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각조각 미학 일기
이 책으로 독자들은 영화와 그림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미학으로까지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영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박찬욱, 〈헤어질 결심〉 워쇼스키스, 〈매트릭스〉 이창동, 〈밀양〉 케네스 로너건,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다르덴 형제, 〈로제타〉
그런 영화들을 잘 살펴보기 위해서는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겠지만, 저자는 영화에 미학적인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영화를 분석하기 위하여는 관람자는 분석의 틀을 지녀야 하는데, 저자는 그 분석의 틀을 미학적 측면에서 제공한다,
예를 들면, 워쇼스키스, 〈매트릭스〉를 위해서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소환한다,
시뮬라크르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를 알아야 하는데 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를 대비하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시뮬라크르는 저자의 설명인 삼각형으로 바꿔말하면 이데아 삼각형이 가지고 있지 않는 ‘만질 수 있음’과 ‘눈에 보인다’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물론 이 가시성과 실감성은 모든 시뮬라크르의 고유한 속성이기도 하다.
자, 이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로 넘어가보자.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역시 원본의 모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플라톤의 시뮬라크르와 차이가 있다.
이를 위하여 보드리야르는 과잉 실재의 사례로 쥐와 미키 마우스의 차이를 예로 든다. 그 설명은 생략하는데,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저자가 한가지 이론을 들어 설명할 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플라톤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플라톤의 동굴에서 그림자를 가져오고, 또한 삼각형을 제시하고 또한 쥐와 미키 마우스를 예로 들어 보이고 있다.
그렇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 점점 구체적으로 설명의 예시가 이해가 되면서 앞에 든 예가 다시 이해가 되며 결국 시뮬라크르라는 철학적 개념이 손에 잡히게 되는 것이다.
미학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영화도 보고, 그림도 보고, 더하여 철학까지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밝힌 것처럼,
미학이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학이라는 학문이 철학에 기반한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요즘 핫한 철학자들의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
그런 글이 이 책에는 모두 9개,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조각 ‘암호’
2. 두 번째 조각 ‘단서’
3. 세 번째 조각 ‘편지’
몇 가지 제외하고 모두다 새롭게 접하는 것들이 되어서 공부하는 재미가 있다.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그림과 영화를 같이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살펴보는 아주 좋은 분석틀을 제공해주고 있으니. 그림과 영화를 볼 수 있는 귀한 무기 하나 장만한 기분이 든다.
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이제 그림도 영화도 망설이지 않고 ‘어떤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테니, 그러니 한번 살펴보자’ 라는 자신감도 갖게 된다는 것, 분명하다.
다시, 이 책은
이 책은 영화와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 이 책 읽으면, 영화를 보는 눈과 그림을 보는 눈이 생긴다.
또한 이 책은 그런 데 관심이 없는 사람, 특히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 읽다 보면, 내가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런 책을 만나지 못해서 관심이 생기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더불어 ‘어라, 미학이란게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구나’하는 두 번째의 깨달음도 얻게 되니, 대체 이 책 한 권으로 몇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맞다, 한 두 마리가 아니다. |
|
이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상황일 수도 있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일 수도 있다. 아무튼 입이 다물어져 '말할 수 없는' 순간, 그래서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그 정적의 반대편에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어떠한 말이라도 동원해 '말하고 싶은' 욕구다. '미학은 바로 그 이중적인 충동에 두 발을 딛고 선 학문입니다. (p. 9)' 저자는 미학이 원한圓環 구조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말하고 싶고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그럼에도 말하고 싶고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을 때 쓰는 '아름답다'라는 말 해당된다. '미학은 바로 이 '아름답다'라는 패배 선언 안에 꾹꾹 눌러 담겨 있는 세계와 인간의 함축을 연구하는 학문 (p. 9)'이라고 저자는 미학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담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면 할수록 표현하려는 욕망은 더 간절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 소설, 음악, 춤, 그림과 같은 예술과 철학으로 간절함을 표현하고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미학에 관심을 가진 건 오래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나서였다. 문화유산을 해석하는 그의 방식과 글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도대체 무엇을 공부한 사람일까 궁금해 찾아봤다. 미학이었다. 그가 멋지니 그가 전공한 미학도 뭔지 모르지만 멋졌다. 미학을 알고 싶었다. 딸아이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미학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미술과 관련 있는 학문인듯싶었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미학은 너무 좁은 의미였고 미학은 더 크게 아우르는 학문임을 미학생활자 편린의 <조각조각 미학 일기>을 읽고 알게 되었다. '미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입니다. (p. 6)'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한 저자 편린은 백오십여 명의 독자들에게 매일 연재하던 글을 다듬어 이 책에 옮겨 놓았다. 암호, 단서, 편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각각 세 개씩 미술, 음악, 영화를 바라보는 미학적 사유를 아홉 꼭지로 구성했다. 키워드 별로 하나씩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난해한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첫 번째 조각, '암호'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 × 아서 단토 그래도 미학의 핵심은 미술이지 싶다. 그래서 질문, 예술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것도 예술이야?'라고 할만한 작품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제 브릴로를 담은 박스와 닮은 앤디 워홀의 작품 <브릴로 박스>. 저자는 현실과 꿈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예술 작품을 정의하는 예술 평론가 아서 단토를 데려와 이를 설명한다. 평범하고 예술의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어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미적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브릴로 박스>는 예술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꿈만 같았던 예술이 현실(세제 박스)과 똑같아져 꿈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깨어 있는 꿈 <브릴로 박스>'을 꾸게 됐다. '예술은 깨어 있는 꿈을 꾸는 일이다. (p. 55)' 예술 작품 <브릴로 박스>의 해석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어 꿈을 꾸듯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면 미완 상태인 예술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것도 예술이야?'가 '이것도 예술이야!'가 된다. 앤디 워홀은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버렸다. 그 일상을 예술로 받아들여 새로운 일상을 창조한다면 우리는 이미 예술가다. 워홀은 우리를 해석하는 미학자로 만들어버렸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미리 말해 줄 수 있다. p. 57)' 사회의 구조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결정적인 둘째 조각, '단서' 토끼 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마 워쇼스키스, <매트릭스> × '시뮬라크르' 유토피아에 산다면 불만이 없을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들이 인간을 위해 만든 가상현실 세계가 실재를 뛰어넘는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불행해질 권리를, 선을 원하기 전에 악을 원하는 존재다. 레오가 매트릭스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해 맞서듯 우리 인간 앞에 놓인 현실이 유토피아와 같더라도 기만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유토피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유토피아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하나이다. '그렇다면 그 유토피아'들'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바로 미세한 차이 그 자체인 나와 내 주변의 존재의 사이에, 그리고 그 자체로 주변적 존재인 나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p. 185)' 예술과 윤리의 관계를 사유하는 셋째 조각 '편지' 이창동, <밀양> × 자크 데리다 우리는 다른 인간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신은 우리를 대신해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영화 <밀양>의 메시지는 고개를 젓는듯하다. 자크 데리다의 애도, 용서, 구원 개념은 '환대'라는 개념을 토대로 하는데 그 개념에서도 완전한 환대는 불가능하다. 신에 의해서도 법의 정의에 의해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완전한 환대의 그런 불가능은 오히려 '더 나은 환대'를 생각하는 원동력이 된다. 불가능한 용서는 용서라는 행위를 간편하게 사용하는 (신애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을 막는다. 용서를 매듭짓지 않고 유보한 것이기에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기도 한다. 애도의 불가능성이 더 인간적인 애도로 이끌듯이 말이다. 극복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받아 읽은 다음, 서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책을 읽고 덧붙여 기록을 남기는 것이니 후기나 독후감에 더 가까운 글을 남기곤 한다. 대부분은 책을 다 읽고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작가의 글에 기대어 내 방식으로 글을 남긴다. 그런데 이 책은 다 읽긴 했는데 나의 글투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은 더 집중해서 읽어야 내 나름의 정리가 가능할듯하다. 마땅히 그런 다음 후기를 남겨야 하는데 마감일을 지켜야겠기에 서둘렀음을 실토한다. 그래서 남긴 글이 창피하게도 중구난방이다. 내가 원하던 책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관심을 가졌던 미학에 대한 지식의 범위와 해석의 다양성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기다. 곁에 두고 읽는 책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
|
이번엔 서평이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컬처블룸 카페에서 서평단 자격으로 <조각조각 미학일기>를 받아 읽었지만 감히 책을 평한다는 ‘서평’이라는 말에 부합하는 글이 되지 못함을 미리 고백하고 시작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안 일을 하고 sns를 둘러보며 잠시 쉬다 보면 종이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속독을 하게 되고 허겁지겁 마감일에 맞춰 서평을 써냈다. 그런데 이번 책 <조각조각 미학일기>는 빠르게 읽을 수 없었고 급하게 글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서평 마감일은 다가왔다. 이 책을 일독만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그 짓을 하고 있어서 낯부끄럽고 저자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나는 예술 관련 서적들을 읽어왔고 미술관을 다니며 보는 눈을 키우려고 노력했으며 영화를 보면 글을 남겼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쪼개지 않은 둥그런 수박의 겉만 핥아놓고 그 속의 색과 속살의 질감, 냄새까지 다 아는 것처럼 말해왔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잘 아는 내 일상과 감정이 들어있는 글은 일기인데 그것은 또 공개하기 싫다. 서평단 자격으로 쓰는 글에 내 얘기를 넣는 게 주저되므로 결국 일반론적이거나 교훈적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런 습관이 굳어져버린 것 같아 요즘 쓰는 글이 점점 성에 차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잘 모르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자! 그동안 영화를, 미술을, 음악을 이렇게 철학자와 그의 사상으로 연결한 글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각조각 미학일기>는 차원이 달랐다. 공부하듯이 읽게 만드는 책이었다. 저자는 미학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암호, 단서, 편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사용해 미술 작품, 영화를 9편 소개하고 그 안에서 종횡무진 철학의 세계를 내달렸다. 그 길을 따라가려니 버거웠다. 그가 소개한 철학자들의 이름과 저서의 제목 정도는 알아도 책을 읽어본 적은 없으므로 철학이론을 설명할 때는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저자는 ‘편린’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서울대에서 미학과 국문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저자 소개에 단상을 짧게 메모한 촌평들을 오리고 붙이고 꿰매서 글을 쓰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구한다고 했는데 이 책의 각 꼭지보다는 짧은 글을 쓸 때 해당하는 것일까?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각 작품과 연결한 철학자들과 그 이론은 단상을 오리고 붙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책 속 작품들의 제목과 철학자 이름만 봤을 때는 대부분 아는 것이었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안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을 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아는 게 아니니까. 이 책을 한 번 읽었다 해서 내가 다 이해했다 할 수 없으므로 평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아홉 꼭지 전체를 요약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 <헤어질 결심>과 알랭 바디우를 연결한 꼭지 ‘완전히 붕괴된 시간’을 읽은 소감만 써보려고 한다.
저자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압도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예술은 어떻게 우리를 압도하는가, 사랑은 어떻게 우리를 압도하는가’였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을 가져와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태’의 이름과 어부가 알고 있는 명태의 이름, 즉 종류의 차이를 말한 후 무한한 명태의 세계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 지극히 일부만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여기에서 바디우의 ‘존재의 고유명은 공백’이라는 말은 무한한 명태는 너무도 많아서 파악될 수 없는 자리, 아무리 베테랑 어부라도 절대로 다가볼 수 없는 자리, 그래서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무한한 지평에 위치하며 그곳을 바디우는 ’공백’이라 부른다. 바디우는 지식이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리너구리의 발견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물에 대한 이해, 우리가 확보한 진리의 지평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바디우를 따라 진리가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진리를 만든다고 했다. 바디우가 사건에 의해 진리가 생산되는 시퀀스에는 예술, 과학, 정치, 그리고 사랑, 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사랑을 진리 생산의 절차로 포함시킨 것을 인용했다.
사랑은 사건의 좋은 예입니다. 내가 사무실의 동료를, 또는 다른 누군가를 소개받습니다. 그것은 거의 가장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즉시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또한 그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역에는 많은 편차들이 있습니다. … 사랑의 만남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은 ‘비둘기의 걸음으로’ 도래한다는 니체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지만, 엄청난 역사의 기원점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붕괴=사랑’이라는 생각이 이 영화의 근본적 메시지라고 하며 이것이 다른 통속적인 사랑 영화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호도되고 왜곡된 사랑의 모습(사랑이란 불완전한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서로를 완전하게 만든다)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과 바디우는, ‘사랑은 붕괴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나도 공감했으며 ‘존중’을 설명할 때는 존중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김주환 교수의 유튜브 강의에서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존중한다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었을 때 심하게 고개 끄덕였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상대를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는 중이다. 이 책을 읽으며 존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수용하는 태도로 간주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생긴 저항감을 사랑의 힘으로 무조건 억누르는 것이 존중이 아니라 심각한 태도로 마찰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내 안에서 소멸시키거나 그 차이가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 양 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주체에 대해 말해야 한다. 주체는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진리를 생산한다. 기존에는 사건이 입각하고 있는 진리는 주체가 생산한 것이고, 진리에 입각하여 사건을 만드는 것 역시 주체(주체→진리→사건)라고 보았으나 바디우는 사건→ 진리→ 주체의 순서로 뒤집었다. 사건이 진리를 생산하고 모종의 진리가 생산되는 과정의 일꾼으로서 참여하는 주체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주체였던 것이 아니라 몸을 던지는 순간에만 주체가 된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확신, 어딘가로 몸을 던지겠다는 결심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제목으로 연결해 보자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인 사랑이 주체 입장에서 본다면 곧 결심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질 결심을 내릴 때 주체가 된다. 그런데 제목이 왜 ‘사랑할 결심’이 아니라 ‘헤어질 결심일까. 진정한 존중을 위해서는 저항감이 있어야 하고, 정치적 성숙을 위해서는 혁명적 사건이 있어야 하듯 하나를 창조하고 서로를 치유하는 것에는 파괴와 상처라는 전제가 생략될 수 없다.
결국 아물게 될 상처, 나를 죽이지는 못하되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상처는 사실 상처가 아니다. 영원한 상처, 살 안쪽에 패인 상처, 나를 죽일 수 있는 상처, 그러니까 서래가 들어가 앉은 구덩이의 깊이만큼 패인 상처가 진정한 상처다. 우리는 그 상처의 깊이와 무늬로 인하여 우리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다. 또한 마침내 우리 자신이 된 그 상처는 사랑이라는 사건의 흔적이며, 사랑이라는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 그 파괴의 현장에 우리 자신이 있다. 이 모든 사건과 진리는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또한 그래서 아름답다고 저자는 말하며 평생 이 진리를 ‘옹호할 결심’이 되어 있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제목이 왜 헤어질 결심일까 생각해봤지만 쉬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통과하여 저자가 파괴의 현장에 있는 우리, 사건과 진리라고 말한 사랑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미학을 공부하면서 아름다움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중이라고 했다. 그 구덩이의 끝에 모든 아름다움의 이유를 알려줄 최종적 근거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파헤치고 있다. 파헤쳐 나온 돌조각들을 가지고 노는 법을 미학이 가르쳐주었다고. 그의 이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할 수 없고 철학을 모르는 내가 앞으로 만날 예술 작품과 철학을 서로 꿸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책을 여러 번 꼭꼭 씹어 읽어야겠다는 결심만 할 뿐...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
이 책은 압도적으로 좋습니다. 미학생활자가 바라본 미술, 음악, 영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고 있으며 2023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으로 선정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미학과 국문학을 공부했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한 저자는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비롯한 20세기 독일어권 사상가들의 미학 이론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근현대 미학의 계보를 위아래로 추적하고 동시대에 대해 갖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규명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단상을 짧게 메모한 촌평들을 오리고 붙이고 꿰매서 글을 쓰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저자는 '조작조각 미학일기'라는 미학 에세이를 이메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문제적 존재의 존재방식 인간과 타인의 관계 예술 작품의 본질 등 난해한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답하고자 하였던 예술 작품 및 이론을 읽었다는 저자는 예술, 깨어 있는 꿈 불안하다, 그러나 걷는다 완전히 붕괴되는 시간이라는 글로 첫번째 조각으로는 암호와 두번째 조각으로는 '단서' 세번째 조각으로는 '편지' 를 이야기합니다. 쭈욱 단계적으로 읽어도 되고 아무데나 훅 펴서 읽는 방법도 좋습니다. 올해 읽은 단 한권의 책을 고르라면 저는 이 책입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자주 들여다볼 것 같습니다.
#조각조각 미학 일기 #컬처블룸 #컬처블룸리뷰단
|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미학이라는 단어가 나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았기에 먼저 미학이 무엇인지 정확한 개념이 알고 싶어서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미학이란 미적 대상으로부터 얻어진 미적 경험의 특징적 성격을 해명 또는 분석하는 학문으로서, 미적 가치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예술 작품이 주된 탐구 대상이며, 현대 미학은 과학적 미학, 철학적 미학, 예술 과학, 예술철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책을 펼치면 작가는 자신이 쓴 이 책에서는 미학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 용납이 된다면 온전히 '미'와 '예술'이라는 단어마저도 빼버린 것으로 정의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정의한 미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미'도 '예술'도 빼버리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이라니 책을 읽기 전 곰곰히 이게 어떤 의미일까 곱씹고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 내가 내린 작가가 생각하는 미학이란 개개인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는 것, 미적 대상은 누구라도 다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아름다움을 각자가 느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아마도 그런 것을 의미할 것이라는 나름의 이해를 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누구라도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압도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바로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무도 잘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학이라는 학문을 꼭 정해진 틀 속에서 정형화하여 말한다는 것은 분명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그림 앞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또 영화를 감상하며, 콘서트를 보며, 합창단의 노래를 듣거나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감상하며 어느 순간 우리는 털이 곤두서는 전율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누구도 말로 할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이것이 미학이다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불완전한 조각들, 그렇기에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조각들을 제시하며 미학을 말하고 있다. 첫째 조각으로 '암호'를, 두번째 조각으로 '단서'를 그리고 마지막 조각으로 '편지'라는 조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들은 인간이라는 문제적 존재의 존재 방식과 인간과 타인의 관계 등 난해한 존재들 간의 관계를 풀어낼 핵심이 되기도 하고, 인간과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 간의 관계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며, 너와 나라는 관계를 예술과 윤리의 관계로 풀어내기도 하며 작가 나름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작가는 책을 쓰며 어딘가에 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뚫겠다는 반역심으로 썼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을 보며 얼핏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작은 구멍이 큰 댐을 무너뜨린다.' 어쩌면 작가는 의도하여 이 문장을 쓴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이 글이 미학을 새롭게 정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떤 생각에서 이 문장을 썼을지는 모르겠으나 작가가 초입에 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미학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과 함께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곰 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
세상에는 어째서 이렇게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걸까. 보고 접하고 읽을 때마다 새삼 놀라는 나도 참으로 놀랍다. 미술과 음악과 영화를 어렵지 않은 철학적인 시선으로 설명을 해주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을 터인데, 편린 작가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미학의 미자도 모르는 중년 여자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학문”이라는 저자의 표현에 혹해서 집어 든 책이다. 꼭 예술을 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는 왠지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이, 감동들이 너무나도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제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책에 매혹되고 말았다. 첫 몇 장을 읽는 동안에 내 머릿속에서 내내 떠오르던 것은 김광석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였다. 왤까?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이 구절이 계속 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생뚱맞게도.
한참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가는 글을 모두 읽으니 그다음부터는 아주 멋진 예술가, 철학자 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술가와 예술의 이야기보다는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더 눈길이 가기는 했지만, 예술과 철학을 연결하는 문장들은 계속계속 읽어 나가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바디우, 들뢰즈, 데리다, 알고는 싶었지만, 알 기회가 많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현대 철학을 공부해 봐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들, 관람하지 못한 영화들과 작품들. 이제는 좀 더 본격적으로 찾아다니며 감상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은 알지만 관람을, 감상을 거부했던 작품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든다. 모르고서 무언가를 평가하지 말자. 경험해보고 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뒤에야 작품에 관해 말하자. 무엇이든 내 마음으로 거부하지 말자는 마음이 들게 해준 책이 편린의 <조각 조각 미학 일기>이다.
말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느끼고 말해보자고 생각하게 해준 책, 영원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고독을, 다른 인류의 경험과 마음으로 조금쯤은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임을 깨달으며 미학을 좀 더 깊게 공부해 보자고 마음먹게 한 책이다. 많은 사람이, 특히 우리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우리 함께 읽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한번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꾸나!
|
|
이 책은 미학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접근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와 예술 작품을 다루며 탐험으로 인도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매혹적인 측면은 미학을 통해 예술과 경험에 대한 깊은 감정과 이해를 어떻게 도출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였다. 미학을 "이중적인 충동에 두 발을 딛고 선 학문"으로 정의하는 접근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중적인 충동이란 갈망, 감정, 그리고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과 경험에 대한 열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충동은 미학적 사유의 시작점으로서 나에게 공감을 자아냈고 예술 작품을 통한 깊은 감정을 느끼게 했다. "미학생활자"라는 개념은 미학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일상에서 예술 작품을 찾아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을 강조한다. 일상과 예술 간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방식으로 뒤엎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러한 시각은 예술이나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나의 일상을 더 깊이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낯선 개념과 어려운 이론을 부드럽게 전달하려는 노력이다. 책을 읽으면서 미학과 관련된 여러 이론과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예시와 함께 설명함으로써 소통을 강화하고 이해를 도모한다. 다양한 예술 작품과 사상가들이 언급되고 깊은 사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따라가기 쉽도록 설명과 해석을 제공하고 각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술, 철학, 문화,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미학적 시각을 통일시키는 저자의 노력은 안정감 있게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예술과 미학에 대한 통찰력을 통해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제공해주었고 글쓰기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였다.
*** 이 책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
|
미학으로 보고, 듣고, 쓰는, 이른바 “미학 생활자” 요즘 전시를 많이 보러 다니면서 그림에 관심이 많아져서 식견을 넓혀주는 책을 찾는데 미학 일기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어요. 조각조각 미학 일기. 제목이 예뻐요.
미학은 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아무래도 미술사가 아닌 철학의 관점으로 예술을 해석하는 분야다 보니 쉽지는 않겠죠. 반면 저자는 미학을 "이중적인 충동에 두 발을 딛고 선 학문"이라 정의해요. 이중적인 충동. 어떤 이중적 의미가 숨겨있을까요? 궁금해져요.
책은 암호, 단서, 편지라는 꼭지로 영화, 예술, 회화 등의 작품들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타인과의 관계.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요.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철학자의 관점으로 살펴봐요. 〈브릴로 박스〉는 미술 문외한이라도 한번은 들어봤을 예술은 어디까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작품이고 〈걷는 사람〉는 자코메티의 대표작이죠. 〈헤어질 결심〉에는 박찬욱 감독의 디테일이 잘 담긴 작품이죠. 작품의 상징과 의미만 봐도 암호라는 타이틀로 묶는 게 조금 이해가 가요.
두 번째 꼭지는 ‘단서’ 단서에는 예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요. 억압된 대중의 욕망과 항거를 예술이 어떻게 표현하고 대중들이 소비했는지를 통해 삶의 지침에 대해 이야기해요. 워쇼스키스의 〈매트릭스〉, 핑크 플로이드의 〈 The Wall 〉, 노순택의 〈얄읏한 공〉이 예시로 사용해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작품들이어요.
세 번째는 '편지' 예술가들의 작품을 눈으로 보고 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해요. 이창동의 〈밀양〉, 케네스 로너건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다르덴 형제 〈로제타〉가 그 예시로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한나 아렌트와 함께 이야기해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아직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예술과 일상의 조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배우는 시간이 되었어요. 저자처럼 생활 미학자까지는 어려워도 우리도 예술가다운 일상을 보낼 수 있고 그러려면 어떤 생각과 태도가 필요한지 조금은 알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