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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는 <우상의 황혼>과 쌍둥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69쪽). 이 책에서 니체는 ‘데카당스’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술을 부패시키는 주범이자 현대의 도덕과 세계관과 형이상학의 공통된 뿌리로, 노예 근성을 지닌 인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민주적인 평준화의 길을 닦는 주범으로 공격당한다. 그리스도교는 삶을 부정하고, 긍정하는 충동을 억압하는 데카당스 현대성의 전형인 셈이다(위의 책, 70쪽). 이 책 서문에서 니체는 “이 책은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책은 단지 그리스도교만에만 국한하지 않고 현대 세계의 가치 전체, 즉 현대의 도덕, 철학, 정치(정의, 인간 평등, 민주주의 등)이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 비판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그리스도교의 극복이 곧 ‘모든 가치의 전도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스도교는 허무적 종교이고, 그리스도 신은 힘에의 의지의 무기력 상태나 ‘보편성’을 획득한 ‘선한’ 신의 등장이라고 반박하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예수는 사랑하며 사는 삶이 참된 삶이자 영원한 삶이라는 복음, 신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죄’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이해된다. 분노하지도 않고, 벌도 내리지 않고, 저항도 하지 않으며, 자신이 살아오고 자신이 가르친 바를 몸소 실천한 존재인 예수, 바로 이런 실천만을 인류에게 남겨 놓은 예수. 이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이 유일무이한 그리스도교인을 니체는 긍정적 의미에서 아이 같은 존재로, 문화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백치(Idiot)같은 존재로 여긴다(위의 책, 72-3쪽). 니체는 이 책에서 예수를 원한 감정을 넘어선 자유와 초탈의 복음, 복음주의적 평등, 사랑하는 삶이라는 복음, 복음의 실천을 통한 내면의 구원을 설교하는 존재이자 이런 복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예수의 복음만이 진정한 기쁜 소식이며, 이런 예수가 진정한 구세주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성을 제시하는 존재이며, 역사상 유일했던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런 예수상이 교회와 사제 집단에 의해 전혀 다른 구세주 유형으로 왜곡된다. 복음적 평등 권리 대신에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신의 아들이라는 것, 사랑을 통한 구원 대신에 신앙을 통한 구원, 불멸에 대한 믿음, 부활과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교리 등이 구세주 유형에 도입된다. 더군다나 교회라는 것은 예수가 진정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창시자인 예수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성은 상실되어버리고, 신의 죽음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교성의 상실에 기인한다. … 사제 집단이 권리 추구 성향으로 인해 구세주 유형을 왜곡하고 교회라는 조직을 건설한 것이다. 사제들은 그들 자신이 가치를 설정하는 권력의 주체이고자 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 복종을 권고하면서 사실은 자신들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위의 책, 269-70쪽). “그리스도교 신 개념 - 병자의 신으로서의 신, 거미로서의 신, 정신으로서의 신 - 이것은 지상에 실현되었던 것 중에서 가장 부패한 신 개념 중 하나다; 더 나아가 그것은 신-유형의 하향적 전개에 있어 바닥 수위를 나타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삶에 대한 미화이자 삶에 대한 영원한 긍정이 되는 대신, 삶에 대한 반박으로 변질되어버리다니! 신 안에서 삶과 자연과 삶에의 의지에 대한 적대가 선언되고 있다니! ‘이 세상’에 대한 온갖 비방의 공식이자 ‘저 세상’에 대한 온갖 거짓 공식이 신이라니! 신 안에서 무가 신격화되고, 무에의 의지가 신성시되다니!”(위의 책, 271쪽). <안티크리스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결정적인 섬멸 공격이 감행된다. 그 공격의 전략은 1) 그리스도교 역사 이전의 소크라테스-플라톤주의라는 철학적 전통과 그리스도교를 결합시켜, 그리스도교의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는 측면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2) 이스라엘 민족의 신에서 그리스도교 신으로의 발전적 전개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는 것, 3) 그리스도교 신 개념은 무에의 의지이자 부패된 개념이라는 것, 4) 바울이 행한 그리스도교 역사의 창조와 제도의 정비는 그리스도교 신 자체를 왜곡시켜버린 해석의 역사라는 것, 5) 그리스도교는 바울적 유대주의,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주의, 구제 신앙에 대한 신비적 예식, 금욕주의라는 네 가지 사유의 복합체라는 것, 6) 이 사유 복합체가 그리스도교를 지배한다는 것 등을 분석해낸다. 이 분석 작업이 끝난 후에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의 최고의 부패이며, 궁극적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한 부패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위의 책, 272-73쪽). “선(Gut)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Schlecht)이란 무엇인가? ?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안티크리스트> 2절) 니체에게 선은 힘에의 의지,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것인 반면, 악은 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행복이란 힘이 증가하는 느낌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데, 이는 힘의 고양이며, 가장 큰 힘은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극복한 사람, 곧 위버멘쉬다(레지날드 J. 홀딩데일, <니체: 그의 삶과 철학>, 295쪽). “인류는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보다 낫거나 보다 강하거나 보다 높은 상태를 향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란 단지 하나의 근대적 관념, 곧 하나의 그릇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 역사의 전개가 반드시 인간의 고양과 상승 그리고 강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 그러한 사례들에서 보다 높은 전형이 ? 인류 전체에 비해 보면 일종의 초인과 같은 존재가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4절)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더 높은 인간형에 대해서 필사적인 싸움을 벌여왔으며 이러한 인간 유형의 모든 근본 충동을 추방해버렸고, 이러한 충동들을 증류하여 악으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러한 충동을 갖는 자들을] 악인으로 만들어버렸다.”(5절) “순수정신이란 순전히 거짓말이다”(8절). “모든 싸움,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모든 느낌의 반대가 복음서에서는 본능이 되었다. 저항할 능력을 갖지 않는 것이 복음서에서는 도덕이 되었고(‘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복음서의 가장 심원한 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서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평화에, 온유함에, 적의를 가질 수 없음에 깃들어 있는 지복이 도덕이 되었다. ’기쁜 소식[복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 그것이 [내세에]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29절). “현실에 대한 본능적 증오. 이것은 모든 접촉을 너무나 깊이 느끼기 때문에 더 이상 ‘접촉’되기를 원하지 않느나,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의 결과다. 모든 협오, 모든 적의, 한계와 거리에 대한 모든 느낌의 본능적인 배제. 이것은 모든 저항과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는 불쾌감(말하자면 해로운 것, 자기 보존 본능이 말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구에게든, 악에든 악인에게든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 가운데서만 지복을 발견하며 ? 사랑을 삶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가능성으로 보는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의 결과다”(30절). “숭고한 것과 병적인 것과 유치한 것이 그처럼 기이하게 결합되어 있는 존재로부터 감동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자가 이처럼 가장 흥미로운 데카당 가까이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31절). “‘기쁜 소식’이란 우리가 적대시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어린이들의 것이다”(32절). “그러한 신앙은 분노하지 않으며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칼’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 그것은 기적에 의해서도, 보상과 약속에 의해서도, 심지어 ‘성서’에 의해서도 자신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 신앙 자체가 매순간 자신의 기적이며 자신의 보상이고 자신의 증거이며 ’신의 날‘인 것이다. … 우리는 예수를 일종의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고정된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즉 말이란 [자신이 가리키는 것을] 죽이는 것이며, [말처럼] 고정된 모든 것은 죽이는 것이다. … 그는 단순히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삶’이라든가 ‘진리’, ‘빛’이라는 것은 가장 내적인 것을 가리키는 그의 표현이다”(32절).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아 벌이라는 개념이 없다. 보상이란 개념도 마찬가지다. 복음서에서 ‘죄’란 신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든 거리가 제거되었다는 것 ?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다. 지복은 약속된 것이 아니며 어떤 조건에 매여 있지도 않다. 지복은 유일한 실재다. ? 나머지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기호들이다”(33절). “인격으로서의 신, 앞으로 올 ‘신의 나라’, 피안의 ‘천국’,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서의 ‘신의 아들’ 등등과 같은 교회의 조합한 개념들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없다”(34절).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다. ? ‘지상을 넘어서’ 혹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 ‘신의 나라’라는 것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나라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으며 그것은 ‘천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 그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다.“(34절).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 자신이 살아왔고 가르쳤던 대로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재판관, 간수, 고소하는 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중상과 조소 앞에서의 태도 ? 십자가 위에서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는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는 조치도 강구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는 그러한 사태를 도발한다. …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 자신이 되어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에게 한 말 속에는 복음의 모든 말이 다 들어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신과 같은 사람,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도적은 말한다. …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 노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 … 그리고 악인에게마저도 저항하지 않고 ? 그를 사랑한다는 것.”(35절). “인류는 복음의 근원, 의미, 정당성과 정반대되는 것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며,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가 자신이 이미 넘어섰고 폐기해 버렸다고 느꼈던 것을 교회라는 개념 속에서 신성시하여왔다”(36절). “근본적으로 오직 단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도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 순간 이래도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살았던 삶과는 이미 정반대의 것이었다. 즉 그것은 ‘나쁜 소식’, 즉 화음(Dysangelium)이었다. … 그리스도적인 실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만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39절).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일종의 불교적 평화운동을 위한 새롭고도 전적으로 근원적인 단초, 다시 말해 단순히 약속된 것만은 아닌 지상에서의 사실적인 행복을 위한 새롭고도 전적으로 근원적인 단초가 끝나버린 것이다”(42절). “‘기쁜 소식’의 뒤를 이어 곧바로 가장 나쁜 소식이 왔다. 바울의 소식이 그것이다. 바울은 ‘기쁜 소식의 전달자’와는 정반대의 유형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증오와, 증오의 환상과 증오의 냉혹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다”(4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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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기독교를 단순히 비판하는 책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과 가치 체계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 철학서였다. 처음 읽을 때는 표현이 매우 강하고 도발적으로 느껴졌지만,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니체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기존의 상식을 흔들며 깊은 사고를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다. 니체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은 읽어볼 만한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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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1400여 년 동안 서양 유럽을 강력하게 지배했던 종교, 사상이죠. 더욱이 르네상스는 기독교의 극복이라기 보다는 일상화, 생활밀착화에 더 가까운 역사적 흐름이었고요. 굳이 서구의 교구 개념을 예로 들지 않아도 기독교는 지금도 여전히 서구인에게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백년도 더 전에 한 철학자가 바로 이 기독교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네요. 더욱이 그의 저항은 딱히 교회라는 기독교의 권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에 깊이 잠식된 서구 세계의 정신 전반을 아우르고 있기에 전대미문의 도전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니체의 저항은 예컨대 조선시대의 한갓된 유림이 공자님께 엿먹어라를 시전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완전 발칙한 사유였던 거죠. 더욱이 니체의 거침없었던 망치는 지금도 여전히 막강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데요. 일례로, 니체는 기독교가 음험하게 품고 있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잔혹함”을 꼬집죠. 그리고 이 잔혹함이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와 그들을 박해하려는 의지”로 표출된다 성토하네요. 거리의 선량한 대중들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협박하는 개독교인들, 세계 곳곳에서 믿음의 내용의 다름을 정치적으로 확대하여 감히 전쟁을 벌이는 양아치들, 젠더 차이와 개성을 종교 권력으로 무화시켜버리는 무뢰배들 등등 여전히 21세기의 지구는 전반적으로 니체의 혁신적인 사유가 절실합니다만. 글쎄요… 어쩐지 지구인의 사유 능력은 날이 갈수록 퇴보만 하는 것 같네요. 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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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안에서 살고 있던 나는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좋은 일로 여겨왔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전파되고 세계를 향해 뻗쳐나가는 일이 좋은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여러가지 일을 겪고 니체의 이 안티크리스트를 읽으면서 니체는 그리스도교로 인해 세상이 너무 오랫동안 정신병원이였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니체가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파격적이고 두려움없이 여겨졌다. 그러다 천천히 니체의 관점이 맞겠다, 맞다,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쪾으로 생각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안에 있었을 때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를 나는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이 니체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또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 백배는 현실적인 종교라고 말하는 부분, 그 이유,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불교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도 그렇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붓다의 가르침을 실행하고 있는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는 말이지만, 나로서는 '불교'보다 '붓다교'가 더 와닿는 말이다. '불'은 왠지 느낌이 않좋기 때문이다. 영어는 불교를 '붓디즘'이라고도 하니 나로서는 그냥 혼자 있을 때 불교를 '붓다교'로 전환하여 이해하자, 붓다교... 이렇게 부르니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좀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 위 도서는 기독교적 가치와 전통적인 도덕 체계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담고 있으며, 인간 본성의 진정성과 생명력을 회복하려는 니체의 철학적 선언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신과 기존의 도덕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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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번역가와 탁월한 니체가 만났습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독서를 즐깁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나아가 아이로 떠나는 여정을 이 책과 함께 하렵니다. 소중한 번역 감사합니다. 다른 번역본도 읽어봤는데 이 책 만한게 없어요.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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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본다면 굉장히 불편해할 책이 아닐까 싶다. 서양에서 예수의 존재는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그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도 이렇게 신랄하게 안티크리스트를 하는 니체는 정말 엄청 용기가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앞선 위대한 철학자들도 니체 앞에서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그런 니체도 이론, 사상, 철학이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람이기 하다. 니체를 지금이라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
| 반그리스도. 신은 죽었다라는 서양 가치관을 전도시킨 책. 노예의 도덕 위선이 아닌 주인의 길을 갈 긧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의존은 노예의 도덕이며 파렴치함과 나약함의 소산이다. 인간은 인간의 길을 당당하게 주인으로서 살아가라는 니체의 잠언. 유교국가어서 공맹을 부정하면 살아갈 수 없듯이 기독교 문명에서 기독교를 거부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정신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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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프리드리히 니체 저/박찬국 역의 <안티크리스트>를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최근 철학관련 도서들이 유행해서 니체 관련도서가 많이 출간되었더라고요. 읽다보니 니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어져서 구매했습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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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니체가 읽고 싶었다. 뒤늦게나마 우디 앨런의 소설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를 낄낄거리며 읽은 후, 잠시 잊고 있었던 니체를 읽고 싶었다. 그동안 차라툿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랑 도덕의 계보학등은 읽었다. 하지만 신은 죽었다로 대표되는 니체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 명언을 가장 길게 잘 담고 있는 책이 안티크리스트라 생각되어 샀다. 망치를 들고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는 니체가 문득 읽는 내내 생각났다. 그러한 니체의 문체가 생생히 느껴지는 것은 박찬국 선생의 번역과 주석이 탁월했기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니체에 관련된 책을 박찬국씨가 써서 이 판본으로 골랐는데 잘 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박찬국씨가 번역한 우상의 황혼도 찾아 읽을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