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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의 기말고사 날짜가 정해졌고, 범위가 나왔다. 큰 아이 학교는 진로적성 관련 시범학교라 1학년 때엔 시험을 딱 한 번. 1학기 기말만 본다. 나머지 시간은 진로와 관련된 활동을 해야 하고, 그걸 보고서로 작성해야하기에 다른 학교 보다는 공부 쪽으로 좀 느슨한 편이다. 그런 아이가 기말을 본다기에... 부모 입장에서 보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해주길 바라지만.. 아이의 일은 정말이지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공부를 강요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것 또한 바라지 않는 게 부모 아닐까? 엄마들 모임을 하고 나면 늘.. 내 방식에 대한 말들이 많다. 훗날 후회하게 될 거라는 그 말에서 때론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중심을 잡고 싶다. 아이의 인생은 누구도 아닌 본인이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것..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억지로 강요한다고 해서 그 일이 아이에게 맞춤이 되진 않는다는 사실. 다시 한 번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윤수인은 친구를 죽였다. 이후 그녀는 자신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한 채 한 쪽에 밀려나와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예순이 넘은 여자가 찾아온다. 죽은 딸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며 윤수인의 아들을 유괴한 것. 아들을 바라보며 사는 윤수인은... 사실 김선주였다. 김선주라는 이름을 벗고 싶었던 그녀...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아버린 예순 넘은 여자 권희자는 이십년 전 일을 끄집어내어 왜 그때 그랬는지 말하라고 한다. 자신의 딸 나림이. 나림이를 내 놓기 전에 아이를 돌려줄 수 없다 말하고, 윤수인은 괴로워한다. 이십년 전 그녀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고, 왜 복수를 하려는 것 일까?
가끔 사람들은 말한다.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하지만 때론 어른들이 보는 아이의 모습과 아이들이 보는 아이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일수 있다는 사실. 가정환경이 좋고 모범생인 아이가, 가정환경이 나쁘고 평범한 아이를 왕따 시킬 때엔 당하는 아이 입장은 괴롭다는 사실을 어른은 알까? 겉으로 드러나는 모범생 포스. 평판 좋고 공부 잘하고, 심지어 피아노까지 잘 치는 아이라면? 아이들 앞에선 다정하고 따스한 모습을 하지만 둘이 있을 때엔 악마로 변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죽이는 것밖에 없었을까?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고 떠난 다른 나라. 아이의 심리적 아픔은 치유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린 수인. 하지만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 일까?
아이를 지키려는 자와 아이를 이용해 복수하려는 자. 모든 것을 떠나서 복수의 대상이 서로가 아니라 아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누구를 위한 복수일까? 복수를 하려 맘먹게 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3번의 유산과 다양한 시도. 그리고 늦게 낳은 아이.. 자신의 꿈을 대신 실현시켜줄 아이라 믿었던 딸아이.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면서 그들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아이를 꿈의 수단으로 일삼고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 지나친 관심과 무관심. 아이를 키우면서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를 적당히 지켜야 하는 것. 그게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읽는 동안 많이 아팠다. 어떤 일로 인해 파생된 그들의 삶이 너무 많이 엇갈리고 상처 받은 것 같아 슬프다. 마음 안에 복수를 담고 사는 것. 복수가 아이를 기억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비극이 아닐까? 복수는 복수를 낳고, 아픔은 아픔을 간직하게 된다. 무심코 행동한 것이 파급력을 발휘해 또 다른 사람을 아픔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멸종 직전까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잃은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아이였을 경우 그 아픔이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아픔이 살아있는 사람을 더 괴롭게 한다면..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복수라는 것. 딸을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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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남겨진 자에서 떠난 자로 생의 자리를 바꾸게 된다. 남겨진 자의 삶은 떠난 자의 죽음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태어난 순서를 뒤집은 죽음,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생이 마감된 죽음은 폭발적인 힘으로 남겨진 자를 몰아붙인다. 그런데 이 둘이 하나 되어 불어닥친 죽음이 있다. 자식의 피살이 그렇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를 생지옥으로 밀어넣고도 모자라는지 남은 시간마저 파괴한다. 자연사도 아니고 죽임을 당했단다, 내 자식이. 『멸종 직전의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룬다. 부모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은 소설로 읽히지 않고 실제 있었던 이야기 혹은 경고로 읽혔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옆의 아이가 우리 아이를 때려서 자신이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간단한 문자였다. 문자를 보는 순간 피가 솟구친다는 게 이런 느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어떻게 됐길래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을까?’ 난감해 하셨을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됐지만 이토록 건조한 문체로 보내실 수 있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밖에서 하던 모임이 끝나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가다 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교문에서 만난 딸 아이는 덤덤하게 말하며 괜찮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문자나 전화가 오면 혹시 안 좋은 일인가 싶어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작은 일도 자식과 연관되면 부모에게는 특별한 일일 수밖에 없다. 부모라는 자리가 그렇다. 이 책은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마치 한편의 장중한 서사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한다. 20년이 지나도 현재진행형인 과거와 그에서 비롯된 상처와 망각은 부모가 생을 끝내야만 지워지고 잊혀질 수 있는 일임을 드러내준다. 이세황과 권희자는 아직도 자신들의 딸인 나림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버릴 수 있었을으리라. 그러나 허무하게 지고 말았고 나림이의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시간도 정지되었다. 나림이를 죽게 만든 김선주를 향한 그들의 촉수는 그래서 아직까지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림이의 죽음은 피살이라기보다는 김선주를 방패막이로 한 자살에 가까웠다. 선주가 휘두르려다 멈칫한 손을 나림이가 붙잡고 눌렀기 때문이다. 나림이가 죽으면서 나림이네와 선주네는 장마철의 축대마냥 붕괴되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나림이 엄마의 과욕이 부른 비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림이 밖에 없었, 그 죽음은 엄마에게 의문만을 남긴채 증오를 양산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라는 엄마의 강요에 손가락 마비까지 온 나림이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인 선주를 그간 은근하고도 야비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선주가 나림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나림이는 해방을, 선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나림이의 죽음으로 권희자는 엄마의 기쁨을 영원히 잃었고, 이세황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채 고통을 달래며 산다. 선주네는 살인자 가족이 되어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가고, 선주는 그곳에서 ‘피자 한판 사만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며 연명한다. 사만다가 된 선주는 미혼모 윤숙이가 되고 아들 안도를 낳은 후엔 수인이가 되어 새 삶을 시작한다. 안도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권희자는 죽은 남편의 방을 정리하며 선주가 한국에 있음을 암시하는 다잉 메시지를 본다. 사람의 생명을 앗은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나림이의 죽음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채 증오만을 키운 권희자는 안도를 유괴해 자신의 가게에 둔 후 선주와 거래한다. 나림이를 죽인 이유를 말해주면 안도를 데려다주겠다고 말이다. 모든 것에 지치고 만 선주는 권희자를 겨누던 줄칼을 자신에게 돌리고, 권희자는 선주의 얼굴에서 그토록 그리던 나림이의 얼굴을 보게 된다. 나림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권희자. 그녀는 그제서야 자식을 생각하라며 어미의 본성으로 칼을 빼앗는다. 그 시각 안도는 가게에서 홀로 나와 집으로 오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때때로 아이를 지치게 하는 엄마들을 볼 때가 있다. 아이가 어리다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엄마들 말이다. 그 엄마들의 아이는 초등학생인데도 이미 탈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엄마들만 그런가 하는 자문이 책 읽는 내내 계속 일었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바람을 강요한 적은 없는지, 더 솔직하자면 내 안의 권희자는 없는지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권희자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림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 방식이 아이를 그토록 힘들게 할 줄 알았다면 즉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처참한 결과가 나을 때까지 밀어부친 것이다. 댓가는 혹독했다. 아이가 죽었고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었으니까. 또한 자신은 왜 이런 일이 생긴지도 모른채 상실과 증오를 통해 지옥을 맛보아야 했으니까. 참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설이었다. 사실을 대면케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그래도 권희자가 멸종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다행이다. 그랬다고 죽은 나림이가 다시 살아날 것도, 선주를 깨끗하게 용서할 수도 없지만 증오하면서 악에 받쳐 사느니보다, 또 자신을 향해 이유를 캐물으며 단죄하느니보다는 낫다. 이제 권희자에겐 아무도 없고 껍데기뿐인 늙고 추한 자신만 남았다. 그러나 선주의 줄칼을 빼앗음으로써 선주와 안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권희자의 마지막 돌발적 행동이 있어 우리는 멸종 직전에 구원 받았다. 참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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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멸종직전의 우리'일까?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 내는 소설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안달이 난 엄마 덕분에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 그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좋았던 친구, 그 친구를 싫어 하며 괴롭히는 아이, 그 아이를 죽인 친구, 괴로워 하는 아이의 엄마, 그런 엄마를 지켜봐야 하는 남편, 이야기는 이렇게 각각의 '나'가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각자의 내면을 풀어가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 여학생이 친구를 칼로 살해한다.' 라는 다소 무거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사건 설정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를 둘러싼 피해자의 엄마, 아빠, 그리고 가해자 및 가해자의 가족들의 괴로운 삶을 세밀한 심리묘사로 전개해 나가는 점에서 돋보인다.
선주는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나. 선주는 나림이를 누구 보다도 좋아했다. 그러나, 나림이는 이를 알면서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선주를 무시하고, 따돌린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는 흔히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끝까지 나림이를 좋아하고, 나림이의 마음을 돌려 보려 했던 선주였기에 나림이의 행동은 선주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선주는 배신감과 상처로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동경하고 좋아해 본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나를 무시하고, 나에게 상처가 될 때 오히려 그 상처가 증오가 될 수 있음을...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을 통하여 이루려 했던 나림이의 엄마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딸을 잃고 난 뒤, 어떤 마음일까. 자식을 잃은 마음을 당해 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 수나 있을까? 그 상처는 남편도, 그 누구도 치유해 줄 수 없었다. 스스로 치유해야 하는데, 엄마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이 딸에게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서 딸을 잃게 되었다는 자책을 했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른 뒤, 엄마는 선주를 찾아가 왜 그랬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슴속에는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소중한 딸을 묻어 놓고, 슬픔을 간직한채 살다가 딸의 친구였던 가해자를 찾아간 것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왜 그랬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의 선주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세월이 흘러도 사그러 들지 않았다.
등장하는 인물들은('우리') 모두 희망이 없어 보인다. 엄마의 과도한 치맛바람에 피아노만 치고, 각종 대회에 나가 일등만 해야 했던 나림이도, 어린 나이에 살인자가 되어 버린선주도, 어린 딸을 잃은 엄마도, 딸을 잃고 아내와도 이혼하고 직장도 잃은 뒤 혼자 쓸쓸히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한 아빠도, 선주의 가족도 모두 불행한 사건이후 희망이 없어졌다. 멸종은 어떤 종류의 생물이 사라져 버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볼때 이 책의 제목은 사라져 버리기 직전의 우리, 즉, 희망이 없어져서 삶의 의미가 없기에 죽음 직전의 우리라는 제목으로 폴이해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이해가 가는 것 같다.
어린 초등학생이 혼자서 친구를 칼로 찔러서 살해한다! 라는 소재는 좀 무겁다. 하지만, 작가의 독특한 스토리 구성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심리 묘사가 세밀하여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여러가지 해석과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이 말하려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멜로디만으로도 감상에 빠지듯이, 이 책도 작가의 문장만으로도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질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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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고되지 않은 죽음의 경우 남겨진 삶이 예전의 그것으로 회복될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기에 슬픔과 분노로 채워진 삶을 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생과 동시에 생성되어 자란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떤 말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어렵게 얻은 딸이 열두 살에 같은 반 아이가 찌른 칼에 숨졌다면 부모의 삶은 그 순간 사라진 것이다.
김나정의 장편소설 『멸종 직전의 우리』는 이십 년 전에 딸 나림을 잃은 부모가 나림을 죽은 선주의 아이를 유괴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얼핏 복수에 관한 소설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복수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하나의 죽음으로 연결된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은 권희자는 울부짖는다. 열두 살 김선주는 왜 나림을 죽였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잠시 나림의 죽음에 주목할 뿐 점점 잊힌다. 권희자의 눈에 비친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고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결국 이혼의 수순을 밟았다. 정말 남편은 자신의 궤도로 돌아간 것일까?
소설은 나림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차례로 들려준다. 나림을 죽인 김선주, 나림의 엄마와 아빠, 김선주의 부모, 그리고 나림의 목소리로 이십 년 전 상황을 재현하고 현재의 삶을 보여준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어떻게 그 속을 알겠냐고 선주 엄마는 항변한다. 그러다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해외를 선택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사만다가 된 선주는 여전히 두려웠고 외로웠다.
‘휘파람을 불면 개는 달려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사만다는 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들여다보았다. 밤에 악몽을 꾸면 사만다는 한 손을 뻗어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개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덩어리, 살아 있는 것의 감촉.’ 139쪽
부모도 형제도 선주의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수차례 이름과 신분을 바꿔 김선주가 아닌 윤수인(囚人)이 삶에는 아들 안도(安堵)가 전부였다. 수인과 안도라는 이름이 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런 수인에게 권희자는 이십 년 전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전하며 왜 나림을 죽였는지 묻는다. 선주는 나림의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림은 친구들을 선동해 자신을 왕따시켰다. 선주의 눈에 나림은 정말 행복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엄마의 강요에 피아노를 쳐야 하는 나림은 인형 같은 생활이 싫었다. 나림은 다른 삶을 원했고 죽음이 그 길을 인도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어둠 속에 밝음이, 밝음 속에 어둠이 띄엄띄엄 섞여 들어갔다. 운동장이 저편 멀리로 사라졌다. 천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있을 것이다. 빰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음표가 끝나고 긴 쉼표가 이어졌다. 꽃잎 한 장이 사뿐, 건반에 내려앉았다. 꽃잎은 소리 없이 건반 위로 굴러갔다. 악보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이어졌다.’ (195쪽)
평생을 분노와 증오로 살아온 권희자와 알 수 없는 형체에 쫓기듯 살아온 김선주는 고통과 불행을 등에 진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림의 죽음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자식을 잃을지도 몰라 절박한 어미의 마음이 전해진다. 지난 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할 수 시간은 끝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한때 우리 곁에서 머물러주었던 모든 것들. 빗방울이 흔들어 놓은 꽃잎들, 젖은 흙냄새와 나무 그들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는 나비들, 구름의 틈새로 보이는 햇발. 소란한 침묵. 멀리서 가까이로, 가까이서 멀리까지. 멀리서 들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256쪽)
언제 어디서든 죽음은 발생한다. 어떤 죽음은 외롭고 쓸쓸하다. 어떤 죽음은 호상(好喪)이라 불리기도 한다. 복수, 용서, 화해가 아닌 죽음을 축복할 수 있는 몫을 지닌 자의 남겨진 삶은 평온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 혹은 애도는 그저 놓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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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내가 본 것이 전부이기를 바라는 건 진실이 밝혀짐으로써 나의 신념이 잘못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건 ‘나’와 ‘너’의 소멸이다. 우리의 멸종이다. 김나정의 『멸종 직전의 우리』는 멸종 직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들의 삶은 산소호흡기에 의지에 삶을 연명하는 중환자와 비슷하다. 스무 해 전, 초등학교 5학년인 열두 살 선주는 친구 나림을 죽였다(고 알려졌다). 이 사건은 두 소녀 가족의 삶을 폐허로 만들었다. 불행의 시간을 지나 이젠 행복의 시간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바로 그즈음에. 드라마<신의 선물>에서 딸을 잃은 엄마는 14일 전으로 다시 돌아가 아이를 살릴 기회를 얻었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남은 건 세상에 대한 분노뿐이다. 아이가 사라졌다. 이름은 안도, 수인의 아들이었다. 안도를 잃어버린 수인에게 희자가 찾아왔다. 나림의 엄마이자 자신의 과거 이름 김선주를 아는 여자. 선주는 몇 가지 이름을 거친 뒤 수인이라 이름 짓고 수인(囚人)처럼 살았다.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낸 선주는 안도와 함께 안도(安堵)의 삶을 살아갔지만 희자에게 딸의 날개를 꺾은 선주는 절대 행복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희자는 선주가 자신처럼 아이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맛보는 복수를 결심했다. 소설은 안도엄마 수인이 된 선주, 피해자의 부모, 선주의 가족, 사만다가 된 선주, 엄마의 희망이었던 어린 나림, 미혼모 윤숙이 된 선주, 희자를 만난 아빠 없는 안도의 이야기와 희자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수인, 안도 때문에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망친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실은 희자가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희자는 몰랐다. 어린 나림에게 분노가 있었다는 것을. 나림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행동이 어린 나림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어린 선주는 몰랐다. 선의로 한 말이 어린 나림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을 가두게 되리라는 것을. 시베리아 원주민은 매머드를 ‘얼음 아래 사는 쥐’라고 불렀다. 그 거대한 쥐는 흡혈귀처럼 한밤에만 기어 나와 엄니로 무덤을 파서 시체를 뜯는다고 했다. 그것이 울음소리로 아이를 숲으로 꾀어낸다니.(6쪽) 한밤중 아이가 나가는 동안 자고 있던 엄마에게 책임은 없을까? 피곤한 일상을 보낸 엄마가 잠을 자느라 아이가 나가는 걸 몰랐다면 그래도 엄마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판단하기 어렵다. 희자가 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았더라면, 선주네 집이 좀 더 여유로웠더라면 어땠을까. 불행히도 삶에 가정은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부모가 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가끔 세상이 선과 악,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원망할 대상이 분명해질 테니 말이다.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용서할 수도 없다. 그 사람도, ‘나’도. 짐을 내려놓으면 좀 편해지련만 미안함에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이 웅성거렸다. 불꽃은 나무를 감싸 하늘로 끌어당겼다. 잎사귀를 들은 수런수런 몸을 뒤집었다. 줄기 속 수액이 뜨거워지고, 껍질이 툭툭 터졌다. 이글거리는 나무 사이로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은 술 바깥쪽으로 밀려나가고, 숲과 하늘의 경계가 울렁거렸다. 나무와 나무 사이, 붉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8쪽) 멸종 직전이라는 건 아직은 멸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드라마에서처럼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그래서 딸을 살릴 어떤 노력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딸은 잃은 엄마의 시간은 멈췄다가 가다 다시 멈췄고, 친구와의 일로 시간이 멈춘 소녀는 엄마가 됨으로써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생명을 만드는 존재이다. 엄마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다만 엄마의 분노가 너무 커져서는 곤란하다. 프롤로그의 이야기처럼 아이를 잃은 엄마의 분노는 세상을 화염으로 뒤덮을 것이기에. 음표가 끝나고 긴 쉼표가 이어졌다. 꽃잎 한 장 사뿐, 건반에 내려앉았다. 꽃잎은 소리 없이 건반 위로 굴러갔다. 악보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이어졌다.(195쪽) 소설을 쓴 김나정은 말한다. 용서할 순 없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은 멸망 직전의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그것이라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침묵은 평화가 아니다. 평화를 가장한 것일 뿐. 긴 쉼표는 마침표가 아니다. 마침표를 찍기까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살아야 한다. 그것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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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디 선한 일면과 악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학자들은 성선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성악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자라며 겪은 사람들을 보며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믿게 되기도 하는 듯 하다. '멸종 직전의 우리'는 아이들과 관련된 죽음을 통해 인간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장에 들르는 엄마.. 세 아이를 키우는 집에 오후에만 안도를 맡기지만 드센 그 아이들 속에서 아이는 힘겹다. 그런데... 안도는 집에 없고 나이든 노인만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오직 희망과 안식은 안도뿐이다.
알아볼 수 없는 노인은 오래 전에 잊은 이름 '김선주'를 말한다. 그녀는 불혹의 나이에 딸을 얻었고 자수성가한 그녀의 남편과 함께 애지중지 키웠지만... 나림이 죽은 후 교녀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고 선주의 집안도 마찬가지로 살인자 가족, 살인자의 아빠, 엄마, 형제들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나림의 엄마 권희자는 그렇게 나타나 수인으로 개명한 김선주를 위협한다. 왜..나림과 친구들은 선주를 괴롭혔을까? '우아한 거짓말'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왜? 친구를 죽음으로 악으로 고통으로 몰아넣는가.. 우리 사회의 병폐인가? 학교에서 직장에서 폭력을 근절하자고 부르짖는다. 그만큼 학교 폭력은 깊이가 있고 많은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괴롭히고 있다.
자신을 놓아버린 선주는 사만다로 살아가지만 싱글맘으로 아이와 남게 된다. 수인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용히 은신해서 살아간다. 나림이 죽은 후 나락의 길을 걷던 나림의 아빠는 선주와 안도의 소식을 아내에게 알리고 이혼 후 살아가던 그녀는 복수를 위해 나타나게 된다.
살다보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유없는 괴롭힘과 증오에 힘겹다. 선주도 나림으로 인해 힘겨웠고 친구들까지 똘똘뭉쳐 힘겹게 했었다.
책을 읽으며 가슴깊이 마음이 아팠다. 오해와 미움 증오...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 파고들어 있기에..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수 밖에 없었던 현실과..돌고 도는 미움의 악순환... 그 속에서 안도는 제발 벗어나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희망을 가져보며 책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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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직전의 우리라는 제목과 장정에 그려진 일러스트에서 SF판타지적인 소설을 상상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내용과 달리 우리 생활속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더 와닿을수 있었고, 흡입력있게 읽어내려갈수 있었다.
한때 작가를 동경했던 내게 소설은 창작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이상향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소설을 읽는 재미이전에 내용을 파악하고 현실을 되돌아 보는 사회성이 짙은 내용의 소설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크다.
이 소설은 결과를 먼저 드러내고 그 과정을 차례로 제시한다. 마치 완성된 집을 보여주고, 그집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차곡차곡 보여주는 듯하다.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의문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각각의 캐릭터에서 사건사고의 흐름을 볼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한편의 옴니버스식 영화를 보는듯하다.사건 당일을 기준으로 각각의 (5~6명) 시각으로 재구성된 형식은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이 책은 소설로써 끝내기 아쉽다는 생각이다. 영화로 만들어 진다면 영화 '도가니'나 '또하나의 약속','변호인' 처럼 사회의 아이러니를 속속들이 캐내어 더많은 사람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줄것이다. 폭력과 분노, 증오에 찬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책임을 질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인권탄압과 비리,거대 자본의 폭력성,공권력의 부당성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회성 짙은 영화들처럼 이 책또한 그러한 영화들의 소설편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 신랄한 비판과 직설적인 문체의 평론과 달리 소설을 통해 현실을 되돌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그 이상의 영향을 준다.
소설의 주된 캐릭터들은,복수의 화신이 된 나림의 엄마(권희자),삶을 포기해 버린 이세황(권희자의 남편),살인자가 된 후 윤수인으로 개명한 김선주,살인자를 낳은 죄인이 되버린 김선주의 엄마,당사자 이나림,선주의 아들 조안도로 그들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예순은 넘겼을법한 늙은 여자(권희자)가 김선주를 찾아온다. 없어진 아들을 찾느라 정신없을 상황인데도 김선주는 그녀를 알아본다. 아들 안도를 돌려달라 말하지만, 그 예순의 여자는 나림을 모르냐며 되려 질문하고, 이야기는 과거로 흐른다. 피해자였던 (권선주)가 가해자로 변모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내용을 통해 저자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고 자 한다.
세번의 유산으로 기적적으로 얻게된 아이(이나림)을 그녀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엄마 권희자. 이나림을 자신의 이루지못한 꿈을 대신해 주는 이상으로 여기지만,이나림은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담을 느끼며 인형같은 삶에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결과 피아노에 대한 부담과 강박관념이 손의 마비를 가져오게 된다.피아노를 동경하는 김선주는 피아노를 잘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이나림을 추천한다. 마비로 인해 피아노를 못친 다는 것을 알턱이 없는 김선주. 학급친구들의 웃음을 사게된 것에 이나림은 김선주를 미워하게 되고, 자신을 여신처럼 동경하는 대상인 선주에게 그 분노를 모두 투사한다. 극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시발점이 드러난 장면이다. 이 장난과 증오에 찬 괴롭힘이 결국 이나림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지만, 이는 또다른 아픔과 증오,복수를 불러일으킨다. 죽음이 일어난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않는 선주의 행동에서 소극적인 모습이 보이고, 그런 선주를 무시하며 품어주지 않으려 하는 가정에서 비극의 가정사를 볼수 있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 우리 모두의 인생을 생각해 보지 못하게 하는 사회속에서 그들은 구원도 기대도 사라진 삶을 살게된다. 평론가 정여울님의 작품해설처럼 이책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누구도 이 증오와 분노와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다면,멸종 직전의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해낼수 있을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불편한 질문에 결국 나의 문제로 받아 들이는 태도가 우리를 구원케 한다는 것이다. 가정,사회,국가, 전체를 다루는 문제중에 가장 필요악이자 중요한 문제가 가정사 인것 같다. 너무 앞서도 뒷서도 문제되는 사회문제인것 같다. 가정사에 대한 문제이자, 사회전체의 문제이기도 한 사건을 주제삼아 뼈아픈 질문에 답해 볼수 있게 한다.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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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직전의 우리
우리는 언제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런 관계 속에는 화합과 기쁨, 나눔, 만남, 결합, 나눔의 긍정적인 측면의 일도 일어나지만 죽음, 복수, 상처, 분노, 폭력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의 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입장만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배려를 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스마트시대인 만큼 서로가 전부 연결되어 소통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많은 정보가 올라오기 때문에 우리가 못본 이면까지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것은 결국 우리 이야기입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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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분노의 심연 속에서 던지는 질문 <멸종 직전의 우리 - 김나정>
After Reading
'멸종'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얘기될 수 있는 소재였던가? SF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 단어는 낯설지만 우리는, 혹은 주변의 어떤 이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불안 속에,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오해로 둘러싸인 한 소녀의 죽음, 그녀가 떠나간 후 남겨진 사람들. 그들은 각자의 응어리를 가슴에 지닌 채, 길고 긴 인생의 발걸음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그 발걸음이, 돌부리에나 걸려 쓰러질까 불안해하며 멸종 직전에 서있는 그들, 그리고 우리는 그 위기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소설의 내용은 제목을 보고 지레 짐작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꾸며진 내용도 아닌,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극적인 반전이 빵빵 터지는 내용도 아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 가끔은 논쟁도 벌어지는 - 잔혹한 이야기보다도 덜한, 그렇기에 너무나 익숙한 소재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한 교실 속에서의 청소년 왕따, 그리고 죽음, 그 죽음에 대한 복수심.... 그중 포인트는 증오와 분노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피아니스트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딸에게 투영하던 엄마 '권희자' 그리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마저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딸 나림. 그들은 서로에 대한 분노를, 증오를 내뱉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노 덩어리는, 나림이와 같은 반이었던 선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순수한 동경에서 비롯된 오해가 나림의 증오를 만들고, 그 증오는 재밋거리 (따돌림)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자신을 왜 미워하는지도 알 수 없었던 왕따 '선주'는 나림을 칼로 찌른다. 그리고 순식간에 두 집안은 마치 '멸종 위기'에 놓인 가족들처럼 망가지게 된다.
선주는 증오심이 가득 찬 세월을 버리고 '수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조용히 이름을 바꾸고 잠적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그녀에겐 남아있었다. 어릴 적, 자신도 시원하게 사실을 토로하지 못 했던 그 사건에 그녀는 수인(囚人)이라는 이름처럼 여전히 갇혀있는 것이다. 그녀는 꾸역꾸역 삶을 버텨내기 위해 살았고, 자신의 자식이 딱 친구 '나림'이 죽었을 나이가 되었을 때, 나림의 엄마 '권희자'가 찾아온다. 권희자와 나림, 선주(수인) 그 세 사람 모두 감정의 응어리를 어디에서도 시원하게 풀지 못했고, 그 증오는 악순환의 질긴 고리가 되어 가장 부정적인 방법인 복수의 감정으로 자라나게 된 것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돌보지 않는 분노의 심연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더 이상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는 것은 그 감정을 어떠한 곳에서도 풀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디에도 그 감정을 배출할 길이 없었던 그들은 오해 속에 가려진 진실을 외면한 채, 그 진실을 해결하기 위한 발버둥도 치지 못한 채 멸종 직전까지 살아오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마음속에서 커져가기만 했던 분노 뒤에 있던 진실을, 꼬이고 꼬인 그들의 관계를 풀 수 있었던 실마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화자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장을 넘기면 진실이 드러나듯, 우리의 삶 속에서도 숨겨진 진실을 풀어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기야 그렇다면, 삶은 너무나 쉬울 테지만.
Underline
그때 여자는 한 손으로 수인의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뺨을 후려갈겼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고 울부짖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수인조차 그런 자신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아프지 않았다. 늪이 쇠구슬을 집어삼켰다. 소리들도 사라졌다. 단지, 먹먹했다. 제풀에 지친 여자는 무너져내려, 수인의 발아래서 통곡했다. 수인은 무심한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해. 이것아. 어머니는 등을 밀며 재촉했다. 수인은 외국어 교본을 읽듯 또박또박 말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20p) 삼 층 짜리 허름한 건물로 들어가는 김선주를 뒤로 하고 택시를 잡아 탔다. 열쇠공을 불러 문을 따고 김선주의 집으로 들어갔다. 카드 명세서가 말해주듯 살림은 빈궁했다. 그나마 마음이 달래졌다. 칠칠하게 살고 있었다면 모자가 잠든 사이에 집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벗어놓은 스타킹, 텔레비전 위의 먼지, 변기에 고인 오줌, 화장실 앞에 깔린 구질구질한 러그, 깜빡거리는 부엌 형광등, 구석에 던져놓은 아이 잠옷. 냉장고 문을 열자 두엄 냄새가 밀려왔다. 야채 칸은 물크러진 오이와 싹이 난 양파, 크트머리가 녹아든 상추들로 채워져 있었다. 보이는 것마다 구질구질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그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죽은 사람은 그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65p) 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제 피아노를 치지 못합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된다. 담임 선생님은 재촉했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렀다. 손가락은 건반 위에서 죽마를 탄 어릿광대처럼 뒤뚱거렸다. 피아노 속의 해머가 머릿속을 두들겨댔다. 누군가 웃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합창 대회 반주는 다른 아이가 맡았다. 화장실로 가려는데 그 아이가 가로막았다. "나림아, 너 피아노 잘 쳤잖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는데 그 아이는 비켜주지 않았다. 정말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아이를 밀치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차라리 잘라내고 싶다. 더러운 장갑처럼 눈 속에 파묻고 싶다. 나는 왼손으로 변기 레버를 내리고, 오른손으로 휴지를 뜯어 코를 풀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김선주라고 했다. (172p) "엄마가 좋아?" 어른들은 가끔씩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다. 하늘이 왜 파란지, 구름은 왜 하얗고, 금붕어는 왜 죽는지, 겨울이면 눈이 왜 오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금붕어는 죽었고, 겨울이면 눈이 온다. 눈이 녹으면 꽃이 핀다는 걸 안다.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도?" 나는 화가 났다. "우리 엄마는 나쁜 사람 아니야." (240p)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한껏 불편하게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희망의 손짓이나 구원의 기대도 사라진 자리에서, 모든 행복의 씨앗이 사라진 폐허 위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이 증오와 분노와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멸종 직전의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을까. (283p, 작품해설) P.S 김나정 작가는 저에게, 조금 생소했지만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로 활동하신 분이고, 여러 권의 저서가 나와있네요.문장도 참 좋고, 일단은 깔끔한 느낌이 들었던. 소재는 요즘 참 흔하디 흔한 것이었지만, 단순히 왕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가 있기 때문에 흥미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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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떨어졌다. 잎을 털어내고 봄에 새 잎을 달면 그 나무는 새로 태어나는 것일까. 겨울나무와 봄나무는 다른 나무일까. 147쪽
한적한 가을날의 정취를 여유롭게 그려낸 것이 아니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죄값으로 도망쳐온 이국땅에서 사만다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낯선 이들과 섞여지내는 방법을 제 몸을 그들의 놀이감으로 내놓는 것으로 택한 김선주(수인으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가 그 댓가로 퍼부어지는 아버지의 주먹에 피를 흘리며 바라본 풍경이다. 장면을 그려보면, 가해지는 폭력에 무감각해진 몸뚱이를 온전히 내어주고 자신의 붉은 피에도 무관심한 눈동자의 촛점은 뜻모를 어딘가를 향한다. 무감각과 무관심이 유일한 피난처다. 김선주에게는.
누군가 재를 다 뿌렸다며 그만 가자고 했다. 오후엔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 삶을 털어내는 데 오 분도 안 걸렸다. 갈비 한 대를 익히는 데도 십 분은 족히 걸린다. 46쪽
자녀의 죽음, 학교에서의 폭력과 살인, 지독한 증오와 죄책, 복수의 쇠사슬로 묶여버린 감옥같은 삶 등의 섣불리 얘기하기 힘든 주제들을 이야기하는 이 책 「멸종 직전의 우리」는, 장면마다 전혀 다른 느낌의 소품들과 장치들을 잘 짜여진 영화와 같은 세팅과 흐름으로 들려준다. 아니 보여준다고 해도 좋겠다. 딸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헤어진 남편의 장례식, 그 마지막 가는 길의 처연함이 갈비 굽는 것에 빗대어진다. 생뚱맞기 짝이 없는 듯 하지만, 딸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과 분노, 슬픔 등을 눈코뜰새없이 바쁜 갈비집일로 덮고 살아온 여자에겐 갈비가 그녀에게는 살아있음을 가장 진하게 드러내주는 요소이다. 그 극명한 요소들의 대비와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 구조안에서 하나의 점을 향해 미끄러져간다. 죽음과 삶이 엇갈리고, 또다시 죽음이 되풀이되지만 또한 삶은 계속된다. 그 죽음과 삶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 일 수 밖에 없어서 이것이 참...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