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엽은 흔히들 김소월의 감성과 이육사의 지사적 투혼을 겸비한 시인이라고 한다. 내가 처음 신동엽을 읽었던 80년대에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지만 요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껍데기는 가라>등이 실려 있는 것으로 안다. 김수영이 제일 아끼던 후배 시인.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뇌를 누구보다 괴로워했던 민족시인. 그것으로 신동엽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동엽의 전집 처음에 나오는 <진달래 산천>을 직접 읽어 보라. 7천만 겨레의 세월의 깊은 주름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산문 역시 감상할 수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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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시는 몇 가지 읽어 봤습니다. 교과서에서 실린 것 들과 시인을 찾아서에 나온 몇 편이지만 그를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 우리 역사와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시인. 그리고 무엇보다 시를 참 쉽게 써서 난해하지 않다는 것이 특히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화려한 수식이 없지만 누구의 시 보다도 아름다운 시들이더군요 하나같이 제가 감정이 매마른 편이라 슬픈 영화를 보고도 안 우는 편인데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을 읽었더니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지고 가슴에 응어리 같은게 맺히더군요.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렇듯 신동엽 시인의 시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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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9재를 마치고 이윽고 이승을 떠나신 노무현 대통령님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詩는 아마도 요절하지 않았다면 우리 문단의 큰 별이 되었음이 분명한 시인의 미래를 내다보는 작품입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신동엽 시인처럼 장대하고 원대한, 멀고 깊은 詩를 쓰는 시인은 없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수영의 詩조차도 신동엽 시인의 이 넓고 광활한 눈은 따르지 못합니다.
1968년에 등재된 이 詩는 나중에 미발표 유고들이 발견되면서 그 이전, 1959년에 산문의 형태로 씌어져 있음을 알게됩니다. 저는 다행히도 그 유고집이 출간될 때 그 책을 만났습니다. 아래는 이 詩의 원전에 해당하는 산문입니다.
참으로 신동엽 시인의 생각은 넓고 광활한 대륙의 그것입니다. 평생을 반도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그 넓이와 깊이에 오늘 다시 만난 글만으로도 저까지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님을 떠올립니다. 다시 급..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에게도 다시 노무현 대통령같은, 이 詩의 주인공 같은 그런 대통령이 다가오겠지요. 그때는 다시는 놓치지 않을겁니다.
어느새 49일, 시간은 참 허무하게도 흘러갑니다. 이러다가 어느새 이 아픔조차도 잊혀지겠지요. 이제는 그 잊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남은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가신 님의 발자취를 따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가는 것이겠지요.
오늘밤같은 날 모두 함께 부르라고 신동엽 시인은 절창 한 편을 우리에게 또 남겨두었습니다. 역시 시인의 눈은 앞날을 바라보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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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이미 내 세기에 있어서 4·19는 흘러간 역사이다. 흘러갔지만, 영원히 묻히지 않을 4·19는 한국 현대사를 기록한 역사책의 중요한 한 장으로, 텔레비전의 흑백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숨가쁜 달리기를 멈추고서 가끔씩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사람이 살아가듯 도저한 역사의 흐름은 가끔 그 버거운 걸음을 멈추고서 저 먼 과거의 어느 시점, 동학 혁명과 4·19혁명과 광주 민중항쟁을 아스라히 돌아볼 것이다. 역사 스스로가 그러하고, 그 역사를 살아내는 사람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어떤 통로로,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바라본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느냐'일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목소리를 울리며 이 세상의 변화를 끌어갈 수 있느냐일 것이다. 시인 신동엽은 바로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던 시인이었다. 그 한가운데라 함은, 극악무도한 독재와 억압을 뒤집어쓴 화려찬란한 정권의 정점도 아니요, 권모술수와 부패와 등쳐먹기로 일관된 자본의 정점도 아닌 바로 문학으로서의 정점, 시인으로서의 역사의 한가운데인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는 무엇일까. 문학에 있어서 세상의 변화에 제 목소리를 울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 방법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방법이되 아주 효과적면서도 울림이 크고 때로는 절실하기까지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며 인간관의 문제이다. 그렇다. 시인 신동엽의 이데올로기는 곧 지고지순한 시의 세계와 밀접히 연관지어진 것이었다. 금강이, 우금치 마루가, 외세에 항거한 모든 동포가, 민중개개인의 생명력이, 그리고 그것을 크게 이름한 민족이라는, 살아 꿈틀거리는 거대한 생명체가 바로 신동엽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다. 시인 신동엽에게 있어 인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도 존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학이란 도대체 말도 안되는 짓거리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하는 시인이었고, 노동을 통해 제 생명을 살리는 길을 아는 시인이었고 또 역사에서 한치도 비껴설 수 없는 '역사적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시인 신동엽의 시들은, 그래서 더더욱 훌륭하다. 신동엽의 시들은 시 내부의 완성도와 더불어 시인으로서의 당당한 이데올로기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가히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과연, 신동엽 시인이 자신의 시를 온몸으로 불러일으켰던 그것, 온몸의 정성스러운 떨림으로 말하려 했던 그것, 그것을 감히 진정성이라 이야기해도 될는지, 내가 시인 신동엽의 시와 몸 한덩어리에서 받은 감동을 진정성이라 이야기해도 옳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