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일반적인 의미에 더해 1446년 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찍어 낸 목판본 해설서를 고유명사 “훈민정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소설로 만나는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훈민정음 반포에 즈음하여 “전하. 아니 되옵니다. 종주국인 명의 황제께서 이 일을 아시는 날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는 만류 조의 상소가 앞뒤를 가리지 않을 만큼 쏟아진 것인가, 이 책은 최만리의 상소 건으로 일축됐다고 하는데,
훈민정음해례본에 감춰진 반역의 징표를 단서로 세조의 왕위 등극과 관련된 일련의 비밀문서, 그리고 세조의 주변 인물들 간의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소설로 엮은 불문학자 김다은의 <덕중의 정원>(무블출판사, 2023)은 해례본의 특정 구절 옆에 붙은 사인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정체 모를 서찰이 세조의 후궁이 된 덕중의 손에서 수양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전해지고, 이는 연서 사건 즉, 왕의 여자가 왕의 조카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는 덕중은 죽임을 당하는 희대 사건이 된다.
박재성의 책 <소설로 만나는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은 지은이가 “훈민정음” 창제의 의미와 당대의 찬반론을 소개하는 소설이다. 집필 의도는 집현전 8 학사가 성종조 이후에 생육신과 사육신으로 나뉘면서, 세종조의 그들의 모습과 세조를 지지하면서 왕위찬탈의 정치적 행위에 가담한 이들을 싸잡아 못된 종자로 몰아가고 있어, 이들의 학문적 성과와 정치적 행태는 별개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정치와 윤리 도덕이 한데 어우러지던 동양 세계에서의 가치관과 마키아벨리즘으로 통하는 정치와 윤리 도덕은 별개라는 말,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생육신이니, 사육신이니 하는 구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튼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불릴 정도로 당대 신숙주를 폄훼(?), 아무래도 좋다. 이들에게 조선은 왕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사대부, 아마도 왕도 양반이요, 사대부도 양반이며, 종주국 중국의 변방 제후에 지나지 않는 조선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훈민정음 창제원리를 설명함과 동시에 참여했던 인물의 내력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에 나서게 된 연유와 그 시대적 배경을 풀어내고 있다.
한글은 과거시험에도 나오는 등 보급을 위한 조처가 있었지만, 연산조에 이르러 그를 비방하는 언문(당대에는 한글을 이리 표현했다, 언서, 언자, 언해, 암클이라니 중글이라나)을 한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춰 부르는 말, 반절(反切)이라고도 했는데, 이를 아예 그냥 못쓰게 하기도 했다. 백성들이 한글을 읽게 되니, 다스리기가 거북할 때도 있었던겐가. 한편으로는 언문으로 어떤 양반이 내 땅을 훔쳐갔다고 고을 원에게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최만리가 걱정했던 것처럼 백성들이 똑똑해지니 속여먹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박재성은 최만리, 정창손 등을 사대 모화사상에 젖은 보수주의자로 봤다. 기실 이들은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요, 한자,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황제의 눈 밖에 벗어날 것이라,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우리에게 맞는 달력, 농사를 짓는 데 아무리 필요해도 독자적인 달력과 글을 갖는다는 것은 중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셈인데, 이런 움직임은 조선은 독립국, 세종은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했지만, 진짜 그러했던 것인가?, 문화창달, 과학기술 발달의 진정한 목표와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백성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것만 알면 되지 문자 속을 알아 정치를 한다면 누가 농사를 짓겠느냐는 계급의식의 반영에서 훈민정음 반포와 사용을 반대했다. 30여 년간을 열심히 익혀온 한자나 한문은 지배자들만의 소통 도구로 이른바 특권이며 기득권의 문을 여는 열쇠인데 불과 며칠 만에 문자를 깨우친다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겠느냐는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반대 사유가 조금은 그렇다.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세종의 나라가 더 이어진다면 백성의 나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를 우려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상상의 나래가…. 소설은 픽션이다. 팩션도 있다. 역사적 사실의 공백 속에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퍼즐을 맞춰내듯, 허구를 섞어 넣은 그런 글.
소헌왕후는 이미 세종 14년(1432년)에 공비가 아닌 왕비로 승봉됐는데, 1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중전을 공비라 칭했다고 하니 조금은 괴이하다. 아울러 문자 창제를 도울 인재를 발굴하다(35쪽)에서 이때까지만 해도 생원시나 진사시에 급제했다 하더라도 관직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대목이, 하위지, 성삼문, 신숙주, 이선로 등을 생원진사때 집현전 학사로 발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위지나 성삼문은 1435년(세종 17)에 생원시를 거쳐,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했다. 위의 문장은 생원과 진사시에 급제해도 관직에 들어설 수 없었는데 세종은 이들을 알아보고 생원, 진사를 집현전 학사로 발탁한 것처럼 읽히기 쉽다. 기실 이들은 전부 이른바 과거급제(대과)를 했다는 말이다.
초성과 중성 그리고 훈민정음을 완성하는 과정을 엮어내는 대목이 왕 세종의 탐구정신이 도드라지는 게 한다. 소설의 백미라면 이 대목일 듯 싶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소설 밖 세상을 상상하기가 조금은 곤란한 대목들. 정창손이 성종 때 영의정을 하게 된 것은 세종의 가르침이자 사대부의 도리…. 영 닿지 않는 표현들이 눈에 띈다. 진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세종이 왕위찬탈 또한 양해했다는 말인가? 책장을 덮으면서 의욕이 앞선 글이란 생각이 든다. 세종의 정치사상의 본류를 헤아려본다면, 물론 왕도정치론이었겠지만, 백성을 바탕으로 삼는 실질적인 양인의 나라로 발전이... 양반들의 나라가 아닌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
"더 많은 인재가 모여지면 새로이 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나, 그런 때가 오기 전에 집현전은 이미 자리가 잡혀 있어야 합니다. 경들은 힘을 다해 《당감》 을 쓰시도록 하세요." 《당감》은 송나라의 범조우가 당나라 역사를 추려서 찬한 것을 말한다.이것망으로도 세종의 학문이 이미 집현전의 학사들보다 한 수 위에 있을 정도로 그의 학문은 타고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21-) "우리나라에 농사에 관한 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모든 책들이 중국의 것이질 않습니까, 중국은 우리나라와 기후가 다르고 지질이 다릅니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농사에 중국의 농사법을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농사는 우리나라에 합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방법을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25-) 바로 문자 창제였다. 오래전부터 새 문자를 창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세종은 문자 창제라는 소원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심초사 하면서 몰두해 왔던 음운에 관한 연구는 이미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과학적인 영농을 하게 하려고 《농사직설》 과 같은 전적을 간행했으나.그것이 모두 하나로 쓰인 책이어서 백성들에게 읽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세종은 안타까이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백성들이 글을 몰랐던 탓으로 송사나 옥사가 공평치 못하다는 사실이 더욱 세조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31-) 그날부터 정인지, 최항, 이개, 박팽년 등의 기존 집현전 학사들과 하위지,이성로 ,신숙주, 성삼문 등의 새 학사들은 세종과 더불어 밤낮없이 문자 창제에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세조의 문자 창제에 대한 집념은 집현전 학사들이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낮에 정무를 보는 틈틈이 음운을 연구하는 것은 물론 밤늦게까지 촛불을 밝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안질이 재발하고 각기가 다시 도졌다. 그래도 세종은 이를 악물고 연구에 전념했다. (-42-) 그는 또 집현전 학사로서 외국어에도 능통해 한어, 왜어를 비롯한 몽고어, 여진어, 유구어 등 동아시아 8개국어를 통엽없이 구사하였으며, 각 나라 말의 구조와 원리를 깨달아 세종엑세 많은 도움을 주었고 세종은 신숙주를 아끼기를 자신의 몸같이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47-) 세종은 신하를 임용하는 것과 형벌에 관한 것, 군사르 움직이느 것과 처결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서정을 세자에게 맡겨 섭정케 하고 , 세종은 편전과 집현전만 오가며 집현전 학사들과 어울려 새 문자 창제에 전념하여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 이때가 세종 25년 (1443) 6우러 16일이었다. (-51-) 작가 박재성은 『세정어제훈민정음총록』을 집필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훈민정음에 관한 역사적 오류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훈민정음 창제 뿐만 아니라, 단종 복위 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읽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이었던 신숙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그가 태종 임금 때 태어나, 세조 때 태어나, 성종 임금 때 사망하였던 그의 삶은 훈민정은 창제에 깊이 관여했음을 재확인하였으며, 우리가 숙주 나물 하면 떠올리는 신숙주 평전을 다시 써야 하는 이유을 다시 절감하게 된다. 즉 훈민정음은 새종 때 만들어진 조선의 언어이며, 언문이라고도 부리게 된다. 백성들이 글을 몰라서 , 억울한 일에 처해진 것을 안타까이 여겼던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서, 한글을 창제토록 하였으며, 동아시아 8개국에 능했던 신숙주의 성실함과 헌신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 창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안질이 망가지고, 각기가 생길 정도로, 한굴 연구에 힘써왔던 집현적 학사들이 있었다., 한글을 깨우쳐, 농업기술읖 빨리 익히도록 하였으며, 글을 배움으로서, 백성들 스스로 자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의 위민 정신이 없엇다면, 한글 창제는 요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이 소설에 나오고 있으며,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28자의 원리는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언어 하나가 만들어지기 까지 기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언어가 만들어진다. 인간의 혀 구조, 발음 구조를 다섯가지 모음으로 완성하였고,그것이 발음하기 편하도록, 초성,중성 종성을 만들어 나간다. 즉 훈민정음의 우수성은 한자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보완하고자 하였으며, 28자만 익혀도 모든 언어를 구사하도록 하였다. 물론 세종 이후, 한글은 배척되었고,그것이 다시 쓰여지기 까지 오랜 세월을 거치게 된다. |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아시나요 ?? 바로 우리나라 고유 글자인 한글입니다. '훈민정음'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까지 한 세종대왕님의 실록을 소설로 만나볼 수 있는<소설로 만나는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 > 을 소개합니다. 책은 양장으로 도톰한 표지로 제작됐지만 아담한 사이즈와 두껍지 않은 두께로 밖으로 들고나가 읽기에 부담이 없었어요. 부왕인 태종이 건강을 염려해 책 읽기를 금할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던 세종대왕님의 업적은 과학,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데요. 자신이 배운 것들을 백성들에게 나누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선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 문자 창제의 필요성을 깨달은 성군의 모습을 보여주며 책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좋아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 것과 더불어 조선 백성을 위하는 마음과, 백성을 위한 조선을 꿈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을 알 수 있었죠. 세종대왕님의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전 세계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가 탄생됐다는 것까지도요. 당시 한자를 최상의 문자라고 믿던 대소신료들과 다르게 세종대왕님은 백성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조선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고유 문자를 만들어야함을 깨달으셨죠. 이후 문자 창제를 위한 노력들 말의 원리를 공부하고, 다른 나라의 글자를 공부하고, 소리에 대한 연구, 등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감동을 주었습니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글을 쉽게 쓰고,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 한글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는데요. 그중 첫 번째가 바로 '훈민정음 반포'였습니다. 많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 반포에 호의적이었던 집현전의 학자들과 차근차근 한글의 사용처를 늘려가는 과정까지 보며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세종대왕님의 혜안을 느낄 수 있었죠. "개구리가 못에서 개굴개굴 우는데 ... " 를 소리 나는대로 쓰고, 읽을 수 있게 해주신 세종대왕님께 다시한번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소설로 만나는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 > 을 통해 한글 탄생의 멋진 순간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