔이나 아픔 정도는 가볍게 지나갔다는 말을 했지만 사랑하는 딸을 잃고 난 후 남아 있는 자신의 생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광란의 권력의 광풍을 막기 위해 용감하게 죽음에 맞섰다. 키케로는 국가적 운명의 순간에 겪은 개인의 슬픔과 고통을 스토아 철학으로 완성했고 역사는 그를 위대한 공화정 수호자라 기억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슬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모두 용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슬픔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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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생이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 그것을 버틴 옛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신에 대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버티기도 하고, 음악으로,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 신념으로 버티기도 했다.
저 마다 인생의 모서리에서 몸부림칠때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견뎌내며 삶을 유지했다. 견딜 수 없는 슬픔도, 피할 수 없는 고통도 고스란히 각자의 몫이었다.
그 중에 나는 '까뮈'의 이야기가 와 닿았다.
까뮈는 폐결핵 때문에 프랑스 한 지역에 요양을 갔다. 폐결핵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에서 병세에 차도가 있었고 덕분에 함께 왔던 아내는 알제리(까뮈는 알제리 태생이다.)로 돌아갔다. 아내가 돌아간 뒤 전쟁이 터졌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바람에 까뮈는 알제리로 가지 못하고 가족과 헤어진 채 홀로 병마와 싸워야했다. 그 곳에서 까뮈는 '페스트'를 썼다.
우리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힘든 일이 닥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을 때 지독하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인의 위로가 들리는 것도 아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사 준 따뜻한 밥 한 끼는 잊혀지지 않는다. 절망 앞에 다양한 모습을 갖출 수 있지만 까뮈처럼 그렇게 함께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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