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금고' 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내가 행복한 이유' 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단편이 많아서 그런지 소재와 가정을 공유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행복한 이유' 시즌 2인가? 라고 생각하며 독서를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결이 다른 작품들이 많았다. 뛰어난 독자분들이 이미 올려주신 리뷰와 소개글이 있으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보다는 그렉 이건이 품고 있는(던) 생각, 그리고 그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한번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저자의 동의를 전혀 받은 적도 구한 적도 없다. 100% 틀렸을 수도 있음을 알려 드린다.)'내가 행복한 이유'를 읽으며 그렉 이건의 번뜩임에 매순간 놀랐지만 동시에 의아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많은 단편들이 그가 '의식체' 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내가 되는 법 배우기' 에 나오는 '보석'이 정확히 그 역할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이유'에서 단순 파라미터를 바꾸는 행위를 통해 '나'의 행동과 감정이 달라진다는 것은 나의 자아나 의식, 더욱 나아가서는 '나'가 그저 데이터의 집합체로서 존재하고, 그것만 보존하거나 관리하면 조내의 유지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나의 의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나의 박스나 데이터의 집합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이 있었고 그렉 이건은 전작을 통해 내가 불편해 하는 부분을 거침없이 짓밟고 지나갔다. 하지만 '대여금고'는 조금 달랐다.
'대여금고'를 읽고 나름의 기준으로 단편들을 분류해보았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읽은지 꽤 지났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는 단편만 분류하였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단편은 기억이 나지 않거나 '의식'을 다루지 않는 소재가 다른 단편으로 간주하였다. (재독할 만큼 부지런하진 않아서..)
 '대여금고'는 타이틀 작품이지만 그의 다른 글과는 결이 많이 다른데, 그렉 이건이 아니라 오히려 스티븐 킹이 쓴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나의 급진적인 아이디어 위로 줄기가 뻗쳐가지만 왜 그런 것인지는 설명은 하지 않는다. 유독 설명충이 많은 그렉 이건의 소설에서 유별나게도 '왜' 에 대한 부분이 없다. (아예 없진 않지만.) 어떤 연유가 되었든 '나'라는 존재는 여러 육신을 경유하면서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연속성을 인지하고 있다.
'유진'은 고도로 발달한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두 인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확신을 가지고 현재에 영향을 주는 이야기이다. 즉 부부의 눈앞에 실체화된 '유진'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렉 이건은 미래 실제로 태어날 '유진'과 시뮬레이션 된 '유진'이 동일한 존재, 동일한 생각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동일한 개체)을 한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행몽'을 읽어보면 여기서는 데이비드 흄의 '다발론'에 가까운 입장임을 알 수 있다. 1초전과 동일한 '나'는 그 어디에도 없고, 데이터로 재구성된 나는, 저장매체 안에서도 0과1이 끊임없지 변화하는 물리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스티브 피버' 에 다다르면 스티브의 정수가 되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노 로봇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무한의 실험을 진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맥락을 읽게되면 워낙 변수와 상수가 많기에 결국 그곳에 닿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끝남을 알 수 있다. 종교적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의 인간, 의식은 어떤 방식의 복사나 시뮬레이션을 통하든 원본과 100% 동일한 것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책을 읽으며 더더욱 그렉 이건이 대단한 인간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철학부터 수학, 양자역학, 블랙홀까지 모르는게 없는데다 의식을 어떻게 정의해야하는지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딜레마, 윤리 문제의 선을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동시에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0년도 전에 쓰여진 글이 2024년을 사는 나와 우리에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그와 함꼐 한다는 것은 기쁘고 경이로운 것이다. 그의 나머지 작품집들이 한국에 소개되기를, 그저 아는 척하는 나를 놀라게 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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