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92세가 되신 시어머님. 같은 건물 위아래로 살고 있기에 나도 시어머님을 돌봐야 하는 시점이 올지도 모른다.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고 계시지만, 작년부터 흔히 말하는 총명함에 떨어지셨다고나 할까? 아니 총명함이 떨어지셨다기보다는 잘 들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부모님도 80세가 넘으셨으니 결국은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 하지만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고 말하는 가족의 늙음과 돌봄. 남의 이야기 같지 않고 어쩌면 곧 우리들의 사연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무섭다.
3세대가 사는 가정에서 다츠 할머니가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다츠 할머니는 치매를 앓아 가족들의 돌봄을 받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들이 한집에서 살았기에 사람들은 이 가족을 부러워했다. 이런 집에서 살인이 일어났고, 다츠 할머니를 죽인 사람은 남편 료사쿠. 그는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고 경찰에 자백한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다 살인을 저지른 고령의 료사쿠. 료사쿠는 살인 사건의 피의자 임에도 이웃들의 동정을 받고 그를 선처해 달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경찰은 집안사람들을 취조한다. 그리고 모두가 다츠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다츠의 아들 요시오는 부모가 죽으면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며느리 리츠코는 다츠를 보면 자신의 미래 모습을 투영한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도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어떻게 죽어야 모두에게 피해 입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들이 내 곁에서 나를 보필할 일 없고 나 역시도 바라지 않는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내가, 나의 며느리에게 그런 짐을 주고 싶지 않다. 이렇게 사는 건 내 대에서 끊어져야 하는 것. 효도는 셀프고 효도를 받겠다고 아이들을 키운 것은 아니니까 최대한 남편이랑 건강하게 잘 살고 싶지만. 이 또한, 지금이니까 하는 생각일지도. 나는 무섭다. 120세를 운운하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과연 좋은 건지 모르겠다. 주변에서 시어른이나 친정 부모의 치매로 고생하는 지인도 많고 늙을수록 아들한테 집착하는 어머니들을 보는 것도 숨 막힌다.
오랜 간병에 편안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서운 생각을 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고 아파하는 지인도 봤다. 아직은 심각한 상황이 아니니까 나는 이성적인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노인 돌봄에 대해 어떤 말도 쉽게 건넬 수 없다. 정답은 없다. ‘잘했네. 못했네’, 3자들은 말할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안락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웰빙이 중요하듯 웰다잉이 중요하니까. 치매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엄마의 아랫도리를 보는 아들. 아니, 볼 수밖에 없는 아들. 시아버지의 아랫도리를 봐야 하는 며느리도 힘겹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싫다. 태어날 때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니 적어도 죽을 때는 내가 그걸 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인지.
이 책은 1985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부터 40년 가까이 됐는데 그때부터 일본은 고령화가 문제였나보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조만간 초고령화가 될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그래서 무섭고 슬픈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