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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상 작품집을 몇 년 간 접하지 못하다가 이번 찾아가는 기회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원래 시 수상 작품집만을 구입할까 했는데 함께 묶여 있는 관계로 소설까지 같이 만나게 되었다. 소설은 요즘에도 자주 읽고 있는 것이기에 생경하지는 않다. 현대문학상 수상집이라고 해서 조금 특별하게 찾은 뿐이다. 현대소설, 재료에 따라 얘기가 판이하게 달라지니 작가에 의해 주어지는 얘기를 들으면서 느끼고 즐거워하고 공감하며 떠오르는 것들을 재생해 보면 된다. 언어가 가지는 마력을 충분히 음미하면 된다. 이 소설집도 그렇게 나에게 음미할 것을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꺼이 읽게 되었다.
역시 구입해서 읽는 것이 시간이 구속받지 않으니 여러모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와 만나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좋았다. 내용을 자의적으로 만나며 살뜰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다. 소설은 보통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많고 그것이 윤색을 통해 꾸밈을 입고 언어가 된다. 그럴 때는 수사라는 많은 날개를 달게 된다. 그 날개는 화려함과 기이함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자전적이긴 한데, 조각보다는 생활이 있는 그대로 노출된다. 어찌 보면 표현에서는 거칠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야기를 잘라 먹는 것이나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것이나 읽는 독자가 잘 파악하면서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로부터 시작하는 수상작 <미래의 조각>은 잡다한 얘기들이 그림 밖으로 몰려나고 있다. 오로지 중심이 되는 어머니와 두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로 국한해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지면의 부족도 그렇게 만들어간 요인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야기의 진솔성을 위해서 그렇게 조각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형으로부터 받은 전화, 작중 화자는 그 전화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않는다. 통찰의 언어로 주어지는 언어와 상황을 체득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통의 문제를 통해 인간의 삶을 자기중심적으로 조명해 보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어머니가 병원에 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요번에는 참이라고 형이 말한다. 농약을 먹었다는 것이다. 난 무덤덤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리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처리해 나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형에게 소식을 들은 그날, 바로 움직이지 않고 이튿날 회사에 얘기를 해두고 어머니의 병실로 간다. 어머니는 재생되기가 힘들 정도로 신체가 약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부서져 있다. 재생이나 온전한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어머니를 현실적으로 수용한다. 돌볼 사람이 필요하니 돌보는 일을 하고 모든 일정을 처리해야 하니 성의를 다해 행하는 태도를 보인다. 피붙이의 생사가 이성적으로 인식되고 전개되어 나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보통 불의의 일로 혈연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심리적으로 무척 고통을 받는데,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힘겨운 상황이 객관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어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온전하지는 않지만 퇴원을 하게 된다. 당분간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온전하지는 않다. 말을 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그 독한 약을 먹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어머니는 퇴원 후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는 필담으로 한다. 필담을 위해 노트와 필기구를 갖추어 주니 어머니는 그것으로 하고 싶은 자신의 얘기를 적어나간다. 그 속에는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에 꿈을 함께 적고 있다. 요즘 어떤 드라마에서 얘기한 것처럼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는 말이다. 즉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언어로 대신 살고 있는 게다. 그것은 결국 또 실패로 나타난다. 그런 꿈과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자신의 삶을 죽음이라는 공간으로 몰아가지 않았나 보여 진다. 작중화자는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긍정주의자라고 얘기한다. 죽음까지도 보다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것이 수면제를 먹고, 농약을 먹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본다.
어머니는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어루만지고 그것은 언어가 된다. 현실적으론 몽상과 같은 것이라 보아도 되겠다. 그 속에서 몰입해 오지 않을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이겨나가는 삶, 어찌 보면 도피라고도 할 수 있는 삶이 생의 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미래의 조각을 쥐고 시간을 걷고 있는 게다. 그것은 소설이요, 그것은 단편적인 꿈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무너지지 않고 긍정의 마인드를 가지면서 생이 유지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착품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담겨 있다. 이런 책은 많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어 좋다,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 그 속에서 공감하는 심리를 지니고 삶의 방법을 깨우쳐 나가는 읽기, 언어를 만나는 행복한 하나의 길이 되겠다. 또한 삶의 소중한 길도 되리라 생각한다. 책이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진한 냄새의 향취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인생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심 이 모든 일이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지나갈 일, 어떤 일이 일어나고, 모두가 놀라고, 당황하고, 겁에 질리고, 혼란을 겪고, 자책을 하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지난 뒤 예전의 삶을 되찾게 된다는 의미에서 이 일은 한때의 ‘해프닝’으로 기억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지금은 중환자실에 있지만 딱 한 달 뒤로 시간을 돌리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남은 삶이 불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과제가 남겨져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p20
작중화자의 무심한 듯한 태도가 적혀 있다. 그것은 대인관계에 있어, 일을 만남에 있어 삶의 한 모습이리라 생각한다. 상황에 대한 감정의 분출이나 격렬한 심리의 흐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잔잔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이성적인 생각으로 대응하는 결과 때문이다. 큰일이거나 감당이 안 되는 일이데 그런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매사가 그렇게 인식하는 삶의 태도 때문이다. 요즘 세상의 사람들의 행태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다. 부모, 형제 등의 큰일도 객관화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나타나는 주변인들의 태도, 오늘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 거짓으로 하는 곡이나 타인의 싸움을 즐겨하면서 구경하는 것도 일맥상통한 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것들이 개인적으로 미래의 조각을 만들며 살아가는 삶으로 귀결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내 경우도 마찬가지의 의식상태와 행동이지만, 그래도 이러한 상황이 스스로를 허허롭게 한다. 심도 있는 주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미래라는 시간과 엮어 독자들이 숙고해 보게 하고 있다. 다 읽고 난 후, 언어들에 입맞춤하면서 내 삶의 문제를 재고해 보는 기회를 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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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권위 있는 수상 시집이고 지난 많은 시간 가까이 했었던 추억을 가진 작품집이다. 그러다 소설과 문학비평 쪽으로 마음을 쏟는 시간을 가지면서 잠시 떠나 있었던 시집이다. 그런데 올해에 들어 갑자기 시를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 오랜만에 우리나라의 시의 흐름을 살피고자 생각하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해마다 발간하는 현대시 수상집을 찾게 되고 만나게 되었다. 제목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이루어진 김복희 시인의 수상집이다. 물론 다른 수상 후보자들의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상집은 수상자를 중심으로 읽게 되는 게 보통이다. 나도 우선 수상자의 작품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참 시를 가까이 했던 시간들이 많았다. 언어의 리듬성, 간결함과 상징적인 표현이 좋아 이런 유형의 문학 장르에 마음을 빼앗겼던 지난 시간들이 있었다. 생활이 리듬을 가진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독서와 습작을 통해 노력을 했었고, 마음에 들지 않은 언어들을 만나면서 허전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되고 언어에 자유를 얻게 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요즘은 많은 일상을 리듬을 가진 언어로 표현하면서 스스로 행복해 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면서 만나는 김복희 시인의 수상작은 우선 어려웠다. 언어는 일상적인데 그 언어가 지향하는 곳을 찾아가는 연결성이 무척 난해하게 다가왔다. 쉽게 읽혀지는 작품은 아니었다. 작정을 하고 의미를 찾아야 하는 작품이 아닌가 여겨졌다.
시인의 작품엔 천사가 많이 등장한다. 천사는 어떤 이들의 가슴에서만 살아있는 존재다. 어떤 이가 아닌 사람들은 그 존재가 쉽게 다가들지 않는다. 그 미지의 존재가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 현실 속을 내왕한다. 그들의 시선으로 만나는 세계가 일상적인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심리 안에 들어가기 전까진 쉽게 언어가 살아서 머물지 않는다. 억지로 그들의 세계를 접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상상하며 다가갈 때 언어가 마음을 열고 다가든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의 의미가 행간에서 뚝뚝 떨어져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그 모래알을 줍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모래가 시멘트와 결합해 하나의 구조물이 되었을 때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나에겐 그 구조물이 쉽게 보이진 않았다. 부분적으론 방도 보이고 거실도 보이지만 전체적인 집과 그 부분들이 잘 조각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도 되고 인정도 받은 구조물이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고 인정을 해나가는 방법을 통해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독서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여겨도 참 어려웠다. 언어를 연결하는 나의 시멘트가 부족한 모양이다.
시인의 세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의식의 날개가 미지의 공간을 맴돌고 있다. 그가 만나는 존재는 떠나보낸 자들과 남아있는 자들 사이에 있다. 떠나보낸 자들은 그렇게 두면 될 것인데 그것을 현실 속에서 끄집어내어 아파하고 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라져간 것들에 잡혀 행동거지가 자유롭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떠나보낼 자들은 떠나보내야 하는데, 떠나가지 않은 의식이 언어에 박힌다. 그 언어가 날개가 되고, 날개는 곳곳에서 상처가 된다. 상처는 다시 언어를 통해 치유가 되고, 언어는 다시 날개를 만든다.
의식의 세계를 형상화하긴 쉽지가 않다. 그것이 사람들이 다녀본 길이 아니면 더욱 그렇다. 그런 것들은 넌지시 나타낼 뿐이다. 그것을 구체화할 때 어려워진다. 언어를 가지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 그 언어를 소유한다. 그러기에 타인이 가진 경험과 지식이 담긴 언어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아무리 일반화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멋진 그림이 아니면 더욱 어려운 것이 언어의 그림이다. 난 시인의 언어 그림을 만나면서 내 의식의 한계를 많이 경험했다. 내가 생각하지 않거나 내가 만나는 의식의 거울과 매우 상이한 세계를 현실의 언어로 조각하고 있는 매체를 만나면서 많은 당혹감을 가졌다. 오히려 무력감을 느꼈다.
비밀은 별건 아니고, 네 가슴속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하고 사진을 찍은 다음 네 가슴 속에 놓아두는 거야 그 위에 옷 더미와 휴지와 먼지가 또 쌓이겠지 그게 네 가슴이고 그게 내가 기꺼이 살고 싶은 네 가슴이고 그게 내가 몰래 쓴 시고....... 나는 어쩐지 속이 얹힌 것 같아 차가워진 손을 살살 주물러본다
-네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시인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으로 일어나는 스스로의 모든 일상이 정제되어 시가 된다. 그 위에 얹히는 문제들은 모두 현실 밖의 세계다. 그 세계를 현실로 가져올 때 그 무게가 대단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살아있음으로 가지는 열망이 아닐까? 천사도, 천사를 통해 만나고자 하는 꽃도, 천국의 의미도, 무거운 울타리가 되어 옆에 머문다. 그렇게 나에겐 다가왔다. 시인이 존재하는 세계와 만나는 세계가 무척 낯설게 조우하고, 그것은 거리만큼이나 이상한 충격으로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찬찬히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후보자 7 분의 작품들도 더불어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
| 수상 작품집이 전해 주는 매력이랄까, 최근 다양한 곳에서 발표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엑기스만을 접하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며 이 작품 정도는 꼭 읽고 가야 한다고 알려주는 가이드같기도 해서 뭔가 한 시대를 지나오며 또 지나가고 있는 이 순간 다양한 간접 경험들을 통해 세상과 호흡하고 있다고 느끼게도 한다. 그만큼 수상 소설집을 접할 때마다 최근 사회 흐름과 환경을 돌아보는 작가들의 관심사항도 함께 공유해 볼 수 있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곳에까지 생각을 확장해 볼 수 있고, 뭔가 정리되지 않은 머리 속과 마음의 한 구석이 촤르륵 정리되는 기분이다. 매해 발표되면 빼놓지 않고 읽고 있는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또한 나에게 그러한 큰 작용을 하고 있는 책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그저 과거의 나에 얽매이지 말라고, 지금껏 내가 쌓아온 어줍잖은 경험으로 잔소리나 늘어놓지 말라고, 요즘 내가 지나친 수많은 장면 속에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부분들이 있다고, 그렇게 나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다양한 곳에서 이미 접했던 작가들도 있고, 새롭게 접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 호흡으로, 같이 공감해 가며 지금 이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그 느낌은 늘 새롭고 활력을 가져다 준다. 대상 수상작인 정영수 작가의 「미래의 조각」은 어머니의 자살 시도를 계기로 그 곁을 지키는 소설가인 둘째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인생과 가슴에 간직한 마음을 그려가고 있다. “과거가 괜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미래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낙관이 가능한 이유는 미래는 언제까지도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채로 멀리 있다.” <작품 中> 어린 시절 원치 않은 임신으로 가정을 꾸리고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채 살아 왔던 어머니가 지금을 버티는 힘은 바로 미래에 대핸 ‘낙관적 기대’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자신의 꿈으로 변주하고, 자신의 생각의 나래를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견뎌내고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은, 아직 나에게 ‘다가오지 않은’ 그 실체 모를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정작 글을 쓰는 업을 전문으로 하는 아들은 한마디도 쓰지 못하지만, 자살 시도 후 어머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글로 쏟아내고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큰 존재 이유임을,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는 듯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그려내는 과거와 현재, ‘낙관적인’ 미래를 재구성하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허황됨에도, 말도 안되는 공상에 머물지라도, 지금의 나를 어느 곳에도 탈출구가 없고 꽉 막혀 버린 이 순간을 버텨낼 힘임을 사실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바로 그러한 ‘낙관적인 미래’가 바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일 것이다. 앞선 ‘미래의 조각’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아들이 화자로 등장한 듯 ‘눈물 주머니’를 달고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정영수 작가의 자선작 「일몰을 걷는 일」.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던 시기는, 지나고 나니 삶에서 그리 길지 않은 잠시의 방황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며 (…) 무의미라는 거대한 우주의 실재를 마주한 세상 모든 존재를 애처로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누추한 자기 연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울음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작품 中>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작품 속 화자는 글을 쓰지 못함에,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 주머니’를 달고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원인을 찾기 위해 상담을 받게 된다. 원인과는 동떨어진 채 진행된다 여겼던 상담 과정 속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거쳐온 과거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진짜의 자기 감정을 털어 놓는 다는 것에 대해 깨닫고, 더 이상 눈물 주머니를 통해 여기저기 눈물을 쏟지 않게 된다. 과거는 그저 ‘미래의 조각’일 뿐임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는 듯 하다. 미래를 이루는 조각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 현재를 나의 목소리와 생각에 맞는 진실된 조각으로 채워가고, 그런 후에 ‘미래의 조각’들도 더 의미가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애써 무언가를 쓰고, 몇 사람이 그것을 읽어주고,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 목소리가 닿는 거리에 있어 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감사를 전한다.” <정영수 작가 수상소감 中> 소박한 수상 소감 속에 담긴 정영수 작가의 진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슨 거창한 의미가 연유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고, 또 그것이 다시 글을 쓰는 힘이 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 속에 그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글을 쓰는지 느껴본다. 그러한 소박한(?) 글쓰기의 소중함, 그리고 소박함을 넘어선 영향을 미치는 작품의 여운까지 앞으로도 진심을 다해 펼쳐 낼 정영수 작가의 ‘미래의 조각’들을 계속 확인하고, 공감하고 싶어진다. 소설 보다 시리즈에서 통해 접했음에도 다시 새롭게 읽었던 김지연 작가의 「반려빚」은 소위 청년 세대가 겪는 현실에서의 어려움과 고민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왜곡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지를 이름도 귀여운 ‘반려빚’이라는 개념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없이 작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 부피도 질량도 거의 없다시피 한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반려빚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 역시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듯 정현은 자신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꿈결에 생각했다.” <작품 中> 前 애인과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마련했던 보금자리가 ‘전세 사기’를 당하고, 사랑하던 사람과도헤어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반려빚’ 뿐인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아프고도 힘겨운 ‘웃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저 그들이 게을러서, 너무 편하게 커서, 의지가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누구보다 처절하게 열심히 살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철저히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감에도 지금의 청년 세대는 희망과 욕구가 강제로 거세된 듯 하다.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믿음’이라는 화두를 다시 생각해 본다. 마음으로는 너무도 믿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원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마음’. 누군가의 마음도 한 번 더 어떤 의도가 있지는 의심하게 되고, 당장 내가 겪어야 할 현실의 어려움으로 누군가에 선뜻 배려와 아량을 베풀기도 힘들어져 버린 상황. 마침내 ‘반려 빚’이 사라져 버리는 ‘0’이 된 현실에서도 그저 ‘0’으로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고, 그럼에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러한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가능한 것인지 묵직하고도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작품이었고, 무엇보다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간 문장이 너무도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한때는 사랑했던 애인과 또한 더 절절히 깊은 마음을 나눴던 애인의 누나와의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돼 버린 지금 관계의 균열을 가져오던 과거를 반추하고 있는 문진영 작가의 「덜 박힌 못」. “한 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나를 덮쳐오는 느낌. 지구보다 더 무거웠다. 문득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지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결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있는 힘껏.” <작품 中> 누군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 속에 담긴 ‘진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가 상대방에게도 같은 의미인지, 무엇보다 내가 이 관계에서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모든 순간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저 안타까움에, 약간의 동정 의식과 선민 의식을 지닌 채 도와주고, 시혜를 베풀겠다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 자체로서 존중해 주고, 그 사람의 현재를 인정해주고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 그저 내가 편하자고 관계를 그런 방향으로 이어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본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릎 위로 날아와 앉은 참새’처럼 그렇게 가볍게 잠깐 머물렀다 언제든 날아가버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대하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본다. 사람과의 관계란 서로가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응원해주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모든 관계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주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진심’을 다해,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덜 박힌 못’처럼 누군가에게 뿌리 내리지 못하고 ‘덜 박힌’ 관계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박힌’ 그리고 나에게도 ‘박혀진’ 그러한 관계가 되기 위해 진심을 다해 보기로 한다. 연명치료 중인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그저 일하는 곳에서 장례식장 비용을 할인받기를 바라는 아들의 심정을 다룬 박지영 작가의 「장례 세일」. 사회적 관념으로 보면 ‘싸가지’ 없는 불효자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불효자라는 욕을 먹으면서까지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처지를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이런 애도도, 이런 생각해본 적도 없는 선의도 있는 거라는 걸 현수는 처음 알게 되었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애써 하는, 어떤 가격을 매겨도 공정하지 않은 완벽히 불공정한 선의.” <작품 中> 소위 장례식의 흥행 성공을 위해 시작했던 아버지와 인연을 맺었던 분들에게 사전에 감사를 겸한 인사(이 또한 부고 소식 이후 부의금을 수금하기 위한 행위)를 전하는 것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되돌아오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연들, 내 생각과 계획에서 벗어난 일상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부의금을 내야 할 인연으로만 한정 지어졌던 사람들이 과거의 그 인연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아파하고 공감해주는 모습들이 가져다 주는 힘이 실로 크다. 현실적 어려움에 궁여지책으로, 어찌보면 철없는 행동으로 시작했던 행위들이 진심으로 되돌아오고, 특히 진심 어린 미안함과 진정성 있는 애도를 받으며 느끼게 되는 사고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진심’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실제 현실에서의 삶이 모두 ‘진심’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인가에 진심을 다한 다는 것 그것의 소중함을 다시 느껴본다. 대학 동기였던 두 여자가 서로 다른 환경으로 살아간 채 우연한 거짓말로 다시 관계를 맺고 결국에는 관계의 파국을 보여주고 있는 백온유 작가의 「회생」. “있잖아. 나는 뭔가 탕진하고 싶은 것 같아. 돈이든, 시간이든, 마음이든 말이야. 빨리빨리 쓰고 싶어. 뭐든 나에게 주어진 걸 다 소진하고 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 지루함도 끝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들어.” <작품 中> 선뜻 이해되지 않는 전개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진심’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온 사이지만 지금 처한 현실에서의 위치는 전혀 달라져 있는 두 사람. 사소한 거짓말을 계기로 둘은 대학시절의 관계를 떠올리며, 일방적으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친구의 호의와 그런 호의를 점점 무뎌진 채 수용하는 화자. 하지만, 결국 ‘진심’을 담아내지 못한 관계는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되고, 결국 어떠한 사과나 화해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봉합되지 못한 채 그런 상태로 관계는 정리되게 된다. 한번 상처난 마음을 봉합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의 백 번의 진심보다는, 아슬아슬한 거짓을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먼저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함을, 그리고 한번 상처난 마음은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는 실제 현실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제 거짓이 아닌 ‘진실된 나로 살아가고 있다’고 아무리 항변해봐야 거짓을 당한 마음에는 선물로 받은 식기세트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듯 (우연을 가장한 고의인지도) 결국 파탄이라는 결론 외에는 다른 길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새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 독립하는 의미를 지닌 ‘이소(離巢)’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이주혜 작가의 「이소 중입니다」. 누구라고 명명되는 이름이 아닌 사회적으로 활동하는(드러나는) 직업으로 호칭되는 세 사람은 반려견이나 외동딸, (특이하게도) 전 남편의 아버지 등을 부양하고 있으면서, ‘돌봄’에 대해 버거워 하거나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덤덤하게 각자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철학자를 만나러 땅끝으로 가는 세 사람의 여정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고민과 힘겨움 속에서도 우회하거나 후퇴하지 않고, 특히 세 사람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삶의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가의 차 트렁크에 실린 (결국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물컹할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한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짐은 결국 그들이 맞닥뜨리는 삶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는가. (…) 그리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내일을 향해 무심히 걸어갈 것이다.” <작품 中>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 날아가는 ‘이소’ 과정에서 새는 정상으로 도약할 수도, 하지만 날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땅에 떨어진 새를 함부로 (도움이라는) 손길을 주면 평생 독립할 수 없는 새의 운명처럼 우리의 삶과 인생도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삶을 헤쳐나가야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내일을 향해 무심히 걸어갈 것’이라는 말이, 그리고 그 길에 누군가와의 동지적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 크게 다가온다. 코로나와 비슷한 질환으로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한 40대 여성이 18살의 어린 여성과 함께 일주일을 보내며 변화되는 생활을 보여주는 정선임 작가의 「이후, 우리」. “사랑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서 목적지에 도착해 서둘러 내려놓고, 가벼워지고 싶은.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 승희는 과거를 추억하면 후회가 가득하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되도록 오늘만을 생각했다.” <작품 中> 억지로 일주일간의 동거를 시작하며 전혀 다른 생활 패턴과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생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친절과 발랄함을 무기로 가만히 있고 싶은 나의 영역에 무작정 침범해 오는 상대방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무례하거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련만 그도 아니니 더욱 그 일주일 간에 고역일 거라 여겨본다. 하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변화되고, 스무 살도 넘는 나이 차이임에도 어느 덧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스며드는 모습(물론 상대방도 또한 스며들었을 것이다)이 왠지 모를 미소를 짓게 한다. ‘그래, 이제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숨지 말고 천천히 본인의 세상으로 나가보세요.’라고 응원하게 되는 미소처럼. 뭔가를 계획하지 못해 그저 하루를 소진해 버리는 생활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불안해서 시도조차 못해 보고 숨는 것보다는 그럼에도 한번 ‘해보는 것’의 중요함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 뭐 한번 헤보지’라며 담대하고, 쿨하게 맞서 보는 것 그것 또한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일 것이리라.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남은 생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정용준 작가의 「바다를 보는 법」. “죽음도 그런 게 아닐까. 영혼이 있다면 바위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움직일 수 없지만 움직이고 싶고 마음이 없지만 생각하고 입도 없으면서 말하고 싶어 하는. 그런데 어둡고 딱딱하고 쓸쓸한.” <작품 中> 세상 억울할 법도 하다. 그저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온 것 밖에는 없는데 갑작스러운 뇌에 종양이 있다는 판정과 함께 6개월 여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은 화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하기로 한다. 자신이 써 놓은 시나리오에 인터넷을 통한 단원 모집으로 공연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또 치열하게 소진해 가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우게 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으로 ‘믿음ㆍ희망ㆍ사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의 ‘진심’ 어린 관계를 통한 믿음과 내일의 삶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한 현재의 충실함, 그리고 확장된 의미의 사랑까지 이것들이 바로 세상을 살만하게, 또한 견뎌내 보게 하는 힘이리라 생각해본다. 작품에서도 나오지만, 삶에 대한 희망과 누군가 나에 대한 믿음과 내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들이 바로 삶의 의지를 심어주고, 이를 통해 당초 예정됐던 삶의 시간인 6개월을 넘어서고 또 다시 새로운 6개월의 시간을 부여받게 된다. 뭔가를 희망하고 열망하고, 그로 인해 의지를 불태우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믿음과 사랑을 나눈다면 이 또한 멋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아울러, 작품 속에 등장한 시나리오 ‘바위들’ 역시 예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며 대사들이 가슴 속에 깊이 다가왔다. 이번 수상 작품집을 읽으며 나에게는 ‘진심’이라는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 어떤 것을 진심으로 치열하게 해 나간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을 보여지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다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까지 ‘진심’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사람 사이에서 ‘진심’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고, 무언가를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은 내 삶에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고, 모든 것에 진심을 다한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내 삶을 진정으로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진심’을 다해 모든 것들을 대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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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맞는 책을 발견한 것 같아요. 우연히 가게 된 도서실에서 이 책이 꽂혀 있길래 읽어보았는데 구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완독을 한 것이 아니라 책에 대해서 길게 말할 순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작가님들을 많이 만나게 된 것 같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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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수 「미래의 조각」 “이것이 영화였다면 점프 컷으로 내가 불 꺼진 중환자실 앞 복도를 서성거리는 장면으로 연결되었겠지만······” (p.14)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형의 전화를 받은 다음 이와 같은 문장이 따라 붙는다. “미래를 바라보는 그러한 낙관성은 어머니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모두 괜찮다’라고 말함으로써 긍정성을 강화하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두 괜찮을 거야’라고 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낙천성을 유지하려면 현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거나 합리화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낙관성은 막연한 믿음만으로도 가능했다. 어머니는 신앙이 없었지만 대신 미래를 믿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언제나 현재의 좋은 것을 손에 잡기보다 미래에 도래할 좋은 것을 기다리는 일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p.24) 그러니까 나는 곧바로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방향을 잡는다. “... 어머니가 괜찮을 거라는 말, 어머니에게만큼 나에게도 나만의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그리는 괜찮은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과거가 괜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미래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낙관이 가능한 이유는 미래는 언제까지고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실패한 과거 속에도. 그러니 그 말이 미래 시제로 존재하는 한,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믿기로 한다.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공유하는 유일한 자원인 것처럼.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염려와 달리, 아무 걱정도 하지 안았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채로 멀리 있다.” (p.37) 그렇게 기억과 기억 사이를 요리조리 헤쳐 위와 같은 현재에 도착하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작가를 현재 진행형으로 아주 좋아하고 있(는 편이)다. 정영수 「일몰을 걷는 일」 “... 어느 순간부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울음을 터뜨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슬픈 영화를 볼 때나 조금 눈물을 흘렸다.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던 시기는, 지나고 나니 삶에서 그리 길지 않은 잠시의 방황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의미라는 거대한 우주적 실재를 마주한 세상 모든 존재를 애처로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누추한 자기 연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울음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p.61) 소설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오는 ‘그’ 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은 바로 그 ‘그’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던 울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며 끝난다. ‘그렇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나의 바람이 아니라.’라는 문장과 함께... 김지연 「반려빚」 “그날 밤 꿈에서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목줄을 한 쪽이 정현이고 목줄을 쥔 쪽이 반려빚이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했지만 개와 산책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정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져 반려빚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카페에 잠깐 들를까? 반려빚은 정현이 꽤 가엽다는 듯이, 그러나 목줄을 쥔 자로서 단호해야만 한다는 듯이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에 커피 믹스 있잖아. 정현은 카페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꽤 오래 낑낑거렸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pp.70~71) 반려빚이라는 조어가 주는 블랙 유머의 강도가 세다. 서울 시민의 1인당 가계 부채는 1억이 넘고, 자영업자의 1인당 부채는 (2022년 기준) 1억 8천만 원이다. 혼자 사는 이이이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이든 직장인이든 사업자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가 (불)공평하게 부채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참으로 찌질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소설이다. 문진영 「덜 박힌 못」 “꽤 오랫동안 경호와 내가 헤어진 게 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우리가 헤어진 건 우리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언니 자신이듯이. 언니가 뺑소니범처럼 나를 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쩌면 그냥 참새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언니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있던.” (p.111) 나는 경호와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아 경호의 언니 경신을 소개 받았다. 그리고 경호보다 경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고 그러다가 경호와 헤어졌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러 경신에게서 내게 연락이 왔다. 소설은 그 6년 뒤의 시간을 짧게 다루고 있다. ‘참새만큼 가벼웠던 나의 진심’을 담아서... 박지영 「장례 세일」 “그러니 진짜 팔아야 하는 건 독고 씨의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 가치 없는 삶이었다. 독고 씨는 그렇게 예비된 애도객들의 가치를 높여주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애도 가격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상기시켜야 할 것은 독고 씨의 그래도 싼 죽음이나 그에 대한 설픔이나 연민, 죄책감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인품을 지닌 과거의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뿌듯함이었다. 그리하여 독고 씨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감사한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만나게 되기를, 보여줄 기회를 희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p.147) 수상집에 실린 소설들 중 가장 무겁게 시선이 가는 소설이었다. 죽음을 다룬 소설들 중 이토록 유니크한 시선의 소설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백온유 「희생」 대학 동창인 수영과 연지의 이야기인데 색다르게 계급적이다. 물건을 주고 받는 지역 주민의 온라인 마켓이 등장하는데, 물건이 넘쳐 넘기는 자와 이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이들로 나뉘는 작은 세상이 그 안에 있다. 그 양쪽에 수영과 연지가 있는데, 문제는 양쪽 모두가 허위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느 한쪽에 속한다기보다는 애매하게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을 것인데,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고 슬프다. 이주혜 「이소 중입니다」 “시인과 번역가와 소설가는(데뷔 연도순) 점심을 먹으려고 낯선 도시 톨케이트로 들어섰다...” (p.205) 이들은 철학가가 새로 지었다는 육지 끝의 단층집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이다. 얼핏 읽다 보면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나, 싶다. 일상은 흐릿하고 상념은 또렷하다. 정선임 「이후, 우리」 “유튜브 알림이 떴다. 새로운 브이로그가 올라왔다. 카메라는 빈 나뭇가지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꽃이 진 자리를. 승희는 좋아요, 를 눌렀다. 사람들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모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오늘 밤이 바로 그 밤이길 바라며 승희는 어딘가를 향해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p.244) 코로나의 시절, 의 마지막 즈음, 어떤 집단 유폐의 시간들, 안에서 만났던 승희와 유정의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적어 놓았다. 정용준 「바다를 보는 법」 “... 한성이 쓰고 싶은 단어와 표현은 예외 없이 삭제됐다. 복잡해선 안 됐고 관점이 둘 이상이어도 안 됐다. 모순 없고 단순하게, 표면적이 빠르게. 반올림하거나 버렸다. 1.8은 2... 3.4는 3.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은 좋거나 싫은 것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사실이 아닌 사실과 진실이 아닌 진실을 써야 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거짓보다 나쁜 근사값. 한성은 그것이 거짓말보다 더 질 나쁜 거짓 같았다...” (p.251) 그리고 한성은 지금 사람들을 모아 연극 연습을 하고 그 연극을 작은 무대에 올린다. 거기에 2와 3을 강요당하지 않고 1.8이나 3.4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향하는 한성의 행위가 있다. 정영수, 김지연, 문진영, 박지영, 백온유, 이주헤, 정선임, 정용준 / 2024년 제69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현대문학 / 299쪽 /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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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청년 윤동주가 「쉽게 씌어진 시」에서 고백했듯이 인생이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는 것, 문학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이 대체 이 시국에 무슨 소용과 쓸모,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회의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드는 요즈음이다. 일상을 영위하기가 힘들듯, 그 어떤 책도 읽어내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한강의 평생 화두였다는, '글쓰기는 구원이 될 수 있는가'와도 맞닿아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쓰고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과거와 연대하고, 현재와 조우하며, 미래를 꿈꾼다. 그걸 시인 김복희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알았던 사람들의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인 셈이다.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원하고,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그 가능성을, 아주 실낱같을지라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김복희, 권박, 김리윤, 김은지, 민구, 박소란, 서윤후, 신동옥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개인적 호불호와는 별개로, 상을 받을 만한 시인들이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청년 윤동주가 시인 윤동주로서 다음과 같이 시를 맺었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시대의 어둠을 조금씩 내모는 현재를 조우한다. 우리의 미래이기도 한 사람들을.그 들의 선의와 신념과 열정을. 우리는 그렇게 연대하고, 서로를 구원한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부분 |
![]() 기다리던 정영수 작가님의 소설이라 주문했고, 잘 읽었다. 미래의 조각, 일몰을 걷는 일 - 정영수 7편의 수상후보작 작품들 ![]() 소설 보다 종종 구입해서 읽었는데 겹치는 작품도 있었고, 하지만 소설 보다의 매력이 있다. 작가님 인터뷰가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점은 좋았다.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 색깔이 뚜렷했고 매력이 있어서 아껴 읽었다. 정영수 작가님의 소설이 궁금해서 구매했고, 이번 역시 또 좋았다. 37p. 과거가 괜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미래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61p. 그는 무의미라는 거대한 우주적 실재를 마주한 세상 모든 존재를 애처로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누추한 자기 연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울음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담담하고, 담백하고, 다소 밍밍한 느낌이 있었는데 곱씹을수록 다가오는 게 남달랐다. 두고 두고 읽게 될 것 같다. 이런 틈이 있는 책들이 참 좋다. 박지영 작가님의 장례세일, 이주혜 작가님의 이소중입니다. 정말 인상 깊었다.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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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소설을 좋아하는 직장 동료에게 선물해주려고 샀습니다. 단편 소설이 알차게 수록되어 있고, 현대 문학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습니다. 단편소설이지만 술술 읽히는 종류의 작품들은 아닌 듯 합니다. 기회가 되면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