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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28일,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在日朝鮮人)들은 일본 문부성(文部省)과 미 군정이 협력하여 조선인 민족 학교를 폐쇄하고 조선인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일본 공립 조선인 학교로 강제 전학시키고 조선인 학교들을 패쇄시킨 것에 분노하여 한신 교육 투쟁( 阪神?育??)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많은 조선인 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안겨준 사건이며 재일 조선인 사회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특히 한신(阪神) 지역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크게 부각이 되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무장 경찰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조선 민족에게서 일제 강점기(日本帝國時代) 부터 민족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그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역사적 자각을 확립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말을 배우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는 교육이 사라지고, 일본의 가치관이 내포된 교육이 강제 된다는 사실은 조선인들 에게 있어 받아들일 수 없는 탄압이었고 반드시 투쟁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평범한 새내기 교사 일본인인 노보루는 월급이 3호봉이 오른다는 이유와 자신도 가난하게 살아왔으니 조선인에 대한 가련한 마음 아니면 단순한 동정심으로 젊은 혈기로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에 전근을 오게 된다. 처음 학교에 도착했을 때, 노보루는 그곳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교원들을 일본 문부성에서 보낸 스파이로 여겼고 "달아매기"라는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 교원들의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반목의 감정으로 조선인 학교는 가득 차 있다. 당시 도립 학교 교사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학생들은 대부분 조선인 이었지만, 조선어를 못하는 일본인 교사의 가르침을 받는 조선인 학생들의 반목이 큰 상황이었지만 노보루는 학생들의 눈빛에서 읽히는 반감은 여타 다른 일본인 교사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당시 조선인 학생 입장에서 일본인 교사들에게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무시 당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러한 억압은 그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노보루가 교감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였다. 노보루는 처음으로 그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때 나는 비로소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노보루의 첫 번째 과제는 자신의 수업시간을 위해 조선어 교본을 만들며 노조에 가입하여 기존 권위적인 일본인 교원의 압박 그리고 일본 공권력 그리고 미군정의 일반적인 공산주의자로 학생들을 매도해가는 상황에서 중앙 교권에 목소리를 내어 현 상황을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바꾸어 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나 노보루의 노력에도 일본 경찰들은 3000여 명의 인원으로 당시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으로 공산권과 대립하는 사이 무단으로 도립 조선인 학교에 침입하여 조선인 학생 그리고 일반 기자 그리고 교원, 의료진까지 탄압을 하는 사태가 터지고 만다. 노보루 역시 이런 사태를 겪으며 단순히 일본 정부의 조선인 탄압으로 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노보루와 뜻을 같이하는 조합 일원들은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 사회에서 교육 받기 위한 작은 변화를 위해서 일본 중앙 교원 협회와도 연대 등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노보루의 이러한 행동은 친 정부 성향의 일본인 교원들과 계속적인 감찰하는 경찰 당국으로부터 외면과 감시를 당하게 된다. 노보루의 의도는 그들에게 억지로 일본 식 교육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노보루는 교사로서, 그들에게 단지 일본의 제국주의 잔재를 주입하는 것 이상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1951년-52년 걸쳐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코 조약( San Francisco Treaty)을 통하여 일본과 연합군의 전쟁 상태를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미 군정하에 점령 상태에서 공식적으로 주권국으로 복권되고 일본은 조약에서 쿠릴 열도(Kuril Islands.) 타이완(taiwan), 사할린(Sakhalin) 등을 포함한 여러 영토를 포기했고. 조약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일본은 과거의 식민지 및 점령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해야 했다. 그 더 이상 일본 내에 있던 식민지 주민이었던 아니 일본 국민이었던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 내 교육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 초 일본 당국의 조선인 학교 탄압은 의도치 않는 교육에 대한 정책적 불필요성을 줄이고 전후 새로 세워진 일본의 체제에서 순응할 조선인들은 그들의 편견을 딛고 일본 교육체제에서 순응하고 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 남북 전쟁 후 남과 북의 새로 새워진 각 독립국가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일본 당국 위정자들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일본 문부성과 미 군정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동화'를 통한 일본 교육정책에 대한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목표로 했지만 노보루와 그와 생각을 같이 하는 교사들은 일본에 남아 삶을 구현하던 조선인 학생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보루 혼자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불안한 고용 구조 속에서 스스로의 삶도 버거운 조선인 교사들과 노조에 소속되어 있는 뜻을 같이하는 일본인 교사들의 단합된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재일 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일본 제도하에 도립이라는 명목하에 1940년 말부터 50년 초까지 진행한 것은 결국 도립체제라는 중간 전환 과정을 통해 결국 조선인 학교의 사립화를 최종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사립화를 통한 일본 내 조선인들의 교육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이 미 군정하에 지배에 있었던 비정상적인 상황하에서 미 군정이 동일한 지역 그리고 동일한 시대에 있었던 약 10만 명 가량의 조선인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도립이라는 형태를 취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조약 이후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을 종료함으로써 사립이라는 허울 좋은 테두리에 조선인 학생들의 교육을 낭떠러지로 밀어 넣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러한 도립 조선인 학교의 폐교는 당연한 조선인 교원들의 직업적인 안정감을 박탈 당하고 그 이후의 삶이 힘들어진 것이 당연하지만 도립 조선인 학교의 조선인 교사와 뜻을 같이 했던 일본인 교사들에게도 단지 조선인 학교에 근무했다는 이유는 개인 사에 대한 일본 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그리고 학교 폐교 후 일본인 교사들의 직업의 안정성까지 박탈 당하는 사태를 노보루의 그 당시 기억에 대한 아련한 감정이 이 책에 담아있다. 조선인 학교에서의 원하지 않는 퇴직 후 노보루에게 있어 조선인학교의 5년 후 일본 학교의 전근은 다시금 교사 생활을 신입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인학교에서의 5년은 그를 완전히 일본인으로 놔주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일본 학교의 조직이 그를 이방인으로 간주했을 때 그는 조선어 공부에 열중했다. 다만 조선인 학교의 퇴직 후 전문적인 조선어 공부 및 학문적 결과를 내놓기 힘들었지만 그는 조선문학 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계속적인 조선인 학생에 대한 교육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난 노보루가 5년 동안 도립 조선인 학교에서 근무하며, 노보루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들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노보루가 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일본 당국자들과 이견을 극복해가야 하는 필요성을 인식했다고 생각한다. 노보루와 뜻을 같이 했던 그들의 투쟁은 단지 조선인 학교 내에서의 작은 저항이 아니었다. 모든 행동들은 조선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더 큰 싸움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불행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선생님의 활동 상을 이 책을 통해 느끼면서 노보루와 그들의 동료의 강인함을 깨달았다.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느낀 점이 많다. 비록 이 책에서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획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당시 그들이 갖고 있는 불안과 좌절 그리고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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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 교사가 남겨 놓은 희망의 씨앗
카지이 노보루,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정미영/박소영 옮김, 몽당연필, 2023
코로나19가 급속하게 전파되던 2020년 3월 즈음 읽었던 기사 한편이 기억난다. 일본에 있는 어느 중소도시에서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에 코로나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배포하면서 조선학교 유치부를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내용이었다. 내 눈을 믿기 힘들었다. 이건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4년 전의 기사였다. 21세기에 공공기관이 ‘솔선수범’하여 배제와 차별에 앞장서는 졸렬함이라니! 심지어 기사는 시 직원이 ‘(조선인은) 마스크를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 모른다’는 취지의 폭언도 스스럼없이 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관련 사건에 대한 사설을 읽어보았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은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깝게는 2013년 아베 신조 정부의 ‘고교무상화’정책과 관련한 사례가 있었다. 이 정책은 고교수업료를 무료화 하겠다는 취지라 명목상 많은 일본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정책에 조선학교만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이를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차별을 제도화한 것은 우려스러웠다. 이 조치는 몇 년 전 조선학교 유치원 및 보육원에 인도적 차원에서 마스크를 배포하는 일에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한 근거가 되었다. 일본 사회에 염치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제는 왜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학교에서 5년 간 근무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책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를 읽으며 내내 궁금했다. 저자 카지이 노보루는 일본이 패망한 후 재일조선인들이 교육 현장에서 겪었던 수난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겼다. 귀한 기록물이다. 그가 조선인학생들과 함께 한 경험들은 단순히 교육 현장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2020년 당시 조선학교 유치원생들에게 공공기관이 주도한 ‘합법적’ 차별은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문제와 얽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학교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무엇보다 일본의 정치권과 공권력, 권력의 눈치를 보고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언론까지 가세하여 만든 총체적 결과물로 응어리진 결과다.
일본의 패망 후 연합군사령부(GHQ)의 교육담당 장교 듀렐이 도쿄의 조선인학교를 시찰하며 “개 잡듯이 죽여야지.”(62)라고 했던 대상은 누구였던가. 그리고 조선인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고, 조선인학교 문제를 ‘치안 문제’로 이야기하던 이들은 누구인가. 저자가 같은 일본인으로서 이러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낀다는 대목에 눈길이 멈추기도 했다. 나아가 일본 식민주의 지배세력의 조선인 혐오, 그리고 미국의 세계패권 야욕과 철저한 반공주의가 결합하며 찾은 희생양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1951년 2월 28일 오전 6시 30분에 무장한 경찰 예비대대 520명이 도립조선중고등학교 건물과 기숙사에 침입했다. 훗날 이 사건을 ‘2·28사건’이라고 불렀다. 도둑처럼 학교에 급습하여 학생들의 교과서나 숙제, 미술작품, 수첩까지 압수하며, “조선인은 싹 다 죽여야 해.”(75)라고 고함치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곤봉까지 휘둘렀던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자가 당시의 광경을 묘사한 이미지를 “군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의 일본의 모습과 겹쳐놓으면 아마도 어긋난 곳을 찾기 힘들 것”(77)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은 또다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올해로 101주기를 맞은 간토대학살 사건(1923년 9월)이었다. 일본 군부의 주도하에 일본자경단들이 일본도뿐만 아니라 죽창으로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사건이 아니었나. ‘그들’의 구호가 “조선인을 다 죽여라!”였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조선인학교의 폐교는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현재 및 미래의 타자를 숙청하는 방법이었다.
엄혹했던 일본의 식민지 시절, 한인들은 일본의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사람들도 있지만, ‘힘든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패전 후 조선인들에 대한 속죄는커녕, 보상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를 지우는 일에 몰두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흔적지우기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정황을 엿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등한 대우를 말하며 동일한 책임을 요구했지만, 조선인들은 정작 받아야할 혜택에서 언제나 제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대의 젊은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중학교에 부임하여 마주했던 것은 학생들의 냉냉한 시선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일 조선인들의 박탈감을 이해해야 넘을 수 있는 선이었다. 조선인학교에 온 신임 일본인 교사들은 ‘달아매기’라는, 학생들의 불신어린 심문을 받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자신들의 학교를 망가뜨렸다는 반감으로 가득한 학생들로부터 일본의 문부성 및 교육위원회의 스파이로 간주된 것은 저자가 조선인학교에서 처음 마주한 현실이었다.
조선학교에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배포하지 않은 사례 역시 저자가 그토록 맞서 싸웠던 조선인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학교에 일어났던 일, 그리고 몇 년 전 조선학교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단순하고 충동적인,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던 셈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야만으로 치달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였다. 이를테면 식민주의, 제국주의/군국주의, 반공주의 등의 이념이 인류에게 가한 폭력의 세계사적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된 대목 하나는, 조선인학생들을 위한 민족교육에 대해 저자가 성찰한 대목들이었다. 조선인에게 올바른 민족교육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자는 “조선인학교 문제가 곧 일본의 교육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119)을 간파하고 있던 소수의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 아이들 12만 명의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한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을 아래에서 엿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로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로서, 일본의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 관련되었음을 중요시 해야만 한다.”(138) [홋카이도에서 온 요시다 하츠미 씨의 언급 재인용]
여기에서 교사는 교육자로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문제부터, 가해국 국민으로서 피해국의 국민과 평화를 위한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배경에 속한 집단의 친선을 도모하고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서로 존중하는 일이 우선 요구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치유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흉터는 남아도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줄곧 추구하던 민족교육의 문제는 양국의 건강한 평화와 독립을 위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이런 지점까지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같은 인간으로서 후손인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비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는 교육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통해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따라간 여러 일본인 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조선인 교사와 조선인학생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립조선학교는 결국 1955년 3월 31일부로 폐쇄되었지만, 이 책이 남겨놓은 것은, 결국 희망의 씨앗이라 여긴다. 저자 카지이 노보루를 비롯한 여러 참여 지식인들의 존재 덕분이다. 그가 남겨 놓은 이 씨앗이 책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계속 전달되고 읽히고 기억된다면, 언젠가 새롭게 싹이 트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감해본다. [책 속으로] [1] "새로 채용된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인들의 분노와 슬픔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 한 학교에 교장이 둘이나 있는 이상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된 것은 조선인학교에 근무하고 나서다."(24) [2] "그 아이들이 일본에 영주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이미 역사를 통해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인이 원해서 조국을 버리고 일본에 온 것이 아닌, 힘든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도일한 이가 많기에 조선이 평화롭고 완전한 독립국만 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35) [도교육위원회에 제출한 청원서 재인용] [3] "선생님! 우리는 조선인이에요.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말도, 나라도 빼앗겼어요. 얼굴은 조선인이지만, 조선말도 역사도 모른 채 살아왔어요! 선생님, 누가 선생님에게 일본어를 써도 안 되고 배워도 안 된다면서 학교 문을 닫아버리고 감옥에 집어넣으면 화가 나지 않겠어요?"(41)[일본인 교사 S의 기록] [4] 4·24 교육 투쟁-재일조선인연맹 강제해선-전국 조선학교 폐쇄-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필름 위에, 남북의 분단과 일본 국내에서 미 점령군의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비민주적 행태를 아무런 설명도 수식도 없이 겹쳐놓고 보았을 때, 내 나름대로 도립조선인학교의 위치에 대해 깨닫게 된 것 같다."(62) [5] 아이들을 교실로 들여보내려 한 교사에게까지 "교사면 다야?", "감히 국가 권력에 불만을 품어?", "조선인은 싹 다 죽여야 해."라고 고함쳤습니다."(75) [3·7사건에 대한 기록 재인용] [6] "수색 영장도 없이 3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해 무기 하나 없는 학교에 쳐들어와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에 과연 어떤 이유를 댈 수 있을까. 게다가 무저항 상태의 학생들과 사태를 수습하려던 교사들까지 폭행한 것은 물론이며 신문사 카메라맨과 의사까지 폭행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폭력단이나 다름없었다."(77) [7] "인식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면 스스로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99) [8] "지금까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 놓여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인식함과 동시에 현재 일본이 처한 상황과 겹쳐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로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로서, 일본의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 관련되었음을 중요시해야만 한다."(138) [9] "내가 상당히 고심해서 완성한 구상은 두 가지 기둥으로 이뤄졌다. 첫째, 고교 이하는 의무교육으로 하고 운영도 공비로 하지만, 교육 내용은 재일조선인이 자주적으로 실시하는 것, 둘째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지키는 일이 일본인의 민족교육을 확립하는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142) [10]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시설 등 제반 운영에 필요한 조건 마련은 일본 정부가 하고, 교육 내용과 조직을 만드는 일은 조선인 스스로 책임지고 확립해 가는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재일조선인 교육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44) [11] "일본의 아이들이 풍요로운 일본인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아이들도 역시 풍요로운 조선인으로 자라나야 한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 대한 속죄로서 일본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토록 단순명료한 논리가 5년간에 걸친 조선인학교 생활을 지탱해준 논리다."(206) [12]"언어가 가장 고도로 승화된 것이 문학작품이라 생각한 점과 난독 학습을 하다 보니 36년간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의 비극을 맞은 조선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확실한 실마리가 문학 속에 훨씬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그 무렵부터 다시 20년이 지났다. 나의 공부는 마치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하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조선을 알아가는 일은 어쩌면 나에게 남겨진 반생의 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나를 뒤따라올 것 같다."(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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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야키니쿠 드래건(한국명 용길이 네 곱창집)은 재일 한국인 가족의 삶과 갈등을 중심으로 한 휴먼 드라마로, 감독은 재일 한국인 출신의 재능 있는 극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08년에 처음 연극으로 발표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2018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는 1960년대 말을 배경으로, 일본에서 조그만 부속고기 야키니쿠 집을 운영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한국인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영화의 무대는 일본 오사카 변두리에 위치한 고깃집 "야키니쿠 드래건"이다. 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용길(김상호 분)은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강인한 인물이다. 용길의 아내 영순과 세 명의 딸 정화,이화, 미화와 아들 시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본 사회에 적응하려 하지만,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의 문제와 가정 내 갈등이 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큰딸은 집안의 맏이로서 책임감이 강하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남편의 문제로 인해 항상 고민에 시달린다. 둘째와 셋째 딸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인물로 자신의 꿈을 찾아 방황하고 있으며, 아들 시생은 무언가에 분노를 품고 있지만 그 감정의 정확한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이 가족의 삶은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그 내면에는 다양한 감정의 충돌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야키니쿠 드래건은 단순한 가족 드라마를 넘어서, 재일 한국인이라는 소수자 집단의 삶과 일본 사회에서의 이주민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이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주인공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여전히 일본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뿌리와 일본에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이러한 갈등은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둘째,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이다. 영화 속에서 각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고민을 안고 있으며, 가족 내에서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며,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갈등을 넘어서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셋째, 사회적 배제와 편견이다. 영화 속 재일 한국인 가족은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상황은 가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관객들에게 이주민 문제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생각하게 만든다. 감독은 연극에서 이미 검증된 작품을 영화로 옮기면서, 가족의 섬세한 감정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영화는 1960년대 말 일본의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재현하면서,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가족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부속 고깃집이라는 공간은 이 가족의 삶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건들은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특히, 김상호와 이정은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며, 그들의 연기력은 극중 캐릭터의 감정과 상황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이정은은 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김상호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이들 외에도 각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이 영화의 무게감을 더해주며,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야키니쿠 드래건은 일본 내 재일 한국인 가족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며,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문제,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적 배제와 편견을 심도 있게 다룬다. 이 영화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를 넘어서, 일본 사회 내 소수자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깊이 탐구하며, 관객들에게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여기 막내아들 시생이다. 용길과 영순의 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자식이다. 조선학교가 아닌 일본인들이 다니는 유명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재일교포라는 이유와 내성적인 성격과 어눌한 언행으로 인해 극심한 이지메를 겪고 있다. 영순은 심하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조선인학교로 전학시키기를 주장하지만 용길은 시생은 앞으로 한국에서 살 수 없고 일본에서 터를 잡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야 한다며 전학을 반대한다. 결국 이지메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극 후반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게 된다. 현실에서는 1950년부터 1968년까지 일본에 거주한 조선인 학생들은 교육과 일상생활에서 여러 차별을 경험했다. 학교에서는 언어적·문화적 차별을 받았으며, 일본인 학생들과 분리된 교육을 받거나 교육 기회가 제한되기도 했다.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며, 조선 학교에서 교육받는 경우 학력 인정이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며, 취업과 진학에서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차별은 일본 내 조선인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영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책이 이번에 발간되었다. 배우 권해효 님을 중심으로 일본 조선인 학교를 후원하는<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에서 (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 /카시이 노보루) 란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노보루라는 교사가 높은 호봉에 끌려 '조선인학교'로 부임하게 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강제 폐쇄된 조선학교의 수많은 조선 학생들을 받아줄 일본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도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인학교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게 된다. 아이들은 "조선말도 모르면서 어떻게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느냐?"라며 수업을 거부했던 것이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노보루는 그때부터 패전 후의 일본에서 다른 일본 교사들이 겪지 못한 파란만장한 교사의 삶을 이 책 한 권에 담아내고 있다 물론 영화 야키니쿠 드래건 시대 배경 1960년대 말이고 이 책의 시대 배경은 1950년대초 인것은 시대 배경의 차이는 있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하지만 시대적인 연결성을 감안해야 한다 1950년대 초반, 노보루라는 인물 덕분에 일본에서 소외받는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조선인 교사들과 진보적인 일본인 교사들이 협력하여 교육 환경 개선에 힘이 되었다는 거는 인정을 해야 할 부분이다 당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공립학교에서 차별을 받았고,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조선 학교들이 운영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노력은 학생들의 정체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영화 시대 배경인 1960년대 말에도 일본 정부는 조선 학교에 대한 재정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교사들과 일본인 교사들의 노력으로 조선인 학생들은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권을 확보하며 조금씩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들 수 있었고 2024년 일본 고교 야구 대회 우승을 한국인 학교가 할 수 있는 토대가 70여 년 전 이 일본인 교사의 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