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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재난의 지난함에 관하여 - [재난에 맞서는 과학]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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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재난의 지난함에 관하여<재난에 맞서는 과학>을 읽고  재난은 뜻밖이다. 말 그대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인간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뉴스에서 자연재해를 포함한 각종 재난 소식을 접할 때면 인위적, 그러니까 인간의 그릇된 행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과학기술을 밑천으로 한 현대사회의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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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재난의 지난함에 관하여

<재난에 맞서는 과학>을 읽고



  재난은 뜻밖이다. 말 그대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인간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뉴스에서 자연재해를 포함한 각종 재난 소식을 접할 때면 인위적, 그러니까 인간의 그릇된 행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과학기술을 밑천으로 한 현대사회의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환경재난 연구가인 저자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주제로 쓴 박사학위논문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낸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과학의 역할과 책임, 나아가 재난에 맞서는 우리 시민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내내 새로이 알게 된 것들, 아니 나의 무지함에 연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먼저 2023년 10월말 기준으로 누적 사망자수가 1,835명(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가 각각 158명, 304명에 해당한다)으로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복합적 ‘참사’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2011년 피해사례가 가시화되었으나 1994년 제품 생산단계에서 유해성 논란이 감지되었음에도 기업이 양산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또한 종결된 사안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역사학자 스콧 놀스의 주장처럼 “느린 재난(slow disaster)은 재난을 단 하나의 사건, 쪼개진 사건으로 보는 대신 사건 발생 전 켜켜이 쌓인 과거부터 사건의 여파가 미칠 먼 미래까지의 장기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기를 요청한다(30쪽).”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를 떠올려보면 느린 재난이라는 개념이 보다 쉽게 와닿을 테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지난 기록들을 들여다보면서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한 재난, 곧 사회적 재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나갈지 다 같이 머리를 맞대어 보자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참사를 수습하는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요인이자 핵심 쟁점이 바로 제품의 ‘안정성’ 문제였다. 위험성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았으니 유해하다는 피해자측과, 반대로 유해하지 않다는 기업측이 대립한 것이다. 피해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재난조사에서도 질병관리본부, 보건복지부, 환경부 등 정부의 관계부서는 서로 나서기를 주저하며 지난(持難)한 모습을 보였다. 법 역시 “불확실함은 곧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충분한 근거가 아닌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185쪽).”는 입장을 펴며 이 재난의 지난(至難)함을 방증했다.

  뒤늦게나마 ‘재난에 맞서’ 불확실성을 낮추고 없애기 위하여 전문가들이 실험실 밖으로 뛰쳐나와 다행이다. 과학적 역학조사와 세포독성시험을 거쳐 피해 원인을 밝히고 피해 판정 기준을 만들며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기까지 결코 순탄하진 않았지만,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되찾겠다는 전문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재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피해자를 외면하고 내몬 것은 과학 연구 결과 자체가 아니다. 그 결과를 해석하고 기준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더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되풀이한 책임자(193쪽)”와 기업 편에 서서 불확실성을 조장한 청부과학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책이 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며 일깨우는 듯하다. 재난의 험로를 지나는 데 과학자의 힘에만 의존할 수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과학자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활동가 그리고 피해자가 연대하여 참여함은 물론, 모두가 과학의 장을 넘어 정치의 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책을 덮으며 재난은 갑자기 벌어지는 우연성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보편성에 주목해야 함을 머릿속에 되새긴다. 아울러 앞으로 세계 시민 전체가 느린 재난에 맞서, 가능하다면 그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도록 과학적, 법적 근거를 충분히 마련하고 시스템을 재설계하여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에서 부디 우리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k*****o 2026.05.2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