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라운 표지 그림에 한참 머문다. 프레데리크 그로, 프랑스 파리 12대학 정치철학 교수이자 철학자 그리고 미셀 푸코 연구자. 푸코가 그토록 사유했던 광기와 성(性)이 표지에 겹쳐진다. 그래서 흥미롭다. "수치심은 우리 시대의 주된 정서고, 새로운 투쟁의 기표다. 이제 사람들은 불의에, 전횡에, 불평등에 고함치지 않는다. 다만 수치심에 울부짖는다." 11쪽, 서문 문득 어떻게 정의되는 감정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저자가 피력한 루소가 느꼈다던 숨이 막히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그런 수치를 느낀 적이 아니 알아챈 적이 있던가, 생각한다. 그가 죄책감과는 다르다고 극구 부인한 데에 왠지 감사함을 느낀다. 그는 더 이상 수치심이 개인의 부정적 감정이 아닌 사회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낼 혁명적 감각들이라 주장하면서 수치심의 역사를 관통해 현대에 작동하는 궤적을 마치 탐사 보도처럼 세밀하고 시사성 높은 논의를 하게 한다. 집안 혹은 가문으로 불리는 집단적 수치심은 불명예를 동반하고 이를 통해 많은 부분을 잃는다. 즉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가문이 구설수에 오르는 순간 그들의 평판은 바닥을 칠 것이고 여기에 동반되는 수치심은 말 그대로 정상적인 가문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이 설명은 종갓집으로 대변되는 양반가의 봉건주의 관습이 여전히 연결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집안 망신을 시킨다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담은 설명은 눈에 쏙들어 온다. 읽으면서 더 침묵하게 된다. 미처 생각지 못하고 무심코 내뱉은 말 중에 어느 지점은 누군가에게 모욕적이거나 멸시처럼 느껴졌을지 모르고 그로 인해 그 누군가는 수치심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걸 확인하니 확 수치스럽다. 예를 들면 복지관을 찾은 누군가의 남루한 옷차림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서 퀴퀴한 냄새 나지 않아?"라고 했을 때처럼 말이다. 이 말을 들은 당사자는 본인에게서 나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분명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은 용변을 가리지 못한 누군가가 지나친 직후였다. 저자는 이런 사회적 수치심은 결코 순수하게 받아 들여지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어 가난을 '가벼워지고, 무중력을 더 얻는 것'이라는 디오게네스의 말은 부자들의 탐욕스러운 소유욕에 대한 한탄이고 혐오다. 그러면서 "스스로 가난을 가치 지향적으로 여기는데 누가 수치스러워 하겠냐"라는 디오게네스의 자신감은 몇 세기 지나면서 가난은 수치심을 동반한다. "모욕적인 수직 체계에서 닥치는 대로 부당한 이유만 찾는다." 63쪽, 사회적 멸시 타인의 멸시가 자기 멸시로 바뀌는 데에 대한 이야기에 수치심을 생각한다. 애써 준비한 일이 시작하기도 전에 뒤틀렸다. 담당인 나와는 상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 버렸다. 모욕감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관리자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수긍해야 하는 처지임을 자각하는 수밖에. 자로 잰듯한 수직 체계에서 난 숨길 야심도 없다.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할 법한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대한 억압적 폭력에 대한 설명은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기는 힘들면서도 현재에도 비일비재하게 주위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 힘의 논리의 배경에는 남성우월주의적 장치를 통한 사회적 합의나, 어쩌면 수치심에 휩쓸린 가족의 침묵 속에서 확대되는 만행이 근친상간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공자가 신중함이라는 용어로 말한 것은 플라톤에게서 두려움이라는 말로 다시 연주된다. 화법은 두 가지이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여전히 수치심이다." 158쪽, 아이도스 줄곧 서양의 철학적 관점을 주로 다루다 보니 동양의 윤리적 관습에서 빚어지는 수치심과는 결이 다를 수 있을 수 있는 부분을 공자의 사상을 끌어와 자신의 견해를 보완한다. 이 책은 수치심이 개인이 느껴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사회정치적 판단이 함축된 감정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다양한 문학 작품을 소개하면서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함을 치밀하고 신랄하게 파고 든다. 어렵지만 많은 수치심을 깨닫게 한다. #수치심은혁명적감정이다 #프레데리크_그로 #백선희 #책세상 #서평 #책리뷰 #북플로언서 #철학 #사상 #사회학 #페미니즘 #젠더 #정치철학학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
![]() 수치羞恥. 부끄러울 수, 부끄러울 치. 부끄러운이 두 번이나 들어갔으니 얼마나 심한 부끄러움일까요. 죄의식보다 훨씬 폭넓고 복잡하며 깊은 경험을 내포하는 수치심은 단순히 개인적 감정을 넘어 도덕적,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차원을 넘나듭니다. 사실 우리는 범법자가 아닌 이상 죄의식보다는 수치심을 더 내밀하게 경험하지 싶습니다. 그리고 수치심 그 자체보다 수치심에 따라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더 무서워합니다. 자기멸시와 침묵을 강요하는 슬픔이 포함된 수치심이 있는가 하면, “염치도 없는 자”라는 분노의 외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혼합물인 이 수치심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셸 푸코 연구자이자 파리12대학 파리정치연구소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하는 프레데리크 그로입니다. 전작 <불복종>의 원동력이 되는 것으로 그는 수치심을 끌어옵니다. 불복종할 힘을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라고 말이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수치심을 지렛대 삼아 파괴적 슬픔, 자기 경멸을 제거하고 순수한 분노로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 수치심은 심리학적 치료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정서는 부차적이며, 추락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여전히 매년 천명 이상의 여성들이 가문을 수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죽임당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디지털은 가상세계가 아니라 실재하고 있습니다. 사이버폭력의 희생양들은 존재함에도 그들을 위한 디지털 회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치는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라고 합니다. 가난, 상사의 모욕 등을 이유로 받은 타인의 멸시는 이내 자기멸시로 바뀝니다. 아니 에르노는 수치심의 특별한 재능으로 기억을 손꼽았습니다. 사회적, 정신적, 신체적 영역에서 타격받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성폭력 및 근친상간의 희생자들은 죽을 때까지 저항해야 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살아있기에 불리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수치의 경험은 흔적을 남기기에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 p101 수치심의 반대말은 몰염치입니다. 수치심이 없는 몰염치한 사람으로부터 수치심을 받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수치심의 동양적 의미는 움츠림, 조심성, 신중함입니다. 도덕적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도덕적 장벽으로서의 수치심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공자는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사람들은 수치심도 알고 스스로 마음을 올바르게 할 줄도 알게 되지요”라며 수치심을 관망의 태도, 더불어 살기, 행복 추구를 위한 윤리적 자질로 삼습니다. 수치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이어나가는 프레데릭 그로 저자의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개인의 부정적 감정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힘으로서 수치심의 영역을 확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영화, 소설, 철학자들의 사상들에서 건져올린 수치심의 사례를 무수히 쏟아냅니다. 프로이트, 니체, 푸코, 플라톤, 사르트르, 라캉 등 철학자들이 펼치는 지적 향연이 풍성합니다. ![]() “철학의 본래 기능은 수치심을 안기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는지, 그가 아는 것을 어디까지 아는지 자문하게 만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것은 아는 척하던 이들에게 더 명료하게 밝히라며 난감하게 만들면서 수치심을 안겨줬기 때문입니다. 발자크, 카뮈, 카프카, 모파상, 도스토예프스키, 프리모 레비 등 유명 작가들의 소설 속 수치심 사례를 알아갈수록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가 점점 늘어납니다. 특히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 수치심과 관련한 내용이 꽤 많길래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수많은 장치들-공장, 사무실, 학교-에 대해서는 저자가 각각 책 한 권씩 쓸 수 있다고 얘기할 만큼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철학적 용어의 일부는 어렵긴 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수치심을 다룬 주제인 만큼 제법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마르크스가 쓴 편지에 있는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수치심은 이미 하나의 혁명입니다. (중략) 수치심은 일종의 분노입니다. 억눌린 분노. 온 나라가 정말 수치심을 느낀다면 그건 달려들기 위해 움츠린 사자 같을 것입니다.” 저자는 수치심에 동반하는 분노에 주목합니다. 우리를 깎아내리는 평가, 가치를 실추시키는 모욕, 굴욕적인 실패 속에서 분노는 복수의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정치적, 집단적 분노, 방향을 띤 분노의 형태를 취할 때 분노는 정화되고 승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분노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에 속한 수치심을 투사의 힘으로 발현하는 겁니다. 더불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집단적 분노를 일깨우기 위한 연민은 상상력에서 탄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대신해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는 체념하지 않고 저항할 능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저 감정으로만 치부했던 수치심에 대해 이토록 깊게 생각해본 경험은 처음입니다. #도서협찬 #수치심은혁명적감정이다 #프레데리크그로 #책세상 #철학 #수치심 |
![]() ? 프레데리크그 로 (지음)/ 책세상(펴냄) 〈수치심은 이미 하나의 혁명이다〉 칼 마르크스 우리는 어떨 때 수치심을 느끼는가? 그것은 개인적인 사유에서 혹은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반면 한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730부대가 생체실험한 건강 보조재를 사기 위해 줄을 선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회적인 차원의 수치심을 느낀다. 또 화장기 없이 흐트러진 차림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하필 학부형과 마주쳤을 때는 얼 둘이 화끈한다. 이는 개인적인 수치심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연구자, 정치 철학자이자 내겐 〈왜 전쟁인가〉를 통해 알게 된 저자님이시다!!!!!!! 책은 기존 〈불복종〉을 보안한 후속작이다. 총 열세 꼭지에서 저자의 철학적 사유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타인의 눈길에 좌우되는 삶은 지옥이다. 이 책에 언급되어 잇지만,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악취를 풍기는 것이 가난한 자들의 속성이라는. 사회적 수치심은 순수하지 않다. 모호성이 수치심을 성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가난은 불의가 될 수도 있다는 문장.... 저자는 발자크, 카뮈, 아니 에르노의 문학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수치심, 분노, 극복할 수 없는 혐오를 설명한다. 또한 세계대전 후 독일에 부역한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머리를 빡빡 깎이고 조리돌림을 당하던 기억은 모파상의 소설 〈비곗덩어리〉에서 드러난다. 남성 우월주의에서의 강간의 역사, 1970년대까지도 강간을 신고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 만큼, 이는 피해자에게 자기 몸을 일정 기간 동안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그 권리를 빼앗는 일이라고 세계 여성의 날 신문 기사에서 읽었다. 수치심에 대한 정치 철학적 관점에서의 사유. 우리 사회가 느껴야 할 수치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이다. 수치심은 곧 책임의 증거다.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정부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 이들, 고액 체납자들, 인종차별적인 발언,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지구의 기후 위기에 대해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수치심은혁명적감정이다, #프레데리크그로, #책세상, #정치철학, #철학책추천, #세상에대한수치심, #불평등 |
![]()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책세상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치심이 맞나? 싶은 제목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표지에 그려진 에곤 쉴레의 그림에도 마음이 끌렸다. 뒷모습은 앞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게 '수치심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저자인 프레데리크 그로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수치심'에 대해 왜 쓰고자 했는지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수치심'이 가지는 위치는 엄청났고 복잡했고 폭넓었다. 역사적 사실과 저서로 뒷받침되어 서술되는 '수치심의 세계'는 실로 놀라웠다.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 고결한 분노로 발현될 때 우리는 불복종할 힘을 가지게 된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순수한 분노로 정화된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인 것이다. 저자는 수치심을 다양한 경로로 탐색한다. 그의 고찰이 들려주는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원인(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 수치심에서 비롯된 태도(멸시, 분노, 혐오), 수치심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이유를 비롯하여 야기하는 상황으로 수치심을 분류하여 논하고 있다. 좀 더 수치심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며, 다양한 근거와 예시들로 이해를 돕기 때문에 복잡한 수치심의 면면을 탐구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당연히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지만, 이토록 찬찬히 들여다볼만한 생각과 재능이 없는 나였기에 저자 프레데리크 그로가 보여준 '수치심' 도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 무리 생활을 하는 우리 인간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의식하고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심'은 큰 두려움이자 공포가 되는 것이리라. "헝가리 정신분석학자 임레 헤르만은 매달리는 원초적 본능을 '애착 욕구'의 구체적 지시대상 같은 것으로 가정하고, 단단히 매달릴 의욕을 꺾어놓는, 털의 결핍이 우리 종에 모든 불행(불안, 죄의식, 수치)의 모태가 되는 음험하고 지속적인 불안을 초래했다고 상상했다. 수치심의 번민은 버림받았다는 감정, 무리로부터 허공에 버려졌다는 슬픔,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오고, 끈이 끊기고, 닻이 풀렸다는 감정에서 온다." - 우울 95~96쪽 '수치심'을 다룬 학자들 중 공자와 플라톤이 있다. 그들은 수치심을 관망의 태도, 더불어 살기, 행복 추구를 위한 중요한 윤리적 자질로 받아들였다. 공자는 움츠림, 조심성, 신중함… 이것을 수치심으로 받아들였다. 수치심은 각각의 윤리적 힘을 제 고유의 본질 속에 지켜주며, 실제로 공정하고 공손하고 진지해지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은 "선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은 추한 행동과 연계된 수치심, 그리고 아름다운 행동과 연계된 명예 추구다."라 말했다. 그는 수치심에 많은 힘을 부여한다. 그것이 함께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만들고, 지혜를 요약하고, 용기를 준다고 말한다. 수치심은 구체적 위험 앞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공적 이미지를 변질시킬 수 있을 무엇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란다. ![]() 저자는 윤리적 수치심, 외상성 수치심, 철학적 수치심, 교차적 수치심, 계통적 수치심, 혁명적 수치심 등을 다루고 있다. 성폭행, 강간, 사회적 가난, 흑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이 수치심을 유발하는 배경이 된다. 구분되어 명명되는 수치심에 관한 사유를 읽다 보면 어느새 수치심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가까워진 느낌이다. "분노란 우리를 향한 또는 우리 가족을 향한 공개적 멸시, 부당한 멸시를 마주하고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다." - 아리스토텔레스 ![]() 수치심을 느끼지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의 자리에 서 보게 하거나 가능한 다른 세상들을 고려해 보게 하는 움직임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좌절시키려는 시도들 앞에서 서 있는 우리는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올바른 자가 느끼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수치심을 분노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무구함의 반대는 죄의식이 아니라 '통찰력'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 불의가, 불공정이 어떻게 법과 사법기관과 교회의 지지를 받는지 본다." - 계통적 수치심, 226쪽 프레데리크 그로는 우리에게 '수치심'의 본질적인 힘을 일깨워준다. 그 여정을 함께 하면서 만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감흥 하지 못한 채 덮어버렸던 작품들을 이제는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수치심'을 단순히 부끄러움으로 아는 이들에게 더 넓고 복잡한 '수치심'을 보여준, 놀라운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를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수치심은혁명적감정이다, #프레데리크그로, #책세상, #인디캣책곳간 |
|
그동안 살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언제 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창피함'과 '부끄러움'이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망신을 당했거나 누군가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들었을 때 우리는 주로 수치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꼈을 때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다른 이들에게 비참한 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혼자 감정을 삭였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의 저자인 프레데릭 그로는 수치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부자들이 가져야 할 염치이자 부정한 축제에 대한 권력자들의 창피함이며,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성차별, 인종차별적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인류가 망가뜨리고 있는 지구에 대한 수치심까지 수치심이 생기는 상황은 참으로 다양하다.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수치심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수치의 경험이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는 외상적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억은 "수치심의 특별한 재능"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다가왔는데, 수치의 기억은 그 어떤 기억보다 치밀하고 까다롭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수많은 경험과 그에 따른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오래도록 머무는 기억은 대부분 강렬했던 순간들이다. 모욕적인 장면들은 명확하게 나의 뇌를 잠식하고 그 장면들은 우리 안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슬프게도 근친상간이나 강간과 같은 치명적인 사건으로 인한 수치심의 경우 트라우마로 이어진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두 번째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강론 중에 언급하셨던 "수치심의 은총"에 대한 부분인데 바로 고해성사, 내적 성찰을 말한다. 고해성사 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성찰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양심의 일부인 어두운 굴곡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인데, 이를 두고 수치심을 면하기 위한 회피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어쨌든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상당히 다양한 경우에 발생하는 아주 포괄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부끄러움을 넘어 일명 '쪽팔림'이라고 하는 노골적이고 강렬한 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대로 수치심은 매우 긍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감정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잘못 흘러가는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노는 그것에 무릎 꿇지 않는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된다. 불의를 보고도 내가 피해를 볼까 두려워 비겁하게 눈감아 버리는 세상에 대한 회피보다는 차라리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의 부끄러움을 인정할 줄 아는 정직함과 긍정의 수치심이 만연할 때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 될 수 있다. |
|
‘수치(부끄러움)’란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문맥에 따라 ‘수치’로 번역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다양합니다 - shame, disgrace, humiliation. ‘수치’는 늘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의 탓(잘못)일까요. ‘수치’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한 지성이자 문명화된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수치심’에 관심이 큽니다. “우리에게 불복종할 힘을 주는 것, 나날이 확실히 최악으로 치닫는 세태에 체념하지 않고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프리모 레비의 표현대로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슬픔과 분노의 혼합물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수치심의 ‘형성’과 ‘작동’ 기제에 대해 다각도로 다루는 학술연구서 같습니다. 가독성이 충분히 좋고 흥미롭고 친절한 책이라서 목마를 때 시원한 물마시듯 들이켰습니다. 작고 가볍고 혁명적인 철학서입니다. #강추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가스라이팅 하는 강력한 방법에는 언어를 선점하는 것이 있습니다. 약자이자 피해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덧씌우는 방식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에도 진행 중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바꾸기 위한 방법에는 이런 언어(사유)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공화국을 보장하기 위한 라틴식 질문은 차라리 이러할 것이다. (...) 남성에게는 정의를, 여성에게는 수치심을 안겨라. 그러면 공화국은 탄탄할 것이다.” 새로운 언어(표현)을 만드는 것도 좋고, 이미 존재하는 역사 속에서 잘 살펴서, 근거를 찾아내는 작업도 힘이 됩니다. 수치심이 도덕과 윤리의 중요한 근거이자 동력이 될 거라 생각하는 저는 그런 기제가 있는지 궁금해 하며 읽어보았습니다. “철학은 진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기능도, 어떤 다른 공적 효용성도 갖고 있지 않다.” 작금의 시절은 위선조차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거침없는 태도로 거짓, 기만, 조작, 부정, 부정의, 무원칙, 불법, 무례, 차별, 혐오, 폭력이 천박하게 자행되고 조장되는 위기의 시간입니다. 조심하고 절제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조롱당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세상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끔찍합니다. 돈과 권력과 이익을 위해 못할 것이 없는 사회란 저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통입니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다!” 기대한대로 저자는 ‘수치심’을 소재로 역사를 톺아보고, 개념의 변화를 포착하여 부정적이고 악랄하게 작동된 유형을 찾아 분석합니다. 바로 ‘그 수치심’을 바꾸어야 새롭고 다른 관계와 사회를 만들 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수치심 자체가 동력이 됩니다. “수치심이 혁명적일 수 있는 건 그것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에 속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상상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상상력은 불꽃의 호출에 일어서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그리고, 새로운 정체성들을 지어내고, 연대의식을 창조하고, 격노를 빗는다. 그것은 지형을 다시 그리는 힘, 투사의 힘이다.” 수치심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해서 상세 설명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대상과 상황’, ‘수치심을 촉발한 이유’, ‘수치심이 발현된 형태’에 대해 사회가 내면화시킨 내용이 아닌, 생각과 분석과 대화가 사회에 존재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쏟아 부어서. 범죄의 본질도, 처벌의 합당성도 흐리고 망치는 방식을 이미 많이 보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지가 확대되고 있다고 낙관합니다. 피해자다움과 주의(조심성) 부족, 혹은 ‘생각 없이 놀러 가서 죽었다’는 식의 명백히 악의적인 발화와 언론질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불의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 수많은 사례가 증명하듯, 굴종하면 변화의 여지는 사라집니다. 함께 느끼는 수치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내면화와 강요를 거부하고 밝히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수치심이 강할수록 변화의 동력도 클 것이라 희망합니다. ![]() ![]() |
|
1974년 8월 어느 날 마르세유 작은 만에서 캠핑을 하던 생물학 교수 안느 퉁글레와 육아 전문가 아라셀라 카스텔라노는 세 남자에게 몇 시간 동안 강간당했다. 두 여자는 고소했고 세 남자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됐다. 그 당시엔 강간 당하고 고소할 만한 용기를 가진 여성이 드물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수치심을 짊어져야 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협박을 받을 때 우리는 결코 죽음과 삶 사이에서 "선택" 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응책을 찾고, 전략을 펼치고, 속임수를 쓰고, 결심하고, 체념하지만, 그것이 동의는 아니다. (p. 120)' 남성우월주의적 장치는 두 여성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그 시간에 거기서 뭘 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저항하긴 했는지, 조금은 동의한 건 아닌지.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거부하고 저항했더라도 그건 그저 '지연되고 가장된 동의'라고. 여성도 원해 쾌락을 즐겼을 것이라고. 그래서 죽음으로 대항하지 않은 강간 당한 여성 대부분은 침묵을 선택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 책에서 수치심을 치밀하게 탐색한다. 장자크 루소, 발자크, 조지프 콘래드, 디디에 에리봉, 카뮈, 에밀 졸라, 장 주네, 존 M.구체, 장 라신, 코르네이유, 로스탕 등의 작품과 플라톤, 칸트,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등 철학자의 글을 동원한다. 그로는 우리가 살면서 죄의식보다 수치심을 훨씬 많이 경험하고, 수치심의 강요에 굴복해서 내린 결정이 죄의식에 의한 것보다 훨씬 많음을 알아차린다. 수치심으로 겪게 될 두려움은 영원한 죄의식과 죽음도 삼켜버린다. 수치심은 처벌보다, 범죄보다, 죽음보다도 두렵다. 수치심을 모르는 자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몰염치에 그치지 않고 수치심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기까지 한다. 여성의 성적 순결을 집단의 명예와 결부시켜 금지된 사랑을 한 여성에게 수치심을 전가한다. 디지털 증오를 가해 죽은 후까지도 수치심을 안겨준다. 가난한 사람에게 악하다는, 못생겼다는, 냄새난다는, 가치 없는 존재라는 수치심을 안긴다. 수준을 정해놓고 그 수준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가차 없이 수치를 준다. 집단으로 소수자를 수치스럽게 만들어 편을 가른다. 앞서 예를 들었듯 강간 그리고 근친상간의 희생자들에게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하게 만든다. 안느 퉁글레와 아라셀라 카스텔라노를 강간한 가해자들에게 구타와 상해라는 죄목으로 판결하려는 법정에 지젤 알리미는 맞서 싸웠다. 그 결과 1980년 12월 강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해 광범위하게 범죄 회부를 허용하는 새로운 법률이 가결된다. '안느 퉁글레는 이 사건이 있고 20년이 지나서 이렇게 선언한다. "1978년, 내 강간에 대한 소송이 처음으로 수치심의 진영을 바꿔놓았다." (p. 108)' 수치심은 저항할 능력이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수치심의 반전 명령은 이것이다. '세 가지 중대한 진술이자 시대적 명령도 있다. 마르크스는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라고 썼다. 수치심이 혁명적이려면 그것이 나를 향한 분노여야 한다. 그래야 그 수치심이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나는 하찮은 여자가 아니다. 가련한 남자가 아니다. 나는 경멸 받아야 할 대상도 아니다. 나는 가치 있다. 수치심에서 비롯된 상상력은 나의 정체성을 다시 그리고 만들어낸다. 연대의식을 창조한다. '그리고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다. (p. 247)' |
|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본 리뷰는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철학자가 전하는 변화를 부르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 여러 감정 중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라 궁금한 마음에 읽게 되었다. 더군다나 시선을 잡아끄는 임팩트 있는 제목은 더욱 나의 궁금증을 부채질했는데, 막상 읽어본 책은 생각보다 어렵게 다가왔다. 최근 읽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책들 덕분에 그래도 철학이라는 분야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다시금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살짝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평소 뒤로 감추거나 모른척하기 일쑤인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에 대한 여러 상황에 대입해서 깊이 살펴볼 수 있었던 점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저자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여러 상황에 대입해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 여성, 정치, 철학, 사회 등 수치심이 어떻게 발동되고 이 감정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열하듯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생각의 관념대로 흘러가는 형태라 이해나 공감이 가는 문장에서 급격히 난도가 높은 구간에 다다르기도 한다.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 등의 표현에 있어 조금 난도를 낮춰서 표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학이라고 꼭 어려울 필요는 없잖아!) 이 책은 전체적인 맥락을 담기보다, '수치심'에 대해 열거한 저자의 문장들을 옮겨보려 한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수많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다가오는지, 또 수치심이라는 감정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더불어 평소 내가 느낀 수치심은 어떤 것들이 있고, 타인을 통해 느꼈던 수치심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의 일상에 대입해 보면서, 왜 저자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혁명적 감정'이라고 표현했는지, 이 감정이 내 삶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고민해 보면 좋겠다. ===== "수치심!"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수치심은 막연하고 조밀하며, 견고한 두께를 지녔다. 수치심은 나의 정서와도, 어떤 주관적 평가와도 무관한 객관적인 상태다. 그것은 바윗덩어리처럼 내 위로 떨어진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수치심은 객관적이다. 개인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의 입장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내게 슬픔이 있다면 나의 슬픔은 객관적으로 수치스러운 상황의 산물이고, 효과이고, 결과다. 24페이지 中 ===== 수치심과 죄책감이 다른 건 알겠는데, 명확히 구분 지으려고 하니 애매한 느낌이 들어 찾아보았다.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 ※수치심: 수치를 느끼는 마음. ※수치: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단순히 의미나 뜻으로 구분 지어보려 하니 더 어렵게 느껴진다. 상황에 대입해 봤을 때 실제 의미나 뜻과 다르게 적용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맥락에 따른 의미 해석이 더 적확하게 와닿는 것 같아 스스로 납득이 되는 느낌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수치심은 조건반사적이기에 개인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하는 스스로의 이해와 납득을 해본다. ===== 여성들의 성적 순결이 집단의 명예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치다. 금지된 사랑이라는 실수 한번, 명예롭지 못한 싸움 한 번이면 충분하다. 26페이지 中 ===== '여성+수치'의 조합은 정말 좋지 않다. 전통적으로 여성을 옭아매는 올가미이자, 타인의 명예를 보장하거나 회복시켜주는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 가문의 불명예로 작동하는 이 수치심은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객관적이며, 실체적이며, 집단적이고, 가역적이라는 점이다. 객관적. 수치심은 심리학적 치료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서는 부차적이며, 추락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이 낳는 결과다. 실체적. 수치심은 주관적 느낌, 내적 구축물, 내밀한 감정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들어가고 흐려지는 하나의 실체다. 또한 그것은 실체의 점진적 손상이고, 위신의 붕괴다. 집단적. 이 피와 부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피, 나의 부, 나의 명예가 아니라 씨족의, 집단의, 가문 전체의 것이다. 가역적. 이것은 치욕의 수치심에 고풍스러운 아우라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수치심은 최고의 긍정성인 명예에 대한 부정이다. 복수는 이 부정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해 잃어버린 명예의 복원을 의미한다. 균형을 잡는 비극, 보복 행위, 모욕에 대한 복수를 공개적으로 창출하는 것이 관건이다. 27~30페이지 中 ===== '가문+수치심'을 대입해 보면,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흔한 광경들이 펼쳐진다. 추락은 곧 망함을 의미하므로 불명예를 말하고, 위신이 붕괴되고 손상을 입는 것은 곧 실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다. 가문 그 자체는 개인보다 집단을 형상화하며, 복수는 곧 명예의 회복을 의미한다. ===== 수치심의 얼굴은 달라진다. 덜 씨족적이고 더 부르주아적이며, 덜 비극적이고 더 영리적이며, 덜 의례적이고 더 심리적인 얼굴로... 먼저, 곧 보게 되겠지만, 가난하다는 수치심 혹은 그저 덜 부유하다는 수치심, 명예의 문화 속에서 주변인이라는 수치심이 확장될 것이다. 빈곤은 그리스도의 안개를 후광처럼 부른 운명처럼 체험되는 게 아니라 개인적 실패와 실패한 야심의 기표가 된다. 한편 명예는 변모되어 가족 속으로 이동한다. 이제 그것은 체면, 정상상태로 불릴 것이다. 38~39페이지 中 ===== 시대가 변화고 시간이 변함에 따라 수치심이라는 얼굴은 계속해서 다른 얼굴로 변모한다고 전하며, 경제, 명예 등 현재 개인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가지지 못했는지에 따라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이 된다고 전한다. 어쩌면 현재 우리의 모습 속에서 느끼는 '수치심'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명예 역시 변모되어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흔하게 쓰는 말속에 깃든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 우리는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죽고, 말할까를 자문하느라 삶을 보낸다. 그리고 수준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한다. 누구의 수준, 무엇의 수준인가? 그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 87페이지 中 ===== 사람들은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까' 고민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타인의 그런 시선에 전전긍긍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죽을지를 묻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정작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는데, 우리는 어쩌면 쓸데없는 상상력과 망상에 사로잡혀 없는 수치심을 만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수치심에서 비롯된 두 가지 태도> 바로 (수직적인) 멸시와 (고결한) 분노다. 그리고 세 번째 태도가 있다. 극복할 수 없는 혐오다. 비참하고, 비열하고, 불결해지거나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수치심이다. 88페이지 中 ===== 어쩌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치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감정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 수치심의 세 가지 큰 영역(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은 내게 화상 같은 상처를 입히고, 굴욕으로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 수치를 겪는다는 건 땅이 꺼지는 듯한 추락의 경험이다. 소심한 이는 당황해서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다. 땅이 꺼진다는 느낌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그는 무리에 달라붙어 있었고, 스스로 사회라는 나무의 한 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매달릴 데가 없어진 것이다. 반면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적 혐오, 사회적 멸시, 정신적 분노는 스스로 "다수"라고 여기는 무리를 하나로 끌어모으는 다양한 방식이라고. 90~91페이지 中 ===== 통상적인 '수치심'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앞선 부분에 서술된 내용은 소히 당하는 입장에서의 수치심에 대해 서술한 장면으로 이때 느끼는 무력감과 공허함에 대해 실감 나게 담고 있다. 반면, 후반부에 서술된 내용은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문장으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자 수치심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수치심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정서로서 수치심은 언제나 붙들고, 유지하고, 멈춰 세우고, 억제한다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편의와 상스러움과 배덕의 문턱에서 타인들에 대한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자제하는 윤리적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을 뿜는 날것 그대로의 잔인한 빛에 붙들리고 노출된 포로처럼 느껴져, 그저 사라져서 땅속으로 꺼지기를 바라는 뜨거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불공정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세상에 대한 저항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다. · · · · · 보통,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면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떠올라 회피하기 바쁜데, 이렇게 깊이 있게 들여다보니,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수치심을 느끼기에 멈출 수 있고, 상상력을 발휘해 윤리적으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경험을 통해 인생 경험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리석은 세상에 대해 강한 저항심으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혁명적 감정'이라고 표현했나 보다. 단순하게 한쪽으로 몰아넣고 부정적인 것,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이렇게 툭 터놓고 다방면에서 살펴보니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어떤 것이든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