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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 감정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숭고하고도 복합적인 경험 중 하나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이 책에서 사랑의 다채로운 층위를 탐구하며, 종교적 실존주의자로서 인간과 신, 그리고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다채로운 사랑의 양상을 통해 발타사르는 독자를 신앙의 세계로 이끌며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들 속에 있다"라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통해 신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적 행위는 은총에 의해 하느님의 행동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사랑 하는 것이다. 여기서만 유일하게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앎이 발생한다"는 텍스트는 발타사르가 펼치는 신학적 명상의 깊이를 드러낸다.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의 순간들과 그 사랑을 신학적으로 탐색하는 것 사이의 교감을 주목하게한다. 즉, 이 책은 일상과 신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며, 사랑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파악하려는 실천적인 신학을 펼친다. 발타사르는 더 나아가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께 이끄는 길이자, 진정한 자유이다"라며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오늘날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한 줄기 빛, 그것은 사랑이라는 일상의 신비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파급효과, 그리고 신과의 궁극적인 관계를 확인시켜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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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사랑의 의미는, 사랑이 계시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긴장의 영역 안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심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랑을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자세를 알려주고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동의하는지 안하는지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가장 끔찍한 것, 곧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수긍'의 여부만을 물으실 것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하느님의 사랑의 게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서로가 부부의 연을 맺을 때 '예'라고 응답하듯이, 하느님의 사랑 또한 '예'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피조물의 관계에서 이러한 응답이 이루어져야 함을 견지하고 있다. 필자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가 곧 근원적으로 대화적인 말씀이라고 말한다. 몰아적 사랑이 가능케 하려면 상대의 사랑에 대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그 전에 사랑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어떻게 촉발된 것일까? 이는 우리가 한 번쯤 곰곰히 생각해봐야할 논의거리라고 생각한다. 이 의구심을 풀기위해 한 번쯤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랍니다. 우리는 서평으로도 주님께서 주신 선교사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게 해주신 가톨릭출판사 관계자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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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단 하나, 사랑』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오직 믿을 만한 건 사랑밖에 없다고 말하며, 10개의 챕터로 나누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두 챕터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의 변화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해주고 있다. 르네상스, 계몽주의, 실존주의,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인간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크나큰 변화를 주었다.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긍정적인 이미지의 인본주의는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말해주고 있다.
오직 말씀 중심을 주장하는 개신교와 인간 중심적 사상이 주류가 되면서, 신앙적인 기적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고 가톨릭에서 말하는 믿을 교리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현실을 알려준다.
『남겨진 단 하나, 사랑』에서 중요한 부분은 <6장 계시로서의 사랑>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사랑은 계시의 형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표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가 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불편하기만 한 고통 가득한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인은 이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 대해 절대적 응답을 해야 한다.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게 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Agape)를 말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위로와 아낌과 같은 인간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실체라고 할 수 없기에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이 세상에 이성, 지식을 중시하고 이 세상에 무신론이 넘쳐나더라도, 각각의 피조물, 자연적 우주 안에는 신적 사랑이 담겨 있다. 그것은 십자기의 빛 안에서만 드러난다.
'어렴풋이 감지하며 주님의 사랑과 영광을 너울 없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 바로 주님께서 영의 힘으로 이루시는 이 일'이야말로 사랑의 큰 신비다. -p.208
『남겨진 단 하나, 사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엄청난 완독했다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번역해 주신 신부님의 프리뷰가 각 장마다 있긴 했지만, 이 책은 진심으로 고난이도의 책이었다. 문단 한 단락을 읽을 때마다 기본 두 번씩은 읽을 정도로 어려웠는데, 이건 내용 자체가 어렵기도 했지만 독일어와 우리말의 간극 차이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다가, 그동안 어렵다고 느낀 다른 신앙서적을 읽으니 세상 쉽게 느껴지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달까...
그래도 발타사르의 책들은 다시 한번씩 읽으며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해 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지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영성이 깊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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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 않을까 사랑... 책 제목이 눈에 너무 들어왔다. 왜 사랑밖에 남겨져 있지 않을까? 다른 것들은 어디 갔을까? 가톨릭출판사에서 계속해서 번역되어서 나오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책이 또 나왔다. 아직 국내에는 발타사르의 책이 몇 권 없다. 요즘 계속해서 번역되어 나오는데, 궁금한 점도 있어 이 책을 읽어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발타사르는 누구인가? 그것을 먼저 알면 이 책에 더욱 더 관심이 쏠릴 것 같다!
발타사르는 1905년부터 1988년까지 사셨고, 스위스 출신 가톨릭 사제이며 동시에 신학자이다. 그는 바로 신학교에서 양성받은 것이 아니라, 일반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추후에 예수회에 입회한다. 1936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여러 활동을 했지만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1984년 교황청 국제학위원회가 수여한 '바오로 6세상'을 받은 후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명이다. 그의 저작은 총 15권으로 이루어진 신학적 미학 3부작이다. 1부 영광(7권), 2부 하느님의 드라마(5권), 3부 하느님의 논리(3권)
발타사르의 특징 중에 하나를 뽑으면 바로 신학적 미학!이다.
딱딱하고, 어렵게만 다가올 수 있는 신학을 발타사르는 자신만의 표현으로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표현해 낸다. 그래서인지 발타사르의 표현이나 책을 읽다보면, 어렵게 다가 올 수도 있다. 또 번역된 말이기에 약간 어색한 말들도 있다. 발타사르는 책에서 이렇게 신학적 미학을 사용하는 이유를 밝힌다. “신학적 미학의 목적은 이 신학 방법이 신학적 사유의 하찮은 부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유일무이한 최종 방법으로서 신학의 핵심에 속한다는 권리 주장을 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단순히 영적인 지식 전달을 위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류와 함께하시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드라마'임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하시는 이러한 행위가 어리석어 보일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건들여주시고, 또한 당신을 계시하면서 그 계시가 사랑임을 해석해주신다. 결국, 하느님의 계시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하느님의 계시가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발타사르는 책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계속해서 우리는 당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와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그분을 찾아 나서는 한명의 순례자가 되어가는 길을 이 책이 보여준다.
“하느님의 사랑이 세계의 심장 안에서 사랑을 깨우고 아이가 되며, 이 아이가 신적이고도 인간적인 사랑이 되어 깨어난다. 절대 깨질 수 없는 이 사랑의 순환은 세계를 초월해 계시기에 세계의 심장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께서 홀로 계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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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가톨릭출판사 캐스리더스 7기 1월의 도서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남겨진 단 하나, 사랑』 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구약에서의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시기도 하기에 사랑하지 않으면 심판하시어 벌주신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또 생길수도 있습니다. 《 하느님의 분노로 작열하는 심연을 열어젖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심연을 여는 것과 하나로 묶여있다. (p.153) 》 심판은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지옥의 바닥까지 가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 구원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책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하느님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사랑, 새 계약이요 영원한 계약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은 동정으로서의 사랑’, ‘ 기꺼이 받아주는 너그러운 개방성’, ‘겸손의 마음가짐’, ‘반항하지 않는 부드러움’, ‘인내하는 끈기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참을 수 없는 동료 인간을 극복하고 견디어 내며, 하느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한다. (p.218) 》 왜 참을 수 없는 동료 인간을 극복하고 견디며 사랑하라고 하실까요? 《 이 사랑이 구약 성경 전체에 걸친 인간 교육의 우선적 목표점이다.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 되게 하는 교육 말이다. (P.219) 》 어려워서 울며 시작했다가 웃으며 나오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남겨진 단 하나, 사랑』 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릅니다. (1요한 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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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단 하나, 사랑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20세기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 발타사르의 작품 일부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어려운 책이다. 한 문장을 읽고 다시 위로 올라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게 이 책은 늘 진행형이 될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하고 덮으려고 할 때마다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는 곱씹게 되는 문장들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어렴풋이 이해되는 말들 말이다. 총 10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의 장이 시작될 때마다 프리뷰가 있어 맥락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발타사르의 신학과 문학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 위에 세우는 데 지향점을 둔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따라가며 ‘다른 것과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핵심과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읽어나간다면, 마치 해녀들의 태왁처럼 망망대해 같은 책 안에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것이다. p190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 …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p191-192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는 기본적으로 겸손하게 되었다. 나의 ‘모든 죄가 탕감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차적인 나의 용서는 그저 그 반향일 뿐이다. 정녕 단순한 복종이요, 스스로 자랑할 자기 업적이 결코 아니다. 장벽들이 무너진다. 내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나도 인간을, 그가 여전히 원수일지라도 용서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전혀 대가를 계산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전부 잃으시기까지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자선과 지상적으로 손에 쥘 수 있는 보상 사이에 그 어떤 계산도 단념해야 한다. 하느님이 가져다 대시는 그분의 척도가 내가 가져야 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그 척도로 측정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막연한 정의’의 원칙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의 논리학이다. 다시금 이것이 절대적 사랑의 무조건성이다.(…)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삶 안에서 계속 배려하기는 어렵다. 서로 이해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나를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나도 그가 여전히 원수일지라도 용서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셨으므로 나는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하느님의 이 앞선 행동의 척도가 내가 가져야 하는 척도이며, 나 역시 그 척도로 측정될 것이다. 하느님께 순명하며 기도하는 삶. 오직 기도로써만 우리는 이웃에 대한 인간적 배려를 지속할 수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도로써 하느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일. 이것이 또한 소화 데레사의 삶을 지극히 풍요로운 것으로 일컬을 수 있는 이유다. 은총에 의해 하느님의 행동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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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 1~3)" 신앙인인 우리가 믿어야 할 세 가지의 규범이 있다. 가톨릭은 계시종교이며, 선민사상을 믿고, 삼위일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신앙인의 목표는 행위나 결과에 상관없는 믿음을 따라, 절대적인 선의 목소리로 하여금, 말씀이시자 계시되신 하느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눈을 떠야 한다. 신앙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정언명령에 따라, 교회의 율법을 지키면서,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늘 신앙을 고백해야 바람직할 것이다. 발타사르의 책에서 말하는 커다란 맥락은 하느님의 사랑인 '로고스'에 대한 설명으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믿을 만한 것으로 세상에 제시하기 위해서, 육화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계시를 사랑의 척도로 동정녀이자, 교회의 신부인 성모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으로 내려오셨음을 서술해 주었다. 교회는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으로, 흠 없는 교회를 지키면서, 보호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신부라고 칭한다. 책에서는 "사랑의 본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 있음으로, 우리가 살면서 만난 모든 것들에게 죄를 지었으며, 죄를 깨달으면서 자기 객관적인 통회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믿는 과정의 거룩한 여정이 담겨 있다. 우리는 성령의 증거인 거룩한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로고스를 만나면서 내적 치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사랑의 형상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이성과 감정들이 인간 세상의 한 형태로 주목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숨을 잇게 하는 식량에 감사함과 이웃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자비함에 신의 존재를 실감하고 감사해야 한다. 이웃과 주고받는 사랑은 한시적이므로 근심이 따르지만,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에는 역경을 기꺼이 삼는 호기가 필요하다. 또 신앙인은 몸소 신앙을 해명하는 인간 중심적 태도를 가져야 하며, 끈기 있게 기도해야 바람직하겠다. 발사타르는 "찬란한 영광으로 자신을 해석하는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라고 말했다. 성경 속에는 세계 종교에서 통합적으로 말한 것들과 차별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철학과 심리학, 정신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말씀은 교사들과 주석가도 풀기 힘든 미학이므로, 단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 죄인이란 계시를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개인의 객관적 해석으로 신앙생활이 전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라고 감지되는 거룩한 이끄심을 따라서 이 땅을 덕으로 걸어가야 바람직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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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저의 서평은 특별히 제가 많이 사랑하는 어떤 형님께 추천하고자 편지 형식으로 작성됩니다.
사랑하는 형님, 형님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신가요? 저는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개신교였을 때를 포함해서 하느님을 안 지가 어언 10년이 넘었는데도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성당에 잘 다니는 사람들과 많이 비교합니다. 하느님은 저 분을 더 예뻐하실 거야, 하느님은 저 분께 더 많이 관심을 가지실 테지. 사랑은 배타적이라고 했으니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겠지. 난 에사우처럼 미움 받는 존재이겠지……. 이 책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은 어떠한 인간적 판단으로도 해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그리 딱딱 떨어지는 이론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문학적이면서도 다소 현학적이라고 봐야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모든 차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고, 앞부분을 제대로 읽어야 뒷부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 장의 앞에는 본문을 요약 정리해둔 글이 나오는데, 저는 이러한 요약본을 재작년 3월에 읽었던 『세계의 심장』에서도 똑같이 봤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지 못하였을 것이고, 더 나아가 성당에 발걸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에사우 같았다면 하느님의 선물을 포기하거나 없앴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지금은 신앙생활이 짐처럼 느껴지고 성당일이 힘들어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불러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님, 저는 하느님께서 형님을 정말 사랑하고 계심을 잘 압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같은 참사랑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있다고 합니다. 사랑을 인간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형님을 교회의 일꾼으로 써 주시는 것이고 하느님을 더 많이 갈망하도록 생각을 불어넣어주는 것이겠지요. 저는 저의 비뚤어진 마음도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에서 온 것임을 인식하면서 더 많이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형님, 이 책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더 많이 알길 바라요. 저는 이해가 매우 짧아서 이 정도의 글밖에 못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님께도 좋은 책이 될 거라는 믿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느님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더 많이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지만 영원히 한결같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제가 명령하듯 이야기하는 건 죄송합니다만 하느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오니 너른 혜안을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제가 많이 사랑하고 기도하는 주원형님께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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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그리 깊지 않은 내가 성경 이외의 다른 책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는 건 사실 많이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책 가운데는 수녀님과 함께 읽어 그 풀이가 쉬웠던 책도 읽었고, 끙끙대며 혼자 읽느라 힘들었던 책도 있었다. 발타사르의 『남겨진 단 하나, 사랑』은 후자였다. 그래서 읽는 내내 ‘사랑’이라는 단어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그래서 책에 담긴 진짜 내용은 내게 깊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캐스리더스의 기회를 빌어 가톨릭 서적을 다양하게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마 혼자 읽으려고 했다면 이해는커녕 완독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장의 제목에 적힌 ‘사랑’이란 글자가 읽는 내내 마음을 건드렸다. 발타사르의 ‘신학적 미학’을 내가 이해하긴 어려웠으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랑의 의미에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 좋았다. 8장 행동으로서의 사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8) 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을 좋아한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이며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수난 역시 우리 사랑에 대한 행위를 행동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십자가 수난이 많다. 물론 그리스도의 그것에 비할 수 없지만, 그런 수난들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기도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도가 결국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가닿는, 그래서 한 해 동안 읽을 신앙서적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에 이르길 바란다.
사랑은 행위이며, 이 행위는 참으로 인간의 행위다. 이는 또한 그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행위다. 그리고 그렇게 이 행위는 모든 교회적인 것을 통해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영과 힘’의 증거다.(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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