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이라고 하면 뭔지 모를 설렘이 있고, 조금은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그것은 경치가 아름답다거나, 이국적인 풍경과 같이 자신이 평상시 불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이 있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도 한 몫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물론 그러한 만남이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 본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처음 이 책을 접하면서 ‘자크 랑시에르’라는 이름이 혹 내용이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머뭇거리게 만들었지만,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이라는 제목이 우리가 평상시 생각하는 여행을 떠 올리게 만들어, 역자의 말처럼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자 처음 들었던 생각이 맞았음을 느끼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 책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 아니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프랑스의 사상가 생시몽, 그리고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전부였다. 그나마 이들도 단지 이름을 안다는 것이지,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았다거나, 그들의 사상을 안다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독일의 극작가 뷔히너, 프랑스 작가 클로드 즈누,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셀리니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여행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지, 그들이 어디로, 왜 여행을 떠나야 했는지를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이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도시와 시골의 농민이나 노동자들, 온갖 풍상을 겪는 프롤레타리아, 하녀나 어린 여자노동자 등 다양했다. 그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 그들이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가난한 희생자들이자 잊혀진 역사의 주역들 이었다. 그러기에 이 책의 저자 자크 랑시에르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를 부딪히며 하는 여행이란 노동자와 농민의 자유와 삶을 생각하는 여행이었으며, 그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었다. 책을 떠나서, 집을 떠나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과 부딪히면서,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의 억압적인 삶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과 30년 전이지만 우리 역시 책을 떠나, 집을 떠나 여행을 했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그곳으로 여행을 하면서, 그 여행을 방해하던 사람들을 피해 낯선 곳을 헤매면서, 우리는 고향으로 가기를 원했었는지도 모른다. 자크 랑시에르가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도 다분히 그런 여행이었으리라. 짧은 여행답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짧게 생각하고자 했으나, 그 여운은 몹시 길기만 하다. 이해의 폭, 생각의 폭만이 짧을 뿐이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생각은 결코 짧지 않기에.. |
|
덜컹거리는 버스에 머리를 기댄 채 넋을 잃고 버스 밖 풍경을 바라보곤 하였다. 언제나 무릎위에 책이 놓여진채. 내게는 언제나 책을 읽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창밖을 보면서도 의식은 언제나 책을 향해 있다. 내가 탄 버스의 종착역은 항상 풍경과 겹쳐진 의식의 끝자락을 붙들면서 끝이난다. 노스텔지아를 불러 일으키는 책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을 들고 다니면서 ' 나 자크 랑시에르 읽는 여자야'하고 다녔지만, 자랑하기에만 좋았고 무척 난해한 텍스트라 힘들게 읽었다. 자크 랑시에르가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 첫 책이라 쓰여있는 출판사 띠지문구를 보며 이 책은 자크 랑시에르에 익숙한 사람만이 독해가 가능한 책이라는 생각이 문득^^;;;
개인적으로 정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라는 단어 이면에 담겨져 있는 권력의 냄새와 지배계급의 함의들을 느낄 때마다 참 싫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는 나 자신이 모순적인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조르즈 아감벤은 그의 책 <호모 사케르>에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는 이러한 정치적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여행을 할 때의 설레임이 아닌, 인간 본연의 정치적 모습으로서의 출발을 이 책은 특이하게도 여행자의 시선을 빌려 작가의 사유를 투영하는 사유의 여정을 그린다.
이 여행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며 1부 새로운 고향에서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와 프랑스의 작가 생시몽과 독일의 문학가 게오르그 뷔히너를 통해 통해 혁명과 공화주의 이념을 2부 가난한 여자는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통해 보는 노동자의 삶과 사랑을 3부 자살하는 아이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메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51>을 통해서 보는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미학 - 사건, 만남, 무의식적 기억에 대한 영화이며, 또한 행위와 그 부재에 대한 영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다소 난해하고 독특한 구성이었지만, 미학과 정치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여행스케치 같다. 자크 랑시에르는 여행자의 마을을 그리고 그 마을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인 인간과 언어와 혁명과 권력,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를 소환해낸다. 정치와 미학이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인 관념의 세계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이면들을 향한 노스텔지아의 색다른 사유의 공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서의 여행,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의식의 끝은 결국 심연에 잠겨있는 또 다른 나를 깨우는 여행이라는 것.......... 그들의 시선과 발걸음의 리듬에 따라 새로운 고장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해체된다. 단순히 이방인이 언어를 배우거나 경험을 가진 자신의 시선으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통찰력은 풍경을 그리고, 믿음의 주름에 그 선과 그림자를 조화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우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행복한 미래의 꽃이 피어났던 자리에 메마른 돌과 차가운 무덤이 넘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순진하다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이리저리 눈길을 주면서, 말과 이미지들의 첫 조합을 다듬고, 그곳의 확실한 기억들을 해체하면서, 일반적으로 실제라고 알려진 여행 일정들이나 그 곳들의 지도를 모르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