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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평화를 기리는 느림의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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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앞 능선이 뒤 능선을 엎고 있는 강원도 인제의 첩첩한 산 능선들을 보며 아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우리가 앞 능선처럼 자식들을 업고 가지만 이제 조금 더 늙으면 우리가 뒤 능선처럼 자식 등에 업혀 살아야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글썽글썽 눈시울이 젖는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괜히 마음이 소삽해져서 중얼거렸다   누가 붓질을 했는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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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앞 능선이 뒤 능선을 엎고 있는

강원도 인제의 첩첩한 산 능선들을 보며

아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우리가 앞 능선처럼 자식들을 업고 가지만

이제 조금 더 늙으면

우리가 뒤 능선처럼 자식 등에 업혀 살아야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글썽글썽 눈시울이 젖는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괜히 마음이 소삽해져서 중얼거렸다

 

누가 붓질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 마구 번진 저놈의 수묵 때문에

봄빛 수레가

첩첩 능선에 걸려 덜컹, 덜커덩거리겠소

 

시인은 강원도 원주 명봉산 기슭에 들어갔다. ‘불편당(不便堂)’이라는 당호를 붙인 낡은 한옥에서 아내랑 살고 있다. 일곱 기둥에 한글 주련 날마다 화전 놀이하듯” “불편도 불행도 즐기자” “쉴 새 없이 명랑하자” “당신은 우주에 핀 한 송이 꽃” “시와 꽃과 예술과 하느님을 낭비하자”(불편당) 따위를 붙여 놓고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비로소 난 촉감의 신[Epaphus]처럼 /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네. / 꿈도 밥도 사랑도, 느린 내 / 시의 보폭도 궁극에는 흙으로 수렴되는 것”(시인의 말)이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런 인식에 이르렀다고 하여 세월의 무심함에 무심할 수는 없는 법, 더구나 아내와 함께 자식 등에 업혀 살아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 마음이 소삽해질 수밖에 없다.

 

불편당에서 지내며 으슥한 곳이 좋아 / 햇살도 어두침침한 나무 그늘을 파고드는 / 으슥한 숲으로 들어서시퍼런 이끼 덮힌 계곡의 물소리가 / 저 아래 암자의 독경 소리보다 / 청청하게 들리는 숲에서 이따금 우울을 달”(야생 수업)랜다. “소찬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 학교 다녀올 게요! / 옆지기에게 말하고 서재로 향올빼미와 별들이 일러준 / 천상의 악보를 읽으며 / 우쿨렐레 현을 천천히 뜯”(올빼미 학교)기도 한다. “새벽 미명마다 걸으면서 기도하는데 꿈틀꿈틀 자벌레한테서 지구 / 평화를 / 기리는 / 느림의 신도”(새벽 성전)를 보고, 청량리행 기차에서 여섯 살이 되도록 / 젖을 물려주시던 / 엄니 얼굴이 어른거”(지금도 온 세상이 고요해져)리기도 한다.

YES마니아 : 골드 g*******g 2024.02.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