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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은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우리 역사에 영원히 되새김 될만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필시 지금보다도 몇배는 더 혼란스러웠을 유신시대의 사건들을 통해 그 시절을 관통해낸 권력자들의 고뇌와 속내를 들여다보는 일은 자못 궁금 한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특히 주인공 김재규의 관점에서 그날 운명의 순간들을 반추해 보는 일은 파편화되어 알고 있던 일련의 에피소드가 비로소 거장 소설가의 필력으로 선명하게 정리된 느낌이라 아니할수 없다. 8남매의 장남으로 남다른 책임감을 안고 자란 시기. 가미가제 특공대로 투입되기 직전에 살아돌아온 이야기. 박정희와 동기생으로 함께 입대한 이야기. 10.26 이후 두번이나 차량사고가 나서 죽을 뻔한 일. 차지철이 그 자리에서 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 등등은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된 에피소드다. 역사란 가정이 없지만, 필연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새삼 탄식을 자아내기도 했다. 과연 필연이라면 이때 나는 문득 왜 하필 그날이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과 같은가를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박정희를 죽인 일은 혁명인가 단순살해 인가. 끝까지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과 변호인들의 최후 변론이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나온 당대의 명문임은 알겠다. 유신시대의 종말을 선포한 변호인들은 심지어 작금 지식인들의 역사의식보다도 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민주화의 선각자라 여겨질 법하다. 유신의 심장은 사라졌고 그를 쏜자도 사형당했다. 역사는 열린 가능성이라는 말을 지지한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란 말로 이해한다. 이후에 남겨진 우리의 역사란 무엇일까.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살길처럼 여겨지고 피의 역사 마져 잊혀지고 마는 게 아닌가 여겨지는 즈음이다. 소설은 읽을수록 희한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어서 였을수도 있고 충분히 예감되는 죽음을 각오한자로서의 담담함이 절절한 회고(회한이 아니다) 속에 전해져 오는 효과일수도 있겠다. 적어도 소설을 한눈 팔 겨를도 없이 읽어내는 시간만큼은 흥미진진하였고, 지금 우리의 역사와 비교하고 반추하며 자성하는 시간이 되게하기에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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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오른팔이었으나 만찬 석상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저격한 이중적 인물 김재규. 풀리지 않는 10·26 사건의 수수께끼를 김재규의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본다.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조성기는 가려졌던 역사적 진실에 상상력을 더해 김재규의 삶과 박정희와의 인연 그리고 10·26 사건 등 현대사의 주요한 굴곡을 되짚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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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던 중 몇 가지 생각의 정리
책을 읽던 중 몇 구절에서 일어난 생각을 정리합니다.
김재규가 2월 28일 ‘옥중수양록’에 쓴 내용이라고 합니다. “만일 내가 사형선고가 없이 견성할 수가 있었겠는가. 육신, 즉 유한생명을 바치고 무한생명 부처를 찾았다. 불행이 지혜의 눈으로 보면 곧 행복이 된다는 진리를 입증해 주었다.”(324쪽)
교회를 찾는 경우는 대개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라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모태신앙을 가졌던, 누구의 전도로 하나님을 찾았던, 위기가 극복이 되거나 사라지면 사람들은 교회의 필요를 덜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굳이 하나님에게 부탁할 일이 없어져 행복한 일상을 살 수 있으면 교회에 가는 시간에 다른 기쁨을 주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비슷한 것인가 봅니다. 김재규는 사형선고를 받자 그 불행이 부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지혜의 눈이 떠졌다며 진리를 찾았다고 느낍니다. 그의 불행은 부처를 찾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불행으로 인하여 부처를 찾은 일을 축하할 일인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를 찾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인데, 그 조그만 기쁨으로 인하여 타인의 생명을 끊고 스스로도 목숨을 버리게 된 사건이 자그마해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사형 집행 후 극락에서든, 남의 목숨을 끊은 죄가 있어 지옥에 갔든 부처를 찾은 그 후의 이야기가 허무하지 않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고 예수님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믿음의 정수라고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절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요. 유교라고 다를 것도 없는데, 그는 부처의 발견에 너무 큰 방점을 찍습니다. 이와 비슷한 단정적인 그의 생각은 책의 곳곳에서 보입니다.
박정희가 카터 미국 대통령과 만나고 난 뒤 한 말이라고 합니다. “카터는 역시 촌놈이야. 땅콩농장 출신이야. 이번에 나한테 당하고 갔으니 창피해서 어떡하나.”(344쪽) 어디에서 들었던 얘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억나지 않나요? 옮겨 보겠습니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또는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가오를 잡는 방법이 비슷한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에게 쪽을 팔고 나면 조그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며 상대를 조롱하는 태도 말입니다.
작가는 책의 끝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내가 김재규의 생애와 내면을 통관해 보고 내린 결론은 시대의 흐름 자체가 박정희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재규 개인이 박정희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박정희를 죽인 셈이다. 그 시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염원이 김재규라는 인물 속에 투입되었고 그는 그들의 의지와 염원을 대리하여 표출하고 실현된 셈이다.”(372쪽)
작가는 자기들만의 리그 속에서 '물리적인 폭력'과 '경제적인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들이 '의식들 간에 벌어지는 투쟁'의 치열함 속에서 서로 총질을 했다고 설명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국민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면 국민의 이야기가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전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이든 갑자기 결론이 정해진 답으로 나오면 당황스럽지 않나요? 이런 경우 요즘 젊은이들은 '답정너'라는 표현을 씁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 그런 뜻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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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인, 그들만의 리그
1980년 5월 24일, 박정희를 쏘아 죽인 김재규가 사형을 당한 날이라고 합니다. 김재규에 관한 책은 처음 접합니다. 간혹 제가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했더라면 제 인생이 어떠했을까 상상합니다. 정치군인이 판을 치던 세상, 군인은 국가를 책임지고, 부패한 정치인을 관리하며 불철주야 국가를 사수하는 책임감에 술이 아니면 밤을 새지 못하는 번뇌의 삶을 살았을까요? 제가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 한분이 저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이 둘이 있다고 하자. 군인과 민간인이 지나간다.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니? 사람 하나 하고 군인 하나가 지나간다고 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이니?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뜻을 접으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고 비록 육군사관학교 입학은 실패했지만 그 말은 그 뒤에도 잊히지 않는 말입니다.
이 책은 정치군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궁정동 중정 안가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들은 모두 정치군인 출신입니다. 거짓 책임감으로 풀을 매긴 군복을 가볍게 벗어던지고 권력을 찬탈한 뒤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진 듯, 피곤을 핑계하여 위무하고, 권력의 단맛을 맛보려 가수와 모델을 불러들이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 장교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비서실장인 김계원은 일본육군 견습사관으로 복무했으며, 육군참모총장으로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습니다. 경호실장인 차지철도 5.16 쿠데타에 가담한 육군 대위로 들었습니다. 권총을 발사해 차지철과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 또한 군인 출신입니다.
작가는 김재규 일인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김재규가 성남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장으로 이동하는 도정에서 지난 일들을 추억하는 방식의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상상력으로 허구를 가미한 팩션적인 요소가 많다고 스스로 설명합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불의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인들의 인맥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군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못하는 것이 없었고, 안 되는 일이 없던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김재규가 회상하는 모든 일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이 있으면 있어서 자긍심을 가졌고, 역할이 없으면 없었던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지 조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세상은 김재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역사적인 사건을 한 면만 보고 설명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김재규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권력은 18년을 지나 언제까지 연장되었을까요? 차지철이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김재규를 견제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았을까요? 부마사태가 없었다면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지 않았을까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하고 계엄령이 내려지면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머리가 나빠서일까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제대로 없었던 것일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주는 글들이 죽 이어집니다. 박정희는 그때 총을 맞아도 될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재규는 그때 총을 쏠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지철도 그때 총을 맞아도 될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저는 그들이 총을 쏘고 총을 맞았던 그 상황을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만의 다툼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으로 보였습니다. 국민이 빠진 무대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끼리의 역할극이었습니다. 그 자리 어디에도 국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재미가 없는 이유입니다. 2023년 정권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권력을 쥔 자들의 막말만 무성하지만 그래도 기사의 행간에는 그 말을 듣고 기억하며 때를 기다리는 국민이 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든 것에 김재규가 조금이라도 기여한 바가 있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던져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 예상한 나라가 이런 나라였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이 맞던 그르던 고마운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