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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끝자락에 너무나 애정하는 이화경 작가의 신간을 읽었다. 또한번 작가님의 독특한 매력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ㅎㅎ 술술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읽을수록 호기심을 자아내고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8편 단편소설 속에 소외되고 천대받는 존재의 여러 여성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내주어 너무도 감사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욕망 견딜수 없는 고통의 삶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망설임없이 세상과 맞서 처절하게 삶을 살아내는 여성 주인공들, 그냥 한없이 가엾고 연민의 마음이 깊게 느껴졌다. 아, 그리고 마지막 편에서 만난 낯익은 주인공 무명! 예전에 읽은 이화경 작가의 장편 <탐욕>에서 만났던 그 아이.. 넘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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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경 소설가는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에 가장 근접한 작가다. 과연 그녀의 문장을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 번역가가 있을까. 특히 이번 소설집에는 시적인 문장들이 많아 읽는 내내 긴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문장이 다 했다.
문장 자체로 빛나는 문장은 없다. 모든 문장은 문맥 속에, 다시 말해 상황 속에서 의미를 띤다. 단편 소설의 문장은 그 정수다. 또한 깊이가 있는 문장은 깊은 사유에서 나온다. 소재와는 달리 결코 얻어걸릴 수는 없는 게 문장이란 의미다. 그런데 이화경 소설가는 시적인 동시에 팔색조 같은 문장을 쓴다. 등장인물에 따라 문장이 다채롭고 유연하게 변화한다. 맑은 여름날에 보는 구름 같다고나 할까. 그녀의 문장들은 상황에 따라, 인물에 따라 유려하게 변화한다. 단 특유의 웅숭깊은 질감만은 변함이 없다.
곱씹어보고 싶은 문장, 사유로 가득한 이화경 소설가의 단편은 가독성으로 무장한 소설들과는 다소 결이 다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느린 사유의 시간이야말로 소설이 다른 스토리 장르와의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소한 내 기억에 남는 독서들은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멎는 듯한, 시간과 페이지를 아껴가며 읽었던 독서는 그 글을 쓴 작가가 궁금해지게 하고는 했다. 사실 요즘은 작가가 궁금해지는 소설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래는 이번 소설집에 대한 간략한 소감이다.
함께 몸을 던지는 게 가당키나 한 건가요. 죽음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각자 홀로 캄캄한 외로움을 삼키면서 이쪽을 감당하는 것처럼 죽음도 저쪽을 향해 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함께한 죽음은 정사가 아닙니다. 홀로 검은 바다 물결에 각자 몸을 던진 것입니다. 그가 썼듯이, 인간은, 그는 개별자이기 때문입니다. - 『노라의 ㅽㅗㄴ』 中
그를 사랑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였던 세월이 있었다. 이미 한 여자의 남자인 그를 나의 유일한 사랑으로 설정한 순간, 내 사랑은 눈먼 광기가 되었음을 예감했지만, 때는 늦었다. 내 마음을 자신의 손금을 보듯이 다 알아채주는 남자였다. 함께 있는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애써 그것이 꿈이라고 여기고, 지금이 꿈이라면 조만간에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 만큼 그와 나는 충분히 나이가 들었다. 꿈과 현실적 삶의 무상함을 다 알아버린 나이임에도, 나는 꿈같은 사랑을 현실로 바꿔치기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中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구를 제목으로 인용했다. 짧은 시를 이렇게 산문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온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이나 차오르는 설움은 어찌해야 할까. 세월은 무상하나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니 찬란해서 슬픈 봄이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사랑을 버리기 위해 사랑의 단두대에서 사투하는 인물들. 실로 뜨거운 것은 사랑이다. 내 사랑이 너무 뜨거워 데이고 내 사랑은 뜨거운데 저이의 사랑은 식어가 내 속이 탄다. 그렇게 나의 사랑이 읽히지 않을 때 존재론적인 의문이 불쑥 고개를 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를 보라는 애타는 절규는 내 사랑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오로지 나란 사람이라고, 그러니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나를 찾아 달라고 부르짖는다. 나는 이화경 소설가의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를 불꽃처럼 피었던, 그러나 이제 낙화를 시작한 욕망과 삶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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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여울/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이 시에서 두 구절이 각각 단편으로 묶였다.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을 묶은 이화경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이다. 이 시를 쓴 소월은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을 짓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서른세 살이었다. 책에 실린 소설의 정조는 대체로 시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비슷한 정도 이상으로 다르다. 둘 사이의 거리는 크게 시와 소설이란 글의 형식과, 여자와 남자라는 글쓴이의 성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일백 년 전과 지금이라는 시간이 만든 거리가 그 위에 겹친다. 소설은 세상이 일제 식민지 한복판에서 얼마나 또 어떤 쪽으로 옮겨왔는지, 나아가 어떤 속도로 옮아가고 있는지 나타내는 표지이자 척도다. 이 척도의 정확성은 분명 이 소설의 성취를 가늠하는 한 기준이다. 책의 제목으로 쓰인 구절 말고 시에서 작가가 단편의 이름으로 취한 구절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이다. 일 년을 사이에 두고 쓴 것을 보아 시의 다른 구절을 제목으로 삼아 아예 시 한 편을 소설 한 권으로 엮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러 편의 소설을 펼치는 시, 혹은 한 편의 시로 접히는 소설이라니 얼마나 매혹적인가? 문학적 실험의 야심이 눈부시다.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나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 혹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과 같이, 책에 실린 단편만큼이나 빛나는 작품의 명패가 될 구절들이 얼핏 보아도 스르륵 잡히니 말이다. 이 소설은 이미 페이스북에서 활자에 대해서라면 누구 못지 않은 명민한 눈길들에 의해 그 날카로운 명암과 다채로운 색상이 드러난 바 있다. 시가 낱말과 어구, 혹은 그것이 놓인 고유한 자리만으로 스스로를 빛내듯 빼어난 소설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 서사의 전말을 꿰뚫는 법이다. 알려진 과녁을 명중시키는 데서 나아가 새 과녁을 내보임으로써 제 몫을 증명하는 화살과 같은 문장, 공중에 최초의 궤적을 그리는 문장, 시와 소설을 가르는 울타리를 넘어 성좌가 된 문장이 책 속에 있다. 숨을 가다듬고 온 몸의 감각을 일깨워 소설가 이화경이 가꾸어 놓은 문장의 숲으로 들어가 보자.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알코올중독자와 특수 관계에 놓인 사람은 공의존증의 사태에 직면한다고 주치의는 경고했었다. 의존하는 사람을 놓으면 안 된다는 불안과 강박이 특수 관계인의 영혼을 먹어치운다고도 했다. 각자 독립적인 의존이라는 관계의 방식으로 서로를 옭아맨다고 했다.. 전이적 애증의 수수께끼라는 단어를 엘제는 생각했다. 엘제는 수수께끼 푸는 데는 젬병이었다.'(28쪽) 필요하면 언제든 해부학자나 외과의사가 되는 것은 소설가의 특권이자 의무다. 이 책은, 작가가 그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지는 문장을 다루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스는 술의 힘을 빌어 공포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는 시도라도 했지만, 엘제는 불안을 야기하는 체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 '없음'이야말로 엘제가 겪는 체험의 본질이라는 걸 생각할 수 없었다.. 골목에서 바람이 달리는 것을 보고 파리들이 기침하는 것을 듣는 척하는 사기도 그만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생각하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29쪽) 우리는 생각을 벗어던질 수 없다. 재벌이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생활을 그렇게 할 수 없듯이. 하긴 상속을 마무리짓지 못해 죽지도, 위자료 계산을 매듭짓지 못해 이혼도 못하는 것이 재벌이다. 우리는 생각한다, 바람이 골목을 달리듯이 파리가 기침을 하듯이. 하염없이든 골똘히든 혹은 생각없음에 골몰하든 말이다. 생각마저 악몽인 사람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쓰는 당신도, 읽는 우리도. 그러므로 생각이란 늘 하염없음에 귀착하는가? 《노라의 본(本)》 '저쪽에서는 뢰슬라인이라고 부르는 꽃, 이쪽에서는 들장미라고 부르는 꽃이 철없이, 뜻도 없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때 이곳이었으나 저곳이 되어버린 친정집 뒤란 대숲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빽빽하게 대나무들이 드리운 검록색 그늘로 들어가면 숨이 쉬어질 것 같았습니다. 비단옷이 타들어 살갗에 달라붙을 것처럼 뜨거운 이쪽의 삶을 떠나 서늘함으로 숨고 싶었습니다. 대숲 성긴 자리로 별이 떨어지면 죽순이 되어 자라나던 저쪽으로 자꾸만 달아나고 싶었습니다.'(55쪽) '진정한 시간에서 탈구된 조선의 햄릿'인 남편을 둔 식민지 여인의 내면이 작가 이화경이 부려 놓은 문장을 통해 비로소 환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우리 눈길을 억지로 잡아끌던 신여성대신 식민지 여성 일반이, '뢰슬라인Roslein'대신 들장미가,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 죽음을 찬미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가련함을 무릅쓰고 열중하는 삶에 비한다면.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 '사랑했던 찰나를 위해 남은 생을 남김없이 소진해버린 어마어마하게 그로테스크한 인간을 직접 대면하는 게 솔직히 겁이 났다. 사랑에 대한 원초적 본능, 광적이고 강렬한 집착의 집중력, 끝내 돌아오리라 믿는 그녀의 폭력적인 간원(懇願)....은,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가망 없는 꿈에 대한 집착, 편집증적인 기다림, 기이한 현실도피는 한때 내가 가졌던 병이었음을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114쪽) 아버지가 사랑했던, 그 아버지를 사랑하여 평생을 기다린 여자를 찾아나선 딸 또한, '봄날도 가고, 복날도 가는 걸 알면서, 사랑을 여읜다는 게 뭔지를 알면서 늙어갈 것이다.' 닷새 꽃을 피우고 삼백예순 날을 마냥 기다리는 모란은 말이 없다. 이 모란의 말을 대신하는 것은 누구인가? 소설가가 접신을 시도하는 것이 어찌 사람에 그치겠는가?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존재 자체가 칼날이었던 아버지와 게임하듯 인생을 탕진했던 어머니'는 소년이 스스로 고른 것이 아니다. 간을 아버지에게 떼어준, 아니 떼인 그는 '인터넷으로 신체부위별 국제 암시장 장기 매매 가격을 알아'본다. '간은 약 1억 7천만 원, 심장은 1억 4천만 원, 신장은 약 3억 정 도로 가격이 매겨졌다. 피는 0.473리터에 38만 원, 피부는 평방 인치당 약 1만 1천 원 정도였다. 위, 소장, 쓸개, 비장, 안구 등을 다 합하면 얼추 7, 8억은 넘었다. 피부와 혈액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 뺀 합계였다. 몸은 단 돈 만 원도 못 버는데, 내장들은 값을 쳐주는 세상이었다. 돈 벌기 위해 장기들을 다 팔고 나면 몸은 이 세상에 없을 터였다.'(157쪽) 소설가는 위험한 직업이다. 차마 보기 괴로운 것을 보지 않고 듣기 싫은 것을 듣지 않을 자유를 때로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우리는 문득 소설가 이화경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직진의 힘이 실린 문장은 소심하고 비겁하게 감각의 나태 따위에 꺾이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소설 속 문장의, 또 문장을 그렇게 부려 놓은 소설가의 운명인 것을.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그가 지켜주고 함께해줘야만 했던, 친애하는 존재들이 사라졌다. 그들이 없어지자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걸, 그는 뒤늦게 안다. 그는 자신마저 자신의 곁을 스쳐가고 떠나가는 걸 가만히 놔둔다.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그날 추석의 만월처럼 기억이 환하게, 뚱뚱하게 돌아온다. 실패한 애도.' (190쪽) 친애하는 존재들이 사라지고 나서 자신에게 남는 것은 누구인가? 자신마저 떠나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자다. 해가 있는 한 그림자는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날 리 없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철학자 이전에 시인이요 시인 이전에 소설가다. 작가가 니체의 문장에서 작품의 명패를 건져올리는 것을 보라. 작가 이화경은 니체의 저수지에 출렁이는 문장에서 한 움큼을 길어 또 다른 호수, 세상이 동그란 눈동자로 마주할 전에 없던 호수를 만들려는 심산이었을까. 그 호수를 상상하던 때가 저녁이었어도 틀림없이 즐거웠으리.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여기 앉아 있었지. 허나 내가 기다린 것은 무. 선악의 저편에서 빛을 즐기기도 하고, 그늘을 즐기기도 하며, 모든 것은 놀이일 뿐. 모든 것은 저수지이고, 정오이고, 목적 없는 시간일 뿐. 그때 갑자기 여인이여,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상일 옮김,《 디오니소스 찬가》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 '소년은 바락바락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오목가슴을 손으로 퍽퍽 두드렸다. "느이 누나가 내 손에 맞는 꼴을 봐야 마을 사람들이 말이 없으니까. 네가 그것을 아냐? 에미 손에 느이 누나가 개 맞듯이 맞는 꼴을 봐야 느이 누나가 시암엘 내일이라도 당장에 나갈 수 있으니까. 느이 누나는 바보라서 학교도 못 다니고, 나가서 숨 쉴 데라곤 시암밖에 없는데. 네가 그것을 아냐? 모르냐? 네가 용식이 혼내주려고 때린 막대기 하나로 느이 누나를 지켜줄 수 있을 성싶으냐? 이 바보 같은 놈아, 이 똥 막대기 같은 노옴아!" (215쪽) 비누가 우물에 빠지면 곤란하다. 그러나 자신이 빠뜨리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는 그만의 방식으로 이 세계의 법칙을 그려 보인다. 우물이 없어도, 비누가 없어도 우리는 살 수 없다. '어머니가 퍼내고 긁어낸 우물 바닥 한가운데..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맑은 물이 새롭게 벌컥벌컥 솟고 있는 것을 보'는 소년의 눈길은 곧 작가의 눈길이다. 작가의 후기가 이를 확증한다. '자신이 보고 기억한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일러바치고 떠벌리고 토로하고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하는 열띤 고백의 도착증은 몸종만이 가지고 있는 증상이다. 나 또한 내게로 온 것들을 기꺼이 글로 일러바치고자 들뜬 몸종이었음을 고백한다. 바라건대, 오래오래 떠벌리다 가고 싶다.'(262) 이화경 작가는 이릉부리爾陵夫里에 산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이다. 달이 뜬 이릉부리의 뜰이 궁금해진다. 여름에도 무언가 떨어질 것 같다. 알알이 여물어 가는 석류나무의 그림자일까, 아직도 한참 남은 여름에 울음으로 다 빠져나가고 텅 비어 버린 껍데기만 남은 참매미의 몸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