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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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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는 이 대한민국 땅에서 어떻게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었는가?  라는 작가의 의문에서 시작된 도서이다.그 이유를 파헤쳐가며 그 시절의 생활상이나 역사적 사건을 연계되고 그렇게 우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야구는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게 된다.일제시대 그리고 독재시대에도 낭만은 있었고 그 낭만이 바로 야구이다.보호국의 배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정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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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는 이 대한민국 땅에서 어떻게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었는가?  라는 작가의 의문에서 시작된 도서이다.
그 이유를 파헤쳐가며 그 시절의 생활상이나 역사적 사건을 연계되고 그렇게 우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야구는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게 된다.
일제시대 그리고 독재시대에도 낭만은 있었고 그 낭만이 바로 야구이다.
보호국의 배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정치적인 이용가치가 어우러지며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한 야구.
본인은 그 시절의 공기 하나하나를 느낄수 있었던 야구의 나라를 읽으며 잠시나마 어린시절의 추억에 잠길수 있어서 즐거웠다.
작가의 기행문 같기도 레포트 같기도한 느낌이살짝있으며 재미는 상당하다.
YES마니아 : 로얄 b******o 2024.04.1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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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할 말 있는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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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라고 하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어디 나 뿐일까. 중년 남성에게 야구에 관한 기억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럴 정도로 야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 스포츠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중 스포츠로는 축구가 앞선다는 반박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조기축구회 없는 동네를 찾기도 어려운 정도가 아닌가. 사회인 야구단이 여럿 있다고는 하지만 조기축구회에는 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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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라고 하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어디 나 뿐일까. 중년 남성에게 야구에 관한 기억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럴 정도로 야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 스포츠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중 스포츠로는 축구가 앞선다는 반박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조기축구회 없는 동네를 찾기도 어려운 정도가 아닌가. 사회인 야구단이 여럿 있다고는 하지만 조기축구회에는 비할 것이 아니니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반인의 관심이나 시장 규모로 보던지,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보는 스포츠의 관점에서 봐도 단연 야구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지금이야 스포츠를 즐기는 것으로 여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를 국가 위상이나 국력과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는 오래전부터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승리를 거두어 국민을 기쁘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게 당연했다. 야구도 그중 하나이기는 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하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여러 번 우승해서 많은 국민이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한 게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고,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다. 이러니 다른 종목은 몰라도 야구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은 건 국가적 프로젝트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야구가 대중 스포츠로는 단연 우위를 차지하면서도 동호인은 축구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경기를 위해 마련해야 할 용품이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그러니 야구가 우리에게 소개된 일제강점기에는 더 말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저자는 야구가 엘리트 스포츠로 출발했다고 소개한다. 공 하나만 있으면 몇 사람이 되었든 모두 뛰어들어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축구와 출발점이 달랐던 것이다.


저자는 1915년 창설된 고시엔 대회의 한국 예선전에 1916년 치러졌고 거기에 경성중학(서울고)을 비롯한 5개 팀이 참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이 1905년 설립된 YMCA 야구단이니 중학교 야구팀이 창단된 것은 아마 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야구를 소개한 건 한국에 와있던 일본 엘리트들이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근대교육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때 영어 교사였던 미국인들이 영어를 가르치면서 대표적인 미국 문화인 야구를 소개했는데, 이들에게 배운 엘리트들이 조선총독부의 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공부했던 유학생들이 돌아오면서 야구가 전파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 때문에 1920년 조선체육회가 설립되고 나서 열린 최초의 대회가 야구 대회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공립보통학교에 야구를 도입해 이 땅의 엘리트들을 흡수함으로써 일본 동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그런 동화정책은 당시 또 다른 엘리트의 요람이었던 상업학교에도 적용되었다. 이런 이유가 야구가 우리 땅에서 엘리트 스포츠로 출발한 동력이 되었다.


나도 나름 야구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일제강점기의 야구계 상황은 대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휘문중학이 고시엔 대회 본선에 진출에 8강까지 올랐고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상고가 고시엔 대회 본선에 3회나 출전했다고 한다. 여기서 상고가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는 저자의 설명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기도 할 것이다. 지금이야 상고의 위상이 상당히 내려갔지만 우리 또래가 사회 진출할 무렵만 해도 금융기관은 모두 상고 출신 인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중 몇몇 학교는 가난한 수재들이 가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소개되었던 야구는 해방을 맞으면서 날개를 달았다. 미군정 인사들의 적극적인 관심에 힘입어 1946년 <자유신문>에서 청룡기 중학 야구 대회를 개최했다. 청룡기 대회에 참가한 팀을 보면 야구가 엘리트 스포츠라는 말이 실감 난다. 1회 대회에는 경기, 경복, 경성(서울고), 휘문, 배재, 양정, 경남, 광주서중(광주일고), 전주북중(전주고), 선린, 인천상고(인천고), 부산상고를 비롯해 모두 24개 팀이 참가했다. 이때부터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야구는 단연 고교야구가 으뜸이었고, 국민에게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어린 선수들이 혹사당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고교야구가 주말리그로 바뀌었고 프로야구의 그늘에 가려 고교야구 기사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70년대에는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시작되면 신문이 온통 그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4대 중앙일간지가 모두 전국대회를 개최했는데, 1946년 <자유신문>이 창설한 청룡기 대회는 1953년부터 조선일보가 이어서 개최하고 있고, <동아일보>가 1947년 황금사자기를, <중앙일보>가 1967년부터 대통령배를, <한국일보>가 1971년부터 봉황대기를 개최해오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중앙일간지가 고교야구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대회 수익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전국을 들썩일 정도이기는 해도 사실 입장 수입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신문사들이 겨냥한 건 구독자로서 당시만 해도 구독 경쟁이 신문사 위상의 절대 지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다닌 신일고등학교는 농구로 유명했다. 2학년 때는 전국대회 6개 중 5개를 우승하기도 했다. 그래봐야 신문에 실리는 것은 1단짜리 단신에 불과했다. 고교야구는 8강에만 진출해도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리는데. 그래서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팀을 만들었다.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야구 명문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는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야구팀이 없기도 했고 딱히 야구에 흥미가 있을 유인도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인 1975년 민간기업 최초로 생긴 롯데 야구단 때문에 야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김동엽 감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때문에 평균 천 명에 불과하던 실업야구 관중이 하루아침에 5천 명으로 늘어났다. 저자는 당시 치어리더도 한몫했다고는 하는데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야구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고교야구는 보지 않았는데,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실업야구를 보면서 높아진 눈으로 고교야구를 볼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는 실업야구 한 시즌 55경기 중에서 48경기를 본 일도 있었다. 그때는 동대문운동장에서 하루에 세 경기를 열었다. 그래서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들어가 해질녘에 나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롯데 야구단이 인기를 끌었다고는 하지만 실업야구 주축은 단연 은행팀이었다. 해태타이거즈를 아홉 번, 삼성라이온즈를 한 번 우승시킨 김응룡 감독은 당시 한일은행 야구팀 홈런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은행팀이 실업야구의 주축을 이룬 배경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2년에 국민체육진흥법이 생겼는데, 이는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일어날 남북대결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스포츠팀 운영 방침이 공기업에 떨어졌고, 당시 공기업 중에서 자금 여유가 있었던 은행에서 (당시는 모든 은행이 국가 소유) 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화이트칼라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은행은 야구팀이 있던 상고 출신들이 고위직에 포진하고 있어서 자연히 그들이 익숙했던 야구팀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올림픽에서 일어날 남북대결을 위해 국민체육진흥법을 만들었지만 정작 창단된 것은 올림픽 종목도 아닌 야구단이라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것이다.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바로 이러한 실업야구 출신의 선수로 출범했다. 나는 프로야구가 출범한 때부터 OB베어스의 팬으로 있다. 연고지도 상관없고 더욱이 OB와는 아무 인연도 없던 내가 그 팀을 응원하게 된 것은 실업야구 홈런타자로 이름 높던 제일은행의 김우열 선수가 그 팀 선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마이너리그이기는 했지만 미국 프로야구의 물을 먹은 박철순 투수가 22연승의 대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비록 프로야구가 실업야구 출신 선수로 시작은 했지만 분위기는 고교야구가 바탕이 되었고 이제는 프로야구단이 지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롯데가 자타 공인의 극성팬을 거느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저자는 그 기원을 1964년 동경올림픽으로 본다. 당시 부산에서는 일본 방송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방송을 통해 야구 중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동경올림픽에서 야구 TV 중계를 한 것이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부산에서는 KBS, MBC와 함께 NTV(니혼TV)를 3대 TV방송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부산의 고교야구팀이 전국대회를 휩쓴 것도 부산이 ‘야구의 구도(球都)’로 자리 잡게 만든 큰 요인이 되었다. 1946년에서 1950년 사이에 전국대회로는 청룡기 5회, 황금사자기 3회가 열렸는데 이 여덟 번의 대회에서 부산상업과 경남중이 6회를 휩쓴 것이다. 그리고 지방 최초로 대학 야구팀이 창단됐고(동아대), 지방 최초로 전국대회(화랑대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 이 책은 야구 이야기라기보다는 야구를 키워드로 하는 역사요 사회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저자 이종성은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이며 영국에서 스포츠 문화사로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해방 이전에 야구가 처음 우리에게 소개된 때로부터 해방 이후에도 야구의 위상이 꺾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날개를 달게 된 시대 배경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건 야구라면 할 말이 있다던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고교야구가 황금시대를 이루던 1970년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나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교야구 황금시대도 기억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처럼 기록으로 남으면 역사가 되는 것이니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낱 이야깃거리로 소비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서이다. 알라딘에서 찾아보니 실제로도 역사서로 분류되어 있다.

YES마니아 : 로얄 b*****3 2024.06.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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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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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너무 힘들다. 오전에 잘 보이던 눈이 오후가 되면 난시 현상이 나타난다. 책을 손에서 놓은 지 꽤 되었다. 이제 예전처럼 읽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한참을 쉬었다. 그래도 꼭, 반드시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책을 사놓기는 했다.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노력해보려고 한다. 아들이 야구를 해서인지 관심이 갔던 책이다. 한국 야구의 역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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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너무 힘들다. 오전에 잘 보이던 눈이 오후가 되면 난시 현상이 나타난다. 책을 손에서 놓은 지 꽤 되었다. 

이제 예전처럼 읽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한참을 쉬었다. 

그래도 꼭, 반드시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책을 사놓기는 했다.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노력해보려고 한다. 

아들이 야구를 해서인지 관심이 갔던 책이다. 

한국 야구의 역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역사는 여전히 흥미롭다.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면 지금을 다르게 볼 수 있다. 

 

구에는 '민족주의'가 없었다. 한국 야구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고교 야구를 중심으로 생겨난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였다. 한국 야구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민족주의'와 가까워졌다. 그 시작점은 1977년 슈퍼 월드컵 대회였고, 이후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폭발했다. 한국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야구 대회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이 우승으로 국내 스포츠로만 인식됐던 야 구가 '국위 선양'에 기여할 수 있는 국제 스포츠로 변모했다. 당시 야구 세계 제패는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이룬 국력 신장의 바로미터로 평가됐다. 그동안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종목이 아니라 대중적 인기에 비해 국가 차원에서 중요도가 낮았던 야구의 변신이었다. 야구 스타도 국민적 영웅 반열에 올랐다. 슈퍼 월드컵 대회에서 최고 스타로 떠오른 김재박은 1977년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선정됐으며, 방송사의 송년 특집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미디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제 강점기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 야구부 유니폼에는 'ZENRIN(젠린)'이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젠린은 선린(善隣)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이 젠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원래 선린상업의 교명은 학교 설립자 오쿠라 기하치로의 성을 딴 오쿠라 상업학교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1907년 학교가 설립될 때 교명이 선린으로 바뀌게 됐다. 당시 한일 강제 합병을 목전에 두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은 일본과 조선의 선린을 도모하고, 대한제국의 보조금 교부를 고려해 '선린'이 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인도의 영국 유학파 엘리트들의 크리켓 문화 전파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유학파들이 주도했던 조선의 야구 전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에서 야구가 뿌리를 내리게 된 데에 는 YMCA 야구단의 역할이 컸지만, 이후에는 일본 유학파 엘리트들이 이끌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설립된 이후 최초의 대회가 축구 대회가 아닌 야구 대회였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동아일보> 기자로 조선체육회 설립의 필요성을 설파했던 변봉현과 이중국은 모두 일본에서 야구를 익힌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1915년에 열린 고시엔 야구 대회에서 사용한 경기 규칙과 대회 강령 등을 입수해 이를 바탕으로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일본 유학생은 날로 증가했다.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입신양명의 기회를 보장해 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던 사람들은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유층 자제들이 더 많았다. 영국 유학을 떠난 인도 귀족들에게 크리켓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에게 야구는 중요했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모던 스포츠'로 소수 계층만 즐길 수 있던 야구는 부유한 엘리트 의 상징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야구를 사회 계층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상류층 자제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야구의 중심부에 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를 접한 뒤 일본 유학을 떠난 인물이 다수 존재하는 이유였다. 어쩌면 야구가 한반도에서 엘리트 계층과 손을 맞잡게 되는 중요한 계기는 야구의 매력에 빠지게 된 일본 유학생들이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인사가 많았지만,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 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일본 유학파 엘리트들에게 야구는 선진 근대 문화의 상징이었다. 이 들은 조선 민중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야구 실력에 관계없이 조선 사회에서 명사 대접을 받았다. 이 와중에 야구는 조선 사회에서 집안 좋고 학력도 높은 도련님들의 스포츠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적지 않은 일본 유학파 야구인들 은 이후 정관계를 주름 잡는 고위 인사가 됐다. 1946년 초대 야구협회 회장이 됐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서상국과 군산 출신으로 교토대학교에서 야구를 했던 김판술과 같은 유학과 야구인들이 지역 사회의 유지로 활동하며 훗날 국회 의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 유학파 야구인들 중에 친일파로 분류돼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이들은 친일파 부호들과 야구를 매개로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런 대표적인 경우가 곧 살펴볼 휘문고보다.

[민영휘]

그는 조선의 세도가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친일 인사다. 그는 1910년 일본 정 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은사금은 일왕이 은혜롭게 베풀어 준 돈을 의미했는데, 당시 한일 강제 병합에 협조한 인사들에게 지급됐다. 그는 그와 가족들이 받았던 은사금으로 한일은행을 매입했고, 가족 경영 체제를 확립해 '민씨 재벌'의 서막을 열었다. 조선 최고의 부호로 떠오른 민영휘는 1928년 휘문고보 야구부 운영 예산으로 1년에 860원이 넘는 돈을 책정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쌀 60가마니 정도를 살 수 있는 많은 돈이었다. 재력가 민영휘와 조선 총독부와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휘문고보 야구 선수들이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는 운동장도 확보할 수 있었다. 휘문고보는 1921년까지 제대로 된 운동장이 없었다. 하지만 1922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휘문고보는 경성 부청으로부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조 시기에 세워진 궁궐인 경우궁을 7만 원에 매입해 이를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휘문 70년사>에 따르면, 일본의 강제 병합 후 경성부청 위생국이 사용했던 경우궁을 3,000평 규모의 운동장으로 바꾼 뒤 휘문고보 야구부의 전성기가 열릴 수 있었다.

 

조선인 최초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가 된 손효준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와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손효준은 1921년 제2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한국 야구사 최초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당시 그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재종손답게 그의 친동생 손희운과 천도교청년회 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손병희의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프로 야구 선수로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손효준은 팀에서 4번 타자가 될 정도로 타격 재능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친척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일본 고등 경찰 형사가 그의 뒤를 항상 미행했다.

 

다카라즈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1936년 일본 프로 야구가 출범했다. 다카라즈카 팀을 운영했던 한큐도 한큐군(현 오리스 버펄로스)이란 팀을 재창단했다. 7개 팀으로 출발한 일 본 프로 야구 팀의 모기업은 모두 신문사와 철도 회사였다. 프로 야구가 모기업의 경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때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사카 타이거즈(현 한신 타이거즈)도 창단 됐다. 그중에서도 <요미우리 신문>이 모기업인 도쿄 자이언츠는 일본 프로 야구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조선인 이영민은 이 팀의 창단 멤버가 될 뻔했다. 이영민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야구 선수였다. 이영민은 1933년 전(全) 경성팀의 일원으로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에 참가해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듬해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등 이 포함돼 있는 메이저 리그 올스타 팀과의 친선 경기를 앞두고 일본 대표 선수로 선발됐다. 그해에 이영민은 일본 최초의 프로 야구 팀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로 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잉거프리센 소령은 곧 한국과의 친선 야구 대회를 추진했다. 그의 결정이 미군의 사기 진작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지만, 한국 야구에는 엄청난 동기 부여가 됐다. 잉거프리센 소령은 한국과의 야구 경기에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래서 한국이 24군단과의 경기에서 단 1점이라도 낸다면, 공 10다스 (120개)를 주겠다고 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한국이 이 경기 에서 승리하면, 배트 50개와 공 50다스를 주겠다고 악속했다. 한국은 미군과의 경기를 위해 최초로 야구 대표팀을 구성 했다. 결과는 3-4 패배였다. 아쉬운 석패였지만 중요한 것은 미군으로부터 야구공 30다스를 받게 됐다는 점이었다. 한국 이 기록한 3점은 해방 후 최초의 학생 야구 제전인 청룡기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청룡기 대회를 주최했던 <자유신문>은 이 대회를 앞두고 경비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당시 대회 경비 10만 원을 빌리기 위해 주최측이 내놓은 담보는 다름 아닌 야구공 30다스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룡기 중등학교야구대회는 한국이 최초로 세계야구연맹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 활짝 열렸던 고교 야구 시대는 미군정기에 창설 된 청룡기 중등학교야구대회를 토대로 이뤄졌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최대의 학원 야구 제전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이 주 최했던 고시엔 대회 조선 예선전이었다. 광복 이후 야구계에서 우리의 손으로 야구 대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욕에 불타 있을 때, <자유신문>은 청룡기 대회를 창설했다. 이 대회는 해방 공 간에 펼쳐졌던 야구 대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회였다. 1946년에 열린 제1회 청룡기 대회에는 무려 24개 중학교 팀이 출전했다. <자유신문>이 되도록 많은 팀이 대회에 출전 할 수 있도록 참가 신청을 한 팀에 모두 대회 출전권을 줬기 때문이었다.

 

주산부로 유명했던 전북 최고의 명문 상업고인 군산상고는 1962~1977년까지 매년 100명 가량의 졸업생이 금융 기관에 취업해, 최고 전성기에는 금융 기관 종사자가 1,500여 명에 달 할 정도였다. 상업고등학교로는 최초로 영재 합숙 제도(교내 고시원)까지 만든 군산상고의 노력은 이렇게 결실을 맺고 있었다." 금융 기관에서 군산상고 인맥이 형성되는 시기에 야구도 전국을 제패했다. 군산상고는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4대 전국 대회에서 7회나 정상에 올라 야구 명문교로 성가를 높였다.

 

군산상고 야구는 당시 군산을 대표하는 기업인 경성고무 사장이었던 이용일과 국가 대표 출신의 최관수 감독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이용일은 1960년대 중반 군산 지역 야구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야구 팀 창설에 힘을 쏟았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 야구 팀 창단을 모색했다. 이용일이 먼저 야구부 창단을 제안했던 곳은 사실 군산고였다. 하지만 군산고는 이를 거절했고 대신 1968년 군산상고에 야구부가 생겨났다. 그는 사재 3,000만 원을 털어 군산상고 야구부를 후 원했고 야구부 선수들은 경성고무가 직영하는 방앗간에서 쌀을 손수레로 날라 배를 채웠다.

 

마산상고는 기업은행 과의 특수 관계를 활용해 이미 1969년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었다." 김성근 감독은 기업은행 마산 지점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마산상고를 지휘했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1,388승을 거뒀으며 SK 와이번스 왕조를 창조했던 '야신(야구의 신)' 김성근의 야구 감독 생활은 마산상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김 감독은 마산상고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1970년 기업은행 코치가 되어 서울에 올라왔다. 마산상고는 김 감독이 떠난 공백을 김 감독과 기업은행에서 함께 뛰었던 최관수 감독으로 메우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산상고 동문들은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하는 데에도 중요 한 역할을 했다. 1981년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 비서관이었던 이상주는 전두환 정권이 추진하고 있던 야구와 축구 프로화에 깊게 관여했다. 그가 프로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을 때, 정무 제 1수석 비서관이었던 우병규는 마산상고 동기 동창생이자 야 구인 이호헌을 이상주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해 줬다. 이후 이 호헌은 청와대를 60여 차례나 드나들며 프로 야구 창립 프로 센트를 주도했다. 이호헌은 군산 야구의 대부였던 이용일과 함께 프로 야구 출범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고,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할 수 있었다.

 

부산 팬들의 일본 야구 중계 '청취'는 1964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일본 야구 중계 시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64년은 도쿄올림픽이 열렸던 해였다. 당시 한국 방송사는 도쿄올림픽을 라디오로만 중계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일본 TV 방송을 통해 올림픽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1964년 부산에서는 TV 수상기 판매가 급증했다. 1962년까지 600대에 불과했던 부산의 TV 수상기 대수는 1964년 4,000대로 늘어났다.

 

지방 대학 최초로 야구부가 탄생한 곳도 부산이었다. 1948년 부산 동아대는 야구부를 창설했다. 여기에 전국 규모의 중등학교 야구대회인 쌍룡기 대회도 부산에서 열렸다. 역시 지방 대회로는 최초였다. 제1회 쌍룡기 대회는 부산 지역팀은 물론, 마산, 대구와 서울 팀도 참가했다. 하지만 4강에 오른 팀은 모두 부산 지역 팀이었고 우승은 경남중학이 차지했다. 쌍룡기 대회는 고교 야구가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1974년 화랑대기로 대회 명칭이 변경된다.

 

한국의 중앙 일간지는 누가 뭐래도 슈퍼 엘리트 집단이다. 1960년대 이후 1990년대까지 중앙 일간지 편집국장의 77퍼센트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었으며, 지난 2016년 조사 결과 중앙 일간지 기자들의 60.1퍼센트는 3대 명문 대학교 출신이었다." 워낙 명문대 졸업생이 중앙 일간지에 많다 보니 자연스레 명문고 출신의 신문 기자들도 많았다. 특히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60~1970년대에는 이런 현상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명문고가 야구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엘리트 신문 기자들에게 야구는 친숙한 종목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당시 4대 중앙 일간지(<동아입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가 모두 전국 고교 야구 대회를 주최하며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4대 중앙 일간지의 고교 야구 대회 개최는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동아일보>는 1947년부터 황금사자기 대회를 주최했고, <조선일보)는 원래 해방 직후 <자유신문>이 주최했던 청룡기 대회를 이어받아 한국 전쟁이 끝난 뒤부터 주최했다. 이후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는 후발 주자로 대통령배 대회와 봉황대기 대회를 각각 1967년과 1971년부터 주최하기 시작했다. 4대 일간지가 모두 고교 야구 대회를 개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선린상고 출신으로 야구에 관심이 지대했던 장기영(1916~1977)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사장 시절 청룡기 대회 개최권을 가져왔고, 나중에 <한국일보> 사주가 되면서 봉황대기 대회까지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대 일간지가 고교 야구를 놓고 치열 하게 경쟁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한국의 신문 총발행 부수는 1970년 200만 부에서 1980년에는 500만 부로 늘어났다. 이 사이에 신문은 광고 수입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광고 매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신문의 총광고 수입은 1970년 152억 원에서 1979년 2,180억 원으로 치솟았다.

 

4대 고교 야구 대회를 축으로 전국 대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75년 고교 야구 대회 는 3월 하순부터 11월 중순까지 무려 12개나 됐으며, 1971년 4대 고교 야구 대회 우승을 석권했던 경북고는 이해에 무려 56경기에 출전했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은행 야구팀의 위상이 떨어졌을 때 한국 프로 야구 창설을 위한 구체적 계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976년 1월 발족한 한국 성인야구 재건 및 프로야구 준비위원회의 야구 재건 5개년 계획이었다. 언론에도 공개된 이 계획은 1976 년 실업 야구 10개 팀을 양대 리그로 나누어 각 시도에 분산시켜 130~140경기를 치르는 정규 시즌과 양대 리그 승자 간 코 리안 시리즈를 치른다는 내용이다. 1977년에는 서울, 대전, 인천, 대구, 부산, 광주에 6개 프로 야구팀을 만들고 야간 경기를 위한 시설을 갖추게 한 뒤 1978년에는 서울과 전주에 팀을 증설한다는 것도 이 계획의 주요 골자였다. 여기에 실업팀의 소속 선수를 출신 지역별로 분류해 6개 프로 야구팀에 배분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고교 야구에서 생겨난 지역과 야구와의 결합을 프로 야구에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계획의 입안자는 재미 교포 사업가 홍윤희였다.

 

더욱이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 구 성원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훈육 국가'를 지향했다.' 국민들의 소비와 유흥은 규제의 대상이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 소비성만 높아질 것이다." 라며 우려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컬러 TV 수상기의 국내 생산은 1974년 아남산업이 일본 나쇼날 전기와 합작해 시작됐으며 1976년 삼성전자가 독자 개발 에 성공했다." 하지만 컬러 TV 방송은 1970년대에 이뤄지지 않았다. 이처럼 정권 차원에서 절약과 절제를 국민들에게 강 요했던 시기에 프로 야구 창설은 어울리지 않았다. 소비와 유 홍 문화의 전성기는 야간 통행금지 철폐, 교복 자율화와 컬러 TV 방송이 이뤄진 1980년대부터 열렸고, 이때 프로 스포츠도 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윤희의 프로 야구 창설 계획안은 중요 했다. 1981년 제5 공화국 정권 수뇌부에게 전달됐던 프로 야구 계획안은 홍윤희의 계획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990년대 야구 팬들의 교과서였던 야구 잡지 <주간야구>의 편집장을 지 낸 홍순일은 '홍윤희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1981년에 프로 야구 설립 방안을 채 한 달도 안 돼 만들 수 있었다."라고 말해 줬다. 이처럼 홍윤희는 1982년 시작된 프로 야구의 원형을 제 시한 설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구 한일전 승리로 한국 사회에서 생겨난 야구 민족주의와는 별개로 이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경제 개발이 필요했고,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한일 경제협력차관이라는 명목으로 40억 달러의 자금 공여를 약속받았고, 1983년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 총리 (1918~2019)와 역사적인 첫 한일 정상 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일본에 차관을 요청한 전두환에 대해 한국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전두환 정권의 처사를 비굴하게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전, 두환입니다. 나, 카소네요."라는 농담이 돌았다.


물론 공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1937년 기준으로 보면, 조선인 인구는 약 2,200만명 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립고보와 사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을 모두 합쳐도 1만 5,454명에 불과했다. 이런 측면에서 공립고보를 통한 조선 사회의 야구 대중화는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수재들이 다녔던 공립고보의 야구 전통은 한국 사회에서 야구가 명문교의 스포츠로 자리 잡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줬다. 해방 이후 야구가 이들 학교의 교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어 작전 지시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 만, 대구상업은 1930년 고시엔 본선 무대에서 귀중한 1승을 거뒀다. 대구상업의 승리는 1923년 휘문고보 이후 조선인이 포함된 팀이 고시엔 본선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대구상고 50년사>도 이 고시엔 본선 진출과 1승 덕분에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대구상업을 야구 명문교로 기억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린상업이나 대구상업과 함께 일제 강점기 상업학교 야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학교는 인천상업학교다. 인천상업은 일제 강점기 고시엔 대회 본선에 가장 많이 진출했던 야구 명문교였다. 인천상업은 3회(1936, 1938, 1939)나 고시엔 대회 본선에 진출했다. 인천상업은 일본인들이 다녔던 야구 명문 인천 남(南)상업학교와 조선인들이 다녔던 인천 북(北)상업학교가 1933년에 통합해 만들어진 공립상업학교였다. 이 때문에 인천상업 야구부에는 일본인들 사이에 간간이 조선인 선수가 끼어 있었다." 인천상업은 광복 후 인문계 고교인 인천고로 교명이 바뀌었다. 야구 명문교인 인천고의 전통도 일제 강 접기 상업학교에서 출발했던 셈이다.

YES마니아 : 골드 e***n 2024.08.0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