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앞서간 실존주의자” |
|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신은 유일하다는 것, 신은 전적으로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작용한다는 것, 신은 만물의 자유원인이라는 것과 어찌하여 그러한지에 관한 것,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을 만큼 신에게 의존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데,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 또는 무한한 능력에 의해서 그러하다는 것 등을 설명하였다.” - 스피노자, <에티카>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아는 사람의 ‘도발’ 때문이었다. 이 책이 너무 어려우므로 쉽게 도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어렵길래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과연 책은 난해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생각날 정도로 어려웠다. 사실 스피노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체계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니, 이야기가 추상의 세계에 머물게 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 것 같다. 스피노자는 ‘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에티카’의 모든 내용은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이 책을 정독하지 않으면 스피노자를 신학자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신’은 종교적 ‘신’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만물의 근본원인이자, 최초에 스스로 존재했던 실체를 ‘신’으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아무런 의지가 없으며, 정해진 ‘필연’에 따라 만물을 창조했다.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한데, 만물이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까지는 마치 종교적 신과 동일해 보이지만, 의지가 없고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신’이 종교적 ‘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바로 이 점이 책을 난해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 ‘신’을 ‘의지가 있는 초월자’로 보면 내용이 이상해진다. 반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원리’로 이해하면 훨씬 쉽게 이해가 된다. 따라서, ‘신’이라는 용어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적인 신을 완벽하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파문까지 당했다. 다행히 삶이 크게 고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책의 내용을 읽어 보면, ‘유물론’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의 의지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도 부정하고 있다. 그저 모든 것은 정해진 원리에 따라 ‘이행’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유물론’을 지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의견이 반가웠다. 책의 제목은 <에티카>지만, 앞부분에 <지성교정론>이라는 글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래도 <에티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논리를 구성하는 방식부터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성교정론> 자체도 어렵기 때문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최대한 논리적인 전개를 하고자 했지만, 사실 완벽하지는 않다. 특히, 몇 가지를 당연시하고 넘어가는데, 그러한 부분이 당연하지 않으면 전체 논리가 허물어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답을 만들기 어려운 주제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풀어내려고 한 것은 대단하다. 그리고, 이렇게 긴 호흡의 글에서 일정한 태도와 논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앞에서는 ‘신’이 중심이지만, 뒤로 갈수록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인간의 정신, 감정, 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이 중에서 감정에 대한 부분은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논리도 굉장히 단순하고,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소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람의 감정이 어떤 정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상당히 유익하기도 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스피노자는 ‘이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본성은 만물의 근본원인인 ‘신’에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본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그리고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통제하여, 모든 사람이 신의 섭리를 느낄 수 있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거꾸로 ‘신’을 필요로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읽기 시작했지만, 읽다 보니 그 철학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방식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이 책을 권하기는 역시 어려운데, 관심이 있다면 <에티카>를 해설한 글이라도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 즉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바라지 않는 어떠한 것도 자신들을 위해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정하고 성실하며,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
| 출판사별 옮긴이별 에티카만 총 4권을 사서 비교 작업을 하며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앞장에 지성 개선론도 옮겨 두신 줄은 몰랐는데, 지성 개선하고 보라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ㅋㅋ 그래서 더 좋다는 의미입니다. 지성 개선론과 에티카를 세트로 보고싶다면 이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전 스피노자 책만 종류별로 옮긴이별로 다 샀지만 |
|
에티카를 세번 째 읽고 있습니다. 처음은 강영계 님의 번역본으로 읽었고 두번째는 GHR Parkinson 님의 영어본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황태연 님의 번역본으로 삼독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먼저 황태연 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책의 번역본이 한 종이라도 더 나오는 건 기쁜 일이니까요. 지금 저는 제3부 초반 즈음까지 읽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라틴어 필사본 (Brill 출판사의 바티칸 필사본)과 Parkinson 님의 영문본, 진태원 님의 비공식 번역본 (출간된 것은 아닙니다)과 비교하면서 보고있는데요. 황태연 님의 번역 중에 수긍할만한 것들도 많지만 선뜻 이해가지 않는 번역들도 꽤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imago를 '심상'이라 번역한다든지, imaginatio를 '표상'으로, affectio는 '변화'와 변용'이 뒤섞여있고, 물음표를 찍어볼만한 번역이 정말 많습니다. 물론, 번역가에 따라 번역은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역주입니다. 번역가들은 역주를 통해서, 내가 왜 이 용어를 이렇게 번역했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등을 근거와 함께 밝히는 게 상식입니다. 최근에 읽은 주성호 님의 <지각의 현상학>은 역자의 역주만 보아도 역자가 대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을 했는지 그 처절한 과정을 독자로서 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볼 때 역주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전공자도 아닌 마당에, 번역을 평가할 깜냥은 안되지만, 역자의 관점과 고민을 역주를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역주가 아예 없습니다. 이 책은 다들 아시겠지만, 결코 역주가 없을 수 없는 책이고 또 없어서도 안되는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황태연 님의 번역에 대한 평을 하기 전에, 역주가 없다는 것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책의 가독성이나 만듦새는.... 새삼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설령 강영계 님의 번역에 오류도 많고 문제도 많을지는 몰라도 (개정판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초판을 봤습니다.) 차라리 강영계 님의 번역을 추천합니다. 적어도 중요한 단어는 라틴어 원어를 병기해주시긴 했거든요.. 다들 알다시피 이 책은 한 번 만에 스르륵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도 두 시간 동안 단 두 장을 읽었고, 내일 읽을 때엔 오늘 읽은 부분을 다시 읽고나면 또 몇 페이지나 더 읽을 수 있을지 모를만큼 사유의 촘촘함이 말할 수 없이 깊은 책입니다. 그런만큼 아름다운 책인 건 물론이고요. 저는 언젠가 우리나라에 에티카 완역본이 나오기를 정말,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양진호 선생님이나.. 누가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까지 저라면, 이 책을 다른 판본들과 함께 병렬로 읽으면서, 빨간펜을 그어가며 읽는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독서도 장점은 있습니다만), 이 책만 단독으로 읽는 것은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
|
“시대를 앞서간 실존주의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피투와 기투에 대해 계속해서 떠올렸습니다. 신은 의지도 없고, 목적도 없고, 감정도 없으며, 단지 ‘필연성’ 그 자체이며, 인간은 그러한 ‘필연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사르트르의 ‘실존’과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스피노자는 명망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저주를 받아라”라는 말을 듣고 쫓겨났습니다. 그 후 렌즈를 갈며 자신의 지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들뢰르라는 철학자는 그를 철학자들의 “예수”라고 칭했습니다. 끊임 없는 지적탐구를 통해 얻은 신념을, 삶 전체를 통해 실천하려 노력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티카의 맨 마지막 구절은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자신의 쾌적한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데카르트와, 비교되는 삶을 산 그의 일생이 한 줄로 압축되는 문장입니다. 그는 ‘신’은 인간 중심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하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신은 필연성을 본성으로 하는 ‘질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세계나 우주를 ‘신’ 의 자리에 넣어도, 그가 말하는 신의 개념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개물을 볼 때마다 신체를 거치는 과정에서 변용이 일어나고, 그 결과 정신 안에 개념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개념은 그것의 타당성을 떠나 완전성을 획득합니다. 유령은 과학적 사실로는 세상에 없지만, 사람들의 정신 세계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유령이라는 개념이 머리 속에 있지만 그것이 허구라고 타당하게 인식하는 경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에게 유령이라는 개념은 ‘완전함’을 갖습니다. 유령의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연결되어 표상되는 한, 그에게 세계는 유령이 존재하는 세계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오직 자기 신체에 의해 변용된 개물(사물)의 개념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자신의 본성 안에서만 정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신체를 통해 각각의 변용된 개념을 얻고, 그를 통해 표상하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스스로 완전합니다. 단지 더 완전하고 덜 완전함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유령’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가진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완전함’과 타당하지 않은 인식을 가진 사람인 것이죠. 이러한 타당하지 않은 인식은 인간이 감정에 ‘예속’되어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쁨과 슬픔, 욕망이라는 세 가지 감정은 인간의 본성인 '자기 보존’ 욕구를 추동하는 원리입니다. 자기 보존에 이익이 될 때 인간은 기쁨을 느끼고, 반대의 경우에 슬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욕망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좌우하는 키의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사주를 보는 사람은 예언이 자신이 원하는 욕망에 부합하면 기쁨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신체(내면의 반대 개념)에 자신감을 갖습니다. 자신감 있는 행동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일어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단지 인간이 그 결과를 놓고 판단하고 예측하며 자기의 시각에서 타당하지 않은 인식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죠.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감정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희망, 공포, 두려움, 죽음 등이 한 사람의 행위 원인이 되는 한 그 사람은 '예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적인 사람은 자연의 필연성을 깨닫고 자신도 그 일부에 속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물의 지속성이 아닌 영원성을 바탕으로 정신을 이끌죠. 그래서 죽음에의 공포보다는 삶에의 욕구를 중심으로 '자신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생존의 노력)라고 칭합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인간은 세상에 의미 없이 내던져진(피투) 존재로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기투)’와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요즈음 인간의 이성이 발전해 온 역사를 ‘공감 능력'의 확대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타인, 나아가서는 벌레, 고양이, 고래 같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공감함으로써, 인류 스스로의 인식 능력을 확장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이 현재의 복잡한 고도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죠. 자신을 자연의 질서 안에 속한 일부로 인식하고, 다양한 사물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타당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자연의 질서대로 이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현재에 와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