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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자신이, 1천부만 팔리면 문학과 지성사에 부끄럽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낯선 시간 속으로'가 중판을 찍게 되었을 때, 황지우가 김현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건 작가의 겸손이 아니라 우리 나라 독자들을 그만큼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요?' 돌아온 김현의 말은 정곡을 푹 찔러준다. '문청들이 그만큼 있다는 뜻이겠지.'
시도 소설도 읽지 않는 시대에 이런 비평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위에서 김현이 말했듯이 '문청'들이 아닐까. 평론집 중에도 간혹 '대박' 혹은 '스테디셀러'랄만한 책들이 있음을 감안하여(도정일 선생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같은. 혹은 김현, 김우창의 몇 평론집 같은) 그런 책들을 제외하고 나면, 박철화의 평론집 '감각의 실존' 같은 책은, 정말로 '그 책의 판매부수가 정확히 우리나라 문청의 수'랄만한 책이 아니겠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린 평론들은, 어떤 것들은 김현이 썼다고 해도 믿어질만큼, 김현으로부터의 영향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글들이다. '책머리에'에서의 '아! 나는 이제 알겠다.' 이런 문장부터가 얼마나 김현적인가. 여러 대목에서, 박철화는 자신을 글쓰기로 이끈 스승 김현에 대한 존경심을 고백하고 있기도 한데, 김현의 제자는 정말 많기도 했구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마음에 들고 적어두고 싶은 문장이라면, '책머리에'에 있는 문장, <글이 최초로="" 자신을="" 찾아들었을="" 때="" 그에게="" 따뜻한="" 몸을="" 허락했던="" 몇몇의="" 추억,="" 거기에="" 얽힌="" 감각을="" 나는="" 열애하고="" 싶었다=""> 정도. [인상깊은구절] 그로 하여금 글로 사라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글이 최초로 자신을 찾아들었을 때 그에게 따뜻한 몸을 허락했던 몇몇의 추억, 거기에 얽힌 감각을 나는 열애하고 싶었다. 아! 나는 이제 알겠다. 왜 스무 살에 멈추어 더 이상의 성장을 거부하던 내게, 내가 홀딱 빠져 있던 선생은 한 사람의 글쓰는 자로 남기를 은근히 바랐는가를. 글쓰기는 주체와 주체 없음의 사이에 있다. 글은 자동사이며, '나'는 타동사일 뿐이다. 그래서 한 시인, 작가의 실존을 낳은 원초적 감각에는 처음 만나던 날의 설레임과 무상의 기쁨이 있다. 그것은 행복이지만, 바깥의 추문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주기 때문에 괴로운 행복이다. 거기에서 삶은 저절로 흐르며, 행복한 괴로움 속으로 추문을 끌어들여 따뜻이 품는다. (책머리에)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