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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성서역사비평학의 최전선에서 연구를 리드하던 에타 린네만이 자신의 성서연구방법론인 역사비평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회개 그리고 역사비평학이 결코 성경의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진정으로 논한 글이다. 근대 인문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인간 이성의 힘의 발견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정성을 거부하며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성경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인간이 역사속에서 기술한 역사기술의 모음으로 보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잃고 헤매이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된 일인가? 이 얼마나 잘못된 이단인가? 성경은 줄기차게 성경의 기록된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되고 진실한 말씀으로서 사건의 목격자와 계시의 당사자로서의 참된 증언과 기록임을 증거하고 있으며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참되고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주장하고 강조한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이해와 믿음은 이와같이 하나님 말씀의 계시와 사건의 당사자와 목격자들의 참된 증언과 기록으로서의 예수님의 복음을 들음으로써 듣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참된 말씀으로 듣게 하시고 깨닫도록 역사해 주셔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생겨나는 것인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참된 말씀인 것을 거부하고 인간 이성의 잣대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단지 인간이 자의적으로 기술한 지성의 글 자의적인 역사 서술의 글이라 치부하니 이는 사건의 목격자들과 당사자들의 참된 증거와 증언을 정당한 검증절차없이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며 어찌 성경 말씀을 이와 같이 여기고서야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애초에 감히 생각이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일찍이 이런 일들을 예수님께서는 예상이라도 하셨는지 성경 말씀 뿐만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믿음의 자녀들로 하여금 진리의 길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깨닫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 이 땅에 보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인간에게 찾아와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시고 계시하시고 성령님의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 지셔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던가?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지성으로 기록했다 저술했다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증거로? 린네만은 역사비평학이 절대로 확실한 증거에 근거한 과학적 진리를 밝혀낼 수 있는 수단과 도구가 아님을, 역사비평학 연구의 결론들이 단지 인간 이성이 추론하는 가설에 근거하여 인간이 스스로 내린 자의적 결론 또는 하나의 불완전한 학설에 불과함을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회개하며 고백해준다 도리어 역사적 정황과 증거들은 성경의 기록이 사건의 목격자들과 당사자들의 확실하고 명백한 증언으로 신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정한 성경 연구자라면 이와같은 인간의 이성으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과오로부터 자신을 돌이키고 성경말씀을 영원무궁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 인정하고 올바로 믿고 하나님의 음성 으로 듣고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순종하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기도하는 중에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조명해 주심으로써 성경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성경 말씀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과 바른 성경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함으로 성경말씀을 사건의 목격자들과 그들의 사실적 증언과 하나님 말씀의 계시 당사자들의 기록을 통해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여야 함을 제시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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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신학(믿음)은 철학(이성)의 위에, 그리고 조화, 분리되는 과정을 겪는다. 교부시대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조 되었다. 신학은 철학 위에서 절대 권력을 군림 했다. 중세를 거치며 신학은 철학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을 취하여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꽤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교리와 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도입한다. 철학을 도구로 사용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은 이것을 잘 나타내는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근대가 되자 이제 신학과 철학은 분리 된다. 계몽주의 등을 거치며 믿음이 아닌 이성이 강조 되면서 철학은 - 물론 과학 등도 -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현대에 신학은 도리어 철학의 노예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연구와 그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할 때 철학방법을 동원 하고, 그 방법을 통해 결과를 얻어 낸다. 심지어 과학적 연구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이는 신학은 믿음보다 이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신약의 무슨 문서는 어떠한 이유로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이사야서는 본문의 내용 등을 연구하여 발생하는 차이에 따라 저자를 셋으로 구분하고, 각각 세 시기에 작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성경비평학 - 이 책에서는 여기서 예로든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 비슷한 문제를 언급하고 지적한다. - 을 비판하고 있다. 급기야 "역사비평 신학은 이단적 교리(177p)"라고 정죄를 한다.
신학교에서는 성경비평을 버젓이 가르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성경 내용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성경을 자르고, 붙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을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 성경을 대함에 있어 믿음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 성경의 내용을 이성으로 진위 여부를 가리고, 내용을 취사 선택한다. 이것은 성경을 100% 믿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다. '성경 비평'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저작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의심하고,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이제 신학은 - 신학의 모든 영역이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 철학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성경은 단지 이성의 산물이란 말인가? 어찌 그것을 이성의 판단 아래 둔다는 말인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비평학에 대해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해야 할 바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