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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와 얼굴들'이란 인디 밴드가 있다. 뭐 이젠 너무 많이 알려졌으니 인디라고 말하면 안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노래 중에 이런 곡이 있다. 별일없이 산다. 어느 프로그램에선가 그에게 이런 제목으로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 기억하는건 아니다. 대충 이런 식의 말이었다. "별일없이 산다"라는 말이 제일 부러운 말인 것 같다고.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별일없이 산다고 말하는게 그렇게 부러운지 모르겠다고. 격하게 공감했다. 심심하긴 해도 부러운 말이다. 이렇게 별일 없이 지나가는 날, 너무 일상적이라 지루함과 특별함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감정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날. 이런 날에는 눈에 잘 들어오는 단어들이 있다. 이런 단어들.. 평범한, 보통의, 사소한..
그래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장편소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 문단에 데뷔한 이래 줄곧 사회에서 발붙일 곳 없는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방비로 노출된 폭력과 절망적인 상황 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 그녀는 이렇게 소개된다. 칠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작가 안보윤이 꾸준하게 이야기해온 키워드들은 하나같이 주로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난폭한 사건 사고에 관해서였다. 음지에 사는 이들에게 그 사건 사고는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고, 잔잔한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는 절망은 어느 새 희망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있다.
처음 만나보는 작가다. 그간 써냈다는 작품들의 제목 역시 눈에 익은게 없다. 단지 종이테이프를 뜯어 그 위에 적어놓은 것 같은 제목에 이끌러 집어들었다. 일상의 시계에서 마주치는 폭력과 절망,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라는 문구로 소개되고 있는 안보윤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은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가정과 학교의 폭력에 내몰린 여자아이 '권아영'과 사회에서 이탈해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동성애자 '배두식'의 삶을 묶어 세상의 음지에서 몸부림치며 불행해할 수밖에 없는 불길한 존재들의 이야기다. 고등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중학생 황순구의 눈에 '슈렉'이라 불리는 초등학생 권아영이 눈에 띄고, 순구는 자신이 당해왔던 폭력을 고스란히 아영에게 되풀이한다. 순구에게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도망을 친 아영은 우연히 헌책방으로 숨어들고, 서른아홉 살 동성애자인 주인 배두식을 만난다. 세상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온 두식과 폭력에 시달리던 아영은 함께 지내며 사람과 사람 간의 따스함을 느끼고, 천천히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아둔하고 뚱뚱하고 재기발랄하지도 못한데다가 사람들 속에서 언제나 뒤편으로 밀려나 있는 자신. 제대로 반박할 줄도, 원하는 것을 제때 말할 줄도 몰랐다. 아이들에게 이리저리 차이다 기어코 끌려가는 것도 모두 그런 우유부단함과 나약함 때문이었다. 아영은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고 끔찍했다. 헌책방 주인 아저씨는 대부분의 손님에게 저런 식이다. 책을 찾아달라는 손님에게 알아서 찾아보라, 고 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멍하니 벽이나 책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루하고 공허해 보이는 얼굴. 단정한 얼굴에 비해 나이가 들어보이는 건 저런 표정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이 시작되는 공간은 한적한 놀이터다.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건 학교에 가지 않은 아이들 무리다. 외부와는 어설프게 차단된 작은 공간에서 중학교 3학년 황순구가 또래들에게 폭행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자리를 뜬 후 순구는 근처에서 제가 당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권아영을 발견해서는 다짜고짜 때리고 돈을 뜯어낸다. 폭력과 괴롭힘의 대물림..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두식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십년째 운영하고 있는 헌책방이다. 이곳은 주인인 '배두식'이 살고 있는 책들로 둘러쌓인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 묻혀있는 건 책들이 아니라 주인이다. 그는 침묵과 고독뿐인 책들의 무덤 속에 숨어사는 서른아홉 살 동성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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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두식과 아영의 시선을 계속해서 교차시킨다. 특별히 그 부분들을 나눠주는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두식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문장은 어느 순간 아영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시점으로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변화한다. 저자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사소한 문제를 숨기고 살아가는 불길한 존재들의 시선을 텍스트로 옮겨놓는다.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쉴새없이 주변을 두리번 거려야 하는 그들의 시선이 독자에게 각인되는 이유다.
흐르는 시간을 가진 세상에 등을 돌리려는 그들이 안락함을 느끼고 마음을 여는 곳은 흐르지 않고 멈춰있는 것 같은 시간을 내어주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보통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헌책방이란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면서 그들의 삶은 일상의 그것과 닮아간다. 그들이 바라는 건 아주 단순했으니까.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쁘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책장을 덮으면서 저자가 왜 이 소설의 제목을 '사소한 문제들'이라고 정했는지 궁금했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을 정말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절대 사소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 아영과 두식이 가진 개인적인 문제들(?)은 어쩌면 사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쉽사리 사소하다고 치부할 수가 없다. 왕따, 성폭력, 동성애자, 도박.. 절대 사소할 수 없는 문제들만을 이야기 속에 담아놓은 저자는 이야기의 제목을 '사소한 문제들'이라고 정했다. 물론 한가지는 분명한 듯하다. 아영과 두식은 결코 문제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그걸 보여주기 위해 대신에 저자는 그들과 다르게 정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놓았다. 바로 성현. 작품안에 성현이란 인물은 두명이다. 순구 밑에서 아영을 괴롭히는 초등학생 성현과 도박에 빠져 두식을 이용하려는 성현. 동명의 이인을 등장시킨 건 그 문제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물림되는 폭력을 답습해온 아이와 자신을 이용해 남의 마음을 휘두르려는 성인. 저자는 그들이 행하는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펼쳐놓음으로써 독자의 감정을 그들이 행하는 폭력의 가운데로 던져놓는다. 어찌보면 그들의 문제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불편한 작품이었다. 깨진 뼈야 아무것도 아니지. 금세 붙을 테니까. 새끼발가락? 그것도 어떻게든 고쳐줄 수 있어. 문제는 깨진 마음이야. 그건 무얼해도 안 붙어. 라던 연구주임의 한탄 만이 가슴에 남는다. 그 판단이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에, 이 작품이 불편한건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위에 적어놓은 사소함, 보통의, 평범함.. 이런 단어들이 왠지 마음에 든다. 너도나도 용기를 주려는 마음이 강해서인지 책들을 돌아봐도 '위로'가 키워드인 책들이 넘쳐난다. 힘든 청춘들을 위로해줘야 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해줘야 한단다. 근데 이젠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뭘 해준답시고 자꾸 이야기하면 부담스럽다. 진정한 위로는 그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걸.. 깨닫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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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넘어섰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 병든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해 가슴 아프다. 한창 꿈꿀 나이에, 쳇바퀴 같은 학교생활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 왕따, 상습 폭행, 금품 갈취, 가출, 성매매까지 누가 그 어린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았을까?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의 학교 폭력은 인류 멸망의 단초로 여겨진다. '요즘 애들 무서워요', '가해 학생들을 보면 정말 살의가 느껴집니다', '선생이란 직업을 택한 걸 백 번 후회한답니다. 애들이 무서워요'... 꿈과 희망이 자라는 학교는 어느새 <배틀 로얄>의 그것처럼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잔혹한 전쟁터로 바뀌어버렸다. 서서히, 아주 조금씩, 알 듯 모를 듯한 변화로... 허나 이젠 한계에 다달았다.
얼마 전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때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실효성이 의심되지만 그럼에도 이제야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했다는 점이 다행이다. 학교폭력 근절 종합 대책(대표전화 117)은 피해 학생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며, 가해 학생은 엄중히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학교장과 교사의 역할 및 책임 강화 3. 또래활동 등 예방교육 확대 뉴스에서는 학교 폭력을 묵인(한 걸로 잠정 결론 내린) 교사에 대해 영장을 청구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작금에, 본연의 훈육은 물론이고 각종 행정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이다. 이벤트성 대책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소설 <사소한 문제들> 리뷰의 서론을 길게 장식한다.
읽어내기 힘들다. 첫 부분부터 강도가 남다르다. 이 소설의 가해자로 그려진 황순구가 또 다른 상급생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설마 고작 중3, 고1 정도의 애들이 그럴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면서 경악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또래 애들끼리 강제 성관계를 지시하는, 윤락가 포주보다 더 포악한 폭력성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렇게 당한 황순구가 초등학교 5학년생인 권아영에게 고스란히 폭력을 가한다. 이 소설을 읽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게 만든 장면들.
두 명의 주인공은 학교폭력으로부터, 사회적 소외로부터 상처 받은 영혼이다. 권아영은 뚱뚱하고, 못생긴, 그래서 슈렉이라 놀림을 받는 왕따 학생이다. 서른 후반 배두식은 늘 기대하고, 주저하며, 미련을 두는 헌책방(아버지에게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주인이자, 유폐된 양성애자다. 어느날 황순구로부터 갖은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던 아영은 가출을 감행하고, 두식의 헌책방에 숨어든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나고, 각자의 이야기들이 소름 끼치도록 아프게 이어진다.
둘의 만남은 다소 의외다. 학교폭력에 노출된 초등학생 여자 아이와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성적 소수자인 중년 남자의 만남.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고통과 상처에 관심을 갖지 않고 방치한다는 점. 그 고통의 끝은 죽음 혹은 가출, 잠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둘은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며, 따스한 한뼘 체온을 나눈다.
안보윤 님의 문제작 <사소한 문제들>. 우리가 일상에서 사소한, 혹은 남의 문제로 치부한 일들이 나 혹은 내 주위에서 버젖이 일어나고 있음을, 수많은 이들이 고통의 굴레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알리는 고발서에 가깝다. 초반 극강 참혹의 폭력성을 보여준 것에 반해 뒤로 갈수록 각자의 상처를, 내면을, 관계 맺음을 보여주며 사소하지만 진지한 치유와 위로의 제스처를 보인다.
숨어지내던 아영은 우연히 송곳니를 만난다. 잠적 후 친구인 송곳니(지능이 다소 떨어져,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아영의 친구)가 아영이 당한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급기야 화장실에 불을 지른다. 순식간에 건물이 불타고, 그 안에 있던 송곳니마저 까맣게 타버렸다. 자신의 영혼마저 신음하게 했던 헌책방 건물 2층, PC방 화장실은 그렇게 타버렸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유폐시켰던 두식의 헌책방 또한 타버렸다.
결국 아영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아이들로부터 갖은 모멸을 당하지만, 아영을 그토록 괴롭혔던 황순구는 소년원에 가게 됐다. 반면 두식 또한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세상을 향한다. 서로에게 체온을 나눠줬던 두 사람은 불탄 헌책방 앞에서 조우하며, 끝나지 않는 참혹한 전쟁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결국 웃음은 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2, 제3의 아영이는 학교 폭력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방치된 채 신음할 지 모른다.
공지영 님의 <도가니>,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 등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소설과 영화 들이 새삼 독자와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끝자락에서 궁핍한 삶과 피폐한 가난의 대물림이 계속될 지 모르겠으나, 물론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음 세대, 꿈과 희망으로 세상을 열어갈 우리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이다. 안보윤 님의 <사소한 문제들>이 조금이나마 사회적 이슈가 되어, 좀더 희망이 보이는,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리뷰 쓰기를 포기할까 하다가, 결국 아픈 마음 추스르며 감상을 마무리한다. 정말 지독한 폭력성, 그 야만적 행태를 우리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잔혹하게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그런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 땅의 아이들에게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 미안함을 담는다. 죄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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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붙은 꼬리표는 어떤 방법으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 입학식 때 간질발작을 일으켰던 아이는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게거품으로 불리고 있다. 문방구에서 샤프를 훔치다 걸린 아이는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의심 섞인 눈초리를 받았다. 체육시간에 큰 소리로 욕을 해 벌을 받았던 아이도 수행평가 때마다 최저 점수를 경신했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추한 면면을 결코 잊지 않았다. 쉽게 잊지 않도록 이름을 새기고 꼬리표를 붙였다. (안보윤, 사소한 문제들 125p)
<사소한 문제들>은 폭력의 중심에 내밀하게 파고들어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리고는 가장 외부적-관객적인 시선이 되어 제목을 말한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타자화를 거친 후에는 극도로 ‘사소해’져 버린다는 거다.
<사소한 문제들>은 부정할 수 없이 잔인하다. 뒷표지에 쓰인 문장,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라는 말이 어째서 온전히 희망일 수 없는지 소설 속 약자들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자는 객관의 함정에 빠진다. 삶은 계속될 테니, ‘사소한 문제들’을 겪고도 어쨌든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결코 어렵지 않다. 이것은, 소설을 읽는 순간마다 다가오는 슬픔이 결코 독자의 가슴에 흉터를 새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은 경우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 본인은 ‘슈렉’도 ‘호모새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어버린 약자들은 더 호소할 수밖에 없다. 아영처럼, 두식처럼, 살려달라고.
아영은 단순히 산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 어렸지만 ‘살아남아야’ 했고, ‘살아남는다’와 ‘행복’이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독하게 알아야만 했다. 두식은 그저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통과 만행들이 그를 갈기갈기 찢은 후에야 그는 조금더, ‘살아남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영은 살아 있음을 향해 일그러진 다리를 뻗어나가고, 두식은 불타버린 책방과 함께 모든 과거를 종결짓는다. 이것이 소설의 서사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뚜렷한 현실성을 가진다. 성 착취, 혐오범죄, 도박빚, 큰 제목으로 읽기만 해도 정말 ‘사소할’ 만큼 팽배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 수많은 사소함에 얼마나 무뎌져 있는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수많은 절망들 속에서 모두가 자신의 절망만을 끌어안기 급급해, 타인의 절망에는 차갑도록 덤덤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어차피 세상이 절망 투성이라서, 끔찍한 사건들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현실적 사건에 비해서 자세한 부분부분이 몹시 극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은 얼핏 다행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이 ‘소설’임을 잊지 않게끔, 두식의 옛 직장 동료라는 노골적 조언자와 성현의 아내처럼 사건 절정의 발화점이 되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또는 인터넷 게임 속에서 엄마에게 말을 거는 아영 등의 면면이 있었다. 이런 요소들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소설은 영화 <도희야>를 떠올리게 했다. 두 작품 사이의 가장 큰 공통분모는 약자와 또다른 약자가 만나 각자의 비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일종의 ‘케미스트리’다. 약자는 약자를 알아본다. 알아보고 더 쓸쓸해진다. 알아보았기 때문에 더 강해질 수도 있다. 약자는 약자를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동일시하기도 하며, 애틋하게 증오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이윽고 약자로써의 영혼이 성숙되면 약자는 그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한다. 혹은 다른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약자들’을 방어하며, 부나방이 아닌 짐승이 되어 생존을 위한 본격적 투쟁으로 뛰어든다. <도희야>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주인공 영남이 도희를 태운 차를 몰아 빗속을 지나는 장면은 그들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세상 가운데로 파고드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사소한 문제들>에서 두식과 아영은 각자의 자기 구원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두 작품이 내밀하게 이어지는 까닭은, 구원과 투쟁이 결과적으로 같은 맥락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최종 맥락이 SURVIVE살아남다에서 LIVE살아 있다로 나아가는 지점이라고 본다.
소설을 읽은 후 희망이라는 말조차 진짜 희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되새겼다. 하지만 절망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절망의 본연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라는 문장이 앞의 두 문장을 포함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에게서 본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이 더는 반복되지 않는 미래, 그들이 ‘사소한 문제들’로 취급받지 않는 미래, 그때까지 함께 살아남아서,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희망답지 않은 희망과 선명하게 번득이는 절망,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
작성자: 김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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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학창시절은 따듯하고 아련한 기억들로 추억된다. 지나고나면 그마저도 추억이 된다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와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에 비해 순수할 뿐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지금 보다는 나은 시절이었을지는 모르나 그때부터 가난과 경쟁과 그에 따른 서열이 존재했고,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모자란 아이들을 기가막히게 찾아내 놀리고 이용하는 아이들이 존재했었다.
이 책에도 따듯하고 아련한 학창 시절의 모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황순구'는 못생기고 뚱뚱하다고 따돌림을 받는 '아영'에게 자신이 당해온 폭력을 되풀이 한다. (그런데 아영에게 가하는 폭력이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끔찍하다.) 아영은 견디다 못해 가출을 하게되고 헌책방으로 숨어들게 되는데, 이 헌책방의 주인 '두식'은 대학 시절부터 좋아한 성현이 자신을 이용함을 알면서도 이용당해주는. 은둔형 외톨이 동성애자다.
불행과 외로움과 절망을 가지고 있던 두식과 아영이 함께 살며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를 통해 위로받고 다시 삶 속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역시 이들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영이 없는 빈자리를 인형처럼 예쁘지만 모자란 아이 '송곳니'가 대신하고 있었고, 끔찍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했던 아영의 방화로 인해 의도치 않은 송곳니가 목숨을 잃는다. 누군가가 폭력에서 벗어나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야 하는 꼴이라니. 끔찍하고 잔인했다.
작가는 이렇게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음을, 사소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되어가고 있음을 담담하면서도 서늘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부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도 이렇게 쓸쓸한 그림자가 팔을 벌리고 있을 것 같아 책 장을 덮고도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고무줄로 꽁꽁 묶은 머리카락 때문에 드러난 목이 팔만큼이나 가늘다. 하얗고 앳된 목. 그러나 그 아래 급격히 부푼 살덩어리가 경계선을 짓듯 깊은 주름을 만들어낸다. 그 아래로 퍼진 비대한 등. 두식은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의 발밑으로 쓸쓸하고 불행한 그림자가 헐겁게 늘어져 있다. 두식은 그림자의 불행과 외로움을, 절망을 알아본다. 여자아이와 두식은 그런 식의 동류인 것이다. p44
한번붙은 꼬리표는 어떤 방법으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 입학식 때 간질발작을 일으켰던 아이는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게거품으로 불리고 있다. 문방구에서 샤프를 훔치다 걸린 아이는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의심 섞인 눈초리를 받았다. 체육시간에 큰 소리로 욕을 해 벌을 받았던 아이도 수행평가 대마다 최저점수를 경신했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추한 면면을 결코 잊지 않았다. 쉽게 잊지 않도록 이름을 새기고 꼬리표를 붙였다. 아영은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에게 붙을 꼬리표는 무엇일까.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일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꼬리표는 입과 입을 통해 인터넷과 전화선을 통해 간단히 그러나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아이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다 종내에는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 뻔했다. 이 이상 얼마나 더 깊은 나락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몹시 깊고 캄캄하고 더러울 것이었다. p125
"우리 애가 내성적이고 말도 잘 못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왜 뼈까지 부러질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어. 이전 학교에서는 계단에서 떠밀리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어. 가위로 뒷 머리를 잘라놓는 바람에 머리를 짧게 깎아주면, 그게 또 맘에 안 든다고 애를 괴롭혀. " " 깨진 뼈야 아무것도 아니지, 금세 붙을 테니까. 새끼발가락? 그것도 어떻게든 고쳐줄 수 있어. 문제는 깨진 마음이야. 그건 무얼해도 안 붙어.."p193
두식은 조용히 아영을 배웅한다. 아영은 이제 숨기려는 기색 없이 오른다리를 끌며 걷는다. 발밑으로 헐겁게 늘어진 그림자가 매달리듯 질질 끌려가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불행하고 쓸쓸해 보인다. 두식은 그 고독한 절망이, 자신과 똑같은 깊이이 그 슬픔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한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아저씨, 슈렉은 정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그렇게 물은 아영은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돌아섰다. 떠나야 한다. 다른 것들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 한다. 게으른 슈렉조차 무언가를 얻기 위해 늪을 떠나지 않았던가. 침묵한 대가라면, 외면한 대가라면 이제 충분히 치렀다. 이제부터 아주 먼길을 이 낡은 몸으로 걸어내야 한다. 꾸준히 걸어낸다면 그간 놓쳤던 행복의 퍼즐 하나쯤은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식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선다. 그림지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점점 더 빨리 걷는다. 뒤돌아보면 팻말 바로 옆에, 두식이 떼놓고 온 불행하고 쓸쓸한 그림자가 팔을 벌리고 서 있을 것만 같다. 탁탁 소리와 함께 두식은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p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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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 [사소한문제들]을 정말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책장을 펼쳐들었다면 첫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알게 될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들중에서 가장 어렵게 읽은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흡입력도 있고 문장도 매끄러운데 읽기에는 불편한 글들을 만난 느낌이다. 책장을 펼치면서 '아 이책은 어렵구나'하는 생각을 갖게되는 경우가 내게는 몇가지있다. 일단 책내용이 정말 어려워서 읽어도 활자로만 읽힐뿐 내용의 윤곽이 잡히지않는경우와 책내용이 완전 허술한데다가 오타가 많아서 페이지 넘기는것이 짜증이 나는 경우, 그런데 이책은 그런경우와는 전혀 상관없이 읽는것이 고통스러웠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이 이어지는 소설이라던지 손발이 잘리는 잔인한 소설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라는 인식으로 읽을수있었던 것에 반해서 이책의 내용들은 수시로 내 눈앞에 장면들을 내보이면서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아무곳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자꾸 주지시키는것이었다. 황순구라는 녀석에게 구석으로 몰리는 아영이를 지켜본다는것이 흡사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노는것처럼 잔인하고 야비한데다 어떤 도움도 줄 수없이 그저 당하는 아영이를 지켜보기가 어렵고 힘이 들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은둔의 삶을 살던 두식과의 만남이 그나마 아영이를 시궁창에서 건져올릴 한줄 동아줄이라는 생각이 작은 위로를 던져줄뿐이었다. 학교폭력이 공론화된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않은채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의해서 어린 목숨들을 희생당하고 있다. 어떻게하면 이 반복되는 연결고리를 끊을수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우리 모두 한때는 그나이였던 시절이 있을텐데 우리가 살던 시대와 지금의 아이들이 사는 시대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것만 같다.
놀이터안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아이들의 폭력의 희생자이던 피해자가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가해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또다른 희생자를 물색한다. 그런 순구의 눈에 들어온 어린 여자아이 슈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더럽고 못생긴 아영이는 순구에 의해서 커다란 폭력에 노출되게 된다. 엄마의 힘을 빌릴수도 없이 성인남자들에게 일종의 성을 제공하게 된것이다. 아무리 도망치려해도 순구라는 놈의 시선에서 도망칠수없을것 같다. 영원히 순구라는 놈에 의해서 끝까지 가게될것같다는 두려움이 아영이를 잠식해오는 순간 아영이는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된다. 그렇게 순구의 시야에서 도망쳐나와 아영이가 선택한곳이 두식이가 운영하는 헌책방속. 아영이가 학교폭력의 희생자라면 두식이는 사랑에 의한 피해자였다. 남과 다른 사랑,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것조차 쉽지않은 두식을 이용해서 가진돈 모두를 수시로 찾아와 가져가는 그 남자를 두식은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는것일까. 다른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채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하던 아영과 두식은 서로가 함께 지내는 시간을 통해 천천히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방법을 알게된다. 헌책방이 불타버리는 순간이 어쩌면 그들의 껍질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이었는지도...
아영이 타인에 의해 박제된듯한 삶을 살았다면 두식은 자의에 의해 박제된 삶을 살았다. 떠났던 이가 아무때라도 찾아올수있게,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두식은 알지못했었다. 시계추처럼 그저 왔다갔다 하는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던 두식만의 공간에 아영이라는 어린 소녀를 들여놓았을때부터 두식의 박제된 삶은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타인을 위한 위로와 연민등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모든것이 사라진후에 훌훌 자신을 둘러싼것들에서 벗어나 떠날수 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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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제들.. 제목만 봐서는(사실 표지에 꼬마 여자 아이 그림이 있어서 어쩜 약간은 10대 소녀의 성장 소설류로 조금 편안한 주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넘기고 책을 읽을 수록 흠흠.. 사소한 문제란 것들은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 조금은 어두운 일면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더군요... 어린 청소년들의 폭행과 성문제..그리고 거기에 동성애까지.. 어찌보면 다루기 쉽지 않고 드러내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 주를 이루고 있더군요. 그래서 어쩜 제목을 사소한 문제들로 지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반전이라고 해야할까요..
등장 인물 중 대부분은 아웃사이더 같은 인물들 입니다. 변방의 인물들... 고등학생에게 폭행 당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행동하고 죄책감내지는 겁도 내지 않고 행동하는 남자아이 황순구.. 황순구에게 항상 폭행을 당하고 황순구가 시키는 대로 성매매에 이용당하는 여자아이 아영이.. 동성애자로(책에선 게이라고 표현하고 있더군요..) 사랑하는 남자 성현에게 모든 것을 주고 아버지의 유품인 헌책방을 꾸려가는 두식... 두식의 후배로 두식에게 자신이 힘들때마다 나타나 그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 성현...
실제로 학교 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심각한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왕따문제가 덜했으니까요. 물론 당시에도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끼리끼리 모여다니긴 했지만.. TV뉴스의 경우엔 아주 심각하다기 보다는 조금더 표면적인 면만 부각되어 보도되는 경향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조금은 더 파고 들어가다보면 아주 심각한 문제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친구들 중에도 중고등학교 교사가 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이 어떤 행동을 하면 침을 뱉거나 욕을 하고..심지어 때리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동급생에겐 오죽하겠나란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대충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 생각보다 아주 심각하고 비겁하게 동급생이나 후배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더군요.(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옮기지 못하겠습니다. 약간 좀 아시죠?)
그런데 이책에서 그런 내용들을 다루더군요. 처음부터... 어떻게 보면 누군가는 다뤄야 하는 문제인데도..다들 쉬쉬하기 바쁜 문제들... 전적으로 피해를 보는 아이는 자신의 외모때문에 더욱더 그 피해를 말하려 들지 않습니다. 학교도 사회도 그아이에겐 막연히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헌책방 아저씨는 아이에게 더없이 훈훈한 입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등장하는 불이라는 건 모든 사건을 끝나게 하는 동시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매개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시원 불로 인해 잠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던 성현..(물론 다시 그 어두운 길로 들어갔지만요..) 그리고 마지막에 있었던 불...그것은 아영과 두식에게는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되는 매개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뭐 나름대로 제 해석입니다.(작가님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ㅋ)
지극히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을 사소한 것처럼 흐르듯이 쓰고 있는 작가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고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을 읽게 되어 조금은 세상일을 바라보는데 눈이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불이 나서 가게가 다 타고 난 후 두식의 생각이 들어있는 글귀를 한자 적어봅니다. '떠나야한다. 다른 것들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한다...... 두식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을 나선다. 그림자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점점 더 빨리 걷는다. 뒤돌아 보면 팻말이 바로 옆에 , 두식이 떼놓고온 불행하고 쓸쓸한 그림자가 팔을 벌리고 서 있을 것만 같다. 탁탁 소리와 함께 두식은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다들 달리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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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이 소설을 지나칠 뻔 했다. 매력적인 표지를 열어젖히는 순간 불편한 진실, 무관심하게 봐왔던 폭력적인 현실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몇 번을 들췄다 덮었다 반복했는지 모른다. 초등학생인 황순구가 자기가 당한 폭력을 '슈렉'이라 불리는 아영에게 그대로 행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다. 이러한 장면들을 '사소한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란 물음 때문에 책 안의 이야기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불편한 장면을 조금 건너뛰자 소설의 새로운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헌책방 주인 두식과 아영의 만남이 그랬다. 이 책을 읽고 저저와의 만남의 자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잔혹하고 폭력적인 내용 때문에 남자가 쓴 소설이 아닐까란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초등학생은 너무 심하지 않나, 최소한 중학생 정도는 되어야지'란 질문을 받았다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자는 '중학생은 되나요?'란 질문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단다. 저자는 초등학교 때 왕따를 체계적으로 시켜보기도 하고 되레 왕따를 당해본 적도 있다고 했다. 작품 속처럼은 아니었지만 숨기려고 해도 어느 정도 저자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로 르포를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 학교 다닐 때 왕따를 당하고 시켜 본 경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초등학교 때 시골의 작은 학교라 10명도 되지 않은 아이들 틈에서 왕따를 당하고 시킨 경험이 있다. 왕따를 당했을 땐 정말 자존감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왜 학교에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고, 나는 왜 이렇게 못났는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왕따에서 헤어 나오고 내가 왕따를 시킬 때는 뭔지 모를 짜릿함과 죄책감이 서려 이런 기분은 뭔가 하는 당혹감에 빠지기도 했다. 아영과 황순구 같은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소설 초반에 내가 느꼈던 어두운 면이나 폭력적인 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저자는 두식을 등장시켰다.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보이고 싶었고, 자발적인 소수자인 두식과 어쩔 수 없는 소수자인 아영의 만남을 통해 내면 안에서 스스로 생긴 폭력도 사람을 망가트릴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다는 뜻을 내비쳤다.
반면 두식과 아영은 어떻게 보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두식이 성적 소수자라는 것 이외에는 평범한 남자인 만큼, 어쩌면 헌책방이란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아영의 시선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초등학생인 아영과 대화가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영은 엄마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 앞에서보다 두식 앞에서 더 어리광을 피우며 초등학생다운 면을 보이기도 한다. 폭력과 왕따 앞에 내놓인 아영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모습이었는데 유독 두식 앞에서 만큼은 솔직한 모습을 보여 개인적으로 둘의 독특한 동거 장면이 소설 속에서 제일 즐거웠다. 황순구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황순구는 아영에게 자기가 받은 폭력을 그대로 세습하는 그야말로 아영의 삶을 파괴하는 인물로 나온다. 폭력은 학습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또한 황순구다. 두식을 여관에서 처참하게 폭행한 용복이란 인물도 같은 라인으로 볼 수 있는데, 피해자가 학습되는 과정에서 가해자로 전환되면서 덩달아 악해지고 강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어 참으로 씁쓸했다. 가정이 무너지고 폭력과 무관심이 난무한 이야기를 그려냈지만 "가족은 울타리다"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말이 울림이 되었다. 그랬기에 가족 안에서 소설을 쓸 수 있었고 가정이 무너져도 울타리가 무너지는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어둡고 폭력적이고 우울했던 마음들에 조금은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울타리 밖의 세상이 어떤지 처절하게 경험했지만 가족이란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잘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이런 이야기는 더욱 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가는 울타리가 영원히 튼튼하리란 법이 없기에 일단 그 안에서의 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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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들은 불행 그 자체다. 아이들이 책을 전혀 사지 않거나 가게를 엉망으로 어질러놓거나 매번 책을 훔쳐가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눈을 돌려라. 무시해라. 잊어버려라. 이것은 본능이 명령하는 일이다. 위험한 것, 불결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동물적 본능이. (46p)
지금이라고 딱히 헌책방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두식은 그저 이곳에 고인 채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마음에 들 뿐이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마음에 들 뿐이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으면 어쩐지 잃어버리는 것도 없을 것만 같다. 다만 고여 있는 게 시간이나 추억 뿐 아니라 미련과 후회까지인 것이 다소 불만이다. (71p)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리창 큰 집이 무조건 좋은 집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뭔가, 햇빛 닿는 곳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111p)
아영은 고작 일주일 만에 상대방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게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관심이 가는 곳마다 새롭게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 사실들을 알맞게 끼워맞추면 상대방이 오롯이 탄생한다는 것에 더욱 놀란다. (123p)
"그래도 좋잖아요. 난 이런 거 좋더라. 아침에도 뭔가 햇빛 속에서 깨어나는 느낌이고, 태양 아래서 떳떳이 살아가는 기분, 그런 기분이 들잖아요." (173p)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 끝이구나.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정말로, 정말로 들어." (233p)
두식은 조용히 아영을 배웅한다. 아영은 이제 숨기려는 기색 없이 오른다리를 끌며 걷는다. 발밑으로 헐겁게 늘어진 그림자가 매달리듯 질질 끌려가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불행하고 쓸쓸해 보인다. 두식은 그 고독한 절망이, 자신과 똑같은 깊이의 그 슬픔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한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245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