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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일지 스님의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은 각별한 책이다. 내가 이 분의 책을 읽은 것은 김영민 교수의 禪 관련 글을 읽고서였다. 지금은 파주 회동길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명륜동 시절 직접 출판사(문학동네)로 가 책을 구입했다. 이 책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일지 스님에 대한 추모의 글이었다. 백련불교학술회의에서란 글에서 스님은 성철 스님에 대한 추억을 전하며 註를 통해 海印誌에 실었다는 글의 일부를 실었다. “93년 11월 4일 오전, 우리가 성철 스님이라고 불렀던 수도자는 歲首 82세, 法臘 59세의 삶을 마치고 그 분이 늘 응시하던 불생불멸의 풍광 속으로 고요히 걸어들어가셨다.....‘스님 부디 다시는 괴로움 많은 이 사바에 오시지 마소서.”란 글이다. 백련불교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성철 스님 宣揚 단체이다. 이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스님은 여산의 혜원이란 글에서 白蓮結社를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교육자치주 카스탈리엔을 연상시키는 단체로 소개했다.(169 페이지) 물론 백련불교문화재단과 성격은 다르다. 혜원의 백련결사는 왕권의 광폭한 지배로부터 불교의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사상을 상징하는 연꽃에 초점을 둔다면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지 스님은 유일하게 내가 입적 장소와 해를 기억하는 분이다. 2002년 8월 22일 서울 은평구 수국사(守國寺), 세수(歲首) 44의 삶이 그것이다. 달빛 속의 절이라는 뜻의 月精寺를 가슴에 품게 된 것은 바로 스님의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로 인해서이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은 언급한 성철 스님에 대한 글, 김현 평론가에 대한 글로 눈길을 끌지만 니체, 횔덜린, 막스 피카르트 등의 글 역시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스님은 “언제인가 니체는 이런 시를 남겼다”는 말씀과 함께 “언제인가 많은 것을 알려야 할 이는/ 많은 기억을 말없이 가슴속에 쌓는다./ 언제인가 번개에 불을 당겨야 할 이는/ 오랫동안 흰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글을 전하셨다. 횔덜린의 글은 이렇다. “이기심으로 얼룩진 인간들끼리의 일들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번민과 슬픔으로 가득 차서 갈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의 근원인 자연으로. 방황이 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 막스 피카르트 부분은 이렇다. “고독의 길을 따라 걸었던 聖人들은 그들 자신의 주관적인 고독이 아닌 풍경의 침묵을 응시하며 장대한 자연의 고독을 누렸다. 그들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은 장대한 자연의 고독의 사소한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독은 현대인의 주관적 고독처럼 정서적 긴장과 욕구불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장대한 자연의 고독 속에서 더욱 위대한 정신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침묵 속에서 그 길을 걸어나갔다.” 공통의 개념이 보이는 글이다. 침묵, 준비, 고독, 큰 뜻을 품은 사람의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것이다. 백련결사를 설명하며 카스탈리엔(Kastalien)을 예로 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스님은 인문적 소양을 두루 갖추었던 분이다. 그 양상이 김현 평론가에 대한 관심(김현의 문학과 불교를 부제로 한 ‘불교를 보는 또 하나의 눈‘), 막스 피카르트, 프리드리히 횔덜린, 프리드리히 니체, 시인 왕유, 시인 백거이, 시인 이하(李賀: 791 - 817), 카뮈, 헤겔,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료올라 등의 인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본령은 禪을 위한 변호, 화두, 미혹과 깨달음, 쿠마라지바, 여산의 혜원, 6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에 대한 풀이에 있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은 스님의 다른 책들인 ‘중관(中觀)불교와 유식(唯識)불교’, ‘붓다 해석 실천’ 등에 비해 자유로운 서정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스님은 선승이다. 대승에 속했던 분이고. 스님은 ‘중관 불교와 유식 불교’에서 그 두 불교를 대승 불교의 심원한 인간 응시의 사상을 정면에서 바라본 사상으로 정리했다. 스님은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불교도들은 空과 마음의 解脫을 가르치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를 매우 생소하게 여길 것”이라 덧붙였다. 중관불교에서 말하는 空은 “있다 함은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없다 함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로 지자(智者)는 유(有)와 무(無)에 의지하거나 집착해서는 안된다.”(‘중관불교와 유식불교’ 76 페이지)는 나가르주나(용수보살)의 ‘중론’의 한 구절이 말해주듯 유무 중도 즉 유와 무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로서의 공이다. “유식사상은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는 식일원론이다.“(‘중관불교와 유식불교’ 179 페이지) 스님은 ”불교정신주의가 현실적인 당위를 지나치게 내재화시켜버리는 관념론이라는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정신주의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인한 정신의 단련과 인간정신의 창조적인 전망을 요구한다.“(35 페이지)는 말로 불교의 이해를 돕고, ”선불교는 마음의 평화를 구하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란 외부에서 일부러 구해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라 마음의 참된 자성(自性)에 대한 투철한 깨달음,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조차도 이윽고 소멸되어버릴 마음의 허깨비라는 것을 투철하게 꿰뚫어보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의 삶이든 삶의 모든 문제는 문제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로 보는 것이 선의 수행에 필요한 대전제이다“(95 페이지)란 말로 선의 이해를 돕는다. 이 글은 ”불교 수행은 본래 치료나 치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명상을 통한 심리 치료행위를 수행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계간 불교평론 55호 수록 박재현 교수 글 ‘불교수행과 명상, 접점은 어디인가’)는 글과도 상통한다. 스님은 또한 ”선승이라고 해서 다 산사의 낙엽을 밟으며 선원의 붙박이 가구처럼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127 페이지)는 말로 자유로운 정신을 내비치시고 ”객관적인 시각을 왕도로 생각하는 학문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자료를 연구하고 논문을 쓰며 강의하는 학문에서 체험적인 문제의식이 없다면 도대체 그 학문은 무엇이겠는가.“(64 페이지)라는 말로 체험의 의미를 강조한다. 스님은 ”선을 체험의 영역이 아닌 객관적인 학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깨달음과 닦음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학자들의 자기변호가 유효한 사실이고자 한다면 체험의 영역에는 개입하지 않되 선의 인문주의적 체계를 밝히는 학자로서의 성실함이 필요하다.“(63 페이지)고 말하신다.(”불교를 공부하면서도 단지 책상머리에 앉아 敎에만 전념할 뿐 온몸으로 정진하는 禪을 행하지 못함이 늘 마음에 걸“려 간화선 집중 수행에 참여한 철학자 한자경 교수의 행보는 그래서 주목된다. ‘화두’는 한자경 교수의 간화선 수행 체험기이다. 한자경 교수의 행보를 ”불교는 체험과 인식의 행법“이라는 일지 스님의 글과 비교하자.) 스님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님과 다름없다“는 말씀을 ‘부처님이 다 되었다‘, ’내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식으로 자부하고 마구 오만스럽게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216 페이지) 우리는 완성된 부처(本覺)가 아니라 부처 되기를 시작하는 부처(始覺)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은 산문집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학술서가 아닌 산문집의 특성에 맞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님의 개인적인 심성과 시적 감수성을 만날 수 있다. ”‘달빛 속의 절’이란 뜻을 가진 월정사의 절 이름은 참 좋다.“(51 페이지), ”새해에는 시간을 아끼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고 가차없이 자신을 일깨우고 인간으로서의 관용과 서른이 넘은 남자로서의 기품을 닦아가도록 하자. 선에 더욱 힘써 정진하도록 하자. 인간으로서의 고독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죽음이 목전에 있음을 항상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한다.“(56 페이지), ”선의 길을 가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한편의 고독한 모노드라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100 페이지), ”멀리 짙푸른 동해가 바라보이는 한계령의 가을 아침과도 같은 선의 투명한 풍광(風光), 그 이면에는 오랜 세월 깨달음의 궤적을 찾아 방황하던 진리 탐구자의 고뇌와 영광이 깔려 있는 것이다.“(112 페이지) 등...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서 내가 가장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은 따지지 않는 마음“이며 ”이 따지지 않는 마음이 변함없이 정진하는 마음이며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며 공덕 짓는 마음“이라는 가르침이다.(215 페이지) 이 부분을 유념해야 ”절은 항상 망각을 가르치는 곳이었다.“(20 페이지)는 글과 ”불교는 단념을 가르친다. 단념이란 우리의 흔한 통념처럼 어떤 희망이나 갈구가 좌절되었을 때 그 욕구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염(念)의 실체를 보아버리고 그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염이란 번뇌이며 망상이며 죽음에 이르는 집착.“(187 페이지)이란 글을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어떠한 의미체계나 기억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글“(19 페이지)이란 글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인간의 삶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부처의 말씀을 인용하며 강을 배경으로 한 헤세의 ‘싯다르타’를 언급한 스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고정(固定)과 정주(定住)를 거부하는“(‘인간의 얼굴’ 227 페이지) 강(江)을 이야기한 이정우 교수의 글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제 스님이 가르치는 것이 표류(漂流)가 아닌 순환(循環)임을 알겠다. 어디서 일지 스님처럼 철저한 불교주의자/ 인문주의자를,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처럼 물처럼 자연스런 책을 만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