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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갈라파고스/2014.12.26. sanbaram 세계화가 진행되어 글로벌 교육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서당교육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정도로 생각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어떤 교육과정을 갖고 어떤 방법으로 교육을 해왔는지 교육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인문학이 사회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동양 고전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는 이때, 서당을 15년간 다니고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동서양철학을 공부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을 내놓았다. 저자는 대학원에서 퇴계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퇴계예학사상 연구>, 공저로 <교사, 대안의 길을 묻다>, <조선서원을 움직인 사람들>이 있다.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은 모두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 겸산 선생과 초동서사에서는 서당과 선생님에 대한 소개를 하고, 2장 서당에서 배우는 것들에서는 교재로 쓰이는 책들 소개와 공부 방법 및 하루 일과를 소개한다. 3장 서당, 끝없는 공부의 길에서는 서당을 나와 대학을 들어가고 동서양철학 공부를 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4장에서는 교학, 오래된 인문학의 가르침과 배움에서는 도(道)란 무엇인지 그리고 배움이란 무엇이며 위기지학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인간에 대한 유학의 관점은 매우 관계론적이다. 인간은 또 다른 인간들과 맺는 다양한 관계망 위에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론적 인간관은 반드시 윤리를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관계에 있는 두 주체는 공존하면서 조화로울 수도 있지만, 대립하면서 반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仁)은 유학의 관계론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관계윤리가 지향해야 할 근본정신을 잘 보여주는 개념입니다.(p.27)”라고 저자는 말한다. “글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은 아직 한문문장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한 줄당 네 글자(사자소학)나 다섯 글자(추구집)로 구성된 것들을 가르쳐서 한자와 한문에 친숙해지도록 한다.(p.43)” <사자소학>에서는 제 몸이 생기고 길러져서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 덕이기 때문에 효도를 해야한다는 내용과, 친구 사귐, 생활방식 등을 배우게 된다. 다음으로 배우는 “<추구집(抽句集)>은 다섯 글자가 한 줄을 이룬다. 한시들 중에서 뽑아 엮은 책이기 때문에 풍경이나 사물에 대한 시적 표현이 주된 내용이다. 추구는 두 줄이 한 쌍이 되어 句를 이루며, 모든 구는 대체로 대구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자문은 내용과 글자가 어려워 사자소학과 추구집을 배운 후 배웠다. 서당에 따라서는 천자문을 배우지 않는 곳도 있다. 글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교재를 어떤 순서에 따라 가르칠지는 순전히 선생님의 판단에 따르게 된다.(p.43)” 그러나 보편적으로 배우는 교재의 순서는 <사자소학>, <추구집>, <학어집>,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이다. 서당의 아침공부 : 기침을 하고 나면 배운 경전을 외운다. 이를 밑글이라 한다.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동안 보통 보름치에서 한 달치 정도가 일반적이다. 서당체와 자신만의 책 : 아침을 먹고 나면 서당에서는 세필(細筆)로 하는 붓글씨 공부를 한다. 대필(大筆)로 하는 붓글씨 공부는 점심 식사 후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당 선생님들은 붓글씨와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면추(免醜)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붓글씨는 보기 싫을 정도로 추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공부의 단계가 좀 더 높아지면 아침 붓글씨 공부도 책을 등(騰)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책을 등한다는 것은 어떤 책을 붓글씨로 직접 써서 베끼는 필사(筆寫)를 뜻합니다.(p.58)” 독서백편의자현, 문리와 문안 : 붓글씨 공부를 1시간 내외로 마치고 나면, 이제 글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서당의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글 읽기다. “100번의 성독(聲讀)을 통해 암송하는 것은 바로 글이 가진 결들을 읽어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한 반복적 훈련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목공예가가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나뭇결을 느끼는 훈련을 하듯이 성독과 암송의 전 과정 역시 글의 결을 몸으로 느끼는 훈련을 하듯이, 성독과 암송의 전 과정 역시 글의 결을 몸으로 느끼는 훈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p.65)” 총강, 꼴찌가 없는 평가 : 서당에 따라서는 해질녘에 학동들에게 그날 배운 글을 외워 바치도록 한다. 그것을 서당에서는 강(講)을 해 바친다고 한다. 강이란 배운 글을 스승이나 윗사람 앞에서 외우는 것을 말한다. “9일 동안 배운 글을 모두 외우는 순강(旬講)을 하고 열흘 째 되는 날 서당은 쉽니다. 이 밖에도 한 달치를 한꺼번에 외워 바치는 월강(月講)과 1년 동안 배운 글을 모두 외워 바치는 총강(總講)도 있습니다. 월강과 총강은 선생님께서 랜덤 형식으로 강을 받습니다.(p.73)” 한시 짓기는 학문의 기본기 : 백독과 암송으로 이어지는 글 읽기 공부가 끝나면, 서당 사람들은 한시를 한 수씩 짓는다. 선생님께서 해질녘 운자를 불러주시고, 제자들은 그 운자에 맞추어 시를 짓는 것이다. 난자집, 배운 내용을 돌아봅 : 선생님께서 시들을 보시는 동안 제자들은 밤공부에 들어간다. 우선은 내일 새벽에 배울 글을 예습한다. 내일 얼마만큼 배울지를 정하고, 잘 모르거나 생소한 글자들을 찾아 익힌다. 이런 글자들은 시간 날 때마다 보면서 익히기 위해 난자집(難字集)이라는 별도의 책자에 적어서 정리한다. 일종의 개인용 ‘단어장’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 다음 배울 글의 토를 뗍니다. 형들은 형들대로 아우들은 형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배웠는데도 모르는 글에 대해서는 형들이 기꺼이 설명해주지만, 예습하는 글은 웬만해서는 형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습이 먼저 끝난 사람들은 다시 글을 읽기 시작합니다. 밤에 읽는 글은 밑글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백독을 하면서 외웠던 글도 다시 한 번 외워보고, 며칠 전에 배웠던 밑글들을 차례차례 외워봅니다. 최근에 배웠던 글들은 더 많이 읽어주어야 합니다. 훨씬 전에 배웠던 글들은 그동안 날마다 읽어 와서 익숙해져 있지만, 최근에 배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p.99)” 서당과 학교의 차이점은 첫째, 스승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더 나은 스승을 바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재는 선생님이 선택하지만 배울 범위와 진도는 개개인에 맞게 학생이 정하여 공부한다. 셋째, 나이가 차이나는 10명 내외의 학동들이 함께 합숙하며 공부한다. 그러기 때문에 동문수학하는 학동들간의 위계질서 등 사회생활의 기본을 배우게 된다. 넷째, 수학연한이 정해져 있지 않고 시험의 결과를 서열화 하지 않는다. 다섯째, 함께 공부하는 동안 도반이 되어 평생을 서로 이끌어 주는 벗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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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겸산 선생과 초동서사에서 서당과 선생님에 대한 소개를 하고 2장 서당에서 배우는 것들에서는 교재로 쓰이는 책들 소개와 공부 방법 및 일과를 소개한다. 3장 서당, 끝없는 공부의 길에서는 서당을 나와 대학을 들어가고 동서양 철학 공부를 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4장에서는 교학, 오래된 인문학의 가르침과 배움에서는 도(道)란 무엇인지 그리고 배움이란 무엇이며 위기지학의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스승을 선택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더 나은 스승을 바꿔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버이나 임금은 바꿀 수 없지만, 스승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관계는 간함을 통해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만, 바꾸는 것이 허용되는 관계에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승으로 모시는 동안에 제자는 어떤 경우에서는 간할 이유가 없습니다. p.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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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이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 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를 느끼던 차에 한재훈 교수의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입학 통지서를 받은 일곱 살 시골 서당으로 내려가 15년간 한학을 공부해 사서삼경을 뗀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간 저자의 특별한 이력이 반영된 책이다. 현재 저자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본문에는 1904년 생인 겸산(兼山) 안병탁 선생이 아흔 살 시절 스물두 살의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노우(老友)라는 표현을 썼다는 구절이 있다.(207 페이지) 이 구절에 따르면 저자와 스승의 나이 차이는 68년이다. 그러니 저자는 1972년생이고 서당 공부를 한 시기는 1978년부터 1993년 사이이다. 겸산(兼山)이란 주역의 대성괘 가운데 하나이다. 산(山)을 뜻하는 간(艮)괘가 겹친 괘이다.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굳센 기질을 의미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벗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스승은 존함 뒤에 조아릴 돈(頓)이란 글씨를 쓰기까지 했다. 퇴계(退溪)도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지 않고 강론(講論)했다는 표현을 했다. 공자는 제자들이 자신을 두고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신 분이라 칭하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추구했던 사람이라 말했다.(176 페이지) 또한 누구보다도 배움에 목말라 했기에 열린 마음으로 누구에게라도 배우려 했다.(176 페이지) 스승의 완고한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유연한 행동이다. 스승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벗이다. 스승과 벗의 관계를 말한 사상가가 있다. 명나라 양명학자 탁오(卓吾) 이지(李贄)이다. “스승이 될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수 없다.”는 말이 그의 말이다. ‘분서(焚書)‘로 유명한 사상가이다. 저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이야기한다. ’소학(小學)‘에 나오는 이 말은 스승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부모로부터 받는 은혜만큼 크다는 의미이다.(162, 163 페이지) 스승은 선택되는 존재이다. 임금이나 부모와 달리. 어버이나 임금은 바꿀 수 없지만 스승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관계는 간함을 통해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만 바꾸는 것이 허용되는 관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166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나올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온(溫)은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변화 이전에 있는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열을 가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170 페이지) 이 말에는 누구든 완벽할 수 없기에 반드시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을 가지고 늘 새롭게 하는 자기양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의미가 있다.(171 페이지) 군사부일체를 말하며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가 갖는 의미 또는 성격에 주의해야 한다(156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의미이다. 교학상장은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바 이때 그 현상의 주체는 교사(敎師)이다.(187 페이지)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 즉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듯 교학상장에서도 스승과 제자라는 주체가 아닌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 위정편에서 온고이지신을 말한 공자는 ‘예기(禮記)’ ‘표기(表記)’편에서 도(道)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더라도 몸이 늙어가는 줄도 잊고 남은 날이 부족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지런히 하루 하루 애쓰다가 죽은 뒤에나 그만 둘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온(溫)을 말한 공자의 다른 말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습(習)은 깃털의 총체로서 날개를 뜻하고(199 페이지) 날개의 주체인 새는 특정 종류의 새가 아니라 날갯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어린 새이다.(200 페이지) 이는 공부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과 늘 새롭게 자기 수양의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이란 없었던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만나지 못한 세상을 말하며 그 새로운 세상이란 세상이 변해서 우리 앞에 던져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했을 때 만나게 되는 세상이다.(203 페이지)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쉬지 않음을 의미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연상할 만하다. 저자가 서당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의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가 반대해 저자에게 선택권이 부여되었는데 저자가 형처럼 서당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함으로써 전격 결정된 사안이다.(32 페이지) 물론 저자의 아버지는 삼형제를 똑같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의 아버지가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대학에 가서 현대학문을 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 뜻에 따라 현대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누가 새로운 공부를 할지는 형제들이 알아서 정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는데 저자가 선택된 것이다.(110 페이지) 검정고시와 대학 입시 준비를 거쳐 고려대 철학과에 진학한 저자는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했다. 저자가 인상 깊게 읽은 책들 가운데 하나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서당 교육과 서양식 교육의 차이를 질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서당은 계단처럼 나이가 다른 학생들이 함께 기거하며 공부하고 예절을 배우는 공동체이지만 저마다 다른 글들을 읽고(61 페이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만 공부란 결국 자율적으로 보완하고 관리해가는 것(75 페이지)이며 어떤 글들을 더 읽어야 하고 어떤 글들을 덜 읽어도 되는지는 철저하게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100 페이지) 서당에서는 100번의 성독(聲讀: 소리내어 읽기)을 통해 문장을 암송(暗誦)을 할 것을 요구한다. 서당에서 암송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문리(文理)가 트이게 하기 때문이고(64 페이지) 글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68 페이지) 문리에 대해 저자는 글의 결을 이야기한다. 장악에 대해 저자는 글을 충분히 소화해 전체적 이해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전통 한학 공부를 하는 서당과 현대식 학교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현대의 교육 체계는 너무 인위적이고 통제적이고 획일적이다. 서당은 그렇지 않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이고 학문적이다. 저자가 공부한 서당은 초동서사(草洞書舍)란 곳이다. 스승에게 받아들여질 때 우여곡절이 있었다. 저자는 먼저 공부하고 있는 형이 스승께 동생을 제자로 받아주실 것을 말할 것이라 생각했고 형은 동생인 저자가 청할 것이라 생각해 결과적으로 아무런 말 없이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에 선생님이 지금 뭐하는 것이냐 물으셨고 저자는 글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네가 언제 내게 글 배우겠다고 한 적이 있으며 내가 언제 너를 가르치겠다고 한 적이 있느냐 하셨다.(141 페이지) 급기야 선생님은 저자에게 책 들고 당장 나가라는 말을 했다. 사태가 결말이 난 것은 선배들이 선처(善處)를 청해서였다.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은 촘촘한 인문학적 사유가 시종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다. 나로서는 신영복 선생님의 책들을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교할 만한 감동을 느꼈기에 상당히 고무적임을 밝힌다. 예에 깃든 정신이 아까워 양을 바치는 의식을 보존했다는 의미의 애례존양(愛禮存羊)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이미 없어져 버린 서당을 통해 그 안에 스며있는 소중한 가치를 음미하고 그런 가치를 통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한다는 말을 한 머리말에서부터 배움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 성장하고 그로 인해 좋은 세상을 위한 파장이 나로부터 비롯되게 하라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말까지 저자의 책은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이며 따뜻한 인문학적 성찰과 사색으로 빛난다. 깊게, 치밀하게 사유하기의 전범(典範)을 본 느낌이다. 깊고 치밀하게 읽는다는 것은 새로움을 담보하려는 시각이 있어야 가능하고 또 그런 읽기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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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이라고 하면 어린 학동들이 모여서 함께 하늘 천, 따 지 천자문을 외우는 모습이 떠오를 뿐 실제 서당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저자의 삼형제는 특별한 교육철학을 가진 부친의 뜻에 따라 학교교육을 받는 대신에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그중 저자는 일곱살부터 15년간 한학을 배운 후 대학교육을 받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덕분에 저자는 서당과 학교 교육의 차이점을 볼 수 있는 안목과 경륜을 갖추게 된 셈이고 그의 책을 통해 독자인 우리도 서당교육의 이모저모를 생생히 간접경험할 수 있다. 서당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우주의 친밀한 관계를 배우게 된다. 선생님 한 분과 나이가 제각각인 열명 남짓의 학동들이 둥글게 앉아서 각 사람이 자신의 진도에 따른 공부를 하며 스승과 제자의 예, 벗과의 예를 자연스럽게 익혀가는 곳이다. 스승도 크게 보면 함께 도를 찾아가는 도반인 셈이라 스승도 제자에게 예를 갖추며 평생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는 자세로 학문을 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당이 답답하기만 한 곳은 아니라 오후에는 스승이 주는 운자로 한시를 짓고, 봄 여름에는 산천초목을 누리며, 밤에는 학동들끼리 군것질을 하는 것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동들이 모인 곳에는 그들만의 즐거운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사제간의 믿음이 사라지고 학교폭력으로 신음하는 우리 공교육이 옛날의 여유있고 느긋한 서당교육에서 배우면 좋겠다. 책의 표현대로 하자면 서당에서 마음의 결을 따라 공부하던 저자가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에 다닐때는 처음으로 시간표가 강제하는대로 공부하는 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학교나 학원외에 다른 공부를 경험해보지 않았던 우리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낙오하는 것이라 무조건 참고 견딜 수 밖에 없었지만 서당공부에 몸과 마음이 길들여져있던 저자는 이런 공부의 문제점이 확연히 보였던 것이리라. 학교교육이 논어에 나오는 위기지학爲己之學(나를 위한 공부), 배우고 시간나는 대로 익히고 또한 기뻐하는(學而時習之不亦說乎)공부와는 한참 먼 곳에 와버렸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대안학교나 홈스쿨링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서당교육도 또 하나의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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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분명 다른 길이었다 공부(工夫)라고 하면 우선 영어단어 외우고 수학문제 풀며 쌓여있는 학습지를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현실이다.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공부(工夫)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공부의 본질적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살아보니 우리가 공부라고 여겼던 것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살아가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배우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면 그러한 공부는 사라진 것일까 요사이 한국 사회는 인문학을 빼놓고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 인문학이 이런 열풍의 중심에 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인문학의 본질적 의미에서 출발하는 것과 우리의 현실이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동떨어진 결과로 무엇인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만 현실의 팍팍함으로 점철된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인문학의 본질이 사람의 삶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그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우리시대 인문학 열풍은 분명 의미 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제라도 인문학이 그동안 떠나 있었던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것이어서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에게도 공부가 사람의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으로 존재했던 때가 있었다. 역사 속 선비들의 학문이 바로 그러했으며 가깝게는 서당이라고 하는 곳에서 공부의 시작을 했던 선배들의 경험이 있다. 하지만, 교육제도가 바뀌고 서양의 물질문명을 가치판단의 기준에서 우선시하면서부터 이러한 공부의 의미가 바뀌었으며 길을 잃고 헤매는 현실을 불러왔다고 보인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옛날 선배들이 공부했던 방식으로 서당이라는 곳에서 공부한 사람이 있다. 우리시대에 흔치않은 사람이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현실이다.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을 펴낸 저자 한재훈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한재훈은 모두가 정규학교에 갈 나이에 서당공부를 시작했다. ‘서당’에서 15년 동안 한학을 배우고 다시 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50대 중반 사람에게나 가물가물한 기억 속 남아있을 그 서당에서 옛공부를 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서당의 커리큘럼, 일과, 공부의 평가 등을 생생하게 보여줌과 아울러 ‘서당공부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방점은 오히려 서당공부가 지향하는 것에 있다고 보인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인문학’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진정한 인문학의 길이 서당에서 했던 공부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우리가 하는 공부가 무엇인가 본질에서 조금은 벗어난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당공부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의 본질적 측면에 대해 주목하며 공자와 이황의 경우를 들어 스승과 제자가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공부의 본질적 측면에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한다.
사자소학, 추구 등으로 시작한 서당공부가 소학, 대학, 논어, 맹자 등 경전 공부와 암송으로 그 과정에서 함께하는 붓글씨, 한시 짓기 등 서당공부가 지향하는 점은 ‘위기지학’으로 모아져 ‘위인지학’으로 나아가는‘참 공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참 공부는 결국 현재의 인문학이 해결해야 할 것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저자는 서당을 통해 인문학적 전통이 있었음을 확인하며 우리의 현실인식과 해결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불러오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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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수염이 길게 난 훈장이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여러 어린 학생들이 앉아서, 열심히 책을 외우며 공부를 하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 이다. 그와 함께 드는 생각은, 무척이나 고리타분하고, 전혀 효율적이지도 않고, 스승과 제자가 철저하게 단절 되어 있어 서로 소통의 부재가 있는, 우리의 옛 교육방식이긴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온고지신'의 정신의 예외로서 완전히 버리고 만 교육방식이라는 것 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현대 교육방식이 아닌, 전통 교육방식인 서당에서 몇년 간 공부를 했던 저자가 '서당'에 대해서 하나 하나 조목조목이 설명을 해 준다. 물론 저자가 공부하던 '서당' 역시, 옛날의 서당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지 않았고, 결국은 '현대'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간신히 현대화의 물결을 거부하며 버티고는 있지만, 알게 모르게 현대화의 물결에 오염되고 있는 서당이었기에, 완전한 서당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 하다. 그럼에도 서당공부는 우리 선조들이 옛날부터 해 오던 전통적인 교육방식이고, 그 옛날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추구하는 바와 그 목적이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만큼, '현대의 서당'에 대한 통찰은 무척이나 값어치가 있고, 소중하지 않나 싶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서당공부' 문화는 오랜 시간동안 우리 선조들의 교육방식으로 채택되었던 것에 비해, 너무나도 일찍 사라졌다. 물론 세계화, 현대화의 물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없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온고지신'의 태도를 조금도 지니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진다. 현대의 교육과 비교했을 때, 분명 서당공부는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이고, 현대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정신이 가치 없는 것도 아니고, 서당 공부의 많은 요소들이 전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도 아니다. 책을 조금만 들여다 보더라도, 꼴지가 없는 평가를 하고, 제자들이 제각각 다른 교재들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학문을 하는 진짜 목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이다. '인문학'의 뜻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들의 교육을 돌이켜보았을 때, 우리는 과연 단 한순간이라도 '인간'을 위한 학문을 한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모두 자본을 위한, 자본가를 위한 학문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렇지 않은 학문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인문학은 특별한 학문이 아닌, 말그대로 인간이 그 스스로를 위해 추구해 나가던, 지극히나 자연스럽고, 근래 100~200년을 제외하곤 모든 학문은 인간을 위했다. 특히 서당 공부는, 옛날의 철학가 ,사상가, 정치가들의 좋은 말씀들을 통해 스스로를 갈고 닦고,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을 갈고 닦는데 보탬이 되기 위한 진정한 '인문학' 이었다. 즉, 서당이 완전하 사라지는 순간, 우리에게 진정한 인문학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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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과연 서당공부와 인문학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 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을 서양의 철학이나 문학 등의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인이며, 한국의 인문학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나도 모르게 인문학은 서양의 것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어쩜 나와 같은 편협된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저자가 접하고, 또한 그런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안타까움을 느껴 저자는 책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 서당공부를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래서 이 책 머리말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교육시스템에 비추어 보면 서당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이란 답답하기 짝이 없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굳이 ‘서당’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일종의 ‘애례존양’의 마음에서입니다. 이미 없어져버린 ‘서당’을 통해 그 안에 스며있는 소중한 가치를 음미하고, 그러한 가치를 통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함입니다. 고대의 예가 곧 오늘의 문제 상황을 곧바로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예에 담긴 진정한 의미 속에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결코 희생되는 양 한 마리가 아깝지 않으리라 믿습니다.」(p.9) 저자의 이야기에 백번 천번 공감을 보내는 부분이다. 옛것을 통해 현재를 되돌아보고, 또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의 상황은 그러지 못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안타까운 일들을 저자는 여러 가지 지적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시간표’이다. 「제가 이 ‘시간표’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으로 대표되는 학원(저는 초․중․고 정규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지만, 학교 역시 학원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에서의 공부과정이, 물론 푸코의 주장과 같은 감시와 처벌이 자행되지 않다 해도, 그 자체로 내포하는 문제점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학원(학교)의 시간표는 너무나 몰인정하고 야멸칩니다. 시간표는 해당 학급에서 진행되어야 할 수업을 명령합니다. 한 수업이 끝나면 그다음 수업을 또 명령합니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이 시간표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왜 그 수업을 그 시간에 받아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상황이나 처지 역시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 학급에서 공부하는 수십 명의 학생들은 다 다릅니다. 이해력도 다르고, 관심영역도 다르고, 심지어 생체리듬도 다릅니다. 동일인이라 해도 지난 주 월요일과 이번 주 월요일이 같을 리 없고, 화창한 날과 비 오는 날이 같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몸과 삶의 결들은 시간표의 명령 앞에서 같아져야만 합니다. 시간표는 이미 권력입니다. 이제 학생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표에 순응하든가, 아니면 도태되든가. 이런 점에서 시간표는 대단히 몰인정하고 야멸칩니다.」(p.120~p.121) 언 듯 보면 군인들처럼 훈련시키는 것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 군인들에게 훈련과 교육 등을 시키면서 복종을 강요할 때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그럼 어떤 논리로 학생들에게 이야기할까? 아마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을 얻고, 또 좋은 직장을 얻어야 돈도 벌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할 수 있다”와 같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세뇌교육을 하는 듯하다. 물론 학교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렇게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니 그들의 독립성과 주체성은 엄청나게 훼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시발점이 바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시간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이런 안 좋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서당의 좋은 점들을 반추삼아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중간 중간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물론 이것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수업을 진행하는 것, 계단 꼴과 같은 공동생활 등 서당에서의 좋은 것들을 지금의 현실에 맞게 접목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제발 교육을 백년대계라 부르짖으면서 정작 정치적인 논리 앞에서 무릎 굻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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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당인가 ? 하필이면 ? 현대교육을 뒤로 하고 말이다. 저자는 초등학교 입학을 마다하고 전남의 작은 서원에서 서당공부를 시작한다. 후에 검정고시를 거쳐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되었다. 서당공부 생소하다. 이곳에서 교육이 가능할까?
어떻게 보면 현대교육환경을 꼬집으며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 마치 공장에서 빵 찍어내듯 일정 교육수준에 적당한 스펙을 갖추고 취업환경에 뛰어드는 요즘 평범한 사람들 보다 다르게 사는 방법이 훨씬 블루오션에 가깝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런 교육환경을 선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야 말로 뒤에 든든한 아버지의 후원이 있었으며 깨어있는 생각이 길을 만들었던 것 같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망한다. 마치 퇴보하는 것 같지만 앞서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교육 이대로 좋은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다 해도 요즘 아이들을 현대교육의 혜택을 뒤로 하고 서당에 보내는 학부모가 생길까 하는 고민은 된다. 사서삼경을 읽고 한시를 짓고 읇고 과거 옛 선비들의 인문학적 정서가 그대로 묻어난다.
공자와 퇴계선생을 이야기 하고,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되짚어 준다.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고 할까 스스로 커리큘럼을 선택하고 제자도 스승을 선택하고 스승역시도 제자로 받을지를 고민하여 철저한 책임관계의 교육이 시작된다. 솔직히 수십년 학교를 다녔지만 고민과 방황의 시기에 찾아갈만한 스승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수를 선택하고 내가 댓가를 지불하고 수업을 사는 것이다. 1:1의 학문적 탐구는 어림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교육이 마켓처럼 되어 버렸을까? 스승에 목마름을 호소해 보고 싶다.
물론 오늘날 학교교육의 명예가 훼손된 지 꽤 오래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스승 이었지만 지금은 스승이 제자의 눈치를 봐야할 것 같은 분위기다. 제자 그림자 밟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유교사상에서 비롯된 정통선비 교육, 우리의 것, 우리 교육의 질을 이러한 서당교육을 통해 알리고 세계속에 교육으로 우뚝 솟아야 한다. 저자가 교육현장에 새로운 이슈를 만들고 사라져가는 서당교육의 신화를 다시 쓰기 바란다.
읽고 버리는 게 공부가 아니고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도 아니며 인성을 갖추고 예를 아는 것이 더 우선순위인거 같다. 요즘아이들은 모두 특출나다. 성장도 인지력도 엄청 빠르게 성장한다. 대신 인성은 따라 가지 못한다. 갈구하는 것도 없다. 부모가 아이를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왠만한 건 다 해결해 준다. 대학교육도 마찬가지다. 입시설명회는 부모의 관심이 더 크거니와 입시전략도 모두 그들의 결정에 따른다. 누가 공부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이들도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부여하고 부모도 아이의 성장과 더불어 독립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교육은 백년의 계획이라고 하는데, 서당교육의 기원을 잘 발취하여 오늘날의 교육환경에 반영되어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면 좋겠다. 이런 신선한 인문학 서적을 읽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나도 저자의 제자가 되어 서당공부를 시작해 보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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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의 소멸과 사교육의 범람을 우려하는 현 시점에서 서당공부가 과연 건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서당공부가 비록 공교육과는 달리 인성과 예절을 더욱 중시하는 편이지만, 이 역시 아이들의 인문학 교양을 위한 스펙쌓기 놀이에 포함되지 않을까? 혹은 아이의 미래를 위한 값비싼 대안교육의 또다른 장소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공교육 과정에서는 한문 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는데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훈장에 의한 서당공부는 자칫 한자능력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평범한 사교육장이 되기 쉽다. 저자 한재훈은 스스로 자신을 전통서당 교육을 착실하게 받은 마지막 세대라고 평한다. 그래서 공자와 자공의 '애례존양'의 고사를 꺼내들며 서당에 대한 애존을 드러낸 것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지금 현재 시행되고 있는 의무 공교육이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현실성, 유용성, 효율성"을 강조하는 교육은 아니다. 현재의 공교육은 그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녕 우리 교육이 현실성과 유용성과 효율성을 지향하는 실용교육이 된다면 오히려 천만다행인 것이 아닐까?
저자는 '갱정유도'라는 민족종교를 믿어 온 집안 가풍에 따라 일곱 살 어린나이에 초등학교가 아닌 서당에 입문한다. 그리고 그후 15년간 한학의 길을 걷게 된다. 전라남도 순천숙당에서 약 5년, 전라북도 남원서당에서 약 6년 그리고 열여덟 살 때부터는 구례군 문척면 토금리에 위치한 '초동서사'에서 공부한다. 초동서사는 겸산 안병탁(1904-1994) 선생이 개설한 서당이다.
저자가 15년간 서당에서 배운 책들을 살펴보면 사자소학, 추구, 학어집,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이다. 나는 서당을 다니진 않았지만 사자소학과 추구, 학어집 같은 입문용 교재만 읽지 않았을 뿐이지 사서삼경은 모두 보았다. 물론 착실히 서당을 다니신 분들처럼 칠서를 줄줄 외우고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서당의 하루 일과는 그날 배운 분량을 그날 소화하는 과정을 무척 중시한다. 그래서 백번 문장을 읽는 백독과 암송이 당일 학습의 기본으로 요구되고, 사대부의 교양인 한시 짓기를 통해 개인 시첩을 엮기도 하고, 칠서를 다 떼고도 여력이 되면 춘추나 사기 등 사서를 읽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습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책의 전반부가 자신의 서당 경험이 주가 된다면, 이 책의 후반부는 참교육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오늘날 공교육이 '위인지학'을 강요하고 있다고 보고 옛날 우리 선조들이 강조한 참공부 '위기지학'의 의미를 되새긴다. 특히 노스승과 어린 제자의 우정 관계에 주목한 점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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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갈라파고스 한재훈
서당공부가 뭘까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재훈님은 (서울출생, 초등학교를 가지 않고 전남순천 순천숙당, 전북남원의 남원서당 그리고 초동서사에서 한학공부를 하였다.) 아버지의 교육철학에 따라 학교가 아닌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어려서 물어보았다고 하지만 선듯 이해 되지는 않는다. 서당이라 하여 전국적으로 몇개가 있으며 어려운 한자들을 늘어 놓을 거라는 나의 예상가는 달리 자신이 서당공부를 하는 행적을 적은듯한 내용들로 시작한다. 서당에서 처음 배우는 것에 천자문이 나올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사자소학, 추구, 학어집,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순으로 배운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어질어질하다. 일어나면서부터 글을 외기 시작하여 자기 전까지 백여번을 읽는다고 하니 외어질수 밖에 없다. 그래도 못하는 이가 있다니 집중력의 차이인가 아니면 어디든 그런 아이들이 꼭 있는건지 모르겠다. 한문쓰기는 서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서당에서는 면추라하여 보기 싫을 정도로 추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아무렇게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는 아니지만 추해서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닌 글씨 잘쓰지는 못해도 함부로 쓰지 않은 글씨, 곧 반듯한 글씨를 말한다. 한학을 공부하는 이가 있었으면 하는 부모님의 말씀으로 대학에 진학하려 했지만 결핵이라는 병이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공기 좋은 곳에서 있다기 서울에 올라와 공부 스트레스와 환경이 좋지 않았던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5년만에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니 초,중,고,대학까지 대단할 따름니다. 서당의 개념은 대안학교라는 것과 같게 봤다. 학부모들이 대안학교를 보내놓고 걱정을 하는데 걱정은 보내기 전에 하고 보냈다면 그 결정이 잘 한것인지 대한 걱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곳에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려고 하는데, 정작 부모님이 걱정하고 흔들린다면 아이는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믿어주고 지켜봐준다면 아이는 잘 커가기 따름이다. 과한 보살핌을 받은 식물들은 도리어 시들기 때문이다.
배움의 의미를 잘 표현된 글귀가 있다. "배우고 시간 나는 대로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부터 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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