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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원래 이름은 '훈'인데 굳이 흉노로 쓰는 것은 중국인들이다. 고구려의 원래 이름은 '가우리'이고 '고구려'는 이두문자인데도 고구려를 굳이 구려나 고구려로 쓰는 것도 중국인들이다. 이런 것도 괘씸하거늘, 그것도 모자라서 원래 이름과 맞지도 않는 글자를 가져다가 강노니 하구려니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왕망의 패망은 당연한 일이다. (p.216)
나는 역사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역사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부끄럽게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시공사에서 새로 출간된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나는 한 번도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뤼순 감옥에서 투옥 중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엮는 이 책은 단군에서부터 백제 부흥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비록 원문을 읽지는 못했지만, 연도나 명칭의 오류를 바로잡고, 현대어로 수정되어 읽기 좋은 상태로 출간된 『조선상고사』라도 읽을 수 있었음에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든다. 솔직히 말해 『조선상고사』가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워낙에 방대한 자료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상고사』를 읽고 난 지금, 『조선상고사』야 말로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선 『조선상고사』를 읽는 내내 단 몇 장에 끝났던 우리 고대사를 이렇게 방대하게 풀어냄에 놀랐다. 나름대로 역사를 좋아하고,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생각했는데도 이 책의 내용은 낯설었고, 어려웠으며 놀라웠다. 그러나 우리 고대사에 대해 읽고 나니,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한 것들에 나도 모르게 답을 얻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다시금 역사의 놀라움을, 참 매력을 깨달았다고 할까. 또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역사에 대해, 또 신채호에 대해 배운 것들이 상당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타국으로 인해 왜곡된 역사를 배우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물론 그의 역사관이 모두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존재했던 수많은 책이 지금은 없다. 우리가 그토록 오래도록 배워온 '삼국사기'만이 유일한 역사서이자 진리라고 인식되어 오지 않았나. 역사는 바라본 자의 시각에서의 기록이라는데, 우리는 너무 한 방향만을 보고, 그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해봤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실 교과서에도 없는 역사라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내가 배운 역사,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가 잘못된 시각으로 편집된 역사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물론 교과서가 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바로 잡을 것은 바로잡고- 고쳐 가르칠 것은 고칠 수 있도록 모두가 열린 시각이 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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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 조선상고사(옮긴이 김종성)』를 읽고서...... 대한민국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고, 지난 1천 년간 역사가들이 감추고 축소한 우리 고대사의 진실... 이 책은 "1천 년을 참은 신채호의 외침, 지난 1천 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는 신채호였다. 1천 년간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지난 1천 년간 역사학계가 숨기고 감춘 진실을 그가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을 하며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여순형무소(뤼순형무소)에서 뇌출혈로 초라하게 순국했지만, 그의 외침은 지난 1천 년간 이 땅에서 나온 가장 인상적인 외침이었다." 또한 "고려·조선 시대 사대파 역사가들과 일제강점기 친일파 역사가들이 숨기고 감춘 한국 고대사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 역사가가 바로 신채호다."라고 시작하여 "조선의 기존 역사가들은 자신이 기록한 역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희생시켰다."라고 하며 마친다. 매우 공감하며 기억에 남는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다"라는 『조선상고사』의 머리말 격인 총론에 나오는 명제다. 신채호 선생은 계속해서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높이면 투쟁의 승자로서 미래 역사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반면에 ‘아’가 파멸되어 ‘아’가 ‘비아’에게 바쳐지면 투쟁의 패자로서 역사의 흔적 정도로 그치고 만다"라고 강조한다. 즉,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아와 비아와 투쟁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를 우리 민족인 ‘아’가 ‘비아’인 다른 민족과의 투쟁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이와 같은 ‘역사는 투쟁의 과정’이라는 인식은 일제강점기 당시, 신채호 선생이 행한 다양한 독립투쟁 활동의 사상적 근간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나 신라가 역사에서 보여준 사례들을 왜 비판적으로 기록하였을까? 역사 기록은 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했는지 재조명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속된 말로 역사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하지만, 후대를 사는 우리의 역사를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사실에 입각한 분석과 오류를 바로 잡고 사실적 기록에 중점을 두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나아가 지나친 사대주의적 사고는 배척하여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얼을 이어받자.... 『조선상고사』는 열악하고 힘들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적 사학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또한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 당시 열악한 연구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고대사를 밝히려 시도한 근대적 역사학의 시초라는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많은 울림을 주고 학문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업적이라 평가된다. 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한 이후 다시 이 책을 통해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역사적 기록을 준비하고 남긴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한다. 후대 사학자들은 선생의 업적을 발판으로 더 자주적이고 승자도 패자도 아닌 올바른 역사 기록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사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역사기록이나 표기 등이 맞지 않는 것들도 일부 있다고 그 이유 등을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고 신채호 선생의 역사 시각이 독단적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것은 중국과 일본에도 허다하게 있다. 그러나 일본은 현존하는 사실도 마음대로 우길 뿐만 아니라 역사는 한층 더 더욱 왜곡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역사 왜곡을 넘어 오히려 공식화해서 동북공정 등에 이용하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신채호 선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각성하지 않은 역사학자가 현존하는 하는 것도 아쉬운 이일이다. 먼 훗날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더욱 왜곡되고 편협하게 축소될지도 모를 일이다. 라고 한탄하는 전문가도 있다. 오늘날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고대사와 한국사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측면에서 유효한 기록이라 생각된다. 한편 나에게는 고대사 공부나 자기 계발에 많은 배움을 주는 책이 될 것 같다. https://blog.naver.com/namunaruzuin/223281794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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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선생님은 교과서에서 자주적인 민족역사를 주장하신 분으로 배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채호란 분과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조선 역사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사대파 김부식이 자주파 묘청을 꺾은 뒤로 분서갱유 같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역사서들을 숨기고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본인이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굳이 굶주림과 헐벗음을 감수하면서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다른 역사책과 같이 읽으면 한국사에 대한 안목이 넓어질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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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천 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는 신채호였다. ‘1천 년간’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지난 1천 년간 역사학계가 숨기고 감춘 진실을 그가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을 하며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여순형무소(뤼순형무소)에서 뇌출혈로 초라하게 사망했지만, 그의 외침은 지난 1천 년간 이 땅에서 나온 가장 인상적인 외침이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년)이 10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 투옥된 지 3년째인 1931년 6월부터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다.
총 10편으로 구성된 책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그의 역사관을 시작으로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의 시대를 설명한다. 이는 단군, 기자, 위만, 삼국이라는 기존의 역사인식 체계를 대신하는 역사인식인 셈이다. 또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한민족韓民族 전체 관점에서 고구려·백제·가야·신라의 역사를 서술한다.
역사의 정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조선사람은 조선을 ‘아’라고 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을 ‘비아’라고 한다. 반대로 영국 등은 자신들을 ‘아’, 조선을 ‘비아’라고 할 것이다.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과 중국 어족의 두 파派로 나뉘었다. 한족 · 묘족 · 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 ·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 · 선비 · 여진 · 몽골 · 퉁구스 등이 되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 · 헝가리 · 터키 · 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 · 만주 · 터키 · 조선 4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는 몽골제국 시대에 상호 작용이 많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대사를 보면, 조선과 흉노의 인명 · 지명 · 관직명이 동일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상고 시대에 동일한 어족이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조선 민족의 동진東進
인류의 발상지를 두고 파미르고원이라는 설과 몽골초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조선 민족이 어딘가에서 동진을 해왔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고어에선 왕의 성씨를 해解라고도 하고 왕의 칭호를 ‘불구래弗矩內’라고도 했다.
해解는 태양이란 뜻에서 나온 것이고, ‘불구래’란 칭호는 태양의 빛이 붉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천국을 환국桓國이라 한 것은 광명처럼 환하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 조선 민족은 서쪽 파미르고원이나 몽골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진東進을 해왔다. 이들은 불함산(백두산)을 광명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이 부근을 ‘조선’이라고 불렀다. 조선이란 말은 광명을 의미하는 고어古語에서 나왔는데, 이를 후대에 조선朝鮮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대大단군왕검의 건국
조선 민족이 여러 아리라(강江 유역)에 분포하면서 이들 사이에 공통적인 신앙이 유행했다. 이른바 단군 신앙이다. 조선 민족은 우주의 광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태백산 수림樹林을 광명신의 근거지로 생각했다. 이후 번성한 인구가 각지로 퍼져나가자, 각 집단은 자신들의 거주지 부근에 태백산 수림을 모방한 수림을 조성하고 이를 ‘수두’라 불렀다. 수두는 신단神檀이란 뜻이다. 해마다 5월과 10월에 수두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한 명을 뽑아 제주祭主로 삼았다.
제주를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이라 부르며 제사를 올렸다. 소를 잡아 수두에서 제사하고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다.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팔괘에 나오는 음획과 양획의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수두를 받는 부락들은 연합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했으며, 이때 가장 큰 공을 세운 부락의 수두를 최고의 수두로 숭배했다. 이를 신수두라 불렀으며, 다른 수두들은 그 휘하에 속했다. 삼한 역사에 나오는 소도가 바로 수두이다. 단군은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평양의 옛 이름은 왕검성이다. 신라 <선사仙史>(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에선 “평양은 신선인 왕검의 땅”이라 했고, 북위 역사서인 <위서魏書>에선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했다. 왕검은 ‘임금’이란 뜻이며, 고대 조선에선 단군왕검을 종교적 교주로 신봉했다는 말이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대략 오륙백 년간은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였다. 기원전 5,6세기경에는 불리지弗離支란 인물이 조선 군대를 통솔하고 오늘날의 하북 · 산서 · 산동성 등을 정복했다. 그는 산서성 대현 부근에 국가를 세우고 불리지국이라 명명했다. <주서>의 불령지弗令支와 <사기>의 리지離支는 바로 이 불리지국을 가리킨다. 상고 시대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발해는 큰 호수였다. 불리지는 산동을 정복한 뒤 발해를 중심으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조선은 고죽국을 통해 불리지국과 연합하여 연나라와 진晉나라를 정벌했다. 그러자 연과 진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나라 군주 환공은 명재상 관중과 명장 성보의 보좌를 받아 당시 중국을 제패하고 있었기에 조나라 · 위나라 · 허나라 · 노나라 등의 10여 국가를 이끌고 연나라를 구출했다. 이리하여 조선은 군대를 철수하고 불리지 땅을 잃었다. 그래서 공자는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피발披髮을 하고 좌임左?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피발은 조선에서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는 것을 말하고, 좌임은 조선에서 왼쪽으로 옷을 여미는 것을 말한다. 비록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관자>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조선은 서북 지방을 잃고 장기간 침체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기존의 학교 역사는 단군의 역사를 거의 신화 수준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중국 <위서>에 기록된 것처럼 , 고구려 건국 이전 2천년이 단군왕검의 원년이다. 아사달은 어디일까? 신채호 선생은 현재 하얼빈의 완달산을 가리키며, 이곳은 북부여의 고토古土로 단군왕검의 상경上京이었다고 말한다. 안시성 유적인 아리티가 중경, 지금의 평양은 남경이었다.
삼조선의 명칭 유래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 분립 사실을 빠뜨렸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 · 기자 · 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삼조선은 신 · 불 · 말, 세 한韓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한과 말한은 부왕副王이었다. 삼한이 삼경에 각각 주재하며 조선을 통치했다. 신한 · 말한 · 불한은 이두로 진한 · 마한 · 변한이라 표기됐고, 신조선 · 말조선 · 불조선은 이두로 진조선 · 막조선 ·번조선으로 표기됐다.
신조선왕 모갑은 오늘날의 동몽골 지역을 공격, 선비족을 정벌하고 연나라를 공격해 현재의 하북성 친황다오시, 북경 부근, 산서성 대동부 등지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불리지 때의 고토를 회복했다. 이에 두려운 연나라왕은 신조선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후계왕 모을은 연나라 진개 장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이후 신조선의 모정왕은상곡, 어양 등자를 회복하고 동몽골 일대의 선비족을 복속시켜 국위를 회복했지만 흉노족 연제모돈의 난을 만나 국력이 쇠약해지고 말았다.
불조선은 신조선과 연합했다가 연나라에 패해 요동, 요서, 우북평 일대를 잃었다. 기원전 200년에 왕위에 오른 기준은 투항했던 위만의 배신으로 인해 도성인 왕검성을 버리고 잔여병력으로 바다 건너 월지국을 습격해 왕위를 찬탈했지만 마한 여러 나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말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평양이었다. 말조선은 이후 국호를 말한(마한)으로 변경하고 월지국(현재의 공주 인근으로 추정)으로 천도했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멸망당했다.
고구려의 발흥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다. 추모왕으로 불린 그는 타고난 용력과 탁월한 활쏘기 솜씨를 지녔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전성시대의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한 뒤,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제1환도성)을 수축하고 서쪽 경영의 거점으로 삼는 한편, 국내성 · 졸본성과 함께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 후세인들의 논쟁이 많았는데, 신채호 선생은 환도성이 3개나 있었는데 이를 구별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 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의 사관들은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습성이 있어서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고 한다.
고구려 vs 수나라
통상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충돌하기 마련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은 고구려와 중국의 수나라 간에서 전쟁으로 나타났다. 서기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의 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지 9년이었다. 계속된 풍년과 풍족한 군비軍備로 자만심이 가득했던 수나라는 모욕적인 서한을 고구려에 보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대의 약점을 탐지하고자 항복 사신이 되어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 내부를 살피고 돌아왔다. 이때 우문술 등의 부대에서 굶주린 기색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후 수나라 군대를 유인할 목적으로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했다. 이에 우문술 등은 매우 기뻐했다. 이러는 사이 수나라군은 살수(현재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까지 당도했다.
성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이후 우문술은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가 화살과 돌멩이가 비오듯 쏟아지자 철군을 시작했다. 살수에 도착하니 배가 한 척도 없자 얕은 강물임을 확인하고 건너기 시작했다.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간에 도착하기 전에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물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태에서 을지문덕 부대가 후미를 습격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칼과 활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도착한 후에 강을 건너 달아났다. 30만이 넘었던 우문술의 군대는 겨우 2700명만 생존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고구려 vs 당나라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수나라는 국력의 쇠퇴로 결국 패망하고 만다. 이후 새로운 왕조 당나라가 들어서고, 당은 약 20년 간 전쟁 준비를 한 후 당나라 대군들은 고구려 땅으로 침입했다. 당시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을 빼앗은 다음 곧바로 평양을 습격한다는 전쟁 계획을 수립했지만 수성전을 펼치는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양만춘의 결사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안시성 전투는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전쟁이었다. 양만춘이 쏜 독화살이 당태종의 눈에 명중되어 결국 당나라는 철군을 결정한다. 당태종은 ‘요동 전쟁을 그만 두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는다.
연개소문은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한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한국사 #고대사 #역사 #자기계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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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신채호, 시공사 2023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서두에서 말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화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외는 ‘비아’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이고 유(柔)하게 표현하고 있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직시하여 작성되어야 마땅하지만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사리(事理)를 판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관성을 100% 배제할 수는 없다. 때문에 주관성이 관여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이 정설(定說)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하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한 신채호 선생의 견해는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에 젖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내용을 조목조목 고대사 자료를 통해 반박하고 있다. 224 페이지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이도와 한문의 차이를 변별하지 못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바꾸었다. 그래서 ‘좌, 우보를 국상으로 바꾸었다’라든가 ‘배자 아무개를 좌보로 삼았다’라는 웃음거리 같은 이야기가 《삼국사기》 속에서 종종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자세한 사례를 들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가의 별명은 태대신(太大臣)이란 뜻으로, 이두로는 상가(相加)로 표기했다. 신가의 별명은 마리였다. 마리는 머리란 뜻으로, 이두로는 대로(對盧)로 표기했다. 대로의 옛 뜻은 ‘마주’였다. 신가나 마리는 한문으로는 국상(國相) 혹은 대보(大輔)라고 썼다. 팔치는 팔뚝이란 뜻으로, 이두로는 패자(沛者)로 표기했다. 발치는 넓적다리란 뜻으로, 이두로는 평자(評者)로 표기했다. 팔치,발치를 한문으로는 대보, 굉신(肱臣), 고신(股臣)이라고 해야 하지만, 문자 배열의 멋으 살리고자 대보, 좌보, 우보라고 했다.” 우리가 믿고 읽어야 할 역사서 《삼국사기》이러할 진대 어찌 역사서를 있는 그대로 믿고 우리의 조상을 만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동양고전을 독학(獨學)으로 공부한지 10여 년이 되었다. 한문 실력이 보잘 것 없기에 대부분 번역서로 공부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간혹 의문이 드는 문장들이 있어서 원문도 함께 읽고 있다. 물론 모든 문장은 사건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 출간되는 모든 고전(古典)을 번역하는 역자들(학자들) 또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고, 그들의 주관적인 시각이 번역에 반영된 의역이 종종 보인다. 이러한 의역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력에 난도질을 할 때가 있다. 한자의 의미를 꼼꼼히 살펴 해석하다보면 전혀 다른 뜻으로 전달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어떤 이는 “의역은 오역이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서(古書)를 번역할 때에는 ‘직역’을 원칙으로 하되, 자신의 견해를 주관적으로 포함하여 의역을 할 경우에는 별도의 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 옛 선현들의 글에 대한 예의라 할 수 있다. 이를 《논어》를 통한 공자의 말을 빌린다면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구절로 설명이 가능하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非禮勿視(비례물시) 非禮勿聽(비례물청) 非禮勿言(비례물언) 非禮勿動(비례물동)”
《조선상고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신분제를 뛰어넘고자 하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도 아닌 그 이전에 고구려 시대에 말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블라인드 테스트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련 된 내용은 222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태조 때부터 매년 3월과 10월에 신수두 대제에 군중을 모아놓고 칼춤도 추고 활도 쏘고 깨금질도 하고 택견도 하며,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가무를 해서 미추를 평가하고, 수렵을 크게 벌여 수확물의 많고 적음을 평가했다. 태조 때는 이런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고 불렀다. 국가는 선배가 된 사람에게 녹봉을 주어 처자를 먹이도록 함으로써 집안에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선배들은 각각 조를 나눠 한집에서 자고 한자리에서 먹었다. 이들은 안에서는 역사를 강론하거나 학문을 익혔고, 나가서는 산수를 찾아다니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거나 군중을 가르쳤다. 이렇게 사회와 국가에 일신을 바치며 일체의 고난을 사절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성품과 학문과 기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을 뽑아 스승으로 세웠다.
고구려 때는 각종 지위가 거의 다 골품에 의해 결정됐기 때문에 미천한 사람이 고위직에 오르기 힘들었다. 그러나 오로지 선배의 단체에서는 신분의 귀천 대신에 학문과 기술로 지위를 정했기 때문에 여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고구려 시대에도 이러한 시도가 있었건만 4차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혈연, 학연, 지연에 얽매여 사람을 뽑고 있는 현실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발탁될 수 있는 기회 평등 시대는 과연 언제쯤 가능할 수 있을까?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이고,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내려놓아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는 한 명의 학도로서 《조선상고사》를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동양고전은 대부분 중국의 고서(古書)를 통해 공부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삼국지》지다. 《삼국지》의 경우에는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까지 있다. 그런데 난 《삼국지》를 그저 중국 역사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선상고사》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고구려 동천왕의 시대와 맞물려 있고, 《삼국지》의 위, 촉, 오의 형성과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광복절 때였다. 문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구절에 대한 출처를 검색해 본적이 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며 그 뜻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인용 문구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고, 윈스턴 처칠의 말이라며 인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설에서는 신채호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문구라며 출처까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러 검색을 통해 알아본 결과는 팩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무위키에는 이에 대하 다름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 말이 본격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무한도전 329, 330 화에서 단재 신채호의 발언이라고 언급한 무한도전 TV특강 특집에서부터. 그런데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한 말로 다시 나왔다. 자꾸 중언부언 말이 바뀌는 걸 보면 무한도전 각본가가 창작한 말로 추정될 수밖에 없는 게 그 당시 떠도는 말로도 이런 말은 없었다. 국가보훈처 블로그에서도 언급되었으며, 지금은 링크가 삭제됐다. MBC에 해당 발언의 출처가 어딘지 문의해도 그 당시 근무한 스태프가 더 이상 근무하고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다는 답변만 매크로식으로 반복할 뿐이다.
또한 윈스턴 처질이 연설문에서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라고 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비슷한 의미의 말을 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인용할 때는 그 출처를 적확하게 밝혀야 한다. 하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면 ‘작자 미상’ 등으로 표시하면 된다. 굳이 옛 사람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일 필요는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의미가 있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면 가슴 속에 담아놓으면 되는 것이지 명확하지 않은 것을 예쁜 포장으로 가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역사는 가설로 이야기하거나 ‘카더라’와 같은 확인되지 않은 말을 남의 입을 빌려 책임감 없이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통신망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뉴스를 통해 세상사를 인식한다. 그런데 뉴스 기사마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기자들이란 눈에 불을 켜고 그저 가십거리만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역학을 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결국 훗날 역사가 될진대 어찌 지금도 사실 확인이 되지 않는 글을 대중매체들이 함부로 지껄이고 있는지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단재 신채호 선생인 무덤에서 나오신다면 기자들의 볼기짝을 후려치는 태형을 내렸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글을 쓰고 공유함에 있어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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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국사책은 지식과 정보 나열이었는데.... 이 책은 신채호 선생님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듯 쉽게한국사를 평론한 책이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역사에 자신 없었지만.. 깊이 읽기 파트를 통해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고전이라 불리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문장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충실한 답변이 참으로 훌륭해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족들이 먹을게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사학자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며 민족을 지켜준 게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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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도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이다. 항간에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며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 선생이 한 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출처 불분명한 말이라는 게 중론이다. 어쨌든 굉장히 의미 있고, 교훈이 되는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역사는 지루한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마다 역사를 다르게 받아들이지만, 확실한 게 한 가지 있다. 관심이 있든 없든 역사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선상고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우리나라의 상고시대의 역사,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까지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했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하지만, 사학자로도 유명하기에 서두에서 언급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신채호 선생이 했다는 루머가 떠도는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상술한 대로 상고시대의 역사,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까지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 시대, 제3편 삼조선 분립 시대, 제4편 열국쟁웅 시대(중국과의 격전 시대), 제5편(一) 고구려의 전성시대, 제5편(二)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구려·백제의 충돌,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9편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쟁, 제10편 고구려의 대(對)당나라 전쟁, 제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이렇게 총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조선상고사』는 바이블과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신채호 선생의 기억에 의존해 쓴 글이라 오류가 있다고 하지만, 이 책을 쓰고 이 책 안에 담긴 선생의 마음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출간된 『조선상고사』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원문에 없는 해설과 주석을 추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 책에 대한 설명과 평이 필요할까 싶다. 『조선상고사』는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와 신채호 선생에 들어본 사람이라면 필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들여다보고 한국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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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문은 지금의 우리말과 큰 차이가 있어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해요. 또한 신채호의 기억력에 의지한 부분이 많아 연도나 명칭 등에 오류가 다소 있는데 이 책은 <조선상고사>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명백한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 원문에 없는 해설과 주석을 별도로 추가함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쉽고 정확하게 신채호의 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책처럼 읽기 쉽지는 않아요 딱딱한 설명체이지만 자세한 고대사를 알 수 있고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네요 이런 책을 우리는 많이 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읽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대로 읽어보려구요 제대로된 역사책을 읽으며 역사의식이 한층 더 고취되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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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시점의 역사를 알수 있는 시간이였다.
100자평 : 이 책은 역사속에 역사가 있다는것을 알려주는듯한 느낌이였다. 혹, 내가 알고 있지 못한 역사에 대해 잘 이해를 못하는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단재 신채호는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역사를 우리들에 알려주는 내용이 수록 되어있는 책 임은 분명하다.
[본문]
그렇다! 역사는 고스란히 옮겨져야 한다. 역사가 다른 목적으로 기록할 경우 그 목적은 긍정적인 요소 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클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분단의 아픔이 있기어 더 올바르게 작성되어야 한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역사의 왜곡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독도, 위안부, 홍범도장군 등등 역사의 기록이 올바르게 작성 되어야 우리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역사관이 성립 될것이다.
이 책에서 짧게 설명되어 있는 불의 음역. 지명에 대해 유래를 알고 나면 그 지방의 특징을 알수 있다. 특히나 부여라는 옛 명칭을 가지고 있는 하얼빈은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 의미와 아픈 사건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곳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으니 하얼빈에 왜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이유도 알겠으며, 불의 진화도 알수 있었다.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조선이 이렇게 분류 된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부여 역시 동부여, 북부여로 구분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류한다면 이 안에 속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이전에 이야기 나왔듯이 지명에도 그 유래가 있어 알아가던 차에 나라의 지명 역시 유래가 깊을듯 하다.
이책의 특징은 단락단락 "깊이읽기"라는 부분이 있다.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그래서 인지 이해를 더 쉽게 할수 있었으며 이런 스타일의 역사책은 쉽게 보지 못한것 같다. 암튼 이부분 때문에 더욱 유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