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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값을 청구해야겠다 김태실 코드미디어/2024.2.29. sanbaram
밤이 결린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늦은 시간 지하철 객실에는 선 사람 하나 없이 모두 앉았다 꼿꼿하던 오른쪽 젊은 남자 바람에 밀리는 갈대같이 머리에 머리를 기대 온다 그의 품에 안긴 알 수 없는 사각 통 옆구리를 찌르고 흠칫, 바로 앉았다 다시 기울기를 반복한다 얼마나 피곤하면 이럴까 하는 생각에 가만히 지지대가 되어 주는데 흠칫거림도 없는 무게감에 밤이 결린다 덜컹이는 소리 따라 눌리는 옆구리
밤은 깊어 가는데
꺽어지는 허리 바로 세우며 걸어온 날들 새어 나오던 한숨도 순간 밤이 지나간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늦은 밤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피로에 지친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한 시다. 젊은이는 바쁜 하루를 보내며 지쳐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몸이 자꾸만 옆으로 쓰러져 남에게 기대게 되고, 그런 젊은이가 안쓰러워 차마 깨우지 못하고 힘들게 어깨를 내어 주는 나이든 시인은 힘들었던 젊은 시절의 추억에 잠긴다.
꽃잎 주의보
꽃이 올라온다 태풍보다 빠르게 더 빠르게 덩달아 집을 때려부순다 깨어지는 것은 집이 아닌 얼굴들 얼굴에 숨겨있던 웃음이 깨어져 나온다 죽은 듯 잠잠하다 꼭 이때쯤 세상을 들쑤셔대는 저 바람의 의미 허리케인, 사이클론, 윌리윌리보다도 무섭게 사정없이 흩뿌리며 마음을 빼앗는다 앞집 K는 날아가는 마음을 붙잡느라 애를 썼고 옆집 Y는 트렁크에 짐을 싣고 한적한 바닷가로 피신했다 길을 걷다보면 어느 틈에 달려와 머리에, 가슴에 얼굴에 입을 맞춘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다스리지 못하고 봄 속에 들어앉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도 있다 꽃 진 자리에 잎 봉긋 돋으면 헤매던 길에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람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대지가 녹으며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봄바람이 불면, 사람들 마음은 들뜨게 된다. 어디든 여행을 떠나거나 콧바람이라도 쐬어야 한다. 이런 설레임도 계절이 바뀌어 초록의 세상이 되면 마음도 서서히 제 자리를 잡는다. 봄꽃 소식이 전해지는 요즘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눈물 값을 청구해야겠다
오늘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 나의 지금은 미국 플로리다 열네 시간 전 한 달에 두세 번 울리는 전화선을 통해 여인의 눈물을 본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열 살 아이 전쟁의 참혹함을 작은 몸으로 맞부딪쳐야 했던 공포 그 참상 되살아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우는 언니 태평양 건너 미국 생활 40년을 넘긴 그녀의 가슴 아픈 눈물 여든이 넘은 과거가 현재로 달려와 파열음을 낸다
게임처럼 밀당하며 유럽의 빵 바구니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에게 눈물 값을 청구해야 겠다 21세기 전범의 딱지를 붙이고 실록에 올라 천 년을 갈 그에게 남은 생을 계산하는 방법을 알려 줘야겠다
*70여 년 전 한국전쟁의 혼란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열 살의 어린아이가 이제는 80을 넘겼다. 전쟁의 공포에 물들었던 조국을 떠나 40여 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아직도 어릴적 기억을 잊지 못하는 언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으로 어렸을 때의 공포를 떠올린다. 휴대폰 화면 속 나이 든 언니를 보며 전쟁의 주역인 푸틴에게 눈물 값을 청구해야 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한 편의 시로 탄생했다.
절반의 그녀
어제오늘이 없고 아침과 밤이 없는 그 여자와 나만 있는 방
가끔 몸에 빠져나온 그녀는 어릴 적 살던 집으로 떠나고 들개처럼 뛰놀던 들판을 달리며 기억을 배회하다 그 속에 머물러 배설한 찰흙을 가지고 논다 뽀얀 연기 피어올라 방을 가득 채운 창문으로 뛰쳐나가는 냄새들
진흙탕 속 여자를 건져 맑은 물에 씻긴다 아흔다섯 해를 지켜온 주름투성이 목숨의 집 닦고 헹궈 뽀송한 기저귀를 채우면 그제야 돌아오는 그녀
땀인지 눈물인지 흠뻑 젖은 나에게 웬 땀을 그렇게 흘리니, 목욕해라 세상 따듯한 엄마 목소리
한 시간은 낯모르는 아기 한 시간은 엄마 절반의 그녀가 있어 살아가는 반쪽짜리 행복한 바보
*아흔 다섯 나이로 치매를 앓고 있는 언니와 둘이 하루를 보내며 쓴 시다. 어렸을 때는 언니가 엄마처럼 모든 것을 다 해주었지만 이제는 대소변도 못 가린다. 정신도 온전치 못해 자기의 배설물을 찰흙 삼아 주무르는 언니를 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언니의 정신은 과거 어렸을 때의 고향에서 논밭을 뛰놀던 시절로 돌아갔다가도, 제정신이 돌아오면 땀을 많이 흘린다며 목욕하라는 언니는 반쪽짜리 행복한 바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생의 애증을 함께했던 추억이 현실을 만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시는 만물을 상상력으로 사랑스럽게 변형시키며, 시인의 삶과 정서를 나타내는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 속에는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게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예민하고 다양한 상상력을 갖고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볼 때 따뜻한 시가 탄생한다. 세상과 삶에 대한 애정을 다양하게 담아 6부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는 <눈물 값을 청구해야 겠다>의 저자인 시인 김태실은, 2004년 <한국문인> 수필 부문으로 등단 하였으며, 2010년 <문파문학> 시 부문으로 등단 하였다. 제3회 동남문학상, 제8회 한국문인상, 제7회 월간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 <눈물 값을 청구해야 겠다>, <시간의 얼굴>, <그가 거기에>와, 수필집 <밀랍인형>, <기억의 숲>, <이 남자>, <그가 말하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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