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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존재의 소멸 앞에서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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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에 구입만하고 박아두었던 이 책을 갑자기 꺼내 읽었다.왜 좀 더 일찍 읽을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얇은 책인데 이렇게나 깊은 생각들을 담고 있었다니...왜 이제서야 읽었을까?   부엌에 잠깐 내려가기만 해도 기척을 눈치채고 산책가자고 조르던 존재.책상 앞에 앉아서 뭐만 하려고만 하면,식탁 앞에 앉아 밥 먹는 동안에도 옆에 다가와 끊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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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에 구입만하고 박아두었던 이 책을 갑자기 꺼내 읽었다.왜 좀 더 일찍 읽을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얇은 책인데 이렇게나 깊은 생각들을 담고 있었다니...왜 이제서야 읽었을까?

 

부엌에 잠깐 내려가기만 해도 기척을 눈치채고 산책가자고 조르던 존재.책상 앞에 앉아서 뭐만 하려고만 하면,식탁 앞에 앉아 밥 먹는 동안에도 옆에 다가와 끊임없이 귀찮게 하던 존재.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힘겨운 몸을 이끌고 나와 함께 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존재....그렇게 나의 삶을 구성하던 한 존재가 사라져간다. 그리고 나는 그 존재의 소멸 앞에서 오히려 삶의 여러가지 이면들을 생각해본다.

 

요즘은 '애완동물'이라는 말 대신 '반려동물'이라는 바람직한 말을 권장할 정도로 우리사회의 시선도 확실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어느 정도 애견인구가 예전보다 급증했다는 점도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의 한가지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고 짐작이 되는 만큼 사랑했던 동물의 죽음 앞에 누구나 어느 정도는 마음이 아플 것이고,적어도 이런 감정상태에 쉽게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작가의 놀라운 점은 이런 슬픔을 단편적으로,직접적으로 토해내는 걸로 끝내지않고 이런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자칫 무심함으로까지 보이는 '초연함'으로 극복해낸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존재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그 존재의 곁을 지킨다.그 존재의 고통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 인간인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잠깐잠깐씩 이런 고통에서의 도피를 통해 회피의 달콤함을 맛보기도 한다.하지만 이런 달콤함에서조차 그는 죄책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존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라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과연 이것이 그 존재만을 위한 것이었는지,자신을 위한 변명은 아니었는지 자문해 보기도 한다.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존재인 자신을 생각하며,인간인 자기자신의 숙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인간이라는 존엄한 존재가 한낱 미천한 존재인 동물에 연연해 하는 것에 아주 찰나의 순간 의구심을 품어보기도 한다.하지만 이내 자신의 그러한 생각을 고쳐먹는다.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애정을 쏟아부었던,그리고 조건없는 무한한 애정을 돌려주었던 '애착'의 존재를 그리워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자칫 감정을 쏟아부었던 대상이 상실된 것에 대해서 오로지 이러한 감정의 다른 돌파구를 찾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던 이 글쓰기는 오히려 감정에 대해서 초연할 것을 다짐함으로써,어느새 초극적인,초인적인 '달관'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듯 보인다.그리고 어느 개의 죽음으로 시작된 글쓰기는 어느새 애정과 애착을 쏟아부었던 수 많은 대상으로까지 무한히 범위를 뻗어나가고,불멸성을 지닌 신과 초월적인 구원의 문제로까지 도달한다.얄팍한 깜냥으로는 도저히 가늠해볼 수 없는,겨우 짐작만이 가능한 저자의 수십년간의 경험과 삶에 대한 통찰,죽음에 대한 견고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론 과연 내가 작가가 이 글을 쓴 이 나이가 됐을 때조차 이런 마음자세를 가질 수 있을런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너무 늦게 읽어서 후회했지만(그리고 읽는데 시간이 넘 오래 걸리기도 했지만) 반면에 조금이라도 지겹고 재미없어보이는 것은 한순간도 못 견딜 거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달라진 듯한 기분도 들어서 약간 놀라기도 했다.이런 글도 읽을 수 있다니,자식,너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고,조금 대견스럽기까지도 했다.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의 즐거움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엔 절대로 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에 무심히 도전하고 어설프게나마 끝마칠 수 있었다는 성취감을 맛본다는 것...갑자기 나이를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y***6 2010.12.12.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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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오를 추억하며...
"타이오를 추억하며... " 내용보기
을 읽고 난 뒤, 그르니에 전집을 다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철학자인 그의 책이 쉽게 읽히는건 아니다. 그의 책을 대하고 내가 느낀 감흥은 일종의 선율이었다. 글 속에서 음악이 울려퍼지는것,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르니에는 라는 잡종개 한마리를 키웠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본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유한한 우리의 삶, 정녕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란
"타이오를 추억하며... " 내용보기
<섬>을 읽고 난 뒤, 그르니에 전집을 다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철학자인 그의 책이 쉽게 읽히는건 아니다. 그의 책을 대하고 내가 느낀 감흥은 일종의 선율이었다. 글 속에서 음악이 울려퍼지는것,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르니에는 <타이오>라는 잡종개 한마리를 키웠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본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유한한 우리의 삶, 정녕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란 무엇일까.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조차 죽는것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인데... 그르니에의 글은 느껴진다. 느껴진다는 것의 의미는 글을 보는게 아니라 듣는다는것, 귀로 듣는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다는것, 그의 글은 느껴져야 한다. 느낄 수 없다면 읽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민음사에서 출판된 네권의 전집중 다행스럽게도 이 책이 가장 읽기에 편안함이 있었다. 그르니에의 문체를 번역하기란 쉽지 않으나 어찌됬건 역자의 번역은 나에게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편안한 글이지만 책을 덮고 난 뒤엔 잔잔한 슬픔이 가시질 않는다. 오늘따라 이사오기전 앞집에 살던 복실이가 보고싶어진다...

[인상깊은구절]
인간은 정말이지 위선으로 가득하다. 가엾게 여긴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동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동물들로 배를 채우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가증스런 희극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강자는 약자의 껍질로 몸을 치장하지만 약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m******0 2004.10.14. 신고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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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만났던 장 그르니에...
"스무살에 만났던 장 그르니에..." 내용보기
장 그르니에를 처음 만났던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처음 섬이라는 제목의 얇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의 사유들을 따라가기는 쉽지않았다. 나는 계속 멈짓거렸다. 그르니에의 선집 시리즈에 담겨 있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과 그 이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과 감정 사이의 흐트러짐을 그는 의도하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자유로운 시각은 어느 곳에
"스무살에 만났던 장 그르니에..." 내용보기

 

장 그르니에를 처음 만났던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처음 섬이라는 제목의 얇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의 사유들을

따라가기는 쉽지않았다.

나는 계속 멈짓거렸다.

그르니에의 선집 시리즈에 담겨 있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과 그 이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과 감정 사이의 흐트러짐을 그는 의도하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자유로운 시각은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않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따끔 열어보아도 나를 반겨줄 것 같다.

 

 

 

 

 

 

n******i 2007.05.30.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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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장 그르니에 : 소중한 존재를 열렬히 사랑하자
"『어느 개의 죽음』 장 그르니에 : 소중한 존재를 열렬히 사랑하자" 내용보기
책을 읽는 내내, 데자뷰처럼 떠오른 장면은 수년 전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에 담긴 감정도, 내가 책을 바라보는 감정도 유사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라는 2년 동안, 내게 온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운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내게 찾아올 슬픔에 대한 두려움
"『어느 개의 죽음』 장 그르니에 : 소중한 존재를 열렬히 사랑하자" 내용보기

 

책을 읽는 내내, 데자뷰처럼 떠오른 장면은 수년 전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에 담긴 감정도, 내가 책을 바라보는 감정도 유사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라는 2년 동안, 내게 온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운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내게 찾아올 슬픔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읽고 있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작가가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이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대상의 차이가 있지만, 형식을 포함하여 책에 담긴 마음, 슬픔이라는 감정 등 많은 것이 겹쳐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애도일기> 235쪽)"

 

"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 글쓰기는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 따라서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글을 채워나갈 종잇장조차 내 앞에 두지 않을 테니까." (<어느 개의 죽음> 65쪽)

 

다른 책 이야기를 이리 길게 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내가 <애도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슬픔의 감정이 어떤 대상에 따라 섣불리 판단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누구는 가족을 죽어서 슬퍼하고, 누구는 키우던 반려동물이 죽어 슬퍼한다. 대상은 중요치 않다. 소중한 존재 -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더 나아가 식물이든 무엇이든 - 를 잃어버린 사람의 감정은 모두가 똑같다. 결핍을 마주한 두 작가가 소중한 존재를 애도하고, 자신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작가 '장 그르니에'는 개의 죽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접어들고 항시 우울함이 감돌지만, 여전히 감미롭고 충만한 세상을 본다. 고통과 절망, 죽음들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과, 행복한 삶과 관계된 아름다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작가 "자신 내부의 두 존재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51쪽)"이다. 결핍을 견디기 위해 그는 종이와 펜을 들어 그 모든 사유에 대하여 기록한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던가. 작가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타이오'라는 개의 행동을 추억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그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위대함, 그 속의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염세적인 시선도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글을 쓴 상황 속에서 슬픔을 부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죽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기에, 텍스트를 넘은 엄청난 우울함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이 된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위안이 되었다. "사랑하자. 위선과 가식과 자만이 없는 사랑을 하자."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책을 덮는다. 삶을, 삶의 소중한 존재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 것 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

 

9쪽,
두렵지 않은 수호신의 가호를 빌듯이, 밤에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은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것이다. 녀석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달래주는 자연의 속성들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침묵, 잠, 걱정도 후회도 없는 만족,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세상을 감싸고 있는 햇빛, 발 아래에서 우연히 찾아낸 샘과 같은 것들 말이다. 녀석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58쪽,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63쪽,
6월 1일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암탉이 운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탉이 울기 시작한다.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 너머, 점선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을 본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면, 그 형상들은 실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로 불어나고, 마침내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84쪽,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p********1 2017.04.26.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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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살아남은’ 자가 삶을 ‘사는’ 힘이 된다
"사랑은 ‘살아남은’ 자가 삶을 ‘사는’ 힘이 된다" 내용보기
다시 장 그르니에를 읽는다. 『섬』에서 「고양이 물루」 이야기를 더없이 아름답게 들려주던 그가 『어느 개의 죽음』에서는 있던 개 타이오를 추억하고 있다. 모두 그르니에가 사랑했던, 한편으론 그가 의지했던 대상들이었다(고양이 물루는 주고 자신의 곁으로 부르곤 했던 대상이었으며, 개 타이오는 이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그가 그들의 죽음에서 그가 느낀 슬픔과
"사랑은 ‘살아남은’ 자가 삶을 ‘사는’ 힘이 된다" 내용보기
다시 장 그르니에를 읽는다. 『섬』에서 「고양이 물루」 이야기를 더없이 아름답게 들려주던 그가 『어느 개의 죽음』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충직함과 사랑을 지니고> 있던 개 타이오를 추억하고 있다. 모두 그르니에가 사랑했던, 한편으론 그가 의지했던 대상들이었다(고양이 물루는 <내가 잠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지워>주고 <황혼녘,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다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곁으로 부르곤 했던 대상이었으며, 개 타이오는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이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그가 그들의 죽음에서 그가 느낀 슬픔과 상실감은 클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 위안의 방식은 사뭇 달라 보인다.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의 삶에 깃들인 숙명적인 죽음에 대한 통찰을 그 바탕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그르니에는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고양이 물루의 이야기가 한 편의 짧은 소설처럼 경쾌하게 단숨에 읽혀지는 반면, 개 타이오에 대한 추억은 조각조각 나눠진 단장들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변주되기 때문에 자주 쉬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니면 우연한 것일까? 『어느 개의 죽음』뒤에 붙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짧은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 글에 의하면 개는 친밀감, 고양이는 거리감을 그 생활 방식으로 갖고 있다. <결합을 도모하는> 개와 <결별을 꾀하는> 고양이의 이 대조적인 속성이 그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이처럼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채택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즉, 고립과 자유를 즐기는 고양이 물루의 이야기를 개 타이오의 이야기처럼 조각조각 나눠진 단장의 형식으로 썼다면 하나의 흐름을 갖는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4주간에 걸쳐 쓰여진 90편의 단장으로 이루어진 개 타이오의 이야기가 <맥락없이 가쁜 숨결처럼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 나름대로의 질서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 자체가 개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나의 해석이 지나친 억측일는지도 모르겠지만, 타이오를 잃은 슬픔은 물루를 잃은 슬픔보다는 확실히 커 보인다. 물루를 정원에 묻은 그르니에는 물루는 <쒜레느 근처의 섬에 매장되는 파리의 고양이들보다 더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가슴이 조여들도록 답답한 공동묘지에 묻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며, 아피에나 대로를 따라 자기네 시골 영지에 묻히는 부유한 로마사람들만큼이나 행복하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복귀하지만, 타이오를 잃고 나서는 그는 글쓰기를 계속하면서도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타이오는 <(인간처럼) 죽음 뒤의 천국에 대한 믿음도 없이 (고양이처럼) 지상에서의 천국마저 누리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회한이 그르니에로 하여금 4주간이나 타이오를 추억하게 만든 힘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타이오의 죽음을 통해서 그르니에가 결국 응시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죽음이다. 개나 사람이나 <우리의 운명은 모두 같다>는 이 비극적인 인식이야말로, 그르니에가 <한 마리 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이다.> 삶에 깃들어 있는 이 숙명적인 죽음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라고 말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르니에의 많은 글에서 항상 죽음을 읽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삶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일 터이다. 따라서 그가 『어느 개의 죽음』을 진부하고 어쩌면 통속적으로까지 보이는 다음과 같은 단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것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그렇다. 사랑은 ‘살아남은’ 자가 삶을 ‘사는’ 힘이 된다. ‘삶’은 ‘사랑’의 준말인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질병, 노화, 죽음에 대해 종교와 철학이 제시한 해결책은 <결국> 하나뿐이다. 즉, 환자<처럼>, 노인<처럼>, 시체<처럼> 살라는 것이다.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그 즐거움을 금할 것, 젊은 시절의 쾌락에 환멸을 느끼지 않으려면 노인처럼 굴 것, 삶이 주는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능하다면 송장처럼 지낼 것!
c*****t 2002.12.18.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개와 인간
"개와 인간" 내용보기
인터텟으로 좋은 책을 골라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이 책은 인터넷으로 책을 고르던 중 이 책에 붙어 있는 독자 리뷰를 읽고 선택하게 된 책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개와 인간... 신과 자연에 대해 작가의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짧지만 구절구절 사색에 잠겨 쉽게 넘겨지지는 않는 책이었다.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인간도 하찮게 여기는데 하물며 동물은 정말로 인간의
"개와 인간" 내용보기
인터텟으로 좋은 책을 골라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이 책은 인터넷으로 책을 고르던 중 이 책에 붙어 있는 독자 리뷰를 읽고 선택하게 된 책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개와 인간... 신과 자연에 대해 작가의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짧지만 구절구절 사색에 잠겨 쉽게 넘겨지지는 않는 책이었다.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인간도 하찮게 여기는데 하물며 동물은 정말로 인간의 노리개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단순히 개에 관한 담론을 적은 글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빗댄 인간과 그 주변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 돋보이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j*****s 2002.11.27.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개의 죽음으로 인한 단상들
"개의 죽음으로 인한 단상들" 내용보기
요즘 들어 유독 얇은 책을 보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찬찬히 보아야 하는 것이 바쁜 생활에 심적 부담이 되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은 후에 사색에 빠져 보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 되버린건가보다.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 은 속독을 하면 20여분도 채 안걸릴 정도로 짧고 또한 여러가지 생각거리들을 던져 줌으로 지금 내 생활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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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유독 얇은 책을 보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찬찬히 보아야 하는 것이 바쁜 생활에 심적 부담이 되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은 후에 사색에 빠져 보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 되버린건가보다.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 은 속독을 하면 20여분도 채 안걸릴 정도로 짧고 또한 여러가지 생각거리들을 던져 줌으로 지금 내 생활에 안성맞춤격인 책중의 하나 이겠다. 이 책은 약 한달간 씌여진 것으로(1955년 5월 15일에서 6월 12일까지) 병으로 고통받던 개를 안락사 시키기로 한 후의 그르니에의 심리 변화와 안락사 시킨후에 따른 죄책감과 개에 대한 추억과 공허함 그리고 인간이 동물의 우위에 있다는 개념의 부당성 그리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들까지 그리고 끝에는 사랑에 대해서 까지 차분하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쓴 글이다.

[인상깊은구절]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누리는 기쁨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만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 기쁨들을 전해주는 손과 빼앗은 손이 같은것이라면?
a****9 2000.09.21.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개의 죽음을 통해서 들여다본 사랑 그리고 죽음의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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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객관적인 시각이 존재할 수 없다. 잘났든 못났든 그것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다. 카뮈의 스승이자 '섬'의 저자인 장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이렇게 말하니깐 나의 오독이 상당한 객관성이 보장되어 있는듯 비춰진다. 절대 아니다. 상당히 주관적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뭐, 내가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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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객관적인 시각이 존재할 수 없다. 잘났든 못났든 그것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다. 카뮈의 스승이자 '섬'의 저자인 장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이렇게 말하니깐 나의 오독이 상당한 객관성이 보장되어 있는듯 비춰진다. 절대 아니다. 상당히 주관적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뭐, 내가 몇자 끄적이는 것보다 옮긴이 '지현'의 입을 빌어 이 책의 오독을 대신하겠다는 소리다. 참고로 내가 읽은 '어느개의 죽음'은 1997년 민음사 출판의, 지현이 번역한 책이다. 이제부터 지현이 얘기한다. "사랑했던, 사랑하고 있는 한 존재가 소멸한다. 책상에만 앉으면 바깥으로 나가자고 졸라대던 개가 죽어버렸으므로 그는 종잇장을 앞에 두고 연연해 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존재의 죽음을 겪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신을 대신하여 그를 자연, 삶, 생명의 영역으로 이끌던 개, 타이오가 없기에 그는 그 자신 죽음의 영역이라 여기는 '글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뭔지 모를 어떤 것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라고 재촉한다는 정체불명의 '작은 목소리'에 작가는 그저 따르고 있을 뿐이다. 맥락없이 가쁜 숨결처럼 이어지는 이 글들은 작가 자신이 입은 상처의 치유를 위한 힘겨움이다. 개에 대한 일상적인 추억들, 죽어가는 개를 보살피며 느꼈던 괴로움, 개의 죽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주조를 이루는 이 한편의 진혼곡은 다양한 변주를 들려주고 있다. 시공을 넘어선 인간 중심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시하고, 삶의 기저를 이루는 여러 가치관들을 새로운 눈길로 다시금 바라보고, 신적 구원에 대한 불만과 기원을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대한다. 개의 죽음에 관한 푸념들로만 가득했다면 이 책은 이와 같이 풍요로움을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등, 자유, 구원, 죽음, 사랑 등의 문제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들이 읽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의 뒤를 잇는 작은 목소리들은 답이 아니다. 확신을 표하지 않는 그의 대답들은 또다른 질문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삶의 기쁨을 주는 손과 빼앗는 손이 같은 것이라는 데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마지막의 고통으로 인해 일생의 기쁨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추스르기라도 하듯 각각의 글들은 작가의 심경에 따라 새로운 시선을 취한다. 책 뒤에 부가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짧은 글'에서는, '섬'의 한 단장에서 '책위에 드러눕겠다고 떼를 쓰던' 귀여운 고양이가 냉혹한 존재의 대표격으로 취급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의혹의 눈길만으로 가득한 그의 글들은 결코 확신, 일관성에 갇혀버리는 일이 없다. 살아가며 마주치게 되는 여러 문제들, 의문들을 풍부한 서정과 함께 정해없이 나열해 놓을 뿐이다........" 중략 옮긴이, 지현의 이야기는 좀더 길다. 마저 읽고나면 마치 따로 이 책을 읽지 않아도 감이 잡힐 듯 그녀의 시각은 정확하지만 어쩐지 그대로 옮기고 있는 나자신이 우스워 보여서 여기서 그만 둔다. 한번은 아주 긴 시간동안, 또 한번은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이 책을 읽어나갔지만 솔직히 개에 그토록 집착, 또는 애착하는 작가의 심정을 나는 잘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개를 그리워하며 작가가 밝히는 여러가지 철학들은 드문드문 그냥 발췌하고 싶을정도로 멋지다. 아마 그르니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선, 한마리의 개라도 키워야 할까 보다. 근데....난 너무 친근하게 구는 동물들에게는 자연히 거리감을 두게 된다.

[인상깊은구절]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 것 없는 설득려글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 드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테니까.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t******e 2001.01.1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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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버리고 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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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장 그르니에의 "섬"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도데체 왜 그 책에 빠져있는지 궁금해서 호기심에 도서관에서 "섬"을 빌려와 읽은 것이 대학 3학년때쯤인가 그랬다. 유난히 마음이 팍팍하고 메말라가던 나날들 속에 "섬"의 많은 구절들은 고통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지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주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책이 "섬" 뿐인줄 알았다. 그래서 서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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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장 그르니에의 "섬"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도데체 왜 그 책에 빠져있는지 궁금해서 호기심에 도서관에서 "섬"을 빌려와 읽은 것이 대학 3학년때쯤인가 그랬다. 유난히 마음이 팍팍하고 메말라가던 나날들 속에 "섬"의 많은 구절들은 고통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지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주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책이 "섬" 뿐인줄 알았다. 그래서 서점에서 "어느 개의 죽음"을 보았을 때 반가움에 미소가 지어졌다. 민음사에서 발간된 그르니에의 책은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다. 책 표지 모양새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얇고 작은 책 속에 넉넉히 여백을 남기고 박혀 있는 글들 속에는 거창할 것 없는 소박한 일상에 대한 단상들이 담겨있다. 나는 개를 키워봤다. 아니 엄마가 키우신 개랑 여러 해를 살아보았다. 개가 동생이라 여기며 아주 어린시절부터 대학4학년까지 함께 보냈다. 물론 여러 개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개 밥 주는 일 때문에 대학 수학여행을 포기한 적도 있다. 그래서 개보다 못하단 얘기도 들었드랬다. 그야말로 애증이 교차하던 개와의 추억들이 그르니에의 글 속에서 살아났다. 나는 그르니에를 잘 모른다. 까뮈가 그의 스승이었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노라면 어깨에 힘 주고 뭔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잘난척쟁이 지성인"의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다. 또한, 바로 오늘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 내가 발 붙이고 있는 공간들... 이름하여 일상을 어디에선가 보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이 느낀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나와 함께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뭔가 따분한 그렇고 그런 일상에서 "즐거운 일"들이 발생하기를,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지만, 그 즐거움과 따사로움은 우리가 당연한 듯 만나고 보내는 "일상에서 만나는 개와 사람과 하늘과 섬과 별과 달과 해와 나무와 물"에 있음을 알려준다. 내가 불어를 제대로 공부했음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옮겨지지 않은 그르니에의 단상들을 내 느낌데로 만날 수 있을터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무슈"라는 단어 조차 쓸 줄 모르니... 아쉽다.
h*****y 2001.10.27.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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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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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프랑스 수필가 장 그르니에가 노년을 함께한 애견을 통한 삶의 한 단편을 시처럼 써내려간 아주 짧은 분량의 수필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 속에서 실제로 더 바쁜 것은 마음이 아닌가 한다. 한가한 시간이란 실재로 의미가 없고 한가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더 중요한 시점이 되었을 때 명상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오랜 시간 전에 생존했던 먼 타국에 사는 한 수필가의 자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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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프랑스 수필가 장 그르니에가 노년을 함께한 애견을 통한 삶의 한 단편을 시처럼 써내려간 아주 짧은 분량의 수필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 속에서 실제로 더 바쁜 것은 마음이 아닌가 한다. 한가한 시간이란 실재로 의미가 없고 한가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더 중요한 시점이 되었을 때 명상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오랜 시간 전에 생존했던 먼 타국에 사는 한 수필가의 자연에 대한 사랑,특히 개를 통한 동물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것, 어떤 생명체를 아끼고 키워낸다는 것, 그로인해 위로받고 보상받고 그로인해 힘겹고 아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거칠디 거친 현대인의 마음속에 숨겨진 곱디 고운 사랑의 마음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n****g 2004.03.07. 신고 공감 1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