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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살인은 예고되었다. 남자의 가장 가까운 지인 몇몇을 제외한 동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소식을 전해들었다. 살인의 준비과정은 허술했고, 트릭도 알리바이도 없었다. 대담한 살인범들은 흉기를 품에 품고 주점에서 어슬렁거렸다. 심지어 경찰들 또한 살인 계획을 사전에 파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 예고는 현실이 되었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 살인범들은 피해자가 자신의 여동생을 성폭행했기에 보복을 하는 것이라 선언했는데,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스포일러인지라 말할 수 없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니 꼭 한 번 사서 읽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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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도 체험 그대로 쓰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선두에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역시 ‘내 책에 쓰인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p.161)라는 사뭇 비슷한 말을 했다. 중편 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조구호 옮김, 민음사, 2008, 1981, 161쪽 분량)는 실화를 재구성한 증언 문학으로 기사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좋은 소설의 두 가지 조건으로 꼽은 ‘사실을 시적으로 변형하는 것과 세계를 구성하는 암호들을 풀어내 알리는 것’(p.161)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의와도 일치하다. 비현실적 변형과 과장의 틈바구니에 뿌리박힌 진실을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독자 역시 외면하지 못한다.
실제 일어난 참담한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을 지탱하기에 기록하기 위하여 작가는 상당한 공을 들이고 오랜 시간 기다렸다. 비로소 쓸 수 있었을 때 작가는 직접 화자로 등장함으로 예를 갖춘다. 화자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27년 전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적한다. 배를 타야 접근 가능한 마을에 바야르도 산 로만이 신부감을 찾아 도착한건 결혼식 여섯 달 전이었다. 그는 앙헬라 비까리오를 우연히 본 순간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결혼식은 공식적인 행사이자 마을 잔치가 되어 성대하게 치러지는데, 그 밤에 신랑은 순결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내를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앙헬라 비까리오의 쌍둥이 오빠 빠블로 비까리오와 뻬드로 비까리오는 동생이 지목한 상대인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기 위해 곧바로 집을 나선다.
‘미남이고, 점잖고, 스물한 살 나이에 그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산띠아고 나사르는 어머니에게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이었고 ‘천성적으로 명랑하고 온화하며 솔직 담백’(p.14)한 성품이었다. 그는 쌍둥이 형제에게 살해당하고, 다시 한번 학살과도 같은 부검으로 훼손된다. “변호사가 그 살인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 행위였다고 주장하자 재판부는 양심적인 행위라고 받아들였고, 쌍둥이 형제는 최후 진술에서 똑같은 이유라면 천 번이라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p.64)고 화자는 기록한다. 명예가 걸린 문제라 양심에 따라 죽였다는 논리는 이전에 막을 수 있었던 기회들을 모두 상실한 채 실행된다. 예고되고 선포된 살인이었건만 ‘스물 두 명이나 되는 사람’(p.67)은 모호하고도 무심한 핑계를 대며 개입하지 않는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본인이 모를 수 가 없을 것이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오지랖은 민폐라고 발을 빼는 순간 방관자의 자리에서 관람을 시작한다. 혹시라도 불편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는 신조는 얼마나 익숙한가. 화자로 분한 작가는 사건을 복기하며 증언을 다각도로 비추고 수집한다. “이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은 결코 없었다.”(p.67) 그럼에도 일어나버린 사건을 작가는 추적한다, 계속해서 숫자를 기입한다. 잠든 시간과 잠들지 못한 시간을, 깨어난 시간과 움직인 시간, 머문 시간과 머뭇거린 시간을, 날을 세우던 칼의 길이와 폭, 하기로 한 조치를 4분을 지체하고 다시 3분을 빼앗기는 등 사소한 일의 누적이 불러온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쓴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p.123)기에 그날을 불러내며, 사람들은 용기가 없었다고 뒤늦은 자백을 하고 당시와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전혀 몰랐다고 분명히 밝혔던 일들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시인으로 바꾼다. 당사자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예측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다. 그들 역시 비참한 삶으로 어쩌면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짧은 분량으로 치밀하게 전개되는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등장인물 모두를 생생하게, 때론 연극적으로 부각한다. 2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날로부터 시계는 떨어져 나간 것이나 진배없다. 그들의 무의식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마지막 날에서 일초도 전진하지 않았음을 이미 안다.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산띠아고 나사르의 ‘냄새’는 방관자들의 삶이 죽음과 일반이라는 상징으로 읽힌다. 열 한달 동안 잠들지 못했던 뻬드로 삐까리오의 불면증은 『백년의 고독』에서 레베까로 인한 전염성 불면증을 연상케 한다. 어떻게 대처해도 결국은 삶을 황폐화시켰던 불면증이다. 곳곳에 작가의 인장격인 마술적 사실주의 색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압권은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참혹한 행진을 그려냄으로 웅변한다.
죽은 자의 장송행진곡은 산자들에게 호소하고, 그 호소는 시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에 사는 독자에게 닿는다. 또 다른 산띠아고 나사르는 없는지, 관망하던 자리에서 뒤늦게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는지, 합리화로 가릴 수 없는 고통 앞에 굳어가는 심정 또한 환기한다. 소설은 불행한 우연과 책임을 회피하는 침묵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질문도 남긴다. 산띠아고 나사르를 향한 앙헬라 비까리오의 일관된 입장이 그렇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다른 누구여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폐쇄된 공간에 붙박힌 가부장 사회에서 착취의 대상이며 도구, 고뇌의 상징이 되어버린 한 여성이 필요로 했던 희생양이었을 수 있지만 새롭게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그녀 역시 이 거대한 부조리극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겠다. 작가는 마술보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무대에 올려 누구의 책임인지 묻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치달아가는, 기록함으로 증언하고 질문하는 대가의 작품을 권한다. ![]() 책 속에서>
어느 날 새벽의 수탁 소리에 우리는 불현 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p.123)
무엇보다도 그는 문학에서도 허용되지 않던 수많은 우연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여 그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p.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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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직전에 읽었던, 마르케스의 유작 <8월에 만나요>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준 작품이었다. 내가 기대하던 마르케스 만의 특징이 전혀 없어서다. 그래서인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도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어우아, 이 작품은 내가 바라던, 내가 좋아하던 마르케스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내가 마르케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르케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미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한데, 거친 삶을 대하는 낙관적인 태도와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날것 그대로의 삶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장르로 비유하자면, 치밀하게 잘 짜인 서스펜스가 아닌, CG 없는 호쾌한 액션이라 보면 될듯싶다. 이러한 특징이 여실히 나타난 작품이었다. 27년 전 일어난 살인사건을, 피해자의 친구인 화자가 회고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피해자 나사르는 부유하고 자신감 넘치는 평범한 청년이다. 가해자는 같은 마을의 쌍둥이 형제인데, 살해 이유는 이렇다. 쌍둥이 여동생의 결혼 첫날밤, 처녀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그녀는 자신을 범한 사람이 나사르라 말한다. 소설에서는 나사르라는 근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가 아닐 거라는 암시를 주지만, 답답하게도 여동생은 왜 그를 지목했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를 알게 된 쌍둥이 형제는 여동생의 명예 회복을 위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사르를 죽일 것임을 경고하고, 이를 실행한다. 나사르는 쌍둥이 형제가 자신을 죽이려는 사실을 살해 직전에서야 알게 되지만, 그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부모까지도, 그들이 나사르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까.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운명론적 믿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그들의 허풍으로 취급해서 일까. 일본 속담 중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불편한 일이나 상황이 새지 않도록 감춘다는 뜻인데, 설마 아닐 거야, 말이든 뭐라고 못할까라는, 상황 부정과 애서 휘말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포함된 걸로 보인다. 쌍둥이 형제 또한, 내심 살해를 예고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누군가가 막아 줬으면 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예고된 죽음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의 결과였다. 이러한 현상을 하인리히의 법칙이라 부른다. 모든 큰 사건 전에는 전조를 알리는 작은 사건들이 반드시 발생한다는 이론인데,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많은 경미한 사고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앞서 쌍둥이 형제가 예고한 죽음을, 마을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안일한 생각에 결국 일어났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처럼, 힘들다고, 살고 싶다고, 계속해서 암시를 주지만, 이를 애써 무시하고, 무관심에 방치한다면 되돌릴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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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띠아고 나사르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들이 나를 죽여 버렸어요...." 그들은 누구일까... 칼을 휘두른 쌍둥이일까, 침묵을 지킨 마을 주민들일까.... 실수로 문을 잠가버린 그의 어머니일까.... 거짓말을 한 앙헬라일까...(앙헬라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가정하에) 아니면 이들 모두를 말하는걸까...
저번 주말... 영종도에서 배를 타던중... 갈매기들을 향해 새총을 쏘는 청소년?들을 보았다. "야... 맞았다. 저기 봐... 날개짓을 못하잖아.."거침없이 내뱉는 그들의 말이 뚜렷이 들렸지만 난 미간만 찌뿌린채 그들로부터 멀리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나서서 말리지 못한 이유는.... 그래 맞다! 그들이 두려웠다!! 나는 여자이고, 덩치도 작고, 혼자였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했음을 고백하고싶다. 이렇게 비겁했던 내가..... 산띠아고 마을 주민들의 무관심과 침묵에 돌을 던질수 있을까.... 나또한... 갈매기의 날개에 새총을 겨눈것이다. 보이지만 않을뿐이지... 다를게 무언가....
이 작품은 1981년에 씌어졌다.(책에 언급이 없어 찾아봄.. 그 흔한 작가연보가 없다. 상품구성평 별을 뺀 이유..) 근 30여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이지만... 이기주의가 만연한 요즘 더 필요한 작품이지 않을까... 난... 이작품을 통해 명예의 가치와 인간관계가 낳은 부작용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작가, 작품에 대한 찬사는 따로 하지 않겠다. 나말고도....... 많은 이들이 언급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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