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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학문은 이학으로서의 성리학과 기학으로서의 경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율곡은 학문을 통해 인간의 변화를 시도한 성리학자이면서, 정치를 통해 사회개혁에 매진한 경세가였다. 다시 말해서, 율곡은 이기일원론을 정립한 조선 유학의 거두이면서,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기반해 개혁을 주장한 노련한 정치가였다. 율곡의 정신을 이은 후대의 학자들, 즉 율곡학파는 외적인 실천규범과 질서를 중시한 도문학을 강조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 율곡의 생강처럼 매운 기풍을 맛보려면 『경연일기』(아르테, 2023)를 펼쳐보면 된다.
『경연일기』는 율곡이 정치의 현장에서 쓴 17년의 일기다. 율곡의 나이 30세 때인 1565년(명종 20년) 7월에 시작하여 46세 때인 1581년(선조 14년) 11월에 끝나는 약 17년간의 방대한 기록이다. 경연이란 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서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을 말한다. 강론이 끝난 뒤에는 국왕과 신하가 함께 고금의 도의를 논하고, 정치와 국정 현안 등을 토론하기도 했다. 『경연일기』는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왕과 여러 대신들의 정사 집행 내용과 함께 인물에 대한 평론, 그리고 율곡의 생각도 사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경세서이면서 수양서이기도 하다. 율곡은 『경연일기』를 『금상실록』이라고 했는데, 이는 본인이 사관의 자의식을 갖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율곡은 투철한 우환 의식을 갖고 16세기 조선을 걱정한 실천적 지성이었다. 유학은 본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우환 의식을 근본으로 한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경장기(更張期)로 진단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지금 나랏일을 하려는 이들의 계획은 틀렸다. 무슨 일을 하려면 마땅히 개혁이 있어야 한다. 지금 140년 동안 설치해 놓은 위패조차도 옮길 수 없는데, 하물며 140년 동안 시행해 온 제도를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궁색하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통하는 법인데, 지금은 궁색해도 변화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지 나는 알 수 없다."(75쪽)
이러한 율곡의 우환 의식은 105편에 달하는 상소와 차자로 임금에게 올려졌다. 그는 당시 세도가의 처벌을 기탄없이 주장했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함을 주장했으며, 동서 분당의 조짐이 보이자 이를 조화하고 화합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연일기』에는 율곡이 선조에게 건의한 국정 전 분야의 구체적 개혁안이 수록되어 있다. 향약 시행은 물론 군정개혁과 공납개혁은 지속적인 정치 의제였다. 공납 문제는 이이가 제안한 수미법으로 개선되었고, 수미법은 후에 큰 변화 없이 대동법으로 정착되었다.
율곡은 경연일기에 당대 문사나 정치인 등 23명에 대한 솔직한 인물평을 남겼다. 선조 2년(1569년), 왕이 퇴계에게 인물 천거를 청하자 퇴계는 이준경과 기대승을 추천했다. 기대승이 누군가. 당대의 거유 이황과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펼치며 퇴계를 압도했던 걸출한 학자다. 그런데 당시 홍문관 교리 율곡은 이렇게 썼다.
“이준경은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을 도학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인재들을 널리 불러들이지 못했다. 또 그는 뻣뻣하게 자기만 잘난 체했으며,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고 단지 근래의 규칙만을 준수하여 사람들의 논의를 막아버렸으니, 숫자만 채우는 신하에 불과할 뿐이다. 기대승은 재주는 뛰어났지만 기질이 거칠어서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자신만 잘난 체하며 다른 선비들을 가볍게 여겼다. 또한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만 좋아하였다. 만약 그가 임금의 신임을 얻는다면 그의 비뚤어지고 고집스러운 병폐로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이황 같은 현명함을 가지고서도 그 추천하는 인물이 이와 같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7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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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의 학자 율곡 이이의 현실적이고 투철한 개혁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헌 중 하나로 이를 통해 그의 유교적 이상과 현실 개혁에 대한 열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율곡이 참여한 경연의 기록으로 조선시대 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을 불러 교류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기술하고 있다. 율곡 이이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대학자로 그 꿈을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 힘쓴 인물로 인식된다. 그는 중앙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한다. 공납 문제 해결을 위한 수미법 제안, 폐법 개혁을 통한 법의 공평성 확립, 지방행정의 효율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그가 나라와 백성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율곡은 또한 세도가의 처벌을 주장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며 동서붕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상소문은 안부를 묻는 것 이상으로 임금의 시시비비를 진언하며 비판과 충고를 담고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나라가 부강하고 민생이 안정할 수 있는가 하는 대안까지 제시한다. 이 모든 행동은 그가 나라의 우환 의식을 갖고 책상에서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책을 통해 율곡 이이의 이상사회를 향한 열정과 실천이 고스란히 느껴져 그의 투쟁정신에 큰 존경을 표하게 된다. 율곡의 뛰어난 지성과 현실적인 시각은 그가 유교적 이상을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대안도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책상에서 앉아만 있는 학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을 위해 몸담은 실천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율곡 이이의 개혁 정신을 탐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라들에게 깊은 정보를 제공한다. 율곡의 이상사회를 향한 열정과 현실적인 대안 제시는 현대에도 영감을 주는 바가 크며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은 한국 역사와 문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 이 책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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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형이 죽었다. 윤원형이 몰락했을 때, 백성들은 거리에 모여 욕하고 기왓조각과 돌을 던지는가 하면 ,심지어 활을 쏘아 죽이려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윤원형이 몰래 교하(경기 파주) 로 떠났으나 ,원한을 품은 사람이 쫒아 올까 겁이 나서 다시 강음으로 몰래 옮겨 가서 그의 첩 정나정과 함께 매일 울분을 머금고 서로 울기만 하였다. 이대 윤원형의 전처 김 씨의 계모 강씨가 형조에 글을 올려,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하였다고 고발하였다. (-21-) 이어 김개는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선비 된 이는 마땅히 제 몸이나 단속하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소위 선비라는 자들은 제 행실은 부족하면서도 함부로 옳고 그름을 논하며 대신들을 헐뜯고 방해하니,이런 풍조를 길러서는 안 됩니다. (-80-) 1572년 선조 5년 저월, 벼슬에 뜻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던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 建仲 으로, 그 성품이 청렴하고 절개가 굳었다. 젊었을 때는 과거에 힘썼으나 그가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139-) 노수신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이가 경연에서 임금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하니 일이 새길까 염려된다. 내가 말리고 싶지만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 말리지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물러가면 말이 없을 것이니 노수신의 근심도 없어질 것이다. (-244-) 명예를 좋아하는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이익을 좋아하는 행위는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승지 정언지의 말은 지금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말입니다. 학자의 고집으로 말하자면 명예를 좋아하는 부끄러움이 좀도둑질보다 심합니다. (-318-) 종 2품 동지중추부사 허엽이 죽었다. 허엽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한다고 자처하였으나, 견해는 앞뒤 조리가 없었고 문자의 뜻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언젠가 이황과 학문을 논할 때 그의 견해에 잘못이 있었다. 이황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427-) 사헌부 대사헌 이이가 경연 자리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개 사람에게는 각자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산해 같은 사람은 평상시의 직분을 맡아서 관직을 지키는 것은 남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이조판서가 되어서는 그 직책에 전념하여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오로지 공정한 논의만 따랐습니다. 일체 청탁이 없었으며, 대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고, 오직 착한 선비 만을 듣고 보아서 벼슬길을 맑게 하는데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498-) 만일 천재지변에 응하기를 참된 마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나라는 이로 인하여 어지러워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과거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운 자가 오래되면 점점 법률과 제도의 폐단이 생기고 민심이 해이해집니다. 그런데 이때 어진 임금이 일어나서 타락된 것을 말끔히 제거하고 그 정치를 고쳐애만 나라의 기세가 떨쳐 일어나 운명이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니,이런 현상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534-)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다. 율곡 이이 (李珥) 는 1536년 음력 12월 26일 태어나 1584년 음력 1월 16일 사망하였으며,조선의 문신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다.,이이의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한편 이이는 명종 3년 1548년 진사시 초시를 시작으로 29세 때인 명종 19년 1564년 식년 문과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에 걸쳐 장원을 해 이른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으며,그를 조선시대 최고의 대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율곡 이이가 남긴 『경연일기』에서, 조선시대 왕들과 신하가 학문,기술을 강론ㆍ연마하였으며, 왕은 경연을 통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였다. 왕 스스로 경연을 적극 장려하였을 때, 조선은 태평성대 (太平聖代)를 이루었고, 대표적인 임금으로, 세종과 영조, 정조 임금 때이다. 반면에 인조 때는 경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조선은 그 당시 위태로운 난세였다. 『경연일기』를 완독하면,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선비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선비에 대해서,청렴, 결백, 기개와 절개, 간언과 직언을 하는 학자들을 통상적으로 선비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선비질이라고 조로의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가 있으며, 선비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서로 섞여 있었다.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 속에서는 진정한 선비의 자질을 제대로 적어 놓고 있으며, 학문에 힘쓰며,재주를 갈고 닦아야 하며, 남명 조식처럼 벼슬에 나가지 않더라도, 스스로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이들을 선비라 한다.조식은 스스로 제자르 만들지 않았지만, 스스로 조식의 문하생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책은 선비정신의 본질을 얻을 수 있다. 청렴함, 강직함 뿐만 아니라, 항상 배움에 뜻을 품고 있으며, 세상의 변화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하는 이들이었다. 즉, 세상이 혼란스러운 국운에 처해질 때, 선비는 스스로 갓을 벗고,나라를 구하는데 힘써왔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스스로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들을 선비라 한다. 율곡 이이가 살아 생전 왕에게 직언을 하면서 ,왕이 싫어하는 말을 주로 하였고, 노수신은 그러한 이이의 성향을 걱정한다 경연을 통해서, 나라의 근심과 걱저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했다.특히 율곡 이이가 살았을 당시 흉년과 전염병이 조상 전역에 감돌았으며, 왕은 율곡 이이와 경연을 통해 , 자신의 과오가 없는지 두루두루 살피었으녀, 가벼운 죄를 지은 이들을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물론 지금과 달리 조선의 산에는 야생곰과 호랑이가 있었고, 민가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조선사회의 모습이 『경연일기』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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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일기
최근에 노량이라는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았다. 어둠 속 바다 위에서의 벌어진 참혹한 전쟁, 아비규환 속 노량해전은 이순신이 전사한 전투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발발 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 이이는 명실공이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학자이다. 율곡 선생도 유명하지만, 율곡의 모친 또한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으로 유명했던 신사임당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남다른 자질을 보였던 율곡은 유교는 물론 불교에도 정통했으며, 일찌감치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그 다음해에 정3품 우부승지가 되었고, 특히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게 되고,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지만, 그의 개혁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라 형세가 쇠퇴해져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폐정을 고치고 생민을 구제하고 군사 대비를 닦는 것으로 급무를 삼았다.... 소인이나 속류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율곡 선생은 천재였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려면 제일 중요한 텍스트가 바로 사서삼경이었는데, 율곡 선생은 선비들이 읽을 사서 책의 순서를 정하면서 공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우선 <대학>을 읽고 그런 다음 <논어>를 읽고, 그 뒤에 다시 <맹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중용>을 공부하라고 하였다. 나아가 율곡 선생은 사서에 언해, 즉 우리말 풀이를 달 정도로 사서에 정통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노수신의 건의를 내가 듣지 아니한 것이 별로 없었다.라고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노수신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재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정과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는 넉넉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노수신의 사직을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이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 뒤에 사직하면서 “보잘 것 없고 어리석은 소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나 재주는 부족하고 고질병이 있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시골에 엎드려 마음속으로 오직 전하의 만수무강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내용이 어려울 것 같지만, 번역이 무척이나 부드럽게 잘 되어 있어 노소 누구라도 할 것없이 어렵지 않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경연일기를 통해 율곡의 학문 사상, 학문 세계는 물론 임금과 신하가 경연을 통해 어떻게 학문을 토론하고 공부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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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20년부터 일기를 시작한다.
붓을 들어 바로 쓰는 것은 사관의 직분이고 바로 쓰는 훌륭한 사관을 벌하지 않는 것은 초정의 책임이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마치 끓는 국물에 데고서 냉국까지 입으로 불어 식히는 격이라 하겠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꾼 대학자 현실에 발을 붙인 개혁에 몰두하다. 경연은 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서 경전 및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을 의미한다.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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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경연일기>를 읽게 되었는데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의 불리는 신사임당의 아들인데요. 정말 관심이 없어서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거나, 이름을 모른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살면서 퇴계 이황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오천 원권 지폐에서 만날 수 있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율곡 이이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율곡 이이가 관직 생활을 하며 남긴 글이 바로 경연일기입니다.
경연은 조선시대의 임금이 유학을 공부하고 신하들과 많은 토론뿐만 아니라 국정을 협의하던 행사라고 하는데요. 경연은 임금이 되어서도 공부를 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많은 임금이 참여하기를 꺼려했다고 하는데요. 이 경연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의 다툼도 꽤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율곡의 [경연일기]는 율곡이 30세인 1565년(명종 20년) 7월에 시작하여 46세 때인 1581년(선조 14년) 11월에 끝나는 약 17년간의 기록인데요. 경연에서 군신 간에 논란이 되었던 당시의 주요 사건과 관련 인물들에 관해 상세한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연, 월 일 순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연일기]는 제자들에 의해서 비밀리에 필사되어 전해지다가 오랜 세월 후에 정본으로 출간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 내용이 율곡의 시대적 고민과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솔직하게 평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른 시기에 정본으로 출판되었다면 큰 갈등의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연일기]가 중요한 이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인 율곡 이이의 시선으로 조선의 정치와 사회, 문화와 학문의 모습을 살펴보고 율곡 이이가 평가하는 당시의 학자들의 사상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는 지금과 전혀 다른 시대이기 때문에 분명 이 책을 그냥 한번 읽는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경연일기]를 읽으며 쉽지 않게 읽었던 거 같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이 책은 역사책과 같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에 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조선 시대의 법, 정치, 경제, 상황 등에 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장인 율곡 이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책을 읽으면 지금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많으며, 현재와 다른 상황이라도 율곡 이이의 깊은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어서 읽다 보면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경연일기]를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임금이 이이에게 "한나라 문제가 왜 가의를 등용하지 않았던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이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는데요. "한나라 문제가 비록 어질기는 했으나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이 원대함을 보고 의심이 들어 등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은 큰 뜻이 있고 난 뒤에야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주인은 두어 칸짜리 작은 집을 지으려 하는데, 목수는 큰 집을 지으려 한다면 주인이 어찌 그 말을 옳게 알아듣겠습니까."
저는 위의 내용을 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도 리더가 큰 뜻을 품지 못하다면 과연 큰 뜻을 실행하기 위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큰 뜻을 가지지 못한 사람 밑에 일하는 사람도 본인의 능력을 펼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이처럼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시대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어서 좋답니다.
번역과 해설을 맡은 유성선, 유정은 교수님께서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번역과 해설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는 게 느껴지기도 했답니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서양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를 통해 인사이트를 얻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번에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를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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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은 조선시대 왕의 공부를 말하는데요. 경전을 공부하는 자리라는 뜻으로 경전은 성현의 가르침으로 경연은 결국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행사였습니다. 임금이 공부한 경전은 유교 경전이었으며 조선시대 왕의 경연은 유교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리였지요. 이렇게 경연은 왕이 공부하는 자리였으며 동시에 정책 세미나의 역할도 갖고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 강론을 하게 되는데 조선 시대 학식과 덕망이 높은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율곡 이이를 들 수 있겠지요. 율곡 이이가 집필한 경연일기라는 책은 율곡이 중앙에서 관직을 지내던 시기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국정 전 분야의 구체적인 개혁안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기록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읽어본 경연일기는 아르테 출판사의 새로운 고전 시리즈로 클래식 아고라의 네 번째 책입니다. 먼저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신사임당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율곡 이이는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을 한 천재이기도 하지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선조 16년에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낙향을 하지요.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율곡의 개혁안들은 당시에는 채용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학문과 경제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고 하지요. 이기일원론을 정립한 유학의 거두인 율곡 이이는 그러나 이론에만 빠져있는 인물은 아니었고 현실에 기반하여 개혁을 주장한 정치가였는데요.
경연일기는 국정 전 분야의 구체적인 개혁안들이 수록되어 있기도 한 중요한 기록물이기도 합니다.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던 시기는 조선의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하였던 시기였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율곡 이이는 붕당 간 대립 해소에 노력을 기울였고 정쟁에만 치중하는 붕당을 가리지 않고 비판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지만 불교와 도가 등 여러 분야를 수용하기도 했다는데요.
실리는 추구하는 실학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대동사회를 건설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개방적 자세로 현실에 기반을 둔 개혁안들을 끊임없이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그러한 내용들은 경연일기 안에서 엿볼 수 있었는데요. 율곡 이이의 개혁 정신들은 경연일기를 통해 담겨있으며 이는 당시 역사적 사건들을 비롯하여 정치 상황이나 정세 등도 알 수 있는 자료기도 하더라고요.
경연일기는 율곡의 나이 30세 때인 1565년 7월에 시작을 하여 46세 떄인 1581년 11월에 끝나는 약 17년간의 집행 내용과 함께 인물에 대한 평론과 율곡의 생각도 사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경세서이면서 수양서라고 합니다. 또한 율곡 자신이 금상실록 이라고 명명한 데서 엿보듯 스스로 사관의 위치에서 당시의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경연일기를 읽으면서 율곡 이이의 사상을 좀더 깊이 있게 엿볼 수 있었고 율곡이라는 인물을 깊숙히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될 수 있었는데요.
투철한 우환 의식을 갖고 16세기 조선을 걱정한 실천적 지성이었던 율곡의 정치적인 사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등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경연일기는 경연에서의 강연보다는 당시 주요 쟁점과 정계 동향을 주로 기록한 것으로 대부분 정치, 사상사적인 평론 기록으로 담겨있는 기록이었는데요. 율곡이 직접 정사에 참여하여 목도한 사실들을 사회개혁에 적용한 율곡의 사회사상을 엿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가진 기록이기도 합니다.
사관의 위치에서 당세의 역사를 공정하게 이실직서하여 직서, 직필의 전통을 세우고자 했던 율곡의 수양서인 경연일기를 읽으면서 율곡의 사상을 비롯한 개혁적 사상과 개혁안들을 확인하면서 학자로서의 율곡 이이와 개혁가와 사상가로서의 율곡의 여러 다양한 면모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어찌보면 율곡과 같은 인물이 가장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ㅣ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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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니 건너뛰기 어려워서 계속 읽게 되는 시리즈가 있다. 아르테의 클래식 아고라 역시 그중 하나이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 클래식 아고라는 난이도가 있다. 우리의 고전을 마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미 한 발을 담그고 있기에(삼국유사와 의산문답.계방일기를 읽었다.), 경연일기 역시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겁이 났던 이유는 저자가 주기론, 성리학의 대가 율곡이이였고,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 중의 벽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겁을 먹었던 것과 달리 술술 읽혔고 재미도 있었다. 우선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경연(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서 경전 및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 - p.555 해설 중)을 일기 형식으로 담은 글이다. 경연일기를 다른 이름으로 석담일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수업 내용이라기보다는 마치 우리의 역사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조선시대에 교과서나 사극 등을 통해 익숙히 들어왔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이 버전의 인물평을 담은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주석이 무려 349번까지 있는데, 그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인물에 대한 주석이기 때문이다. 주석으로 다루지 않은 인물들도 있으니 적어도 340명 이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저 인물평만 다룬다면 조금 과장해서 가십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에는 인물평과 함께 이이의 입장에서 현실을 돌아보고, 인물들의 과오와 함께 진정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명종 20년인 1565년(을축년) 7월부터 시작하여 선조 14년인 1581년(신사년) 11월까지 17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나라의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율곡 이이는 상황과 인물을 바라보는 눈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에는 임금 사후 장례의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대윤(윤임파)과 소윤(윤원형파)로 불리는 드라마 여인천하 속 이야기가 재연된다. 주초위왕으로 몰려 죽은 조광조도 만날 수 있고, 율곡 이이와 함께 성리학의 거두로 불리었던 퇴계 이황, 성혼, 김성일, 정인홍 등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상복 논쟁에 대한 이야기와 흰 무지개의 등장(?)으로 삼정승이 사직을 청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또 특이한 기억 중에 하나는 선조에 대한 평이다. 지금은 이순신을 괴롭힌 천하의 악질이자 리더십 없는 군주로 악명이 자자한 그였지만, 초반에도 나름 괜찮은(?) 인물이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선조다. 예절을 알고, 겸손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눈이 뛰어났던 그이지만,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적어도 초반에는 괜찮은 인물이었다는 이이의 평이다. 해설을 읽어보니, 이 책이 왜 율곡의 제자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해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의 신랄한 평이면 당연히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 갈등이 붉어질 수 있을 법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성리학자는 앞뒤가 막힌 지극히 예절만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달리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는 역시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 안에는 예절을 따지는 부분이 없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조선의 미래를 고민했던 실천적인 지성 율곡이이의 경연일기.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조선이라는 사회 속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또 다른 면모를 속속들이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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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일기라 하여, "조선의 미래를 고민한 실천적 지성의 기록"이라는 말, 그리고 기대감에 부풀어 남의 일기나 훔쳐보고 싶은 요량으로 선택한 책. 그런데, <경연일기>란 사실을 간과한듯 하다.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같은 느낌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찾아보니 조선시대의 "경연"이란 말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한다거나 국정을 신하들과 협의하는 그런 것들을 "일기"로 이이의 언어와 말로 엮어둔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석담일기>, <석담유사>, <석담야사>로 알려져 있는 책이다. <석담일기>라 했으면 금방 무슨책인지 알았을텐데.... 그래도 이렇게 국내에서 유명한 책을 읽을 기회가 생긴것엔 후회하지 않는다. 약간의 착각이 있었을 뿐이다. 안타까운 점은 내가 조선시대의 역사를 꽤 많이 잊어먹었다는 점. 이점은 이 책의 문구들이 쉽게 적혀져 역사를 꽤 많이 잊어먹었다하더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적혀있다는 점과 모르거나 어려운 단어,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뒤에 "미주"되어 적혀있어서 뒷장을 넘기기에 불편함이 없다면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을 것같다. 경연일기 속의 이이는 생각보다 뒤늦게 등장한다. 그 전에는 말을 많이 안했던 것인지 '일기'에 본인 등장이 조금은 부끄러웠던 것인지. 기다렸는데 90장이나 넘겨야 나왔다. 그리고 때론 임금을 가르치기도 하고 인물평도 해주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미가 느껴졌달까. 때론 예전에 읽어보았던 소학, 대학, 중용, 논어에서 보았던 문구들이 나왔다. 소학과 논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과 중용은 정말 울며 겨자먹기로 읽었는데, 그러한 문구를 조선시대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물론 이이의 입장에서)을 보니 또 새로운 깨달음이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일기 속에 조선시대의 경연과정이라거나 왕가의 상전(특히 왕) 죽음으로 상을 치를 모습, 거기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치르면 좋을지 조선시대의 정치가(?)들이 논의 하는 모습도 그대로 보이고,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대중의 상황은 어떠하였는지 등등 율곡이이의 입장 + 약간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시대상, 그리고 율곡이이의 고뇌하는 모습, 퇴계와 논쟁, 조선시대의 악법에 대한 개선방안 등등 조선시대에 관심이 많은 사람. 그 중에서도 율곡이이의 내면과 이상, 성리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경연일기를 읽어보는 것을 매우 추천한다. 기존에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역사나 조선시대 역사서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읽을 거리가 될 듯한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중간에 이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런데, 그 시점에 경연일기는 누가 쓰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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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은 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 경전 및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이의 ‘경연일기’는 명종 20년(1565년-이이 30세)부터 선조 14년(1581년-이이 46세)까지 17년간 이이가 이 경연에 참가하면서 쓴 기록이다. 그런데, 이이가 기록한 ‘경연일기’는 강론보다는 강론이 끝난 뒤 국왕과 신하가 정치와 당면 문제를 놓고 토론했던 것을 대부분 쓴 것이다. 율곡 이이로 말하자면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이이 이전의 성리학은 주리(主理)적 입장의 퇴계의 성리학이었다. 주리적 입장의 성리학은 도덕적인 이상사회의 건설에 주력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추상적이고 공리공론적인 뜬구름 잡기식의 논쟁이 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예법을 따지면서 과거에는 이렇게 저렇게 했다. 중국 하은주 시대에는 어땠다는 식의 논쟁들이 주리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이의 성리학은 이러한 주리적 입장뿐만 아니라 주기(主氣)의 입장을 더하여 실제적인 경세적 실학을 더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경연일기’에 보면 부국강병과 민생의 안녕, 그리고 동서붕당의 문제점 등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이이의 현세적인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600년간의 방대한 역사를 실록으로 기록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인터넷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왕조별로 나와있고, 원문과 한글 번역이 다 되어 있다. 실록은 사관들이 왕과 주변의 사람들이 말한 내용을 사초로 작성하고 이러한 사초들을 모아 실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초를 사용하여 실록을 작성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자에 의해 어떤 사초를 쓰느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발생한다. ‘경연일기’는 율곡 이이가 경연에 참가하면서 들었던 내용과 함께 그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판단한 내용도 들어 있다. 이는 당시의 역사를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하기 위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당대를 보고 해석하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연일기’에는 당파를 초월하여 좋은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것과 관직에서 청렴하고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이이의 주장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연일기’를 소장하고, 조선왕조실록과 비교대조하면서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단어나 구절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주석을 썼는데 미주로 처리하여 바로 바로 확인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미주를 각주로 해 주면 읽는 사람이 편하게 독서할 수 있을 듯 하다.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책을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