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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을 검색했더니,폴 오스터의 소설<거대한 괴물>이 함께 검색 되었다. 급 호기심이 발동하여 읽게 되었다.책의 원제가 '리바이어던(Leviathan)'이었다는 사실은 <거대한 괴물>을 다 읽고 나서 알았다.몇 년전 리바이어던 제목의 영화를 보고 난 후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어 보고 싶었지만 선뜻 읽어볼 자신이....(그리고 지금도 여전히...넘사벽이라 생각하고 있다.아직은 읽을 수가 어쩌면 폴 오스터의 소설이라든가,영화 홉스의 생각을 조금씩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실존하는 모든 국가는 타락했다" (랠르 윌도 에머슨)
한 남자가 폭사(暴死) 했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그런데 몸이 갈가리 찢겨진 이 사내에 대해 그가 누구인지 알것 같다고 말하는 남자..그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은 흘러간다.그리고 나는 홉스의 주장이 소설에 어떤식으로 녹아들었갔을까에..대한 찾기여정을 하기 시작했다.제일 먼저 만난 에피소드는 '자유'에 대한 개념...이였다."우리는 자유라는 개념에 경의를 표하러 갈 거였는데,나는 사슬에 묶여 있었던 거니까요"/63쪽 "나는 자유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조심을 하지 않으면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66쪽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삭스라는 남자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거나,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거였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에게 자유는 결코 보여지는 대로의 자유가 아닌 유령과 같은 존재로 보였다는 것일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유를 유령으로,거대한 괴물로 보았다는 상징을 찾지 못했다면,소설가였던 남자가 테러리스트가 되는 과정을 전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앞서 읽은 <모비딕>에서 처럼 열정과 광기의 그 미묘한 경계는 매번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법이니까 말이다. 자유,욕망,다시 욕망과 도덕의 문제,정의의 경제학(피해자를 가해자로 바꾸는 동해 보보형 양쪽 모두의 균형을 맞춰 주는 행위), 그리고 다시 정의(돈은 착한 거하고는 상관없습니다.그런 정의와 상관 있는 거고 정의에 뭔가 의미가 있다면 그건 정의가 모두에게 착한 사람에게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건 똑같아야 한다는 겁니다/350쪽) 에 대한 물음...
"보편적인 진리는 없었다"/171쪽
최근 배신감을 넘어 허탈한 뉴스를 접하고 있던 터라,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던 모양이다.삭스와 그의 부인에 대한 배신감 혹은 믿었던 진실이 실은...허상일지도 모른다는 피터의 고백을 들으면서 연민이란 다리를 놓고 생각하니,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화들을 조금 객관화 시켜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까 말이다.조금 지루하다 싶은 느낌을 갖게 했던 릴리언과 삭스의 에피소드에서도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돈이 갖는 탐욕과 굴욕에 대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선을 돌려보기도 했고,보편적 진리가 없다 라는 명제는..어쩌면 세상에 대한 방관자같은 자세일수도 있겠지만..거대한 권력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삭스의 행동은 그럼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것은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닌,각자의 선택일게다. |
| 폴 오스터, 폴 오스터.... 어떤 사람일까 너무 궁금했었다. 소위 책을 좀 읽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내게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으나, 사람들로부터 이미 자자한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면 애가 탄다.(나도 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어느 특정한 소설가와 그의 소설들을 하나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어드메쯤 방점을 찍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건 그의 수많은 경험과 내가 겪어보지 못한 느낌과 생각들이 적절한 배율로 배합됨으로써 하나의 경험체계를 만들어내고 그 체계는 또다른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냄으로써 결국 단단한 제본풀로 묶여진 책으로 출간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책은 하나의 세상으로써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 얘기는 모든 작가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진지한 인문학적 고민과 철학을 거쳐서 자신의 모든 힘과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책들만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폴 오스터의 '세상'을 겪어보지 않은 터라 평소에 늘 그의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대중적 인기와 인정을 얻은 작가이기에 그의 세계관이 대중적 입맛과 성감대를 겨냥한 별볼일 없는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쉽게 그의 작품을 접하기에 앞서 나를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이번 <거대한 괴물="">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그는 특별한 작가이며 '다작'을 했다고 해서 만만히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의 글쓰는 스타일은 이렇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씨줄날줄로 큼직하게 조직해놓고선 그것을 하나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풀어서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적 '천'을 부분부분 또 여기저기 왔다갔다 우왕좌왕하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폴 오스터가 안내하고 보여주는 대로 바쁘게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가 손잡는 대로 이끌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이끌리기만 한다면 그 부분적 이야기가 실로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이라, 오히려 그 '부분적 이야기'들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하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약간이라도 긴장을 늦추고 있거나 느슨해져도 금세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가 가이드하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순간순간의 이야기에 빠져듦으로써 그의 현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솜씨에 매료돼 중심이야기구조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어야할 것 같다. 그만큼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며 내가 처음 접해본 타고난 소설가인 듯 느껴진다. <책을 한="" 번="" 붙잡았다가="" 절대="" 놓지="" 못하는="" 경험="">이라는 것이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그의 말솜씨는 탁월했고 마치 연금술사의 주술처럼, 마술사의 빈틈없는 마술같았다. 미로를 탐험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글을 모험하는 듯한 기분이었고 또 한편으론 마약같은 오리무중의 이야기구조 속에서 빨리 헤어나오고 싶은 답답함과 애가타는 기분을 느꼈다. 소설이 이렇게 블랙홀처럼 독자를 어지럽고 복잡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역시 느끼게 됐다. 다 읽고난 뒤의 느낌은 그 미로에서 겨우 벗어났다는 해방감, 그러나 마약처럼 또다시 그의 소설을 접하고 싶다는 중독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면 이해하겠는가? 물론 그의 이번 소설이 아주 완벽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거대한 괴물="">의 원작이 <리바이어던>인 것을 감안하고 소설의 마무리를 생각한다면 주제를 충분히 살렸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고, 주제를 향해서 일관성있고 힘있게 이야기를 끌고간다기보다는 이야기전개과정에서의 지엽적 이야기들에 치우친 감이 있었다. 좀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자신이 여기저기 벌여놓은 속이야기들을 빨리 매듭지으려 하고, 진짜 주제를 향해있는 핵심적 텍스트가 빈약하다는 생각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조금은 어설프게 소설을 끝마쳤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말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영어원제이기도 했던 <리바이어던>과는 많이 관계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소설적 복선과 암시가 미약했고 이제껏 전개한 이야기에 비해 그것들을 마무리하는 수준은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뒤로하고 어쨌든 나는 이 책을 내 자신에게 있어서<폴 오스터="">의 발견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물론 많은 이들이 폴 오스터를 더 먼저 알고 읽어왔으며 이제야 폴 오스터를 알게 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 대단한 입담꾼을 이제서라도 알게 된 점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다. 아직 그를 접해보지 못한 많은 독서가들에게 그를 한번 접해볼 것을 권한다. 그 처음 '테이프'를 이 책으로 끊을 필요는 물론 없다. 그가 이제껏 창조해낸 소설이 무려 10권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적으로 <거대한 괴물="">을 읽고 나는 <달의 궁전=""> 바로 구입했다. 또 그의 마술같은 필치에 매료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내겐 책읽기가 삶의 또 다른 즐거움이니 말이다.달의>거대한>폴>리바이어던>리바이어던>거대한>책을>거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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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이야기에는 두 명의 소설가가 등장한다. 삭스와 피터다. 삭스는 단 한 권의 소설을 출판했다. 출판 년도는 정확히 언급된 적이 없으나 1945년 생인 삭스가 23살에 집필을 시작해 5년 동안 썼다고 했으니 1973년 즈음일 것이다. 집필을 시작한 해는 삭스가 징병을 거부해(베트남 전쟁) 감옥에 간 해이기도 하다. 징병을 거부한 자유가 자유의 구속으로 귀결되는 아이러니. 사건이 일어난 곳은 '자유의 나라' 미국이다. 피터가 삭스를 만난 해는 1975년이다. 당시 피터는 예닐곱 편의 단편을 발표한 변변찮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피터는 촉망 받던 한 소설가가 테러리스트로 변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삭스는 1990년에 폭사했다. FBI는 산산조각 난 삭스의 몸에서, 신비하게도 온전하게 남아 있던 지갑을 발견한다. 지갑에는 피터의 명함이 있었다. 피터는 자신을 찾아온 FBI를 보자마자 신문에서 읽은 폭사의 주인공이 삭스였음을 직감하지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며 시치미를 뗀다. 대신 피터는 1975년 부터 1990년까지, 그러니까 삭스를 만나 우정을 나눈 15년의 시간을 한 권의 소설로 써낸다. 소설의 제목은 <거대한 괴물>이다. 미국의 현대사 <거대한 괴물>에는 공통된 해석이 존재한다. 촉망 받던 소설가에서 테러리스트가 된 한 남자의 급변을 통해 삶의 추진력이 자기의지나 명백한 인과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들이닥치는 사건에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므로 안전한 비평의 주제가 될 수 있지만 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니므로 오늘의 이야기에선 제외할 것이다. 대신 나는 196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미국의 현대사와 삭스의 변화를 병치함으로써, 사실은 삭스의 변화가 미국 현대사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은 다소 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너무 어설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오리지널리티에는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생경함이 있기 마련이다. 삭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68년에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은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 있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었음에도 미국은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베트남에 쏟아 부었다. 베트남 전쟁은 이전의 양차 세계대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전쟁이었다. 겉으로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비지니스였다. 사람들은 악취가 나는 전쟁을 자유의 비단으로 포장하려는 국가에 분노했다. 자유는 존 F. 케네디와 함께(1963년에 암살 당함) 죽었음이 밝혀졌다. 피터가 삭스를 만난 건 1975년이고 피터가 삭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건 1979년이다. 페니(삭스의 아내)는 삭스의 여성 편력을 고백하며 자신의 불륜이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피터는 삭스가 외도를 했다고 해서 페니의 외도가 정당되는 건 아니라고 유혹을 거부했으나, 결국엔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후에 만난 삭스를 통해 삭스가 자신이 집을 비운 몇 주 동안 페니와 피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는 당황했지만 삭스는 침착했다. 삭스는 자신의 여성 편력은 모두 페니가 지어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터의 불륜을 탓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삭스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진심으로. 피터는 삭스의 말이 맞는지 페니의 말이 맞는지, 정말로 삭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삭스는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삭스의 말이 맞다면 세상은 도덕과 비도덕이 너무나 엉켜 있어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비도덕인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1970년대의 미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국가기관을 이용해 상대 당의 기밀 문서를 훔치고 회의 내용을 불법 도청했다. 불법은 너무 자연스럽게 행해져 법과의 구분이 혼동될 지경이었다. 세계 도처에선 반미 데모와 미국 시설에 대한 테러가 들끓었다. 1979년에는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이 습격당해 90명의 외교관들이 인질로 잡혔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의아해 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온다. 삭스는 이 시기에 아파트 추락 사고를 겪어 거의 죽을 뻔한다. 삭스는 이 사고를 계기로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레이건이 집권한 1980년대는 자유가 부활한 시대였다. 당시 레이건이 주도하던 경제 정책은 오늘날 '신자유주의'라 불린다. 이 사조의 이름이 왜 '자유'를 포함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1981년은 또한 AIDS가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아이를 갖거나 갖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은 피임약을 합법화했다. 합법화된 피임약에 성은 더 문란해졌고 문란해진 성이 AIDS로 귀결됐다. 사람들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국가가 약속한 자유의 부활은 익히 알고 있던 자유가 아니었고 우리가 자유라고 믿었던 것은 재앙으로 도래했다. 자유의 여신은 자기가 수호하는 게 무엇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삭스의 선택은 자유를 테러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자유는 더이상 우리가 알던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는 파괴되야만 했다. 삭스는 자유의 여신상을 폭파하는 것 만큼 자유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찾아 모든 주를 돌아다녔다. 1990년 6월 29일 삭스는 여신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조립하다 폭사하고 만다. 위스콘신 주 북부의 어느 도로변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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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북카페 <달의 궁전>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입문했던 폴 오스터의 책. 그 시작은 '거대한 괴물' 이었어요. 제목이 좀 부담스러워서 어렵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럿이 함께 읽으면 하루에 몇 장씩이라도 읽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읽기시작했답니다. 그.러.나... 어메이징~!!! 제목이 주는 부담감은 어느새 조금씩 날아가고 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책이란 참 이상한 물건이라서 그게 일단 세상으로 흘러 나오면 무슨 이리든 일어날 수가 있지요. 별의별 못된 장난이 다 벌어질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어요. 좋건 나쁘건 그 일은 우리 손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거지요. /p15
한 가지 일은 다른일로 이끌리기 마련이어서, 내가 그러고 싶어하건 아니건 나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누구 못지않은 책임이 있다. /p94
제목처럼 뭔가 거대한 사건을 기대했는데...그보다는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미치게 되는 영향,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연관지어지면서 퍼져가는지,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소설가에서 테러리스트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들이 한 곳에만 치중되어있었다면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정말 자연스럽게 흐르듯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속에서 조금씩 사슬처럼 이어져가는 관계들을 보며 '몇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 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글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벤, 그리고 천직이 소설가, 또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되어졌던 삭스...그들이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로 인해 그들의 인생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감을 알고 있었을때, 또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들어섰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삭스의 인생은 그 자체로도 훌륭했지만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해는지, 그리고 그에게 발생한 사건 그와 연결된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그의 삶이 조금은 편안해졌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때로, 인생은 만남, 우연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때 그 운명의 흐름속에 자신을 맡길 것인지 자신이 컨트롤해볼 것인지를 결정하는것은 자신의 몫이겠지요? 살다보면 인생은 예측한대로 또는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지지 않는 때가 더 많은것 같습니다. 「관계」속에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기에 연관이 있는 누군가에게 좋던 나쁘던 어떤 작용을 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어쩌면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가장 거대한 괴물은 바로 '나' 자신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짧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강렬한 문구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거대한 괴물』 한번쯤...아니 기회가 된다면 두 번 이상..? 다시 읽을 책 리스트에 추가해야겠어요. 폴 오스터님 은근 매력있으십니다. 좋은 책을 만나게 해 준 <달의 궁전> 감사해요. ^^
떠날 때면 언제나 그냥 머물러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물 때면 언제나 떠나야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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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괴물]을 샀다. 뜻하지 않은 부수입을 얻어서 주머니가 두둑했던 탓이다. 매우 재밌는 책이었다.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은 뒤 컴퓨터를 킨다. 감상을 남기기 위해서. 아니, 감상을 즐기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사람으로 잠이 들었다가 저런 사람으로 깨어날 수가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을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그 사고가 그를 바꾸었다기 보다는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도록 했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벤의 삶은 그날 밤 둘로 갈라져 그 이전과 그이후로 분명하게 나뉘어졌을 것이고, 그럴 경우 이전의 모든 삶은 기록에서 완전히 지워질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행동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p.184~185" 도로 변에서 한 남자가 폭사한다. 신분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작가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는 벤자민 삭스다!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인 한 작가가 창문에서 아주 우연하게 떨어진 다음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하여 온갖 기행을 일삼고 급기야 전미의 자유의 여신상 모상들을 폭파시키고 다니다가 어느날 도로변에서 폭사한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줄거리다. 그런데 그 주제가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 그의 파멸은 단순히 우연적인 사건들이 결합한 결과물인가? 그의 운명은 그렇게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우발적 사건이 사슬을 이룬 결과일 따름인가? 작가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왜냐면 만약 운명이 우발의 연속이며 인간의 삶이 단순히 그러한 매듭짓기의 결과물이라면 '인간의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연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사건들의 접속 속에서 단절 혹은 도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연이 필연을 탄생하는 과정 속에서 결국 우발의 연속은 필연의 연속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외부의 사건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지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설사 사건의 발생이 전적으로 우연일지라도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므로 우연한 사건 역시 인간에게는 필연적 사건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주변의 사건을-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느냐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의식/무의식적으로 지녀온 문제 의식 속에서 해석하여 지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 사이에 놓인 하나의 사건으로 변형시킨다. 따라서 계열화하는 인간에게 단절을 낳는 사건은 있을 수 없으며, 우연은 필연일 뿐이다. 창문에서 떨어진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지만 벤자미에게 그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연한 사건들이 연속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우연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결코 운명이 될 수 없다. 작가의 안타까움-그것은 자신이 벤자민으로 하여금 사건을 우연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거대한 괴물이란 운명일 테다. 운명 앞에 인간은 무력한가? 인간의 행동은 정말로 어떠한 의미도 없는가? 그렇지 않다. 운명-필연성 없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온갖 사건들을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계시하지만, 그 계시를 해석하는 것도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괴물은 벤자민 삭스가 걸어가다 마주치는 갈림길마다 온갖 이정표들을 설치해놓았다. 그 이정표를 해석하고 길을 선택하는 것은 벤자민 자신의 몫, 그의 폭사는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할 때마다 삭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구현하고 본래의 자기인 척 하는 게임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자주 되풀이함으로써 그는 마리아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기 시작하는 위치, 모든 것이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위치에 이른 것이 분명했고, 그 덕분에 다시 자신과 맞설 수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카메라가 사람에게서 영혼을 빼았아 간다고 하지만, 이 경우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고, 삭스의 영혼은 카메라 덕분에 차츰차츰 그에게 돌아갔다고 믿는다.p223~224" 소설에 등장하는 특이한 두 인물, 벤자민 삭스와 마리아 터너는 스스로 타인에게 자신을 감시하고 이를 기록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는 자신의 일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고 싶은 욕구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한다. 인간은 내면과 외면으로 구분되어있고, 우리는 우리의 절반인 외면을 스스로 바라보지 못한다. 외면은 다른 사람들과의 시선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하고 그 사진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며 이는 곧 자신이 보지 못하는 절반-외면을 알고싶어하는 욕망이다. 물론 이는 본래의 외면일 수 없다. 사진이 건네진 순간 외면은 다시 나의 시선 아래 놓이고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의 외면은 본래의 외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타인에게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기록을 남기고 감시받는 다는 기분을 은근히 즐기는 둘의 행동은 일견 변태스러워 보이지만, 흥미롭다. 덧붙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방식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하나 씩 베일에 가려있던 사건들을 풀어가는 듯 하지만 걷혀진 베일 뒤에는 일부의 진실과 또다른 베일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일부의 진실을 읽고 난 뒤에 다시 베일과 마주친 독자는 그 수간 눈앞의 베일이 바로 전의 베일을 걷어낼 때 보았던 베일임을 기억해내고 읽었던 부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나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다 다시 뒤로 되돌아와 이전의 베일을 떠올려야 했고, 소설의 완벽한 짜임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베일을 걷어내지만 언제나 새롭게 나타나는 베일. 남겨져있는 베일 때문에 나는 도중에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시점이 뒤죽박죽인 것도 재밌다. 작가이자 화자 피터 아론의 손에서 흘러나온(1인칭 시점) 이야기들은 액자 안으로 흘러들어갔다(3인칭 시점)가 갑작스레 이야기가 액자를 깨고 나와 피터 아론의 손(1인칭)으로 돌아온다. 소설 속의 화자가 소설의 작가임을 자처함으로 인해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도 무척 인상 깊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FBI에게 벤자민 삭스와 자신의 관계를 기술한 원고를 넘긴다. 이 장면은 원고의 내부일까? 원고의 외부일까? <소피의 세계="">에서 소피가 책밖으로 뛰어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아.무.튼. [거대한 괴물] 읽어보시길. 무척 재밌다.소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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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페이지에 달하는 하나하나의 장이 모두 극적인 감동을 준다. [달의 궁전]을 읽으면서 폴 오스터란 작가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문체에 반해 그의 다른 작품 [공중 곡예사]에 이어 지금 막 읽은 [거대한 괴물]이 내가 읽은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그의 글은 가장 모던하고 시크하면서도 공허한 절제미를 갖춘 21세기 최고의 무채색 빌딩을 연상시킨다. 그 안에서 무차별 전율세례를 맞으며 고독과 절망을 곱씹는 느낌. 더불어 무언가를 갈망하게 하는 부정과 긍정의 이중적 미스터리.
안경너머로 낡은 일기장을 펼쳐든 늙은 노파의 모습으로 과거사를 회상하는 듯하기도, 말풍선 속에 담겨진 장면 장면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배회하는 듯하기도. 각각의 플롯은 다음 스토리와 자연스럽게 연계되면서 어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강한 흡입력이 있다. 사실 하나의 플롯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전 플롯이 절정이자 클라이맥스인 셈이다.
작가인 화자는 부분적으로 폴 오스터를 대변하는 캐릭터일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고뇌가 뼛속 깊이 내포되어 있다. 하여 그의 글은 읽는 내내 ‘맞아, 맞아’라는 장단을 맞추게 하는 힘을 발휘하는 반면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냉소와 회의도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마저 금세 사랑할 수밖에 없어진다. 또 별난 캐릭터들에게서 느끼는 동질감과 절박함은 어느 새 내 상상 속 자아의 모습과 맞물리기도 한다. 모나고 특이한 삶을 살고자 미친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으로 진부하게밖에 살 수 없는 비겁한 나. 그리곤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는 걸로 막을 내리는 비참한 관객. 그게 바로 나다.
흉내란 참으로 덧없다. 본연의 나를 일부 버리고 고치고 다듬어 다른 모습의 자신을 꿈꾸는 헛된 망상에 불과한. 그럼에도 인간은 누군가를 ‘닮고’ 싶어 한다. 내 경우엔 짐작하다시피 폴 오스터. 그의 생각과 일거수일투족을 읽어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니고 싶은 허황된 욕심이 이글거린다. 이를테면 전 세계적으로 무한한 단어 중에 하필 [거대한 괴물]이란 제목을 채택한 이유는 뭐며, 캐릭터들의 성격 설정은 어디에서 기인한 거고, 또 그들의 직업이나 사고가 작품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왜 꼭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는 건 오롯이 독자인 내 몫이란 것도 나는 안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심미안과 혜안이 적절히 조화된 성능 좋은 망원경 하나가 간절하다.
글쓰기란 보고 읽기엔 쉽고 직접 하려면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내가 가질 망원경은 초정밀 현미경이어야 할 것이다. 더 잘게 쪼개고 쪼개 혹은 더 크게 늘리고 늘여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해야 하며, 더불어 좀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도약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도구가 있을까, 또 만일 있다면 내 소유가 될 수 있을까. 혹 가졌음에도 인지하고 못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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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우정에 대해 회의를 표하는 이들이 있다면 폴 오스터의 이 책 [거대한 괴물]을 읽어보길 바란다. 15년 전 폭우로 취소된 한 낭독회에서 서로 알게 된 두 명의 젊은 작가 피터 아론과 벤저민 삭스, 이들의 우정은 삭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피터의 작품 [거대한 괴물]로 거듭난다. 사실 [거대한 괴물]은 삭스의 미완성 소설의 제목이다. 우리는 단 한 권의 작품에서 그 작가의 모든 재질과 천재성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삭스 역시 그런 단 한 권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해 보인 그런 작가에 속한다. 삭스는 평론과 에세이 그리고 서평들을 끊임없이 써내려 갔지만 삭스가 출판한 유일한 소설은 [새로운 거상(巨像)] 한 권뿐이었다. 1876년부터 1890년 사이의 미국을 무대로 쓰여진 역사소설로, 미국이 독립한지 1백주년 되던 해에서 다음 15년 동안의 중요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와는 큰 상관이 없다.
이 책의 원제 [리바이어던]은 토마스 홉스의 책에서는 '거대한 국가권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개인을 좌지우지하는 '운명의 힘'을 상징한다. 삭스가 미국 각지의 짝퉁판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는 테러리스트 '자유의 유령'이 되기까지 두 가지 고개를 넘어야 했다. 첫 번째 고개는 1986년 7월 4일 자유의 여신상 백주년 기념일에 일어난 추락사고였다. 비상계단에서 떨어진 삭스는 구사일생으로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고 마리아 터너와 알게 된다. 두 번째 고개는 릴리언의 남편인 리드 디마지오를 살해한 사건이다. 삭스는 디마지오의 차량에서 폭탄제조에 드는 재료들과 거액의 돈다발을 발견한다. 릴리언을 찾아가 돈을 건네주고 디마지오의 서재에서 그의 논문과 책들을 보며 그는 디마지오의 순수한 이념과 이상에 빠져들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지 몰랐던 삭스는 이제 단순한 책상물림이 아니라 실제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그가 테러리스트가 된 데에는 레이건으로 상징되는 당시 미국의 시대적 정신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소설가에서 테러리스트로의 변모는 이미 자신의 펜을 꺾어버린 재주 많은 소설가의 죽음 자체를 예시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으로 대표되는 순수 이상주의는 삭스의 죽음으로 마지막 빛을 발하고 사라져 버린다. 이상주의자의 소멸은 소비상품으로 전락한 자유의 여신상 모델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성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자유의 유령이 여신상에 설치한 폭탄은 이상주의가 냉엄한 현실주의에 가하는 테러 행위의 상징물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세월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에 잠겼다. 그 세월 속에는 숱한 우연과 선택의 기로가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재가 둔재가 되고, 추녀가 미녀가 되고, 잘 나가는 이가 쪽박을 차거나, 유명스타가 불우한 삶을 살거나 재능 있는 예술가가 자포자기한 소시민으로 변하거나 한다.
이념과 이상, 작가들의 책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사랑과 섹스도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성적인 면에서 개방적이고 즐기는 편이다. 24살의 컬럼비아대학 영문학과 대학원생 아이리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피터는 '호모 에렉투스'라는 자기풍자적인 말대로 난봉꾼의 길로 접어든 적이 있다. 성적인 집착에는 전처와의 이혼보다도 패니와의 깨어진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피터는 전처와 이혼 후 마리아 터너의 은밀한 섹스파트너 역할을 행하고, 또 삭스의 아내인 패니와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삭스와 이혼하고 자기에게 오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패니는 그럴 생각이 없어 둘의 관계도 끝난다. 패니는 삭스에게 피터와 있었던 일을 고백하고, 삭스는 쿨하게도 피터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며 오히려 점심을 사며 그를 위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패니 덕분에 피터는 삭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삭스를 통해서도 패니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된다. 가령 패니의 임신불능과 그녀의 의부증 환상까지도. 패니와 삭스의 이야기가 서로 모순되는 측면이 있지만 모두 납득할만한 두 가지 진실임을 피터는 깨닫게 된다.
"패니의 눈으로 본 삭스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삭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통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친구가 되었던 열정이 넘쳐 흐르고 타고난 말재주를 지닌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남자, 다른 누구와도 나눈 적이 없는 비밀을 지닌 남자였다."
그의 비밀이란 결국 삭스가 자기 가슴 속에 오래도록 품어온, 그 자신조차 모르던 타오르는 이상의 불꽃, 무정부주의자의 순수한 이념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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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개가 심하게~ 부족하다.
내 인생에 이렇게 임팩트 있는 소설은 정말! 처음이다. 거대한 괴물' '거대한 괴물' '거대한 괴물' '거대한 괴물'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는 '선택' '우연' 등의 삶을 결정짓는 요소들에 대해 말하는걸 좋아하는 듯 하다. <우연의 음악>에서 게임이라는 도구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깊이를 더해가다 결국 어떤 의미의 해방을 맛보는 나쉬처럼, <거대한 괴물>에서 삭스는 소설, 여자, 죽음, 사람 등을 통해 그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를 얻게 된다. 어떻게 보면 파멸이고 어떻게 보면 자유의 성취인듯한 삭스의 삶. 그 과정이 '나'라는 사람의 또다른 선택과 사상과 삶을 통해 표현되는 모습이,,, 인간사의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삭스의 삶처럼 어찌보면 인간만사가 희비쌍곡선을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 '살인'으로 두려움의 극단에 섰던 삭스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죽인 사람에게서 얻게 된 '사상의 정점'. 또 그 속에 매료되어 가는 모습은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을 참 연약하게 보이게 한다. 부싯돌을 튀겨 불꽃을 만드는 것 처럼 한 줄의 글귀가, 한 순간의 생각이, 한 마디의 말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깡그리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그런 인간이란 존재. 하지만 그런 연약함이 있기에 사회라는 곳이 가치있는것이기도 하니까!
대중문학이 판치는 미국문학계에서 진지한 소설을 유지하고자 하는 폴 오스터. 그의 이 엄청난 책에 대해 내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읽어보지 않으면 이 전율을 느낄 수 없으리라!
스티그 라르손 이후로, 날 이렇게 흠뻑 빠지게 만든 작가!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인간 감정을 묘사하는 폴 오스터의 필치가 이렇게 빛나는 작품이 또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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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거의 비슷한 이야기 주제를 가지고 있다. 소설 속엔 그만의 일관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풀어내는 과정이 참 독특하다. 하지만 다 펼쳐 놓고 보면 결국엔 폴 오스터가 다른 소설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처음부터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찾아내는 숨바꼭질 같은 이상한 매력이 있다.
'거대한 괴물' 에서도 역시 폴 오스터는 미국과, 미국 사회와, 그 거대한 '괴물' 같은 존재가 더 커다른 '괴물'에 의해서 만들어져가고 있는 -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펼쳐낸다. 우선 그는 자신과 어딘가 비슷할지 모르는 소설가 두명을 등장시켜서 소설의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피터 아론이라는 소설 속에서 이 소설의 집필자는 아마도 현실적으로 이 거대한 운명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쩌면 방관자 적인 미국시민, 바로 폴 오스터 자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삭스라는 인물은 누구겠는가? 아마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괴물(그렇지만 영양가 없이 멀대처럼 키만 커진)이지 않을까.
삭스는 폴 오스터가 우연히 창조해낸 인물은 아닐 터. 그는 우울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어느순간 키가 훌쩍 크면서 농구 선수 못지 않은 운동 신경도 부여 받았다. 키가 크다는 것은 일단 일반인들 보다는 무언가 우월하다는 무언의 설정이다. 하지만 소설가로 성장하면서 가졌을 고민과 괴로움, 또 외로움 등등 수 많은 외부적인 요인가 내재된 원인으로 인하여 꺽다리가 되었을 뿐 영양가는 별로 없어서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소설의 전반에 걸쳐서 삭스는 '자유'라는 명제에 구속되어 있다시피한 행동을 자주 보여준다. 미국은 자유의 국가란다. 그래서 미국의 상징물은 '자유의 여신상'이다. 하지만 과연 미국이 자연을 위해서 노력했던 것은 실제로 우리 대다수가 바라던 그런 자유일까. 소설 속에서 삭스 또한 그렇다. 우연히도 '디마지오'라는 인물(이 사람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음지에서 미국의 자유를 위해 활동했던 사람이다.)을 공격해서 죽이게 됨으로 그가 생각만으로 가지고 있던 자유에 대한 철학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그 행동은 구체적으로(약간은 어이 없게도) '자유의 여신상 파괴'다.
미국의 자유는 제대로된 자유가 아니라는 삭스의 철학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잘못 된 자유를 위해 세워진 우상이나 마찬가지 였다. 마치 성경속에서 모세가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을 쳐 부수듯이 삭스에게도 그런 영웅적인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디마지오는 어디에서 생겼는지 모를 16만 달러라는 '공돈'을 삭스에게 행동 자금으로 남겼지 않은가! 이보다 더 절묘하게 삭스를 부추길수는 없다.
실제의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미국의 자유'는 소설 속에서 삭스와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마치 복선처럼 삭스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삭스가 폭사한 날짜는 1990년 6월 말이다. 하지만 피터 아론이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게 된 날짜는 그보다 6일이 지난 7월 4일이다.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다. 어렸을 때 삭스는 자유의 여신상의 꼭대기 까지 오르려다가 그만 작은 사고를 일으킨다. 자유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의 오르다가 일어난 사고 - 그건 이제 부터 있게될 삭스의 운명을 미리 소개하는 프롤로그 같은 이야기다. 그 때부터 이미 거대한 괴물은 램프의 좁은 구멍을 통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할 연기처럼 그의 삶을 휘감은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쨌든지 삭스가 두번째로 사고를 당한 1986년 7월 4일, 공교롭게도 이 날은 아메리칸 드림, 곧 자유의 상징인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면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지 꼭 100년째 되던 해였다. 이날 삭스는 어렸을때와는 전혀 다른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거의 의식불명의 상태로 밑바닥 까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과 미국 독립 기념일, 게닥 100년이라는 대단 숫자를 축하하는 날, 삭스는 죽음의 밑바닥 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게 바로 미국의 자유다.
이제 거대한 괴물은 어찌 할 수도 없이 삭스의 삶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이상 멈출 수 없는 운명의 괴물은 통재로 삭스의 삶을 먹어 삼킨다. 결국 삭스의 삶은 예상치 못했던 파멸로 끝을 맺게 된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자유의 상징물을 파괴하던 우리의 영웅은 그렇게 신문에 크게 이름 날 것도 없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누구라도 멈출 수 있을까. 우리 삶의 거대한 괴물은 또 다른 운명의 열쇠고리를 쥐고 또 다른 개인의 삶을 멈출 수 없도록 잡아 끌고 있다. 그게 파멸이든 축복이든, 어쨌든 간에. [인상깊은구절] 그 당시 세계 도처에서는 더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나는 자유의 유령이 내 주의를 끌 때마다 그를 괴짜, 미국의 광기라는 역사에 끼여든 덧없는 인물쯤으로 치부해 버렸다. |
| 불가에서는 스치는 작은 것에도 인연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지않은가. 작가 폴 오스터는 그의 작품들에 있어서 어쩌면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서양적 이야기구조로 풀어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오스터의 소설들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우연'이라는 정체는 이 소설에서는 "괴물"로 정의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이 소설의 원문의 제목 '레비아탄'을 보고 괴물영화의 원작쯤으로 생각을 했었고(레비아탄 이란 영호가 실제로 있다.) 오스터와의 만남은 이렇게 잘못된 오해로 시작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평범한 한 소설가가 테러리스트로 변하는 과정이나 그것에 의도 혹은 이유등이 소설적인 구성에 있어서 당연하다거나 독자로 하여금 공감이 가는 부분이 미약하는 것에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은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은 결코 우연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결국은 거대한 입을 통해 그 위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이지 못한 본인 같은 독자에게는 조금은 어려운 소설이였지만 인간에 삶에 있어서 지나치기 쉽고 대소롭지 않게 여기던 우연적인 사건들의 꼬리에 대해서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던 작품이고 또한 폴 오스터의 소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해준 소설이라서 뜻 깊은 소설이였다. 당신도 이 책을 통해 우리싦의 우연들이 필연으로 가는 씨앗임을 알게 될것으로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