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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서관 신간 목록을 훑었다. 아직 대여 중인 상태가 아니면서도 흥미가 가는 책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야마모토 후미오란 이름을 발견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플라나리아』작가였다. 그제야 2021년 10월 1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알게 됐다.『바닐라』는 야마모토 후미오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발표한 단편들을 담고 있다.「바닐라 2008년 11월」,「난 괜찮아 2009년 1월」,「과자 동산 2011년 1월」,「사랑의 바욜린 2013년 12월」,「20 X 20 2015년 여름」,「아이 아줌마 2011년 7월」, 총 여섯 편이다.
「바닐라」는 화자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하얀 연인을 만난 이야기다. 연인의 인터넷 일기가 중간중간 섞여 있다. 스토리의 성질이 달라 까끌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반전에 놀란 작품이다. 반전은「난 괜찮아」와「과자 동산」도 만만치 않다. 선입견을 깨 준다고 할까. 뭔가 이면을 본 것 같기도 해 인상적이기도.「사랑의 바욜린」에서는 야마모토 후미오의 치밀함이 느껴진다. 하필 하마나코, 폴란드인, 3월 11일 대지진.「20 X 20」은 뭐랄까. 작가라는 직업의 고단함이 전해진다고 할까. 나오키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을 받은 야마모토 후미오에게도 애로가 있었던 것 같아 인간적이기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지막으로「아이 아줌마」는 마흔일곱 살 독신 여성의 이야기다.
나는 아직 철이 없구나, 아줌마면서 아이구나, 아이 아줌마구나, 하고 역 계단을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지금은 계시지 않는 할머니가, 기르던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네가 아이를 안 낳으니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아이인 거야.” 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종종 말했다. 그것의 귀엽지 않은 버전이다.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해서 귀엽지도 않네, 라며 누가 인간 아줌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p. 222「아이 아줌마」)
스토리는 현실 같기도, 비현실 같기도. 아이 아줌마의 일도, 옷도, 일어나는 시간도 자는 시간도, 심지어 어울리는 사람의 종류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작가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그럴 뿐 근본적으로는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p. 245「아이 아줌마」), 라고 명시하고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난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마무리가 따스하다. 마치 야마모토 후미오가 이렇게 간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완전히 길이 들어 부드러워진 가죽 재질 리드 줄을 쥐고서 나는 일어섰다. 릴리는 나를 선도하듯이 걷기 시작했고 내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아닌지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헥헥 하고 릴리는 흰 김을 내뿜었다. 그녀는 만년에 이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외로웠을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불행하지는 않았다. 설령 외로움을 메우기 위해 기른 반려견이라도 온기와 신뢰를 아낌없이 주는 생물이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째서 나에게 반려견을 맡겼는지 그 이유는 역시 모른다. 알 수 없는 채 나는 살아간다.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답을 찾아서 헤매고 있다. 나는 한 주에 닷새 일을 가고, 휴일에는 반려견 산책과 장을 보고, 밤에는 친구나 가족과 식사를 하거나 욕실에서 추리 소설을 읽는다. 일상에 싫증날 일은 없다. 무언가 이루었다는 실감 없이 이것저것 어중간한 채 어른도 되지 못하고, 유치함과 제멋대로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확실히 죽을 때까지 말이다. (p. 246~ 247「아이 아줌마」
야마모토 후미오에게 생물은 각별했던 것 같다.「사랑의 바욜린」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란 생물이 되는 것.(p. 199「사랑의 바욜린」), 이라고. 오늘 처음으로 야마모토 후미오의 사진을 봤다. 미소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단편들이지만, 번역에 아쉬운 점이 많았다. 밑준비(p. 86) - 일본식 표현, 여서일곱(p. 160) - 예닐곱으로 써야 한다, 큰 덩치에 오동통한 체형(p. 206) - 오동통하다의 사전적 의미인 몸집이 작고 통통하다와 상충되는 표현, 기척이 들었다(p. 211) - 기척이 들렸다 혹은 기척을 들었다, 라고 써야 한다, 슬램가(p. 153) - 슬럼가, 민소재(p. 167) - 민소매, 감질맛(p. 178) - 감질(그런데 여기서 감질이란 표현이 적절한지도 의문), 슬램(p. 188) - 슬럼, 색이 바라서(p. 226) - 색이 바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