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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1960년 1월 3일.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루르마랭의 집을 나선 알베르 카뮈는 예약한 기차 대신 친구의 자동차에 올라 파리로 향한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고향 알제리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두운 시선을 차창 밖으로 던진다. Paris는 이제 막 노벨상을 받은 작가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알제리인가, 프랑스인가. 그는 침묵한다. 프랑스 대중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알제리에서 태어나 이슬람 문화 속에서 자란 그는 오직 프랑스 국민이 되라는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하라는 요구에도 침묵을 지킨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무기를 지원하는 한때의 동지, 사르트르를 비롯해 파리의 좌파 지식인들의 비난과 조롱 역시 가혹하다. 폭력과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상주의를 거부하는 카뮈에게 프랑스와 알제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인인 자신과 스페인계 어머니, 모두의 고향은 알제리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좁고 낡은 아파트에 홀로 기거하고 있다. 성공한 작가가 된 아들은 어머니를 프랑스로 데려가려 하지만 그녀는 고향 알제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 옛날,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던 가난하고 괴팍한 할머니에 맞서 문맹이자 청각장애인 어머니는 힘겹고 어눌한 발음으로 ‘카뮈는 학교에 가야 해요’라고 외쳤던 바로 그 어머니였다. 아들이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로 성공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며 구태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상을 받았다는 것에 감동했고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기자들을 부담스러워했을 뿐이다. 카뮈는 알제리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 어머니를 걱정했다. 그의 침묵이 알제리에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안전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가 태어나 맨 처음 배운 것은 침묵이었다. 청각장애인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그 침묵,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들이 위협적인 현실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침묵.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함의 표현이 아니라, 침묵 속에 살아온 어머니처럼 억압적인 세계와 홀로 마주 서는 저항의 표현, 부정의 침묵. 강렬한 태양을 마주한 채 낯선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뫼르소의 살인을 합리성의 바깥으로 끌어낸 카뮈는 폭력에 대한 극단적 사유를 통해 인간과 삶의 불가해함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합리성과 도덕성의 깃발 아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잔인한 폭력의 난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프랑스의 탐욕스러운 식민정책과 압제는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알제리 독립 후 이집트 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구소련의 반서방 주의 사이에 놓일 수 있는 알제리의 불안한 미래를 우려했다. 비록 역사의 무의식은 독립을 향하고 있고, 그 속에는 또 한 명의 위대한 검은 프랑스인 프란츠 파농도 있었지만, 알제리가 고향인 카뮈는 알제리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를 배신자로, ’파트타임 동지‘로, 오만방자한 제국주의자로 만들었다. 한때는 파시즘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이자 젊은 공산당원이었으나 공산주의와 결별하며 변절자로 불렸다. 구소련의 스탈린식 통치에 대한 저항과 사형제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알제리와 더불어 일생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그는 모든 압제와 억압, 교조에 반항하는 인간이었다. 폭력의 종식을 거부하는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서 카뮈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이 되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역사의 희생자들이었고, 그들 모두를 어머니로 여겼다. 제국과 식민지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믿음은 제국주의 침탈의 경험을 지닌 우리에겐 낯설다. 이 믿음을 반동적 기만으로 폄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가장 급진적인 생각으로 이어진다. 인종과 민족, 국가와 영토의 경계 자체를 무력화시키겠다는 무정부적인 발상은 그 믿음과 표리를 이룬다. ’최고학력자를 위한 철학'자 사르트르와 더불어 당대 거센 비난에 직면했던 카뮈. 파리 부르주아 지식층 대부분은 카뮈의 출신 성분을 따지며 악의에 찬 비난과 경멸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알제리의 가난한 가정부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들의 세계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가난이었고 그로부터 삶을 배웠으므로 카뮈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대중의 몰이해에 상처받는 한 남자의 연약한 그림자가 늘 그를 뒤따른다. 이념적으로도, 그 존재에 있어서도 어디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는 스스로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노벨상 수상 이후 혼란한 상황에 직면한 카뮈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 던지며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최초의 인간”을 붙들고 있다. 바깥세상으로부터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그는 알제리의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가난했지만 생의 에너지로 충만했던 그 기억들이 차창 밖의 안개 속에 잠겨있다. 그 묵직한 안개를 뚫고 자동차는 파리를 향한다. 속도에 대한 기피, 평소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다고 말했던 카뮈는 결국 그 스스로 부조리를 입증하고 만다. 권력과 정치, 위선과 타협에 대한 저항, 신과 이성 그리고 이상적 사회에 대한 불신, 그에 대한 모든 오해 혹은 이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현실의 희생자들을 주목했고 또 그로 인해 주변인으로 남았다. 해변과 태양 그리고 축구를, 여자들과 추는 춤을 사랑했던 남자,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모순을 열정적인 생의 에너지로 삼았던 남자. 그러나 고독했고 소외와 비난을 달고 살았던 남자, 압제자에 대한 거부와 희생자에 대한 연대를 주저하지 않았던 남자는 1960년 1월 4일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미완의 원고 “최초의 인간”과 그가 늘 품에 지니고 다녔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남기고 사라졌다. "Always go to far, because that's where you will find truth"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카뮈를 사랑한 여자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대 카뮈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사르트르를 만났던 여자들은 지적 우월을 내세운 그의 공격성에 압도됐지만, 단 한 번이라도 카뮈의 손을 잡고 춤을 춘 여자들은 카뮈를 잊지 못했다고 전한다.카뮈, 선택과 침묵 사이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루르마랭의 집을 나선 알베르 카뮈는 예약한 기차 대신 친구의 자동차에 올라 파리로 향한다. 테러와 고문, 학살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고향 알제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두운 시선을 차창 밖으로 던진다. 파리는 이제 막 최연소 노벨상을 받은 작가에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1960년 1월 3일이다. 알제리인가, 프랑스인가. 그는 침묵한다. 이미 논쟁적인 작품을 써낸 작가에게 프랑스 대중은 더군다나 호의적이지 않다. 알제리에서 태어나 이슬람 문화 속에서 자란 그는 오직 프랑스 국민이 되라는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하라는 요구에도 침묵을 지킨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무기까지 지원하는 한때의 동지, 사르트르를 비롯해 파리의 좌파 지식인들의 비난과 조롱 역시 가혹하다. 폭력과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상주의를 거부하는 카뮈에게 프랑스와 알제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렬한 태양을 마주한 채 낯선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뫼르소의 살인을 법과 정의, 합리성의 바깥으로 끌어낸 카뮈는 폭력에 대한 극단적 사유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불가해함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현실에서 난무하는 폭력, 합리성과 도덕성의 깃발 아래 벌어지는 비인간적 폭력의 난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탐욕스러운 식민정책과 압제는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알제리 독립 후 이집트 주도의 신 아랍제국 주의와 구소련의 반서방 주의 사이에 놓일 수 있는 알제리의 불안한 미래를 우려했다. 비록 역사의 무의식은 독립을 향하고 있고, 그 속에는 또 한 명의 위대한 검은 프랑스인 프란츠 파농도 있었지만, 알제리가 고향인 카뮈에게 알제리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헛된 망상이었을까? 무엇보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당시 알제리의 반 프랑스 운동의 지도자가 그를 ’파트타임 동지‘라 칭했든, 또 후대에 ‘제국주의자의 오만방자함‘으로 여겨지든, 정의와 자유의 이념 아래 희생되고 소외당하는 수많은 약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였고 그들 모두를 어머니로 여겼다. 소설로 엮어낸 <카뮈의 마지막 날들> 스페인계 이민자인 어머니는 여전히 좁고 낡은 아파트에 홀로 기거하고 있다. 성공한 작가가 된 아들은 어머니를 프랑스로 데려가려 하지만 어머니는 고향 알제리를 결코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옛날,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던 가난하고 괴팍한 할머니에 맞서 문맹이자 청각장애인 어머니는 힘겹고 어눌한 발음으로 ‘카뮈는 학교에 가야 해요’라고 외쳤던 그 어머니였다. 아들이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로 성공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며 구태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상을 탔다는 것에 감동했고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기자들을 부담스러워했을 뿐이다. 카뮈는 그곳 알제리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폭력의 종식을 외치는 카뮈의 노력은 어느 곳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그의 침묵이 알제리에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안전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가 태어나 맨 처음 배운 것은 침묵이었다. 귀머거리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그 침묵,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들이 위협적인 현실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침묵.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함의 표현이 아니라, 침묵 속에 살아온 어머니처럼 온 세계와 홀로 마주 서는 저항의 표현, 부정의 그 침묵.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를 대하는 파리 지식층의 질시와 대중의 몰이해에 상처받는 한 남자의 연약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최고학력자를 위한 철학'을 한다는 사르트르를 비롯해 대부분 파리 부르주아 지식층은 카뮈의 출신 성분을 따지며 악의에 찬 비난과 경멸을 드러낸다. 그가 알제리의 가난한 가정부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들의 세계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카뮈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가난이었고 그로부터 삶을 배웠으므로. 노벨상 수상 이후 이런 험악한 상황에 직면한 카뮈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 던지며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최초의 인간”을 붙들고 있다. 바깥세상으로부터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그는 알제리의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가난했지만 생의 에너지로 충만했던 그 기억들이 차창 밖의 안개 속에 잠겨있다. 그 묵직한 안개를 뚫고 자동차는 파리를 향한다. 속도에 대한 기피, 평소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다고 말했던 카뮈는 결국 그 스스로 부조리를 입증하고 만다. 권력과 정치, 위선과 타협에 대한 저항, 신과 이성 그리고 이상적 사회에 대한 불신, 그에 대한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현실주의자였고 또 그로 인해 주변인으로 남았다. 해변과 태양 그리고 축구를, 여자들과 추는 춤을 사랑했던 남자,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모순을 열정적인 생의 에너지로 삼았던 남자. 그러나 고독했고 소외와 비난을 달고 살았던 남자, 압제자에 대한 거부와 희생자에 대한 연대를 주저하지 않았던 남자는 1960년 1월 4일 플라타너스 그늘 미완의 원고 “최초의 인간”과 그가 늘 품에 지니고 다녔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남기고 사라졌다. "Always go to far, because that's where you will find truth"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카뮈를 사랑한 여자들의 말이다. 여자 문제에서도 당대 사르트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여자들은 지적 우월을 내세운 그의 공격성에 압도됐지만, 단 한 번이라도 카뮈의 손을 잡고 춤을 춘 여자들은 카뮈를 잊지 못했다니. 이런 바람둥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