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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말-내밀함을 외밀함으로
"아니 에르노의 말-내밀함을 외밀함으로" 내용보기
나는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던가?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도 그러하듯, 이 책의 외부적 물성에 먼저 이끌렸다. 신간작품 코너에서 읽을 만한 책을 검색하던 중, 회색 테두리 안쪽의 책장을 배경으로, 손목시계 찬 왼손을 턱 밑에 살짝 받치고, 마치 ‘나는 지금 당신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어요.’라고 내게 말하는 듯한 맑고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의 말-내밀함을 외밀함으로" 내용보기

  나는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던가?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도 그러하듯, 이 책의 외부적 물성에 먼저 이끌렸다. 신간작품 코너에서 읽을 만한 책을 검색하던 중, 회색 테두리 안쪽의 책장을 배경으로, 손목시계 찬 왼손을 턱 밑에 살짝 받치고, 마치 나는 지금 당신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어요.’라고 내게 말하는 듯한 맑고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니 에르노의 시선에 이끌렸다. 그래서 아래쪽의 책 소개와 미리보기를 이용해 책의 일부내용을 읽은 다음 구매를 결정했다. 외모에 먼저 이끌려 누군가를 만났지만, 지내다보니 내면세계가 서로 달라 관계가 끊어지는 인간관계에 비유되는 책과 달리 이 책은 먼저 이끌린 물성에 걸맞은 동일한 감정을 유지시켜주는, 고상함과 예쁨이 조화를 이룬 표지와 튼튼한 양장외피와 표지의 에르노 초상이 그대로 안으로 관통되어 내용이 된 채 겹겹의 층을 이루고 있는 듯한, 안팎 구분이 없는 듯이 느껴지는 기이한 책이었다. 아마도 표지의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의 소제목들까지 이어진 붉은색 글씨의 인쇄, 질 좋은 종이 사용, 문장에서 드러나는 번역자의 실력 등, 전체적으로 대단히 공을 들여 만든 책이라는 느낌도 한 몫 했으리라.

 

  상상력의 응고 상태를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부끄러움>, <사건>, <단순한 열정>, <바깥일기>, <밖의 삶>, <빈 옷장>, <얼어붙은 여자>, <여자아이 기억>, <집착>, <탐닉>, <카사노바 호텔>, <세월>, <남자의 자리등 여러 작품들 속에, 물에 퍼진 잉크처럼 퍼져 있던 상상력이 하나의 틀에 부어져 굳어진 지성 상태가 아니 에르노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우선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지성을 해체해 보면 내밀함으로 채워져 있었고, 내밀함의 응고물인 이 책은 비록 세상에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내밀함을 유지하고 있어, 내밀함의 외밀함이라고 나름 명명해 보았다. 누구나 성적인 문제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는 공 영역에 드러났을지라도 빵을 먹듯이 자유롭게 드러내놓고 다루지 못하고 특정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어서, 외부로 노출된 것임에도 여전히 안과 밖의 중간에 위치하는 외밀함을 유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외밀함에 이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은폐된 세계로부터 탈주자가 되어 바깥세상으로 뛰쳐나와 자전적 내용이나 사회적 성찰에 관한 내용을 공 영역에 흩뿌린 용기만으로도 나는 아니 에르노가 인류 진보에 크게 한 삽을 보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에르노의 탈주경로를 탐색함으로써 우리 인간 종이 공유하고 있는 내면적 사회적 문제의 뿌리에 닿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개인이 지닌 피해의 문제를 역시 세상에 분출시킬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니까. 이러한 연쇄고리는 에르노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는 피에르 부르디외로부터 암암리에 용기를 얻고, 이 책에서 에르노의 대담자로 나오는 로즈마리 라그라브가 에르노에게서 용기를 얻은 맥락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난 사회과학이 부르디외가 말한 그 이유 때문에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제일 먼저 확신한 사람이에요. 나에게는 1971년에 발견한 상속자들Les He’ritiers’이 바로 그런 책이었어요. 이어 부르디외의 책들이 글을 쓰겠다는 내 계획을 더욱 다져주었어요. 특히 구별짓기는 당시에 내가 느끼던 욕망,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 출신 환경에 속한 사람들이 살고 먹고 생각하는 방식들을 보여주겠다는, 경멸을 품지도 않고 반대로 호의를 베풀지도 않으면서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욕망, 아니 욕망을 넘어 그 필요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 에르노> 92-93.

 

  <당신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에겐 당신도 상승의 동맹자 중 하나였어요. 나도 당신처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신이 쓴 책들에 힘껏 매달렸거든요. : 라그라브.> 123.

 

  <이미 당신의 책들을 읽을 때 마음의 동요를 겪었는데, 지금은 확신을 얻었답니다. 내 감정을 파악해야 한다고, 내 기억을 파헤쳐서 어떤 경우에든 용기를 내서 써야 한다고 말이에요. 당신은 나에게 그런 확신을 쇨 없이 불어넣었어요. 가르치려 든 게 아니라 오로지 우리 사이에 오간 우호적인 대화라는 기적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죠. : 라그라브> 133.

 

  <에르노의 말작품에서 가장 눈에 띈 대목은 프랑스 사회의 문학적 정치적 문제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지닌 문제와 상통한다는 점을 알게 해준 점이다. 어떤 책을 읽거나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을 떠올리면 동쪽과 서쪽처럼 서로 거리를 둔 채 군집을 형성하고, 그 기준을 순문학과 비문학으로 나눠 대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겉으로 보이는 그 기준이 결국 정치적 성향이라는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 경계선상에서 에르노가 이룬 위대한 성취라면 사회를 계급구조의 강고한 틀로 만드는 정치적 부르주아 질서의 틈바구니로 문학의 지렛대를 집어넣고 작품을 생산해낸 숫자만큼 흔들어댄 작가라는 점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에르노의 문학은 그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발전적 미래를 향해 진일보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 책들은 일종의 사회의 호명interpellation이자 그 기능 작용이라는 점에서 단 한 번도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아요. 혹은 문학적으로만 받아들여진 적이 없죠. 문학적인 이유를 내세워서 내 책들에 반감을 표하지만, 사실상 그건 문학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니까요. ‘자리부터 수치까지 15년 동안의 내 작품들에 대해서 가면과 펜이나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비평가들은 문학적 위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민중주의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연결 지었어요.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고 여전히 그 계급에 속해 있는 그들이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에 거부 반응을 보인 거죠. ; 에르노> 88-89.

 

  또 한 가지 기억에 매달리는 점은 아니 에르노가 남성지배적, 자본주의적 사회구조로부터 계급 탈주자가 되는 데 관여한 힘은 물질의 힘이 아니라, 정신의 힘이라는 점이다.

 

  <내 생각에는 돈보다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획득이 계급 탈주자를 만드는 것 같아요. : 에르노> 109.

 

  책의 끝에서는 우리 유한존재의 슬픔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현재를 충만하게 살 되,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한 채 끝을 맞을 적당한 마음자세를 준비해 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주는 대목도 있어, 한 번 더 책 표지를 매만져보게 되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소의 책이 되기도 했죠.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난 노년이 향유의 시기가 되면 좋겠어요. 다시 말해서, 나도 당신처럼 고통과 쇠락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만 끝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어요. 이제 우리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야겠네요. : 에르노> 136.

 

  이 책 덕분에 로즈마리 라그라브라는 괜찮은 여성 사회학자를 한 명 알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재미있는 사실은, 아니 에르노의 내밀함은 마음으로 뭉쳐진 것이고 그 내밀함을 바깥세상에 노출시키는 것은 마음을 산책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마음산책이라는 곳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제 에르노를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피는 여전히 우리의 혈관 속을 돌고 있듯이, 그녀 역시 내가 받아들인 훌륭한 작가들과 한 줄기 강물의 혈류를 이루어 내 사유의 육체를 형성하는 혈관 속을 돌면서, 아이에서 어른으로 육체가 성장하듯, 세상을 바라보는 내 사유의 육체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a********4 2023.12.16.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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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로즈마리 라그라브 《아니 에르노의 말》, 현재의 작가를 있게 만든 여전한 뼈대를 확인하며...
"아니 에르노 로즈마리 라그라브 《아니 에르노의 말》, 현재의 작가를 있게 만든 여전한 뼈대를 확인하며..." 내용보기
《아니 에르노의 말》은 학제간 독일 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의 폐막행사로 열린 2021년 5월 26일에 열린, ‘마르크 블로크 연구소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사라 카를로타 헤쉴러, 클레르 멜로, 클레르 토마젤라가 기획한 좌담회’의 내용과 2022년 3월 24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출판사의 제안으로 ‘로즈마리 라그라브와 아니 에르노, 사라 카를로타 헤쉴러와 클레르 토마젤라,
"아니 에르노 로즈마리 라그라브 《아니 에르노의 말》, 현재의 작가를 있게 만든 여전한 뼈대를 확인하며..." 내용보기
  《아니 에르노의 말》은 학제간 독일 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의 폐막행사로 열린 2021년 5월 26일에 열린, ‘마르크 블로크 연구소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사라 카를로타 헤쉴러, 클레르 멜로, 클레르 토마젤라가 기획한 좌담회’의 내용과 2022년 3월 24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출판사의 제안으로 ‘로즈마리 라그라브와 아니 에르노, 사라 카를로타 헤쉴러와 클레르 토마젤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출판사의 클레망스 가로와 에티엔 아나임이 참여한 추가 대담’의 내용으로 엮여 있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 사회학적 · 전기적 auto-socio-biographique” 텍스트들과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자전적 조사 enquête autobiographique”를 통해 우리는 주관적으로 체험된 것과 사회적 권력관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전기 속에서 사회적 권력관계를 분석한다... 작가 에르노와 사회학자 라그라브가 공유하는 독창성은 두 사람 모두 사회계급의 관점을 직접 겪은 체험의 젠더적인 측면과 관계 짓는다는 데 있다. 즉, 여자라는 위치에서 겪은 물질적 조건들을 지식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에르노와 라그라브는 스스로 지배관계의 주체임을 알아보고, 그럼으로써 개인적 체험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맥 속에서 갖는 집단적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한 지배적 상황은 자연적 여건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이고, 따라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주어진 대화는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가 지나온 길 그리고 쓴 글들을 통해 그들의 경험과 참여가 어떻게 만나고 갈라지는지 보여준다...』 (p.8~10, 〈서문〉 중)

  사회학적이지만 동시에 자전적이고 전기적인 아니 에르노의 어떤 말들을 소설 바깥에서 읽을 수 있다는 기대로 책을 들었지만 이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책은 아니 에르노의 말,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 에르노와 사회학자 로즈마리 라그라브가 동등하게 지분을 할당받고 있다. 책은 두 사람의 (대화라기 보다는) 대담을 정리한 것인데,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 같은 여자이고 또 연배가 같아서인지, 당신 책을 읽는 거의 대부분 동안 난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보았어요. ‘어느 페미니스트 계급 탈주자의 자전적 조사’라는 부제는 사실 내가 문학에서 시도한 탐구를 그대로 정의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죠.” (p.36, 아니 에르노의 말)

  실려 있는 내용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사뭇 진지하다. (책은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는 여성 소설가로 다른 한 사람인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여성 사회학자로 평생에 걸쳐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대담을 나누기 전까지 사적인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지만, 페미니스트 특히나 계급 탈주자인 페미니스트라는 점에서 대담 내내 의기투합한다.

  『보편적인 페미니즘은 불가능해요. 페미니스트 투쟁을 사회 투쟁과 분리할 수 없죠... 여자들은 어떤 사회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인종화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남성 지배라는 조건을 같은 방식으로 겪지 않으니까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페미니즘은, 당신이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경험의 페미니즘”이에요...』 (p.61, 아니 에르노의 말)

  ‘계급 탈주자’라는 개념은 아니 에르노가 적극 사용한 개념이고 ‘낮은 계급 출신이 교육이나 사회적 상승을 통해 상위 계급 문화권으로 이동’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특히나 이러한 계급의 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존재론적, 문화적 소외감이나 정체성 혼란 상태’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에서는 그 탈주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작가 자신의 사립 학교에서의 경험이 실려 있다.

  “... 난 분열된 아비투스가 나의 정체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요. 어떤 사회적 상황들에선 여전히 나타나고 있죠. 분열된 아비투스는 내가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고, 그런 뒤에 그것을 글로 쓰는 방식이에요.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느껴질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오히려 사회가 나뉘어 있고 위계화되어 있음을 기억하라는 내 안의 요청 같아요...” (p.95)

  그리고 아니 에르노는 이러한 ‘계급 탈주자’로서 불가피한 ‘분열된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어 몸에 배인 개인의 습관, 취향, 태도, 분위기, 가치관 등의 총합으로서의) 아비투스’까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표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임도 밝힌다. 조금 부담스러운 읽을거리이긴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말》을 통해 현재의 작가를 있게 한 굵고 길고 여전한 뼈대를 확인할 수도 있다. 


아니 에르노, 로즈마리 라그라브 / 윤진 역 / 아니 에르노의 말 (Une conversation) / 마음산책 / 176쪽 / 2023 (2023)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5.12.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