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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내용보기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곰곰나루/2023.11.30. sanbaram   지평선   찰나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는 선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떠난 자는 흔적이 없고 남은 자는 슬픔의 섬에 갇히는 선   땅과 하늘, 여자와 남자, 부와 가난,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오르가즘과 불감증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내가 팽팽하게 맞서 뾰족하거나 너그럽거나 유쾌하거나 율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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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곰곰나루/2023.11.30.

sanbaram

 

지평선

 

찰나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는 선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떠난 자는 흔적이 없고

남은 자는 슬픔의 섬에 갇히는 선

 

땅과 하늘, 여자와 남자, 부와 가난,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오르가즘과 불감증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내가 팽팽하게 맞서

뾰족하거나 너그럽거나

유쾌하거나 율적하거나

멀리 또는 가까이

맞닿은 하염없는

서산에 걸린 노을 같은

 

먹먹한

 

*지평선에는 우리 마음속처럼 여러 가지 사물들이 존재한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지평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땅과 하늘이 맞닿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지평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그 대비되는 땅과 하늘이 맞닿은 선이 하나로 뻗어 있음을 볼 때 지평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맞춰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땅과 하늘에 대비하여 나타난다. 이승과 저승, 남겨진 자와 떠난 자,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오르가즘과 불감증까지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한다. 아직도 지평선에서 하나로 닿지 못한 채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슬픔을 넘어야 하는데 슬픔 속에 갇힌 채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연에 먹먹한것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주상절리

 

슬픔을 지고 집을 나섰다

등짐은 버거웠다

 

바다가 철썩였다

막무가내 달려와 몸부림치는 파도에

못 견디어

깎이고 잘리어 남은 자리

 

사람을 잃고 나서 알았다

철썩이며 울어대는 파도는 내 설움이었다

설움은 마음에 주상절리를 남겼다

 

*슬픔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기에 힘든 일상이 된다. 바닷가에 부딪히는 파도는 예전과 변함없지만 태고 때부터 있어온 철썩임은 바닷가 언덕과 산과 바위를 깎았다. 쉬지 않고 깎아서 만든 절벽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둥처럼 늘어선 주상전리다. 아마도 시인의 마음처럼 굳게 응어리진 바위가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어 지금의 주상전리 절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쉬지 않고 철썩인다. 마음에 이는 격동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굳어진 주상절리처럼 시인의 마음은 제 형태를 유지한 채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떨쳐내고 싶었던 잔소리도

그리움이 된다는 걸

잃고 나서야 알게 된 진실

 

함께 그려온 삶의 궤적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치며

적막을 거두어 가는 중

 

창틈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젖은 마음 걸어놓고

오늘은 맑음이라고

또박또박 새기며

 

망망대해 한 점 섬으로

떠 있는 중

 

*한평생 부부로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잔소리 하고 얼굴도 붉혀가며 아옹다옹하며 살아왔다. 그때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었기에 잔소리라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 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 없게 되자 그 잔소리도 하나의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움은 영화의 장면처럼 지난날의 추억이 되어 재생되지만 빈방엔 한 줌 햇살이 찾아와 비춘다. 그것에 위로를 삼아보지만 마음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작은 섬처럼 외롭기만 하다는 시인의 마음이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 벌초

 

무심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꽃 한 다발에 챙겨 넣고

불효가 수북 올라온

봉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생전에 좋아하시던 과일 나란히 놓고

두 번 절 올리며

이승과 저승의 안부를 서로 나눕니다

 

서툰 낫질로 불효를 깎습니다

흐르는 땀이 눈을 가립니다

유택이 정갈해지고

너덜해진 마음에도 잔잔히 평화가 흐릅니다

 

어느새 어머니 나이를 향해 달리는

자식이건만 아직도 철부지 응석입니다

 

이제 삭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관절이 해마다 서걱거림이 심해진다고

 

내년 윤달이 오면

봉분을 열어 화장해 모시겠다며

불효를 나무라지 말아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열 자식 안 부럽다던 생전의 말씀이

가시처럼 따갑습니다

 

하늘이 참 맑습니다

 

*나이가 들어 벌초조차 힘에 겹게 되고, 자식들은 멀리 떨어져 제나 름대로 바삐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벌초가 마음에 걸렸다. 마침내 윤년을 맞아 어머니 묘를 파묘하여 납골당으로 모시고자 마지막 벌초를 하며 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래도 시인이 살았을 때 손수 파묘하여 좋은 곳으로 모시고 싶어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떼쓰듯 말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의 노년과 일생을 회상해보는 시인의 마음이 맑은 하늘처럼 시리다.

 

 

함박눈

 

함박눈은

스타일리스트다

 

헐벗은 겨울나무에 목화솜 꽃을 피우고

땅위엔 하얗게 카펫을 깔아놓았다

 

세상 만물을 순백으로 바꾼 매직의 천재

행복의 전령사라 해도 무방하겠다

 

마음이 눈밭을 뛰어 오르고

함박눈과 어깨동무하고

나비가 되는 이 가벼움

 

순식간에

내 머리 위에도

하얀 왕관을 씌웠다

설국의 황후라 해도 되겠다

 

억새도 눈꽃을 이고 고개가 휘었다

저리 겸손해졌으니

내 시녀 해도 좋겠다

 

눈밭 위로 만조백관이

부복하며 엉금엉금 알현이다

세상이 모두 내 발 아래라 하겠다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은 만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를 구별하지 않고 조용히 내려와 쌓인다. 마치 하얀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와 앉듯 머리와 어깨 위에도 쌓인다. 그러고 보니 하얀 왕관을 쓴 왕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가만히 서 있는 억새에도 소복이 쌓이는 눈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모든 사물이 눈 아래로 묻히며 마치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듯하다. 쌓이는 눈으로 인해 내가 왕후가 되어가는 풍경화가 연상된다.

 

 

빈집

 

토담이 푸석이고

삽짝이 주저앉았다

 

초가는 승려 옷처럼 잿빛을 두르고

잡초만 서슬 푸르다

 

먼지가 뒤덮인 마루는 더덕더덕 분칠한 주모 같고

여기저기 사냥감을 노렸던 거미줄엔

오래전 생을 잡힌 곤충이

박제된 채 늘어졌다

 

찢긴 덧창은

휘파람소리를 내고 있다

 

헛간 앞

자루 부러진 삽이 빨갛게 삭아내리고

댓돌 앞 낡은 검정 고무신 한 짝이

마냥 외롭다

 

 

*요즘 농촌은 빈집이 늘어가고 있다. 힘 없는 노인들만이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면 집은 빈집이 되어 퇴락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시인의 집도 오래된 담장은 손질을 하지 않아 무너지고, 마당엔 잡초만 무성하다. 빈집의 마루는 먼지만 수북이 쌓이고 벼과 기둥엔 여기저기 거미줄을 치고 날벌레를 사냥하고 살아간 흔적만 남았다. 농부의 손때가 묻은 농기구는 빨갛게 녹슬어 삭아 내리고 미처 치우지 않은 검정 고무신 한 켤레는 쪼그라져 댓돌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 외롭다고 시인의 마음을 토로한다. 이것이 우리네 농촌의 모습의 한 단면이기에 더욱 쓸쓸한 느낌이 든다.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찰나라고 하겠다

하늘이 무너졌다 하겠다

칠흑같은 어둠이라 하겠다

세상이 사라졌다 하겠다

베인 억장에서 핏물 흐르고

살점 저미는 고통이라 하겠다

 

허구한 날 눈이 젖었다

대못이 심장에 박히고

철철 피가 흘렀다

 

입술을 물었다

아픔을 삼켰다

흐르는 눈물 사이로 갈라진 햇살이 춤을 추었다

햇살이 튀어 오른다

 

바닥을 치고서야 다시 튀어 오르는 생

지고 가야 할 업이라고

남은 자의 비애라고

가늠 안 되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뼈가 깎이고 살 떨리는 슬픔을 거두어야 한다고

이제

새 길을 내야 한다고

다시 솟아올라야 한다고

 

어둠을 이기고 새벽은 반드시 오게 마련인 것이니

 

 

*함께 살 때는 미처 몰랐는데 한 사람이 떠나고 빈 자리에는 허무와 쓸쓸함만 남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마음뿐이다. 세상이 끝난 것 같고 오직 나 혼자만 남은 세상이 온통 암흑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어둠을 걷어내고 새벽이 오길 기다리며 오늘도 힘든 몸을 움직여 현 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시인의 몸부림을 엿볼 수 있다.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의 서문에서 시인은 사람을 잃고/ 유기견처럼 떠돌았다./ 시어들이 위로가 되었다./ 남루한 표현이지만/ 개의치 않겠다./ 그것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으니.(p.5)”라고 말하고 있다. 반백년을 함께한 부군을 잃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국토순례나 성지순례를 통해 몸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써내려간 시를 모아 엮은 시집을 내놓았다.

장봉숙 시인은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원목동인 및 용인문학회 회원이다. 시집 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와 수필집 나는 홀로 서럽고 하늘 길은 아득하고등이 있다.

 

 
k******4 2024.01.04. 신고 공감 1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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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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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장봉숙곰곰나루/2023.11.30.       지평선 찰나이승과 저승으로 갈리는 선떠난 자와 남겨진 자떠난 자는 흔적이 없고남은 자는 슬픔의 섬에 갇히는 선 땅과 하늘, 여자와 남자, 부와 가난, 정의와 불의, 선과 악.오르가즘과 불감증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내가 팽팽하게 맞서뾰족하거나 너그럽거나유쾌하거나 율적하거나멀리 또는 가까이맞닿은 하염없는서산에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내용보기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곰곰나루/2023.11.30.


      지평선

찰나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는 선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떠난 자는 흔적이 없고

남은 자는 슬픔의 섬에 갇히는 선

땅과 하늘, 여자와 남자, 부와 가난,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오르가즘과 불감증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내가 팽팽하게 맞서

뾰족하거나 너그럽거나

유쾌하거나 율적하거나

멀리 또는 가까이

맞닿은 하염없는

서산에 걸린 노을 같은

먹먹한


*지평선에는 우리 마음속처럼 여러 가지 사물들이 존재한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지평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땅과 하늘이 맞닿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지평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그 대비되는 땅과 하늘이 맞닿은 선이 하나로 뻗어 있음을 볼 때 지평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맞춰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땅과 하늘에 대비하여 나타난다. 이승과 저승, 남겨진 자와 떠난 자,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오르가즘과 불감증까지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한다. 아직도 지평선에서 하나로 닿지 못한 채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슬픔을 넘어야 하는데 슬픔 속에 갇힌 채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연에 ‘먹먹한’ 것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주상절리

슬픔을 지고 집을 나섰다

등짐은 버거웠다

바다가 철썩였다

막무가내 달려와 몸부림치는 파도에

못 견디어

깎이고 잘리어 남은 자리

사람을 잃고 나서 알았다

철썩이며 울어대는 파도는 내 설움이었다

설움은 마음에 주상절리를 남겼다


*슬픔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기에 힘든 일상이 된다. 바닷가에 부딪히는 파도는 예전과 변함없지만 태고 때부터 있어온 철썩임은 바닷가 언덕과 산과 바위를 깎았다. 쉬지 않고 깎아서 만든 절벽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둥처럼 늘어선 주상전리다. 아마도 시인의 마음처럼 굳게 응어리진 바위가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어 지금의 주상전리 절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쉬지 않고 철썩인다. 마음에 이는 격동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굳어진 주상절리처럼 시인의 마음은 제 형태를 유지한 채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섬

떨쳐내고 싶었던 잔소리도

그리움이 된다는 걸

잃고 나서야 알게 된 진실

함께 그려온 삶의 궤적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치며

적막을 거두어 가는 중

창틈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젖은 마음 걸어놓고

오늘은 맑음이라고

또박또박 새기며

망망대해 한 점 섬으로

떠 있는 중


*한평생 부부로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잔소리 하고 얼굴도 붉혀가며 아옹다옹하며 살아왔다. 그때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었기에 잔소리라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 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 없게 되자 그 잔소리도 하나의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움은 영화의 장면처럼 지난날의 추억이 되어 재생되지만 빈방엔 한 줌 햇살이 찾아와 비춘다. 그것에 위로를 삼아보지만 마음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작은 섬처럼 외롭기만 하다는 시인의 마음이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 벌초

무심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꽃 한 다발에 챙겨 넣고

불효가 수북 올라온

봉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생전에 좋아하시던 과일 나란히 놓고

두 번 절 올리며

이승과 저승의 안부를 서로 나눕니다

서툰 낫질로 불효를 깎습니다

흐르는 땀이 눈을 가립니다

유택이 정갈해지고

너덜해진 마음에도 잔잔히 평화가 흐릅니다

어느새 어머니 나이를 향해 달리는

자식이건만 아직도 철부지 응석입니다

이제 삭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관절이 해마다 서걱거림이 심해진다고

내년 윤달이 오면

봉분을 열어 화장해 모시겠다며

불효를 나무라지 말아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열 자식 안 부럽다던 생전의 말씀이

가시처럼 따갑습니다

하늘이 참 맑습니다


*나이가 들어 벌초조차 힘에 겹게 되고, 자식들은 멀리 떨어져 제나 름대로 바삐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벌초가 마음에 걸렸다. 마침내 윤년을 맞아 어머니 묘를 파묘하여 납골당으로 모시고자 마지막 벌초를 하며 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래도 시인이 살았을 때 손수 파묘하여 좋은 곳으로 모시고 싶어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떼쓰듯 말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의 노년과 일생을 회상해보는 시인의 마음이 맑은 하늘처럼 시리다.


        함박눈

함박눈은

스타일리스트다

헐벗은 겨울나무에 목화솜 꽃을 피우고

땅위엔 하얗게 카펫을 깔아놓았다

세상 만물을 순백으로 바꾼 매직의 천재

행복의 전령사라 해도 무방하겠다

마음이 눈밭을 뛰어 오르고

함박눈과 어깨동무하고

나비가 되는 이 가벼움

순식간에

내 머리 위에도

하얀 왕관을 씌웠다

설국의 황후라 해도 되겠다

억새도 눈꽃을 이고 고개가 휘었다

저리 겸손해졌으니

내 시녀 해도 좋겠다

눈밭 위로 만조백관이

부복하며 엉금엉금 알현이다

세상이 모두 내 발 아래라 하겠다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은 만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를 구별하지 않고 조용히 내려와 쌓인다. 마치 하얀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와 앉듯 머리와 어깨 위에도 쌓인다. 그러고 보니 하얀 왕관을 쓴 왕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가만히 서 있는 억새에도 소복이 쌓이는 눈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모든 사물이 눈 아래로 묻히며 마치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듯하다. 쌓이는 눈으로 인해 내가 왕후가 되어가는 풍경화가 연상된다.


        빈집

토담이 푸석이고

삽짝이 주저앉았다

초가는 승려 옷처럼 잿빛을 두르고

잡초만 서슬 푸르다

먼지가 뒤덮인 마루는 더덕더덕 분칠한 주모 같고

여기저기 사냥감을 노렸던 거미줄엔

오래전 생을 잡힌 곤충이

박제된 채 늘어졌다

찢긴 덧창은

휘파람소리를 내고 있다

헛간 앞

자루 부러진 삽이 빨갛게 삭아내리고

댓돌 앞 낡은 검정 고무신 한 짝이

마냥 외롭다


*요즘 농촌은 빈집이 늘어가고 있다. 힘 없는 노인들만이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면 집은 빈집이 되어 퇴락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시인의 집도 오래된 담장은 손질을 하지 않아 무너지고, 마당엔 잡초만 무성하다. 빈집의 마루는 먼지만 수북이 쌓이고 벼과 기둥엔 여기저기 거미줄을 치고 날벌레를 사냥하고 살아간 흔적만 남았다. 농부의 손때가 묻은 농기구는 빨갛게 녹슬어 삭아 내리고 미처 치우지 않은 검정 고무신 한 켤레는 쪼그라져 댓돌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 외롭다고 시인의 마음을 토로한다. 이것이 우리네 농촌의 모습의 한 단면이기에 더욱 쓸쓸한 느낌이 든다.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찰나라고 하겠다

하늘이 무너졌다 하겠다

칠흑같은 어둠이라 하겠다

세상이 사라졌다 하겠다

베인 억장에서 핏물 흐르고

살점 저미는 고통이라 하겠다

허구한 날 눈이 젖었다

대못이 심장에 박히고

철철 피가 흘렀다

입술을 물었다

아픔을 삼켰다

흐르는 눈물 사이로 갈라진 햇살이 춤을 추었다

햇살이 튀어 오른다

바닥을 치고서야 다시 튀어 오르는 생

지고 가야 할 업이라고

남은 자의 비애라고

가늠 안 되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뼈가 깎이고 살 떨리는 슬픔을 거두어야 한다고

이제

새 길을 내야 한다고

다시 솟아올라야 한다고

어둠을 이기고 새벽은 반드시 오게 마련인 것이니


*함께 살 때는 미처 몰랐는데 한 사람이 떠나고 빈 자리에는 허무와 쓸쓸함만 남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마음뿐이다. 세상이 끝난 것 같고 오직 나 혼자만 남은 세상이 온통 암흑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어둠을 걷어내고 새벽이 오길 기다리며 오늘도 힘든 몸을 움직여 현 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시인의 몸부림을 엿볼 수 있다.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의 서문에서 시인은 “사람을 잃고/ 유기견처럼 떠돌았다./ 시어들이 위로가 되었다./ 남루한 표현이지만/ 개의치 않겠다./ 그것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으니.(p.5)”라고 말하고 있다. 반백년을 함께한 부군을 잃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국토순례나 성지순례를 통해 몸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써내려간 시를 모아 엮은 시집을 내놓았다.


장봉숙 시인은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원목동인 및 용인문학회 회원이다. 시집 <서러운 것들은 쇳소리를 낸다>와 수필집 <나는 홀로 서럽고 하늘 길은 아득하고> 등이 있다.

k******4 2024.12.12. 신고 공감 9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내용보기
책의 전편에 걸쳐 가신 임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이 펼쳐놓았다. 시적 치환으로서의 대상을 파도로, 무지개로, 섬 등으로 불러와서 떨쳐내고 싶었던 잔소리도 그리움이 된다는 걸 잃고나서야 알게 된 진실이라고 고백한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는 선, 지평선에서는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떠난 자는 흔적이 없고 남은 자는 슬픔의 섬에 갇히는 선이라고 부연하였다. 이 지독한 그리움과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내용보기
책의 전편에 걸쳐 가신 임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이 펼쳐놓았다. 시적 치환으로서의 대상을 파도로, 무지개로, 섬 등으로 불러와서 떨쳐내고 싶었던 잔소리도 그리움이 된다는 걸 잃고나서야 알게 된 진실이라고 고백한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는 선, 지평선에서는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떠난 자는 흔적이 없고 남은 자는 슬픔의 섬에 갇히는 선이라고 부연하였다. 이 지독한 그리움과 적막함과 피해 갈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회상하며 한줄 한줄 눈물어린 글을 쓰셨을 장봉숙 시인의 고백에 매말랐던 나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지고야 만다.
k********8 2023.12.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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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숙 시집 -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장봉숙 시집 - 바닥을 치고 솟아오르는 생" 내용보기
"혈관에 쌓인 찌든 세월이 노래 한 자락에 씻김굿이 되었다"     <바람의 노래中>     한줄기 바람을 이렇게도 표현할수가 있구나 싶다. 바람이 바로 내앞을 스쳐가는 생생한 느낌이다. 강렬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너무 신선한것 같다. 강한 생명력을 갖는 멋진 시어들 속에 정신없이 시집을 읽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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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에 쌓인 찌든 세월이

노래 한 자락에

씻김굿이 되었다"     <바람의 노래中>

 

 

한줄기 바람을 이렇게도 표현할수가 있구나 싶다.

바람이 바로 내앞을 스쳐가는 생생한 느낌이다.

강렬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너무 신선한것 같다.

강한 생명력을 갖는 멋진 시어들 속에 정신없이 시집을 읽게된다.

 

h******e 2023.12.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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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집...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집..." 내용보기
팍팍한 세상, 바쁜 일상에게 핑계를 댄다, 내가 '나'를 잊고 살아갔던 이유를. 가끔은 시집 한 페이지 펼칠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지. 이런 마음을 담아서 선물하기에 좋은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봉숙 시집 《바닥을 치고 솟아 오르는 생》내가 시집을 펼치고 그러했듯이 내가 보낸 시집을 펼치는 이웃에게도 문득 작은 위로 만나기를 바란다. 특히 저마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집..." 내용보기
팍팍한 세상, 바쁜 일상에게 핑계를 댄다, 내가 '나'를 잊고 살아갔던 이유를. 가끔은 시집 한 페이지 펼칠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지. 이런 마음을 담아서 선물하기에 좋은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봉숙 시집 《바닥을 치고 솟아 오르는 생》내가 시집을 펼치고 그러했듯이 내가 보낸 시집을 펼치는 이웃에게도 문득 작은 위로 만나기를 바란다. 특히 저마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집...
s*****a 2023.12.0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