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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시기의 고려사를 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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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5권으로 기획된 시리즈 가운데 3권이 출간되었고, 이 책은 ‘무신란과 반란의 시대’라는 부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무신집권 시기의 고려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작품이나 자료의 한계로 인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고려시대의 문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사의 경우 왕들의 시호 순서와 주요 정치적 사건, 그리고 문학사와 관련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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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5권으로 기획된 시리즈 가운데 3권이 출간되었고이 책은 무신란과 반란의 시대라는 부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무신집권 시기의 고려사를 다루고 있다한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작품이나 자료의 한계로 인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고려시대의 문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조선시대사의 경우 왕들의 시호 순서와 주요 정치적 사건그리고 문학사와 관련된 주요 작품들을 충분히 논할 수 있을 정도이다그러나 고려시대사의 경우 몇몇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다행히도 이 책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고려시대사를 비교적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과거의 역사를 접하다 보면권력을 잡기 위한 갈등과 왕과 지배계급 사이의 극한적인 대립 등만을 주로 소개하는 경향이 있다주로 집권자들의 의도에 따라 기록된 관찬 사료를 토대로 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하겠는데이 책 역시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고려사절요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하지만 이들 기록은 고려가 아닌 조선 중심의 관점을 취하고 있어고려시대사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의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일반적으로 권력 쟁취를 위한 갈등이 부각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지방 호족들의 연합으로 세워진 정권이기에, 초반의 역사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과 중앙집권적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과정에 집중되고 있다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에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되자문신 귀족들의 권력욕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전횡이 전개되었다특히 문신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했던 무신들이 들고 있어나이른바 무신란(1170)’이 촉발되면서 권력의 향배가 극적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왕권이 무력화되고격변기의 동아시아 형세에서 몽고의 침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아마도 몽고와의 상세한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출간될 4권에서 다뤄질 것이라 기대된다.

  

3권에서는 먼저 무신란과 무신정권’(1)의 등장을 다루고 있는데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날라리 의종과 조력자들로 인해 무신들이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전개 과정이 소개되고 있다이에 대해 문신들과 지배계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승려들이 반발이 간헐적으로 일어나지만무신들이 장악한 당시의 상황에서 금방 진압되었다. 2장의 이어지는 무신 권력자라는 항목을 통해서 정중부와 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충헌의 등장과 상호 권력 투쟁의 양상들이 다뤄지고 있다집권자들의 무능은 결국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데, 3장에서 반란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이른바 망이와 망소이의 난’ 등 전국적으로 촉발되었던 민중들의 저항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느 시대나 무능한 정권이 들어서면 가장 먼저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최씨 정권의 성립’을 마지막 항목에서 소개하고 있다당시 중국에서는 금나라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감소하였고요와 몽고 등이 각축을 벌이면서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그러한 세력의 각축에 따라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고이에 맞서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일이 잦을 수박에 없었다그리고 결국 강력한 힘으로 중국을 평정한 몽골과의 만남이 진행되면서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오랜 동안의 전쟁을 거쳐야만 했다이러한 내용은 앞으로 출간될 4권에서 소개될 것이라고 생각된다최근 고려시대사를 다룬 책들을 여러 권 읽으면서이제는 당시의 역사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i*****n 2023.01.24. 신고 공감 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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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통해 고려사의 흐름을 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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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일단 역사라는 분야가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때로는 해당 지역을 답사함으로써 연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 연구에 활용될 기록들의 절대적 수치가 줄어들고, 때로는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막상 해당 지역을 답사해 보면, 이미 변해버린 모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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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일단 역사라는 분야가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때로는 해당 지역을 답사함으로써 연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 연구에 활용될 기록들의 절대적 수치가 줄어들고때로는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막상 해당 지역을 답사해 보면, 이미 변해버린 모습에서 역사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느끼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과 함께 기록자의 주관에 따른 내용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관건이라고 하겠다그랴서 역사 연구를 하는 이들도 자료가 풍부한 현대사에 집중되어 있고조선시대를 비롯해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연구자의 수효가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다

  

이미 20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만화로 구현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고려시대의 역사를 다룬 작품을 새롭게 시작했다여기에 활용된 자료는 바로 조선 초기에 간행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이며, ‘천하 통일과 고려의 개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1권이 출간되었다저자는 ‘500년 가까운 세월을 다섯 권에 담아 고려사를 만화로 구현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자료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이겠지만 또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생략되거나 간략해 보이는 감이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북쪽에서는 발해가 세워지면서 이른바 남북국시대가 정립되었고신라 말기에는 다시 후삼국의 분립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1권에서는 이처럼 신라 말의 혼란기를 틈타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태봉)의 궁예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이 과정에서 궁예의 일개 참모였던 왕건이 민심을 얻으면서고려를 건국(918)하는 과정이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그려지고 있다당시 각 지방마다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호족들의 협력으로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기에고려 초기의 상황을 호족의 나라라고 규정하기도 한다안정적인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고려 태조인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의 결혼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그 결과 무려 27명의 부인을 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권에서는 태조 왕건으로부터 그의 아들들로 즉위했던 혜종과 정종 그리고 광종의 치세가 다루어지고 있다특히 광종은 귀족들과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라는 인물의 건의를 받아들여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958)하였다이후 과거제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관리들을 발탁하고 임용하는 제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광종은 왕권을 정립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그 과정에서 냉혹한 숙청을 통하여 지배층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이어서 광종의 아들로 즉위한 경종은 어린 아들 대신 왕족이었던 개령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성종이 즉위하여 다양한 제도 개혁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처럼 태조에서부터 성종에 이르는 성종에 이르는 6명의 왕들과 그들의 정치에 초점을 맞춰 1권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책의 말미에는 작가 후기와 함께 고려사 연표고려 왕실 세계도를 제시하고 있으며아울러 이 작품의 기본 자료로 활용된 정사로 기록된 고려의 역사,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 놓았다방대한 자료의 고려사를 직접 읽기에는 만만치 않은 품이 들기에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구성한 이 책을 통해 고려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i*****n 2022.05.05. 신고 공감 1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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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의 상황을 그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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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실록을 기반으로 모두 5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제 4권째 출간이 되었다. ‘대몽항쟁의 끝, 부마국 고려’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몽고에 맞서 싸우던 고려가 끝내 항복하여 원나라에 부마국으로 전락한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미약한 세력을 기반으로 일어났던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까지 지방 호적들의 광범한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그로 인해 이른바 ‘결혼동맹’을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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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실록을 기반으로 모두 5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제 4권째 출간이 되었다. ‘대몽항쟁의 끝부마국 고려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몽고에 맞서 싸우던 고려가 끝내 항복하여 원나라에 부마국으로 전락한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미약한 세력을 기반으로 일어났던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까지 지방 호적들의 광범한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그로 인해 이른바 결혼동맹을 체결하여 다수 호족의 딸들과 혼인을 거쳐 그들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혼인으로 맺어진 권력 집단은 지배계급인 귀족층을 형성하였고태종의 아들들로 초기의 고려 왕위는 이어지게 된다. 4대 왕에 오른 광종은 인재등용의 방편으로 과거제를 실시(958)하여그동안 귀족들에 의해 세습되다시피 했던 관직의 임용 체계를 재정비하여 이후 관리 임용제도의 기틀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는 북쪽 변방으로부터 거란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나강감찬을 비롯한 활약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한동안 평화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그리고 한때 외척의 발호로 인한 이자겸의 난과 서경(평양)으로의 천도를 주장했던 묘청의 난’ 등이 전개되기도 했다아울러 견고한 권력을 잡고 있었던 문신 귀족들의 전횡이 이어지고그 과정에서 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던 무신들을 들고 있어나 이른바 무신란(1170)이 일어나면서 결정적으로 권력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무신정권이 지속되면서 왕조차 그들의 결정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르고부와 권력을 향한 그들의 집착이 강해질수록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고 하겠다아울러 당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럽까지 진출했던 몽고의 등장은 끝내 고려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정중부와 경대승이의민과 최충헌에 이르는 무신정권의 향배는 이미 3권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졌다. 4권에서는 몽고의 침략으로 오랜 동안의 전쟁을 거쳐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 그려지고그럼에도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최우와 최항으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은 몽고의 침략에 맞서기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강화도로 천도를 결정하면서결국 육지에 남았던 민중들이 몽고와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지속적으로 수도를 육지로 옮길 것을 강권하던 원(몽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끝내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1270)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고려의 왕이 되려면 반드시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만 했고고려에서도 왕보다 원나라 황제의 배경을 믿고 행세하는 이들이 설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지금도 강대국을 추종하면서 자신의 위세를 강조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하지만당시 몽고의 위세로 고려에서 행세를 하던 친원세력의 존재와 흡사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끝내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의 왕실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원의 요구을 들어주어야만 했고원종의 뒤를 이어 원나라에서 제국대왕공주와 결혼한 충렬왕이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충렬왕은 자식인 충선왕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복위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는데이러한 모습은 결국 고려를 좌지우지하려는 원나라의 막강한 권력을 보여주었던 사례라고 하겠다고려의 왕위에 오르고도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에 머물기를 고집하던 충선왕의 행태와 원의 황제가 바뀌는 등의 급박한 당시의 정세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4권은 마무리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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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i*****n 2023.11.27. 신고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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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통해 고려사의 흐름을 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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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역사 교육에서 조선시대는 왕의 시호 순서까지 외울 정도로 익숙하지만, 그로부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경우 몇몇 사건과 인물들 중심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재구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 교육의 초점이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로 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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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역사 교육에서 조선시대는 왕의 시호 순서까지 외울 정도로 익숙하지만그로부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경우 몇몇 사건과 인물들 중심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현실이다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재구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역사 교육의 초점이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로 엮은 박시백의 고려사는 고려시대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졌다.

  

지난 1권에서는 고려를 건국할 시기부터 6대 임금인 성종이 즉위하는 모습까지를 다루었다면, 2권에서는 성종의 본격적인 치세로부터 17대 인종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그려내고 있다. ‘전쟁과 외교작지만 강한 고려라는 부제가 말해주고 있듯, 2권에서는 북쪽 변방에 위치했던 거란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시작되고 있다이 시기에 역사에서 강조했던 서희의 담판으로 인해 압록강 인근의 강동 6를 회복하고몇 차례의 정변을 거쳐 마지막 3차 침입을 막아낸 강감찬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다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이후 8대 현종부터 15대 숙종 때까지는 외부의 위협 없이 태평시대가 이어졌음을 그려내고 있으며예종이 즉위한 이후 북쪽에서 흥기한 여진과의 갈등 양상이 형상화되고 있다.

  

이른바 여진 정벌을 통해서 두만강 근처의 동북 9을 반환받았지만이것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이 그려지고 있다여진족의 후예로 중국에서 성장한 금나라와 거란족의 후예인 요나라가 서로 대립하는 동안이 시기에는 요와 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정책을 펼쳤던 예종의 정치로 인해 외침에서 다소 비껴날 수 있었다. 2권의 마지막은 외척인 이자겸의 발호와 몰락그리고 역사가 신채호에 의해 우리 역사에서 일천년 이래 일대 사건으로 평가되었던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서 비롯된 반란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이 소개되고 있다.

  

이른바 묘청의 난을 진압했던 김부식에 의해서는 여전히 역사적으로도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고 있지만그에 의해 저술된 삼국사기는 과거의 기록들을 수합해서 삼국의 역사를 정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이어지는 3권에서는 드라마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던 무신정권과 원나라와의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상황이 소개될 것이라 짐작된다비록 만화 형식이지만이 책을 통해서 고려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고려사와 관련 역사들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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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i*****n 2022.08.22. 신고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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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나라 고려를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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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VII / 휴머니스트 42번째 리뷰] '조선사'를 다룬 역사책은 참 많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려사'를 다룬 역사책은 드문 편이다. 더구나 '몽골의 침략'과 '원의 내정간섭'을 집중 조명한 책은 더 드물다. 그래서 이 책 <박시백의 고려사>는 읽을 가치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려는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무신집권기 초반 뿐이다. 그리고 '최씨 무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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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VII / 휴머니스트 42번째 리뷰] '조선사'를 다룬 역사책은 참 많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려사'를 다룬 역사책은 드문 편이다. 더구나 '몽골의 침략'과 '원의 내정간섭'을 집중 조명한 책은 더 드물다. 그래서 이 책 <박시백의 고려사>는 읽을 가치가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려는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무신집권기 초반 뿐이다. 그리고 '최씨 무인정권부터 원 간섭기까지'의 상당 부분은 겉핥기 식으로 스리슬쩍 넘어간 뒤에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와서야 다시금 조명을 받다가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으로 '조선 건국'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고려사를 마무리 짓곤 한다. 이런 까닭은 고려사를 다룬 사료가 '절대부족'한 상황인 탓이 가장 크다. 고려조에 쓰여졌던 '고려왕조실록'은 오랜 전란으로 유실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기에 쓰여진 탓에 '객관성'에 상처를 받았던 터라 고려의 진면목을 다잡기에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려사>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왕과 고위급 신하들의 전유물이었던 '역사기록'이 아닌 온 국민에게 널리 읽히고 뜻을 새롭게 정리할 역사책이 말이다. 그래야 역사책을 읽는 가치가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최충헌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충선왕의 죽음'까지 다뤘다. 시기적으로는 '몽골의 침략'과 그에 따른 '고려의 항전', 그리고 '항복 이후의 원 간섭기'를 다룬 셈이다. 고려 왕조로 살펴보면 '고종'부터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으로 이어졌다. 13세기 전부를 다루고 14세기 초까지 아우르는 10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의 고려를 보여주었다. 고려는 '무신집권'으로 문벌귀족사회가 무너지고 그야말로 '무인시대'가 펼쳐졌다. 나쁘게 말하면 난장판이었고, 좋게 말하면 '실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대변혁기였다. 이런 처지에 빠진 고려를 '몽골'이 발흥하여 침략해왔다. 무려 40여 년 간이나 말이다. 무신집권시기가 꼭 100년이었고, 그중 '최씨 무인정권'이 60년을 해먹었으니, 무신집권시기의 후반부는 '대몽항쟁의 시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무인정권은 몽골과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도 '팔만대장경 조판' 등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허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전쟁통에 방치된 백성들이다. 최씨 무인정권은 몽골과의 싸움에서 개경이 함락될 것 같자 '강화천도'를 밀어붙인다. 이대로 몽골에게 패배해 항복을 하게 된다면 '고려 왕족'은 볼모로 잡혀갈지언정 살아남아 '몽골의 속국'이라도 될 수 있겠지만, 최씨 무인정권(당시 집권자, 최우)으로서는 패배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지리적인 이점이 큰 '강화도'에 은거하며 권력의 동아줄인 '고려왕실'을 지켜내고, '조세'도 착실히 걷을 수 있는 최적의 입지인 강화도로 궁궐을 옮기게 된다. 그러면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어찌 되는가? 최씨 무인정권은 몽골군의 침략과 약탈로부터 백성들을 지켜낼 방안이 있었단 말인가? 당연히 없었다. 무인정권이 백성들에게 당부한 것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산으로 도망가든, 섬으로 도망가든, 그도 저도 아니면 용감히 싸우든,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지시 뿐이었다. 그러다 몽골군이 물러나고 나면 '세금'을 걷으러 고을 구석구석 싸돌아 댕겼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이었다.

그런데도 몽골군은 고려의 백성을 온전히 약탈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고려 백성들은 '침략자' 몽골군을 향해 저항을 계속했고, 실제로도 꽤나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40년을 맞서 싸웠다.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누구도,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해서 '천벌'이라고 불리던 악명 높은 군대였다. 그런 군대를 상대로 수십 년동안 대항했던 것이다. 물론 무신정권이 지키던 '강화도'도 꿈쩍하지 않았다. 연이은 침공에도 강화도는 끄떡 없었고, 몽골군은 작은 섬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패배를 밥 먹듯이 한 것이다. 그런 고려였기에 '몽골에 항복한 뒤에도' 몽골(훗날 '원')은 고려를 우대했다. 원에게 있어 고려는 분명 '속국'이었지만, '부마국(공주의 사위로 삼는 국가)'의 지위로 원 황실과 가깝게 지냈고, '조공국'으로 온갖 것들을 수탈 당하는 국가였지만, 고려의 것들을 빼앗아가고서는 '고려의 스타일이 유행하는' 고려양(樣)이 탄생했다. 오늘날로 치면 '한류열풍'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 가운데 '고려의 처녀'를 공녀로 받치라고 강요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끌려간 고려의 여자들이 원의 황실과 고관대작의 '정식아내'와 '후궁'이 되어 원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위치까지 올랐다고하니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가늠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고려의 공녀뿐 아니라 '고려 환관(내시)'까지 함께 대유행(?)을 해서 얼마가지 않아 자발적으로 '공녀'나 '환관'이 되어 출세길에 오르려는 고려인도 있었다고 하니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고려인들이 다방면에서 활약을 하며 '원나라의 황실'에서만 활약하는 고려인들이 전체의 1/4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허나 이리 출세길에 오르려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더 많은 고려인들은 '자기 딸'을 머나먼 타향으로 보내길 꺼려서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성행했단다. 그 까닭은 딸자식을 키워야 노후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란다. 이는 고려 때 '데릴사위제'가 널리 유행한 까닭이기도 하단다. 딸자식을 평생 끼고 살아야 행복한 고려인들이었기에 원의 '공녀' 요구는 들어주기 힘든 사항이었고, 원으로서도 '고려 여자'를 처첩으로 삼지 못하면 권세가로 인정 받지 못했다고 하니 '고려 여인의 활약'이 대단하던 시기였다고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한편, 원에 항복한 고려왕실은 원황실의 구색에 맞춰 '격하'되었다. 폐하라는 말을 쓰지 못했고, 전하라고 불러야 했으며, 태자도 세자라고 불려야 했다. 암튼 모든 것이 원보다 낮춰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원과 고려의 관계는 낮춰진 것 같지는 않다. 왜냐면 고려의 자주성은 크게 훼손되지 않은 반면에 고려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원나라가 앞장 서서 다 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분명 고려는 원의 속국인데, 어찌하여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앞서 '원종'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몽골은 칸이 죽고 후임 자리에 '쿠빌라이'가 오르기 위해 다른 경쟁자들과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이때 원종이 한 발 앞서서 '쿠빌라이' 편을 들어 지지를 천명한다. 이에 크게 감명한 쿠빌라이는 '칸의 자리'에 오르고서 이때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임금일 뿐인 '원종'이었지만, 쿠빌라이는 원종을 극진히 대우하며 모든 면에서 고려에 후하게 정책을 펼쳤던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쿠빌라이가 마냥 고려에 퍼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로서 '숙원사업'이었던 '남송정벌'과 '일본원정'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일본원정'을 위해서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독려했던 것이 바로 쿠빌라이였기 때문이다. 이때 원종이 '원정의 불가함'을 피력하며 어떡하든 막아보려 했지만, 쿠빌라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1차, 2차 원정을 떠났지만, 얼토당토 않게 태풍(신풍, 카미카제)이 불어와 궤멸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쿠빌라이는 재차 일본원정을 추진하다가 수명이 다해 죽고, 원정길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은 끝내 고려에 남아 두고두고 고려내정의 간섭을 하는 원흉이 된다.

그렇게 원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던 때의 왕이 바로 '충렬왕', '충선왕'이다. 이들은 각각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을 해서 '쿠빌라이의 사위', '쿠빌라이의 외손자'였다. 이들은 각각 원 황실의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한 뒤에 고려에 들어와 왕이 될 수 있었다. 말이 좋아 부부이지, 원 황실의 공주들은 사실상 '원 황실의 스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 황실에서 떠받듦을 받으며 살던 공주가 이역만리 머나먼 땅으로 시집와서 '남편' 하나만 보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고달펐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 공주들은 하나같이 성질 더러웠고, 툭하면 남편인 왕과 싸웠고,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 신하들을 원 황실에 '고발'해서 죽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이런 공주의 남편인 왕도 툭하면 고려를 떠나 원 황실에 알량거리는 것이 더 편했으니 '고려의 임금'이면서 원 황실에서 더 오래 머무는 기현상도 벌어지곤 했다. 더구나 원 황실에서도 '사위'이고, '외손자'인 충렬왕과 충선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었으니 두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임금부터 천민까지 권력을 잡고 출세하기 위해 '원 나라'로 떠나는 시기가 바로 '원 간섭기'였던 것이다. 분명 원의 내정간섭은 불편한 것이었지만, 원 황실의 극진한 대접에 고려는 '원의 보호' 아래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온 백성이 출세하기 위해 원으로 떠나길 바라는 풍토가 만연했으니 '나라의 인재'가 모두 빠져나가는 공동화 현상까지 일어난 셈이다. 이런 국력의 누수는 원 황실의 다툼으로 인해 고려를 침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과거에 고구려가 당 태종을 내쫓고, 고려가 거란을 물리치고, 대몽골 항쟁에서도 밀리지 않았는데, 원 간섭기에 벌어진 '원 황실 잔당의 공격'에 고려가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일까? 그건 나라를 잃어버려 '주인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원 황실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잔당들은 '원의 구원병'이 도착하고 난 뒤에야 진압할 수 있었다. '내 나라'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쳤을 때는 어떤 국난도 극복하던 고려였는데, '내 나라'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려 임금'마저 원 황실에서 머무느라 고려에 오질 않으려 하니 백성들도 예전처럼 지키고 싸우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겠는가. 외국의 군대가 대한민국을 지켜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으면 그 대가로 내놓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할 때인 것이다. 또한 온 국민들이 '내 나라'라는 생각을 갖지 못한다면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배층'이 나라를 지킨 적은 거의 없다. 피지배계층이라고 온갖 핍박과 수탈을 당하던 '백성'들이 오히려 나라를 구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적이 비일비재하다. 오늘날에도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나 멋진 국민들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이런 국민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는 못할 망정 배신이나 때리는 정치인, 경제인, 공무원 등등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4.08.21.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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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1.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그러나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Think 1.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그러나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내용보기
우리가 자랑하는 '반만년의 역사'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많이 하곤 한다. 왜냐면 1차적으로 '사료'가 절대 부족한 탓이다. 고대사를 직접 다룬 사료들이 '고려시대'에 쓰여졌고, 그나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조선부터 통일신라, 그리고 발해까지 '우리 역사'로 대외적인 인정을 받는 까닭은 '대외적인 사료', 다름 아니
"Think 1.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그러나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내용보기

  우리가 자랑하는 '반만년의 역사'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많이 하곤 한다. 왜냐면 1차적으로 '사료'가 절대 부족한 탓이다. 고대사를 직접 다룬 사료들이 '고려시대'에 쓰여졌고, 그나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조선부터 통일신라, 그리고 발해까지 '우리 역사'로 대외적인 인정을 받는 까닭은 '대외적인 사료', 다름 아니라 이웃나라들에 '우리 역사에 관한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우리 역사를 고증할 수 있었고, 우리가 '직접' 쓴 것이 아니기에 객관적인 사료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쓴 것이 아닌 까닭에 '역사왜곡'과 '날조' 등등 점차 저희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역사를 제것인 것마냥 치부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역사'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의 역사'도 철저히 분석해야 하며, 더 나아가 '세계사의 범주'에서 우리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역사공부는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그나마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꼼꼼하고 촘촘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지금도 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정도로 방대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실록편찬'이 조선시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려때 시작하여 조선이 이를 본받아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존속되지 못하고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만약 <고려실록>이 지금껏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더욱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사'는 '조선사'보다 더욱 개방적이었고, 스스로 황제국이라 표방할 정도로 자주성을 띠었으며, 수많은 외적의 침략도 막아내고. 지금 우리나라를 일컫는 '코리아'라는 명칭도 바로 '고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려사의 진면목'이 오롯이 담겨 있었을 <고려실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쉽지만, 지금 우리가 '고려사'를 투영해 볼 수 있는 사료는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다. 박시백의 고려사는 바로 이 두 책을 바탕으로 삼아 저자 나름의 생각과 요즘 역사트랜드를 감안하여 시리즈를 펼쳤다. 비록 전편인 <조선왕조실록> 20권보다 현저히 적은 분량일테지만, 교과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고려사'를 당시의 주변국가들의 시대정황과 더불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빗대어 표현한다면, '드라마 몰아보기'로 집중력을 높여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1권에서는 후삼국시대부터 시작해 고려 성종에 이르는 대장정이 펼쳐졌다. 역사적 흐름이 다소 빠른 듯 싶은 것도 '기록'이 현저히 부족한 탓이 매우 컸다. 그나마 사료 분량이 좀 많아지는 2권부터는 좀더 세세히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니, 조금만 기다려보자.

 

  사료가 부족하면 '야사'의 도움을 받곤 한다. <삼국사기>가 놓친 내용을 <삼국유사>가 보충해서 우리 역사가 좀 더 풍요로워진 것처럼 말이다. 후삼국시대의 주요인물도 그렇다.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원래는 '진훤'이라 불려야 옳다고 했으나, 최근엔 '견훤'으로 통일한 듯 싶다), 그리고 고려로 삼국을 통일한 왕건, 이 세 명에 대한 '야사'가 '정사'보다 훨씬 더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토룡)였다는 전설, 그리고 왕건의 조상이 용왕이었다는 내용 따위가 그렇다. 이는 명실공히 '영웅의 탄생'에 걸맞게 그러진 것이니 '정사'에서도 비슷한 뉘앙스가 풍긴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역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이 중요하다. 통일신라가 왜 혼란스러워졌으며, 후삼국으로 어떻게 분열되었다가 고려로 재통일이 되었는가..하는 것들 말이다. 신라사회는 '골품제'로 인해 변화를 꾀하기 힘들어졌고,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넘어가면서 '왕위 정통성'은 점점 낮아졌고,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골간 왕위다툼'은 점점 빈번해졌으며, 중앙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지역부터 스스로 성주나 장군이라 칭하던 '호족세력'들이 점차 세력을 불려나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호족들 가운데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 그리고 궁예의 부하였다가 궁예가 몰락한 뒤에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삼국시대'를 이끌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라면 당연히 세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통일신라는 이미 힘과 정통성 모두 잃어버린지 오래되어 후고구려(고려)와 후백제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스스로를 '신라사람'으로 생각했으니 두 나라 모두 '신라'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이런 신라를 함부로 대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궁예'와 '견훤'이었다. 궁예는 속설에 '신라왕자' 출신이었다고 하니 왕위쟁탈전에 탈락하고 추방(?) 당한 원한으로 신라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고, 견훤은 연이은 승리에 취해 자기 잘난 맛(?)에 서라벌을 점령한 뒤 '신라왕'까지 바꾸고 백성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르며 업신여겼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어차피 망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평소에 신라에 유화적이며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준 왕건에게 나라를 홀랑 바쳐버리고 만다. 이런 왕건의 기세와 백성들의 바람으로 인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만다.

 

  어쩌면 통일을 이루는 비결은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일거에 제압하는 방식보다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인다. 이는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통일의 위업을 보여준 제왕들이 대부분 '무력'을 바탕으로 적들을 제압하여서 패자의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은데 반해, 우리 역사에서는 '첨예한 갈등'을 잠시 내려놓고 '평화'를 사랑하고 '백성'의 안위를 먼저 보여준 인물이 '통일의 위업'을 보여준 예가 더 많아 보인다. 뭐,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위인이 등장하지 못하고 상대를 확실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대권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암튼, 왕건은 우리 민족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만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제 왕건에게 통일보다 더 어려운 숙제가 남았으니, 바로 '호족세력'을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다. 왕건도 호족출신이거니와 나머지 호족세력을 모조리 제압해버리는 힘이 모자란데도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걱정할 만도 하다. 그래서 왕건은 '혼인정책'을 내세웠다. 비등비등한 세력을 갖고 있는 '호족들의 딸'을 한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무려 29명의 부인이다. 자식들이 많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 탓인지 왕건의 자식들은 '근친혼'을 많이 했다. 즉, '엄마'만 다르면 혼인을 장려(?)했던 것이다. 이는 '외척세력'을 두지 않아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조선 태종의 사례만 보아도 '외척'을 견제해야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의 자리는 무척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고려는 성종 때까지 별다른 '외척세력'을 두지 않아 비교적 평온하게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하게 2대 헤종, 3대 정종, 4대 광종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모두 왕건의 아들들이다. 허나 광종대에 이르러서는 계속되는 호족들의 반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왕권강화'를 도모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비롯해서 '과거제'를 시행해 호족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숙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5대 경종, 6대 성종에 이르러서는 포악한 정치(?)는 삼가고 '유교적인 정치'를 구축하고, 전시과를 손보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나라의 기틀을 완성해나갈 즈음에 고려의 북방과 바다 건너 대륙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더니, 급기야 '고려'의 안보에 일대 위기가 몰아치려 한다. 바로 '거란의 침입'이다. 2권을 기대하시라.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지나간 옛일을 공부해서 어따 써먹을 수 있겠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에게 대답해줄 적절한 비유가 있으니,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다. 흔히, 역사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과거라는 '거울'에 빗대어 표현하며, 그 중요성을 설파하곤 한다. 실제로 '과거사실'을 들춰보며 '미래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과거사실'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현재의 권력자'다. 어떤 이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라고 말하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꽤나 설득력이 강한 메시지다.

 

  그렇다면 승자만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거꾸로 말하면, 역사공부에 진지해지면 '승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역사공부에 진지해져야 할 것이다. 역사공부에 진지해지면 '독재자의 횡포'도 막아낼 수 있다. 독재자들은 늘 그렇듯이 아둔한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개를 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이들이 많은 곳에서 공포정치를 펼치곤 한다. 그러다 똑똑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민중들에게 무참히 박살이 나곤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인재가 '역사'에 밝은 명석하고 교양 넘치는 시민들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퉁쳐버리고, 국민들의 이익과 쪽팔림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과거를 망각하게 만들어 현재를 지배하려는 무리'를 솎아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공부를 멈춰선 안 될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3.03.05.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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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3. 무신정변, 혼란하기만 했던 시절이 아니다. 옥석을 가려 보자
"Think 3. 무신정변, 혼란하기만 했던 시절이 아니다. 옥석을 가려 보자" 내용보기
고려사에서 집중조명해야 할 시대는 어디일까? 개인적으로는 '무신정변'으로 본다. 학창시절에는 '무신의 난'으로 배웠는데, 어느샌가 '정변'이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한층 격을 높여 바라보게 된 것도 한몫 했다. 과연 '무신정변'은 고려시대에 무엇이었을까?     고려의 지배층은 '호족'으로 시작해서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뒤에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무신'들이
"Think 3. 무신정변, 혼란하기만 했던 시절이 아니다. 옥석을 가려 보자" 내용보기

  고려사에서 집중조명해야 할 시대는 어디일까? 개인적으로는 '무신정변'으로 본다. 학창시절에는 '무신의 난'으로 배웠는데, 어느샌가 '정변'이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한층 격을 높여 바라보게 된 것도 한몫 했다. 과연 '무신정변'은 고려시대에 무엇이었을까?

 

  고려의 지배층은 '호족'으로 시작해서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뒤에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무신'들이 권력을 차지하더니 '몽골항쟁 이후'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원나라의 뒷배로 성장한 '권문세족'이 집권을 했다가 고려말에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해서 조선개국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를 좀더 들여다보면 집권층을 '문신과 무신'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호족(무신)-문벌귀족(문신)-무인정권(무신)-권문세족(문신)-신진사대부(문신)으로 도식화 해보면 무신보다 문신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신이 집권을 하던 시대는 '호족'과 '무인정권' 때 뿐인데, 호족들도 초기에만 무신이었을 뿐, 광종의 과거제 실시 이후에는 호족들도 과거급제를 해야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에 빠르게 '문신'으로 변신하였고, 이후 문신으로 완전탈바꿈한 '가문'끼리 서로 혼인을 하며 '문벌귀족화'에 성공하였기에 호족들도 마냥 '무신집안'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고려는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문신이 집권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문신들은 태반이 제거되고 말았다. 고려의 의종이 조선의 연산군처럼 사치와 향락으로 일관하며 허구헌날 잔치와 사냥을 벌이는 통에 '무신'들은 임금을 비롯해서 환관과 내시, 문신, 그리고 기생들까지 호위하기 바빴던 것이다. 말그대로 날이 좋아도 '호위', 날이 좋지 않아도 '호위', 날이 적당해도 '호위'만 하느라 잔치는커녕 놀이에도 끼지 못해 임금의 '관심'은커녕 날마다 퍼주는 '하사품'조차 챙기지 못하니 불만이 커져갈 뿐이었다. 그러다 하급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무신들은 일제히 칼을 들어 문신들을 도륙하는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집권층이던 문신들을 깡그리 제거한 뒤에 무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려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일찍이 '문신'들이 도맡아서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한들 '정치의 생리'조차 이해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신들이 나서면 무신들은 어김없이 단칼에 베어 없애버리고 말았다. 무신들이 단단히 화가 났고 불만이 오래도록 쌓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신집권층'은 이의방을 필두로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다가 최충헌 대에 이르러 '최씨무인정권(60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몽골항쟁을 하며 고려의 자존심(?)을 한껏 살리기는 하지만 끝내 '개경환도'와 함께 무인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4권에서 다룰 예정이니 잠시 뒤로 미루고, 3권에서는 '무인정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니 다시 집중하도록 한다.

 

  암튼, 고려시대에 무인정권은 '신분의 벽'을 허무는 시대였다. 무신정변의 주역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란의 주역들'도 노비, 천민, 농민 등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른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호응을 얻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꿈틀꿈틀 대던 활기찬 시절이었던 것이다. 물론 왕조국가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라는 것은 대혼란을 뜻하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겐 너무나도 고통스런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태평성대에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시절일수록 가난한데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타고난 이들에겐 '비극'일 뿐이니 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단 한 방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혼란기'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무인정권시대'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 인정받는 시대임에 분명했다. 물론 과거에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던 혼란기가 있기는 했다. 삼국시대에 숱한 '전쟁'이 그랬고, 후삼국시대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를 받기도 했다. 허나 그시절에는 '골품제'라는 한계가 유능한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장보고'가 그랬고, '최치원'이 그랬다. 후삼국시절에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 등이 호족이란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 신분상의 우위를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까지 결코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인정권시대'에는 그야말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제 실력껏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왜냐면 '대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 민족이 맞이한 '최초'의 계층사다리가 무한정 제공되었던 셈이다.

 

  허나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은 못된다. 왜냐면 그렇게 애써 '신분의 벽'을 허물었지만, 그로 인해 고려사회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닥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층사다리'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심각해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해 흙수저는 결코 금수저가 될 수 없는 비극이 펼쳐진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는 끝내 비극적인 혼란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고려시대 불만과 울분을 터뜨릴 수 없었던 무신들이 한순간에 폭발해서 모든 것을 때려부수던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이런 비극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선 천지가 뒤바뀌는 개혁과 피를 부르는 혁명 뒤에 찾아온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고 어렵게 되찾은 '계층사다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써먹어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 소위 '흙수저들'이 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썩어 문드러진 '고위층'을 제거한 뒤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부정부패를 일삼고 '저들만의 잔치'를 벌이던 고위층을 싹다 제거한 뒤에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아야 한다. 아니 애초에 비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채우고, 공정하고 안정하게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부패한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부도처리되어 무너진다한들 나라경제가 휘청거릴 걱정이 없게 경제적 건전성도 확보해두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싶겠지만, 어느 시대에나 '유능한 인재'는 차고도 넘치게 많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그런 인재를 잘 활용할 시스템이 없을까봐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무능한 정권'은 많았어도 '유능한 인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절로 통할 정도로 우리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영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인재와 영웅들의 '인성'이 중요할 뿐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도 '쓰레기 인성'을 갖고 있다면 가차없이 폐기처분하면 그뿐이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장해버리는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입만 열면 시궁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족속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무신정변'을 다시금 살펴볼 적절한 시기일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3.07.31.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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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2. 뜻밖의 고려를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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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 때만큼 대륙을 호령하지도 못하고 숱한 외적의 침략을 받거나 '원간섭기'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적도 있었으며 홍건적과 왜구 등의 노략질에 변변한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다 500여년간 내우외환에만 시달리다 '조선'에게 나라를 내어준 별볼일 없는 나라로 연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시백의 고려사>를 읽다보면 '뜻밖의 고려'를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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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 때만큼 대륙을 호령하지도 못하고 숱한 외적의 침략을 받거나 '원간섭기'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적도 있었으며 홍건적과 왜구 등의 노략질에 변변한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다 500여년간 내우외환에만 시달리다 '조선'에게 나라를 내어준 별볼일 없는 나라로 연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시백의 고려사>를 읽다보면 '뜻밖의 고려'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고려가 그저 문약하기만 한 나라로 으레 짐작했다가 전혀 그렇지 않고 대단히 강건하며 대외적으로 결코 무시 당하는 나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주변국들이 고려를 '상국'으로 대접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남의편'이라도 되지 못하도록 지극정성으로 고려를 대우하는 등 실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나라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쪽의 침략을 받았더랬다. 거란(훗날 요)의 세 차례의 침략이 그랬고, 고려의 동북면에선 여진족(훗날 금)의 침략이 날로 거세졌고, 끝내 부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훗날 원)이 고려의 국경을 넘보더니 개경까지 집어삼키고 지독한 '원간섭기'를 겪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고려말엔 혼란한 정세를 틈타 '홍건적와 왜구'라는 도적떼들이 전쟁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로 고려를 괴롭혔지만, 고려는 이 모든 '외세의 침략'에도 멸망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내며 때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유리한 상황으로 반전시키는 저력을 뽐내며 500여 년간을 이어온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왕조가 200여 년을 넘기기 힘든데도 '고려 500년 역사'를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려'를 다시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두 번째 책으로 이 책, <박시백의 고려사 2>은 '거란과의 전쟁'에서부터 '묘청의 난'까지 다루었다. 역사책 한 권 분량치고는 꽤나 빠른 진행인데, 이 책을 '전 5권'으로 마무리하겠다고 저자가 밝혔으니 한 권당 '1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비록 세세하게 개별적 사건을 깊이 다루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박시백만의 안목'이 담겨 있기에 믿음직한 구석이 있다. 바로 '날카로운 비평과 균형잡힌 관점'말이다. 이 책에서 주목해서 봄직한 대목은 세 가지다. 하나는 '거란의 침략'에 대처하는 고려의 자세이고, 둘은 '여진의 성장'과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 그리고 마지막은 '이자겸'과 '묘청'이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이다.

 

  익히 알다시피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정책'을 펼쳐 영토확장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하지만 고려의 북방에 '거대한 세력'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고려는 '북진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세력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거란'이었다. 고려가 아직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던 때에 북쪽에서는 발해가 든든히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버티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거란이 빠르게 성장을 하면서 송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발해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더랬는데, 발해가 터무니없게도 멸망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거란이 세력을 확장하며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더니 송나라와도 본격적인 땅따먹기(?)를 시동하였다. 이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서는 거대해진 거란과 맞붙어 상대하기에 곤란한 지경에 이른 셈이다.

 

  이런 형국에 거란은 대대적인 송나라와의 전쟁을 치루기 이전에 '고려'에 본때를 보여주려 '1차 침입'을 했더랬다. 송나라 깊숙이(?) 공격을 했다가 송과 고려가 연합을 해서 거란을 협공이라도 하게된다면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에 고려에서는 '서희'를 앞세워 강화회담을 열었는데, 그 결과 거란군의 퇴각과 함께 '강동 6주땅'을 고려에 넘겨주게 되었다. 고려의 염원이었던 '북진정책'이 서희의 말 한마디로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고려의 역량'이 강력하지 않았더라면 성사될 수 없는 성과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란의 첫 침입에서 '고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으며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선 거란도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거란은 '강동 6주'를 고려에 내어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2차 침입'을 해서 개경까지 함락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쳐들어갔지만, 고려의 반격은 곳곳에서 완강했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도 못하고 고려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간 거란은 뒤늦게 '안전한 퇴각'을 약속받고 개경을 내어주고 되돌아섰지만, 돌아가는 길은 황천길이었고, 퇴각 중에도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져 거란으로 살아 돌아간 병사는 고작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온 것에 비하면 참패를 면치 못한 셈이다. 뒤이어 벌어진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필두로 거란군은 고려의 영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고마는 수모를 당한 뒤에야 고려를 더는 침략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주변 강대국들이 결코 함부로 깔보지 못하게 만들고, 실로 깔보기라도 하면 호되게 당하고 만다는 처절한 기억을 뇌리에 박아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에게 각각 수나라와 당나라가 호되게 당했던 것처럼, 고려도 첫 번째 외세의 침략을 고구려 못지 않게 본때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런 성과는 훗날 여진과 몽골을 상대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먼저, 여진은 아에 고려를 침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여진족이 완전히 통일하지 못한 채 부족별로 각자도생을 하던 시절에는 고려의 동북쪽 경계를 지속적으로 약탈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더랬다. 그때마다 고려는 달래기도 하고 토벌하기도 하는 등 양면정책을 펼쳤는데,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해 고려의 동북면을 정복해 '동북9성'을 쌓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애써 고려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바쳐서 '북진정책'을 완수해내었건만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략에 고려가 '영토포기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꽁으로 내어준 건 아니다. 여진족에서 '영원토록 어버이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받고, 더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이행한다는 약조를 받고 '동북9성'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진은 그후 침략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진은 '완안부족'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에 요나라(거란)를 대대적으로 공략하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여진의 거센 공격에 거란은 고려에게 구원요청을 했지만 고려는 거절하였다. 조선 광해군이 이런 고려의 '실리적 정책'을 본따 명청교체기에 톡톡히 써먹게 된 것이다. 고려는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지략적으로 실리적 이득을 챙기는 나라였다. 아쉽게도 여진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이라 칭하면서 부모로 섬기겠다던 고려에게 '형제의 예'를 요구하고, 더하여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이에 '사대의 예'로 화답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금나라의 무례한(?) 요구에 '큰 나라를 섬기는 이치'를 설법한 이자겸과 김부식이 내심 괘씸하기도 하다. 허나 거란의 잇따른 침략으로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진 뒤였고, 동북9성을 쌓을 당시 여진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상당기간 '소모전'을 경험하기도 했던 고려로서는 빠르게 성장하며 대륙을 호령하게 된 신흥강국 '금나라'와 대립을 한다는 것은 실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판단은 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굳이 '군신의 예'를 다하고 '사대의 예'까지 올리며 체면(?)을 챙겨준다는데 굳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고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현명치 못하다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이렇게 고려와 여진(금)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고려는 힘을 보여줄 땐 확실히 보여주고 실리를 챙길 때에도 확실히 챙기는 확실한 나라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이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면 좋으련만 나라밖이 조용해지니 나라안이 시끄럽게 되었다. 바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그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왕실의 외척이 권세를 갖게 되면서 나라를 어지럽힌 사건이었고, '묘청의 난'은 도참사상과 풍수지리를 앞세운 '서경파'와 안정적이고 과학적(?)인 정책을 밀고 나간 '개경파' 사이의 갈등으로 왕권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17대 임금인 '인종' 때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는데도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안정시킨 훌륭한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어린 임금이라 외척이 득세하여 정치를 말아먹고, 혹세무민하는 땡중이 요설로 현혹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무능한 임금'으로 생각하였는데, 다시금 살펴보니 국란의 위기에도 기죽지 않고 끝내 '왕권'을 지켜낸 '뛰어난 임금'으로 재평가받아 마땅하였다.

 

  한편,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묘청'과 '김부식'을 평가하면서 묘청을 '독립운동가'에 비유하고, 김부식을 '매국노'에 빗대며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주장했더랬다. 근데 묘청의 서경천도를 '윤석열의 용산이전'과 비교해보니 좀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두 사건은 모두 '풍수지리'를 앞세워 나라의 흥망성쇠가 마치 '서경천도(용산이전)'에 있다는 것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천도(이전)'를 하면 흥하고 안 하면 망한다는 논리를 믿어야 한다는 것부터 억지였다. 인종 때에는 '이자겸의 난' 때문에 개경의 궁궐이 거의 불타 없어진 핑곗거리라도 있었지만,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이전을 강행하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이렇듯 '서경천도'는 애초에 무리한 억지주장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스스로 '서경천도'를 없던 일로 하고 명석한 판단을 내렸는데도, 묘청은 '서경파'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을 볼모로 잡아 서경천도를 강행하려 하였다. 이는 명백한 '반란'이었고, '역모'였다. 이런 사건을 두고 '독립당'과 '사대당'의 대결이라 비유한 신채호 선생은 시대적 아픔이 반영된 역사해석으로 보는 것이 맞는 듯 싶다. 실제로 김부식은 고려의 안녕과 실리적 이득을 위해 '사대의 예'를 끝까지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때론 실력행사를 할 때는 할 수도 있을 법한데도 '국가의 존심'보다 '개인의 영욕(실리)'에 더 치중하는 모양새를 계속 관철했던 것이 욕을 먹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암튼, 묘청의 난을 다시금 재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23.07.30.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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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4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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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극도의 혼란상은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머리속에 뭔가 풍경이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박시백 작가님의 고려사 4권의 자세하고 풍부한 묘사와, 구성지고 치밀한 내용 구성을 통해 아주 뚜렷한 당대 생활상과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권이었습니다! 다음 완결권도 어서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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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극도의 혼란상은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머리속에 뭔가 풍경이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박시백 작가님의 고려사 4권의 자세하고 풍부한 묘사와,

구성지고 치밀한 내용 구성을 통해 아주 뚜렷한 당대 생활상과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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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로얄 c********n 2023.08.25.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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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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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학년이 된 아들을 위해 주문했어요...아이 책을 고르고 골라서 책을 구입하는데 우연히 검색하다가 발견한 책 입니다...책을 많이 구매하는 편이라 검색을 많이 하는데 재밌는 책을 발견 할때 제일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아이의 성향에 맞는 책을 고르려니 힘이드네요ㅎㅎㅎ 큰아이 작은아이 둘다 재미있게 잘 보고있습니다. 다른 책도 주문해서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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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학년이 된 아들을 위해 주문했어요...아이 책을 고르고 골라서 책을 구입하는데 우연히 검색하다가 발견한 책 입니다...책을 많이 구매하는 편이라 검색을 많이 하는데 재밌는 책을 발견 할때 제일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아이의 성향에 맞는 책을 고르려니 힘이드네요ㅎㅎㅎ 큰아이 작은아이 둘다 재미있게 잘 보고있습니다. 다른 책도 주문해서 봐야겠어요...



k*******1 2022.03.12.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