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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시는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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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도시재개발이란 낯익은 단어이다. 그리고 그런 재개발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끝없이 주변부를 향하고, 도심은 도심대로 새로운 개발계획에 의해 재편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개발에 주민이나 시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책입안자가 결정하고, 그 이후에는 대형 건설회사들이 온갖 청사진을 내걸고 사업에 착수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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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도시재개발이란 낯익은 단어이다. 그리고 그런 재개발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끝없이 주변부를 향하고, 도심은 도심대로 새로운 개발계획에 의해 재편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개발에 주민이나 시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책입안자가 결정하고, 그 이후에는 대형 건설회사들이 온갖 청사진을 내걸고 사업에 착수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달동네 철거작업에서부터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자본은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구는 도시에서 생활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도시화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도시공간 형성에 필요한 잉여생산물을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생산되는 잉여생산물을 흡수할 도시공간의 형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도시의 형성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이 쉬지 않고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흡수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이자 공간인 셈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처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잉여생산물과 도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 [반란의 도시]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가 자본에 의해 사유화된 도시와, 그에 따라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한 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과 자본은 도시개조사업을 통하여 잉여생산물을 흡수하고 과잉자본을 처리해 왔다. 이처럼 과잉자본 흡수를 통한 도시공간의 형성은 지리적 규모로 끊임없이 확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도시 대중의 권리는 모두 박탈당하였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도시개발 붐은 새로운 금융기관과 금융제도를 구축하여 신용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유지되었음을, 우리는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같은 주택담보대출로 야기된 금융위기를 통하여 깨닫기도 했다. 이러한 도시형성의 급격한 확산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변화시켰으며, 마침내 극심한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신자유주의 윤리가, 인격을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규범으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생산된 잉여의 일부는 세금으로 징수되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는 잉여관리를 민영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거대한 자본의 축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의 변화를 통한 잉여의 흡수나, 창조적 파괴를 통한 도시의 재편은, 계급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소외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극심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도시공간의 형성은 자본주의 역사 내내 과잉자본과 노동을 처리하는 주요수단 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대에 들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는 특효약을 도시문제에 처방하는 것이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법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시를 개발업자와 투기적 금융업자 손에 넘겨주면 결국에는 모두에게 이익이 될 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생한 금융위기는 대부분이 부동산개발이나 도시개발이 그 도화선 구실을 했다. 그것들은 투자가 아니라 명백한 투기이며, 대부분의 도시인들에 대한 약탈이기도 했다.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면 자본은 다양한 수법으로 약탈하는, 즉 자본가계급이 약탈에 의한 축적을 실현하는 무대가 바로 도시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러한 약탈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소외된 자들은 도시주변부를 끊임없이 추방되었고, 이것이 자본주의 도시화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도시를 어느 특정한 계급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공유재라고 말한다. 공유재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 하지만, 자본은 이러한 도시공간을 사유화하고 전유하려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적소유권이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교환 제도를 통해서 사회 속에 자리잡을 때, 공동이익이 극대화 된다는 주장으로 사적소유권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이것은 도시공간 내에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수에 의해 전유되고, 사유화된 도시 공간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저자는 국가가 공급하는 공공재가 감소하거나, 도시공간이 일개 자본의 사적 축적수단으로 변질된다면, 가능한 대응방법의 하나는 자본가 권력에 저항하고, 반자본주의 이행의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를 향해서는 공공목적에 부합하게 공간을 공급하라는 공세를, 그리고 주민 스스로는 조직화에 힘써 공유재의 질을 확대하고, 높이는 방향으로 공공재를 영유하고, 이용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의 공간과 공공재를 공동의 목적을 위해 영유하려는 투쟁은 지금도 세계각지에서 진행 중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것이 곧 반자본주의 이행의 정치를 향한 투쟁이라고 한다. 생산에서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 즉 노동의 잉여가치의 생산과 자본의 잉여가치 영유를 가능케 하는 관계를 철폐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금융권력과 특권계급이 자본축적을 위해 99퍼센트에게 착취와 약탈을 일삼고 있는 도시공간에서, 도시 생산자들은 도시권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7년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저술에서, 도시권은 애타는 호소인 동시에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한다. 도시권은 도시의 일상생활이, 자본의 사적 축적에 따라 파괴되는 위기에서 비롯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이자, 이 위기를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도시권 사상은 거리에서, 지역사회에서 형성되었으며, 억압을 당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의 도와달라는 절규인 동시에 생계유지를 위한 요구인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도시권을 재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도시권은 이미 존재하는 권리가 아니라, 도시를 재건설하고, 재창조하는 권리로 해석하여야 하며, 그것은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조절하고, 파멸적 환경악화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도시를 건설할 권리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도시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도시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연대를 말하고 있다. 노동자중심 투쟁은 주변 민중세력이 지역사회와 공동체차원에서 결집해 강력하고 활기차게 지원할 때, 그 성공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노동이라는 개념을 공업적 형태의 노동에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이라는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반자본주의 투쟁을 위해 도시를 되찾고 조직하는 것이 위대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몇 년전에 일어난 용산참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본이 도시공간의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주민의 생산을 약탈하여 사적 자본을 축적하려 한데서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아직도 우리의 도시 곳곳에서는 시장의 논리로 약탈이 행해지고 있다. 저자는 도시를 우리 마음속 바램에 가깝게 바꿔나가고 재창조할 권리는 소수의 개인적인 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집단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도시는 어떤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전에 안녕들 하십니까?>란 대자보가 우리 모두의 주의를 끈 적이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에서도시는 누구의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제 우리는우리의 도시는 안녕한가?>라고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저자의 말마냥 도시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k*****1 2014.08.28. 신고 공감 1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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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심의 '도시권' 반란을 꿈꾸다 《반란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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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으로 선정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을 때였다.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였고 세월호에 대한 한병철의 진단이 궁금하기도 하여 관심있게 기사를 읽었다. 한병철은 ‘세월호 살인자는 선장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기사를 통해 신자유주의 정책이 빚어낸 세 가지(규제 완화, 국가기관 민영화, 노동유연화)를 지적한다. 첫째, 이명박 정부가 집중했던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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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으로 선정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을 때였다.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였고 세월호에 대한 한병철의 진단이 궁금하기도 하여 관심있게 기사를 읽었다. 한병철은 세월호 살인자는 선장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기사를 통해 신자유주의 정책이 빚어낸 세 가지(규제 완화, 국가기관 민영화, 노동유연화)를 지적한다.

첫째, 이명박 정부가 집중했던 신자유주의적인 규제 완화 선상으로 인하여 20년 선박의 생명이 30년으로 연장되었다. 비용을 낮추고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는 미명하에 낙선 직전에 있었던 18년 된 배의 수입은 이렇게 신자유주의 교리에 의한 것이었다,

둘째, 신자유주의에 이어 두 번째 지적한 것은 국가기관의 사유화이다. 해양사고 구조업무가 부분적으로 사유화되면서 불거진 구조문제는 바로 공유재의 사유화에 기인한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치 민영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언딘해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셋째, 세월호 승무원들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점이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많다는 것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덜하다는 것을 뜻하고 결국 이러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것이다.

 

, 그럼 위의 문제가 세월호에 국한 된 문제인지 한번 짚어보자.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한 위의 세 가지를 세월호가 아닌, ‘도시라고 바꾸어 생각해보면, 답은 더욱 간단명료해진다.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하비는 《반란의 도시》에서 전통도시에서 신자유주의 도시로 모멘텀이 되는 세 가지를 세계 유수의 도시역사를 통해 비슷한 주장을 한다. 하비 역시도 신자유주의의 교리인  1,비용을 낮추고 효율적인 운영. 2, 국가기관의 사유화. 3,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한다. 하비는 현재의 도시를 자본이 사회적, 환경적,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신경 쓰지 않고 도시의 성장을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전통적 도시는 자본의 과잉축적을 처리하려는 한없는 욕구의 희생물이라고 지적하며,  미친 듯 날뛰며 글로벌화되고 도시화하는 자본의 역겨운 혼란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유형의 도시를 상상하고 재구성해야 할 때라고 한다.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면 바로 이러한 도시에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목이 반란의 도시이다. 신자유주의 위에 세워진 도시는 사상누각위에 세워진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적 도시를 만들 것인가 

 

저자는 과거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휩쓴 결과 부유한 엘리트는 권력을 되찾았다(p44) 라고 하며 부와 권력의 분배가 양극화된 모습의 공간 형태가 도시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한다. 저자는 국가는 생산된 잉여의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하고 신자유주의에서는 화폐권력과 국가기구를 동원해 도시 형성과정에서 잉여가 자본과 상층계급에게 유리하게 분배되도록 하기 위해서 잉여 관리를 민영화함으로 국가 이익과 기업이익을 통합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시스템의 도시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 자체가 개혁되어 민중의 민주적 관리 아래에 놓여야만 국가가 관리하는 잉여의 비율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은 다양한 방식의 도시화 과정을 관통하며 재생산된다. 이런 자본의 도시화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이 도시 형성 과정을 지배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본의 도시화가 빚어낸 민영화, 공유재의 사유화, 공간 통제, 치안유지 및 감시의 물결은  도시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대도시는 공동적인 것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동적인 것을 반자본주의적 비판과 정치적 행동주의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기에 하비는 신자유주의라는 사상누각위에 세워진 도시의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도시 공유재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도시 공간 형성을 통해 공공재와 도시 공유재가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영유되기 때문에  공동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집단적 노동자의 힘을 이용하는 창조적 방법을 찾아내어야 하며 가치 생산의 주체인 집단적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자신들 관리 아래에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위의 세월호 살인자는 선장 아닌 신자유주의라 하였던 한병철의 지적처럼 규제 완화, 국가기관 민영화, 노동유연화는 자본주의적 도시화로 대표되는 파괴의 홍수를 불러왔다. 이러한 피해를 억제하고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잉여의 생산과 분배를 사회화하고 누구에게나 개방된 새로운 공동의 부를 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비는 도시 공유재를 위해 투쟁해야 하며 공공심의 회복을 위해 도시로부터 반란을 시작하여야 한다고 한다. 신자유주의는 위험하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는 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개념의 고안자인 경제학자 알렉산더 뤼스토우가 '사회를 시장에 내맡기면 사회는 더 비인간적이고, 더 마비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와의 연대와 인간성을 재생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공공심이다. 하비는 신자유주의라는 사상누각이 아닌 현재의 자본주의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공공심의 '도시권'반란을 꿈꾼다. 그 꿈에 편승하는 자라면 언제든지 이 책을 읽어도 좋으리.



YES마니아 : 플래티넘 k********2 2014.05.16. 신고 공감 6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도시, 그 새로운 집합적 상징자본의 새로운 창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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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한계'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국의 공간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는 그런 그가 2012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1982년에 나온 '자본의 한계'는 그동안 마르크스주의가 중시하지 않았던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발굴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접합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건 1971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세미나로 읽기 시작하여 무려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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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의 한계'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국의 공간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는 그런 그가 2012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1982년에 나온 '자본의 한계'는 그동안 마르크스주의가 중시하지 않았던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발굴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접합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건 1971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세미나로 읽기 시작하여 무려 10년간 '자본론'을 연구한 끝에 나온 결실이었다.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았던 공간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새로이 구성했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어려웠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지만 사실 가장 읽히지 않는 그의 대표작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종의 신념처럼 '자본의 한계'에 투영했던 입장을 내내 관철시켰다. 그런 그에게 있어 도시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의 한계'에 뒤이어 1985년에는 '자본의 도시화'와 '의식과 도시경험'을 내놓았고 결국 그 결정체로서 19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도시의 정치경제학'을 내놓았다. 도시에 관한 그의 책은 2000년에 나온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근대의 핵심이자 파리 혁명을 통한 저항의 도시였던 파리가 어떻게 그 후 반저항의 도시로 탈바꿈하는지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정치경제학적 동인을 파헤쳤던 책이었다. 더구나 그 '파리'는 데이비드 하비 자신에게도 아주 의미있는 곳으로 그가 지금처럼 평생을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파리에서 일어난 '68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론에 머무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실천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원했으며 그가 해 온 모든 이론 작업은 결국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란의 도시'는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온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바탕을 둔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집약적으로 들어간 가운데 보다 약탈적이 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저항의 동맥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방향은 처음부터 제시되고 있다. 바로 역시 68혁명을 계기로 앙리 르페브르에 의해 제기된 '도시권'을 되살리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도시권이 애타는 호소인 동시에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도시권은 도시 일상 생활이 쇠퇴하는 위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였다. 또 도시권은 이 위기를 똑똑히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였다.(p. 9)


 이러한 도시권은 단순히 말하자면 내가 살고 싶은 환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에 행사하는 권력, 즉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만들고 뜯어고치는 방법을 지배하는 권력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p. 28)


 사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정작 우리가 거주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다. 소수의 입안자들이 선을 긋고 중장비를 가져와 파내기 시작하면 그러나 보다 생각하기 일 쑤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걸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여기에 도시인들이 개입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도시라는 공간의 그 어떤 배치든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잉여 가치가 사회적, 지리적으로 집적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언제나 일종의 계급 현상이었다. 잉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추출되건 그것을 사용할 권한은 소수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다.(p. 28)


 그러므로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소수의 손아귀에만 주어진 작업에 대중들 스스로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착취의 선들을 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왜 도시화는 언제나 소수 자본가의 착취와 약탈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는 압박에 놓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필연적인 법칙인 '이윤율 저하 경향' 때문이다. 생산의 지속과 확장은 이윤율을 자꾸만 떨어뜨린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결국 공황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너무 생산물이 많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그건 바로 잉여 생산물들을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본가들에겐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잉여 생산물을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도시 공간 형성에는 대규모의 재화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단번에 잉여 생산물을 써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가 진전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 모두가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는 그 실제 사례로써 프랑스 제2 제정기 당시에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재개발했던 것과 1942년 미국에서 로버트 모제스가 오스만에 영감 받아 뉴욕 주변에 대규모의 거주 공간을 마련했던 것을 든다. 오스만이 당시 파리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하기 위해 파리를 근대적 도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면 모제스는 뉴욕이라는 도시만이 아닌 그 외곽까지 포함하는 대도시권 전체의 재개발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모제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대규모의 도시 기반시설로 당시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했는데 이러한 뉴욕의 재개발은 이후 모든 나라의 도시 재개발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도시화란 다름아닌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할 수 밖에 없는 잉여 생산물의 흡수를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언제까지나 여기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시화에도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국엔 공황으로 이어지듯이 이런 식의 도시 공간 형성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투기로 변질된다. 의제자본 때문이다. 의제자본은 실제 자본은 아닌데 자본으로 의제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란 어디까지나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통해 얻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은 획득물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자다. 이자는 어디까지나 돈이 돈을 낳는 것으로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의제자본'이라 한다. 자본이 아닌데 자본인 척 행동하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말에 반감이 든다. 이자도 결국 자본이 생산한, 그렇게 자본이 아닌가? 우리는 이걸 당연히 돈의 생산물로 간주하지만 사실 이자는 중세까지만 해도 죄악시 될 정도로 이유없이 뜯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빌려준 돈이 새끼를 쳐서 그 이자까지 갚아야 한다는 건 유태인말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노동을 매개해서만 인정되었다. 따라서 이자에 대한 지금의 관념이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의제자본이 바로 그렇다. 의제자본은 주로 생산된 것이 또 한 번 만들어낸 2차적 생산물로 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순환하기 위해 발라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자를 생각하듯이 거기에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어떤 생산적인 활동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의제자본을 물신적 구축물이라 부른다. 외면만 보게 만들어 그것을 창출한 실제 사회적 관계는 은폐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은폐된 사회적 관계는 뭘까? 그게 바로 착취다. 혹은 약탈이다. 의제자본은 잉여가치의 이차적 형태다. 따라서 유통이나 금융 부문도 의제자본이다.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제자본들은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으므로 실제 가치 이상으로 무한히 증가될 수 있다. 서로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쪽 은행이 다른 쪽 은행에서 돈을 빌려 그 돈을 그대로 그 은행에게 빌려준다. 실제 돈은 그대로이지만 양쪽에서 카운트 되는 자산은 두 배로 늘어나 있다.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도시 공간 형성은 바로 이 의제자본들이 마구 흘러드는 과정이다. 의제자본이 의제자본을 낳는다. 결국 투기 붐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부동산 거품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거품과 그 붕괴 현상은 특이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도시에 있어서 상수인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는 모조리 보다 덜 가진 쪽에 훨씬 더 가중된다. 도시화는 어디까지나 잉여 생산물 흡수를 통한 계급 착취의 과정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용산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도시권의 획득을 통해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도시는 모두 같이 살아가는 영역이므로 결국 도시권을 요구함은 공유재를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난다.


 공공 공간 및 공공재의 생산과 접근을 누가, 어떻게, 누구의 이익을 위해 규제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늘 투쟁이 벌어진다. 도시의 공공 공간과 공공재를 공동의 목적을 위해 영유하려는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p. 137)


 그런데 데이비드 하비는 이 공유재를 단순히 재화로 해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그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관계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사실 공유재를 만드는 사회적 실천이 존재한다. 이 실천은 특정 사회 집단만 배타적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사회 구성원 전부가 부분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이용하는 공유재와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확립한다. 공유재를 만드는 실천의 핵심에는 사회집단과 환경의 공유재적 측면 사이의 관계는 집단적이고 비상품적이어야 한다는, 즉 시장교환과 시장평가의 논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p. 138)


 이런 도시의 경관이 대표적인 공유재다.

 

 유명한 그리스의 산토리니다. 집 하나하나는 저다마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집단적으로 연출한 이 경관은 공유재다. 그게 너무도 멋져서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한다는 말까지 듣는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 집단은 각각의 일상적 활동과 투쟁을 위해 도시라는 사회적 세계를 창조하고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거주 가능한 하나의 틀로 공유재를 만들어낸다. 이 문화적으로 창출된 공유재는 아무리 사용해도 파괴당하거나 하지 않지만 과도하게 남용되면 질이 떨어지고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다.(p. 139)


 사람들이 산토리니로 가는 건 다른 어디에서도 산토리니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그걸 '독점지대'라고 말한다. 다른 어디에도 없어서 그 독특함과 희소성으로 가치를 가지는 공간을 일컫는다. 그 반대엔 '디즈니화'된 공간이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다. 독점지대는 이러한 공유재가 얼마든지 재화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산토리니의 매력 때문에 많은 관광업자들이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공유재를 어떻게 창조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헤이온와이'처럼 독점지대로 이윤을 창출할수도 있고 '디즈니화'되어 그렇고 그런 공간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하비가 이렇게 공유재와 그것을 통한 독점지대의 창출을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시권을 이 시대에 걸맞는 인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의 인권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되어왔다. 자유가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소유권을 바탕으로 했듯이 말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제 인권의 개념이 그 개인의 소유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공공으로서의 인권의 대표로서 '도시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권'이 그저 가설의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충분히 형성 가능한 인권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공유재로서의 도시'와 그 '독점지대'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의 지자체들은 이 독점지대를 가지기 위해 발버둥이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관광산업 때문에 더욱 불타오르고 있다. 이제 공간은 집합적 상징자본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갈수록 막중한 역할을 한다.


 집합적 상징자본의 힘, 즉 어떤 장소에 특별한 차별성을 부여하는 행동이 갖는 힘이다.(p. 184)


 이는 도시 거주민의 집단적 실천이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들의 노동으로 인한 것이므로 진정한 자본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독점지대를 왜 강조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착취와 약탈을 수반하는 의제자본으로 넘쳐나는 도시화를 막는 길이기 때문이다. 도시권은 바로 그러한 집합적 상징자본을 만들어내는 참여이며 그 참여를 통해 그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만의 독점지대를 만드는 가치의 창출이다. 또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장 교환을 배제하므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즉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권의 요구와 그러한 도시에의 전면적 참여가 결국 반자본주의 운동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 그 둘은 꼭 함께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 정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흐름에서 데이비드 하비는 어떤 도시에서 시민들이 보다 나은 삶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위해 참여하고 투쟁하면 자연적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리라 보고 있다. 더우기 거기에 대한 실제 사례까지 존재한다. 바로 2000년 볼리비아에서 민영화된 식수 때문에 일어났던 엘 알토시의 시민의 저항이다. 거기다 2011년의 런던 봉기와 뉴욕의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검토하며 데이비드 하비는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즉 반자본주의 투쟁이 결국은 보다 나은(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도시에서의 삶을 결국 가져다 줄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목적을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가졌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그가 '반란의 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대로 반자본주의 운동과 도시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그리 격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까지나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게 이 책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한 뒤로 약탈이 더욱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도시화는 서울의 아파트가 그러하듯 개인을 더욱 파편화시켜서 저항의 연대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럴수록 약탈은 더욱 전면화되고 노골적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빨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드러낸 이빨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를 넘어 연대를 위한 거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막상 잘 알 수가 없다.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는 바로 그 시작을 위한 공간을 어디에 설정해야 할 지 알려준다. 무엇보다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더이상 지금과 같은 분노와 절망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덕분에 도시에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아주 잘 알게 된 듯 하다.




 

l****1 2014.07.25. 신고 공감 5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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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서평]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내용보기
데이비드 하비의 신간인 <반란의 도시>는 인문적 소양이 아직 부족해서인지 조금 어렵게 다가온 책이었다. 책에 나온 단어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제활동인구는 도시에 살고 인구의 대다수는 도시에서 생활한다. 나라의 주요기능은 도시에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공간인데 이 안에서 소비와 생산이 이뤄진다. 도시라는 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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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신간인 <반란의 도시>는 인문적 소양이 아직 부족해서인지 조금 어렵게 다가온 책이었다. 책에 나온 단어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제활동인구는 도시에 살고 인구의 대다수는 도시에서 생활한다. 나라의 주요기능은 도시에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공간인데 이 안에서 소비와 생산이 이뤄진다. 도시라는 는 공간을 움직이는 주체는 바로 자본이라고 말한다. 자본의 거대한 손에 의해서 다소 과장되게 말하면 우리들의 의식주가 좌지우지 된다. 도시는 현대 문명이 이룩한 가장 발전된 상징물이기도 하다. 도시에 모든 기능이 몰려있다보니 자본에 의한 계급이 나눠지게 되었다. 자본가는 일정량의 화폐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 후 그 이상의 화폐(이윤)를 챙겨 하루를 마친다고 한다. 즉, 자본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이 투자한 금액 그 이상의 이윤을 챙기기 위해서이며, 그 밑에는 노동자 계급이 존재한다. 이는 도시를 지탱하는 하나의 원리로 풀이될 수 있는데 노동자는 상품을 생산하며 유통과 판매의 과정을 거쳐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인 재화로 이를 소비하는 구조다. 



우리는 이 도시 안에서 여러 모습을 보곤 한다. 그래서 <반란의 도시>는 성찰해볼만한 여지가 많은 책이다. 하비는 극심한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논제를 통해 신자유주의 윤리가 인격을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규범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다소 이해하는 데 애를 먹은 이유는 이런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정도로 성숙되지 못한 탓이다. 즉, 개인의 사적 재산권이나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게 되었고, 엘리트 계급은 물론 하위 중간 계급까지 이는 하나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지만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이룰 정도로 타협하게 된 것은 아닐까? 기술은 끊임없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자본주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 도시는 자본주의 구조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건 화폐가 움직이는 경제의 중심지이며, 정치라는 권력이 움직이는 공간이자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함께 이뤄지기에 도시의 기능을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저자가 말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권은 무엇일까?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본이 아닌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도시를 재창조할 수 있는 권리와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도시에서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에 대한 민주적 권리를 시민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급진적일 수 있다. 도시에서의 선순환은 일반 시민들의 참여와 적극적인 개선 노력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이롭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가게처럼 재화물에 대한 건전한 소비와 교류가 이뤄지는 장을 만들고, 뚝섬유원지의 아름다운 장터처럼 자신이 가진 것들을 판매하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저자는 <반란의 도시>를 통하여 강력하게 도시권을 주장하라고 강변한다.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은 정말 필요하다. 도시라는 공간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도시의 기능을 원활하게 움직이는 건 바로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절대 다수가 자본 속에서 살아가는데 지난 세기에 도시 투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보면 불평등이 그 원인이었고, 도시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강요받은 채 생활해야 했다. <반란의 도시>는 내게 다소 버거운 책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와 세계의 거대한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논리정연하게 정돈된 책이었다. 



자본의 과제는 독점지대를 영유하기에 충분한 문화적 차이와 문화 공유재를 통합하고, 포섭하며, 상품화하고, 화폐화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 p.193



c******d 2014.05.1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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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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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내가 살았던 도시의 핵심 사업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건설되고 있다. 도시의 중심이었던 곳이 새로운 도심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뒷자리로 물러난 곳에 위치해 있던 도청이 이전되고 난 그 부지에 대한 활용이 화두로 등장했다. 인구 15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의 재구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구도심의 활성화와 새로운 도심과의 조화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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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내가 살았던 도시의 핵심 사업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건설되고 있다. 도시의 중심이었던 곳이 새로운 도심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뒷자리로 물러난 곳에 위치해 있던 도청이 이전되고 난 그 부지에 대한 활용이 화두로 등장했다. 인구 15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의 재구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구도심의 활성화와 새로운 도심과의 조화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새로이 건설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 내에서의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본이 몰려들어 재개발과 재건축을 불러왔다. 이는 곧 기존 세력들의 퇴출을 의미한다. 퇴출되는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도시를 재구성하는 중심에서 사람들은 밀려나 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생활하는 근거지는 도시다. 그것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지역에 편중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 도시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지만 이제는 도시가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주인은 사라지고 자본을 선두로 제도적 장치와 결합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구성원을 속박하는 도시는 누구의 것일까 

 

데이비드 하비의반란의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도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밝히며 최근 세계 각국에서 도시를 무대로 벌어진 사건들의 실체를 파헤쳐간다.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도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잉여를 흡수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도시를 생산하는 계급으로부터 자본가계급이 약탈에 의한 축적을 실현하는 장이라고 주장하는 하비는 자본주의적 도시화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동안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도시 생산자들은 언제나 착취와 약탈 그리고 사기극의 희생자였다고 말한다. 또한 “1% 특권계급에 의해 도시 공간이 사유화되고 영유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자본주의 도시화에서 소외되고 주변부로 추방당했던 99%의 도시에 대한 권리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근거로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도시화로 피폐해진 도시를 보다 인간적인 도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부터 추방당하면서도 언제나 그 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당위성에 우선한다. 그는 도시화의 물결이 지구를 뒤덮는 이 시대 과연 도시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도시는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의해 피폐화된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에서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해답을 찾아간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크게 구분하여 두 개의 지역이 있다. 강남과 강북이 그것이다. 이를 가르는 기준으로 교육이나 문화 환경 등을 비롯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 속내에는 바로 부자 강남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자본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재개발 사업이 정치권의 이슈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삭막하기만 한 도시에도 광장문화라는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면서 주변부로 밀려나기만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희망을 찾아가고 있어 보인다. “도시는 집단적 노동의 결과물이고, 따라서 도시 생산자들 모두의 것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에서 도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확인하게 된다.



m*****8 2014.05.08.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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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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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권 사상<명량>,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들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할 무렵 나는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를 읽었다. 책 표지에 녹아내리고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며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빌딩숲, 자동차, 도시인들. 나는 무엇보다 출근 시간의 지옥철을 떠올렸다. 1제곱미터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으며, 타인의 존재 자체가 몹시 불편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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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권 사상

<명량>,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들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할 무렵 나는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를 읽었다. 책 표지에 녹아내리고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며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빌딩숲, 자동차, 도시인들. 나는 무엇보다 출근 시간의 지옥철을 떠올렸다. 1제곱미터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으며, 타인의 존재 자체가 몹시 불편한 공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는 마치 살려달라는 절규로 들리곤 한다. 사실 사람들은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도시를 선택했다. 하지만 도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쇠퇴시키며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다. 도시 뒤에는 자본 권력이라는 하나의 무리가 장막 뒤에 숨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양상되는 실존적 고통 속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격렬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반응을 바로 도시권에 대한 호소라고 하였다. 도시권 사상은 거리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형성되어 억압을 당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의 도와달라는 절규, 생계유지를 위한 요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

부의 집중

화폐 권력은 끊임없이 도시를 생산?확장해 간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강탈하면서 자본을 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공간의 형성은 자본주의 역사 내내 과잉자본과 노동을 흡수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그 결과 전 세계 상위 2%에 속하는 부자들이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게 됐다. 반면 하위 5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전체의 1%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2013년을 기준으로 볼 때, 상위 10%의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62%를 차지하고 있다. 약 25년 전에는 50%가 조금 넘었었는데, 그 사이 10% 포인트 이상 그 비중이 불어난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부의 재분배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에서 도시가 중심적 역할을 하므로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시로부터 형성되는 도시권이 왜 화폐 권력에게 독차지 되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태원, 그 브랜딩의 가치는 누가 가져야 하는가?

최근 이태원의 '경리단길'이?가장?Hot한 거리로 뜨고 있다. 그러나 불과 5-6년 전만해도 슈퍼와 세탁소가 있는 동네 상권에 불가했기에?임대료도 지금에 비하면 매우 저렴했다.?이태원 중심가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자연스럽게 이곳에 터를 잡아?자신만의 방식으로?이색적이고 감각있는 인테리어를 적용한 이국적인 분위기의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경리단'이라는?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고,?이에 매력을 느낀?사람들이?몰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경리단길'이? 만들어졌다.?하지만 '경리단길'도 이태원의 중심가처럼 곧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했고, 심지어 대기업이 손을 뻗치는 조짐이 나타나고?있다. 경리단이라는 새로운 브랜딩은 지역 주민의?(차별화된)노동과 생활 방식의 총합에서 생산된 가치이지만, 결국 자본이 상품화하고 화폐화시킨?형태로?인클로저하고 영유하게 된?것이다. 즉,?수익 증대에 기여한 것은 자본이 아니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임에도 불구하고?수익이 증대한 만큼?혹은 그 이상을?자본이 흡수해가고?있는 것이다.?홍대와 가로수길도 이와 같은 형태로 임대료가 오르고 대기업이 들어오면서 자본에게 (대부분의) 도시권을 강탈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노동자가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나름의 생산방식을 개발하여 수익 증대에 기여했어도, 혹은 실제로 자본 권력과 싸워 실질 임금(혹은 수익)을 얻어냈다 해도, 임대료 상승과 같은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착취활동이나 약탈 활동을 통해 자본가는 그만큼을, 아니 그 이상을 손쉽게 도로 가져간다. 하비는 집합적 상징자본에는 상당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다고 하면서, 주민 모두가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름의 방식으로 집합적 상징자본의 축적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그 중 어떤 계층이 이익을 거두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의 공유재가 사회적 이익을 위해 생산되고 보호되고 이용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인식은 화폐 권력에 저항하는데 필요한 기본 뼈대라고 주장 한다

우리는 은행 대출을 받아,?자본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다.

하비는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징후는 썩 바람직하지 않다. 주택 부문의 경기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데다 새로운 주택 건설은 정체와 쇠퇴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공적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고갈되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가운데 누구나 두려워하는 더블딥이 나타날 징후가 역력하다.”

도시 공간을 형성하는 활동은 장기적으로 투기성이 강하다. 투기적 금융과 짝을 이뤄 돌아가는 부동산 시장의 호황과 불황은 거시경제 전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금융기관이(그리고 그러한 정책을 내놓는 정부가, 거기에는 토건족의 적지않은 입김과 로비가 있었을) 저리로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주택값과 전셋값은 하락했을 것이다. 이미 구매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대출로 집을 사라고 부추기고, 그로 인하여 집값과 전셋값을 떠받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금융기관은 수수료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버블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화폐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차지하는 부의 몫을 공격해 수익성을 회복시키려 하는 것과 다름아니며, 이것은 소비가 부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리케리아트

하비는 신자유주의에서는 극심한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신자유주의 윤리가 인격을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규범으로 작용하며, 그 결과 대도시에서는 개인주의적 고립감, 불안, 신경증이 나날이 증가한다고 언급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 안이 아닌 도시로 나오고 있으며, 전통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른바 프리케리아트로 바뀌고 있다. 프리케리아트는 이 시대의 모든 민중을 의미한다. 빚으로 얼룩진 대학생, 갑의 횡포에 시달리는 대리점(편의점, 우유 판매점 등) 또는 협력업체, 하청업체 노동자, 계약직 노동자, 재개발로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 감당할 수 없는 집값에 대출이 수천에서 수억에 이르는 일반 가정, 정리해고 노동자들, 거기에 일반노동자 등이 바로 그들이며, 또한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이제 우리는 도시를 상대로 정확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책은 도시로부터 생산되는 잉여에 대한 분배를 사회화하고 누구에게나 개방된 새로운 공동의 부를 확립해야 한다면서, 도시 네트워크를 통한 운동은 계급적 지배와 상품화된 시장의 결정이라는 제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성이 꽃피는 길로 나아갈 것을 강조했다. 그 길을 모색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하비와 같은 사회과학자가 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선명하고 명확하게도 바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한계

도시권의 모호한 개념만큼이나 자본에 대항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하비의 견해는 때때로 안갯속에 가려진 듯하면서도, 유토피아적인 견해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그렇다할지라도 그의 고민과 주장은 옳은 것이며, 그것이 99%의 민중을 향한 것이기에 정의롭다할 수 있다. 세상이 사회과학자보다 빠르게 돌아간다면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유턴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s*******1 2024.04.2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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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바보형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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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운동장으로 나가 뛰어 놀았다. 학교 바로 앞에 넓은 백사장이 있어 뒹굴며 놀았다. 한참 놀다 집에 가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동네 놀이터로 부리나케 뛰어 나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놀다 보면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OO야~~ 저녁 먹어라~~~” 아쉽지만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엄마 손에 붙잡혀 끌려갔다. 아쉽지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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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운동장으로 나가 뛰어 놀았다. 학교 바로 앞에 넓은 백사장이 있어 뒹굴며 놀았다. 한참 놀다 집에 가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동네 놀이터로 부리나케 뛰어 나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놀다 보면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OO야~~ 저녁 먹어라~~~” 아쉽지만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엄마 손에 붙잡혀 끌려갔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았다. 내일 또 그렇게 한바탕 놀면 되니까.

매일같이 뛰고 뒹굴고 하는 우리들의 놀이터에는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보형이었다. 동네 골목 담벼락 아래나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노는 형들의 얘기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주워들은 얘기는 많았지만 그 바보형의 사연에 대해 팩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동네 어귀에서 나타나 동네 꼬마 녀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이후 비로소 그 바보형도 집으로 갔다. 그 사람의 집이 정확히 어딘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집으로 가려면 동네 끝 저수지를 지나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는 말도 있었고 집이 없어 산에서 잔다는 말도 있었고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어서 밤에는 학교에서 잔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 바보형의 집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진위를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바보형이 있었다.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 적어도 우리 무리 중 가장 덩치 큰 형보다 더 덩치가 컸고, 가장 나이가 많은 형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였지만 단 한번도 우리가 노는 것을 방해하거나 때리거나 위협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동네를 배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특이했던 것은 다른 동네에도 우리 동네 바보형과 같은 사람들이 꼭 한명씩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었다. 우리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동네에서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동네 꼬마들 노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동네에 꼭 한 명씩은 있었던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골목골목 들어찬 주택이 없어지고 아파트가 생기고 도시가 개발되면서부터 없어졌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돌이켜보면 자동차가 왕래하기 이전 도로는 공유재였다. 사람들이 교류하는 장소,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 도로라는 공유재는 파괴되었고 이제는 자동차만 바삐 오가는 공공 공간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p.139)

 

맞다. 그때는 도로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를 제외하면 모조리 우리, 동네 꼬마들이 뛰어 다니고 뒹굴 수 있었던 골목이 많았다. 이 책 「반란의 도시」는 우리들이, 우리들과 같은 공간에 존재했었던 바보형들이 어떻게 도시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도시권>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이 당연하게 가지는 권리다. 그땅에서 살고 있고 그 도시에서 세금을 내고 그렇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권리를 가진다는 개념이다. 도시는 원래 공유재다. 국가와 사회도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땅과 도로는 공유재다. 일정한 공유재를 도시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공유해서 사용해도 남았을때는 현대 도시가 갖는 제반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공유재가 파괴되고, 그것을 가지는 이가 사유화하면서 도시는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이 책에서 논하는 파괴는 일반적인 파괴의 개념과는 다르다. 시대가 변하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도시는 물론 발전했다. 높은 건물이 생기고 더 많은 도로가 생기고 온갖 편의시설과 공공시설, 교육시설이 만들어 졌다. 분명 예전보다 더 살기 좋고 편리하고 유용한 삶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일부러 내쫓은 것도 아니고 모두 모아서 어떤 장소에 가두어 놓은 것도 아닐텐데, 없어졌다.

 

 

“과거부터 형성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도시권은 지나치게 협소하고 제한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한줌도 안 되는 정치·경제 엘리트 수중에 들어가 있다.” (p.58)

 

책에서 말하는 이들 정치·경제 엘리트는 자신들의 특수한 수요와 욕구에 가까운 모습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국가와 사회의 특성에 따라 그런 엘리트들은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시에서 부자를 위한 건설 붐이 한창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도시는 농업의 산업화와 상업화 탓에 농지를 잃고 몰려든 가난한 농민들로 북적인다.” (p.40)

 

박정희 시절 도시로 몰려든 도시빈민들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다. 농촌에서 농사로는 도저히 살길이 없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서울의 산등성이에 몰려들었다. 판잣집을 짓고 살고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 광주로 성남으로 부천으로 쫓겨났다. 그들이 땅거미처럼 들러 붙은 것이 미관에 좋지 않았던 것인지, 그들이 없어진 자리를 상업·주택 용지로 만들어 부동산 투기를 하려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그들은 쫓겨났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내던져 진 도시빈민들에게 도시권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공장에 가기 위해서 타고갈 버스도 없었고 상·하수도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삶을 영위해야마나 했다. 이들이 떠난 도시는 엘리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황무지로 쫓겨가 죽을 힘을 다해 돈을 벌고 모아 다시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 엘리트들의 손에 있는 아파트를 사야 했다. 또다시 엘리트들의 잇속만 채워지는 꼴이었다. 이 꼴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친 부동산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천적 슬로건이면서 정치적 이념이기도 한 집단적 권리, 도시권은 해묵은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즉, 도시 공간의 형성과 잉여의 생산 및 이용 사이의 내적 관계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p.60)

 

도시 공간을 재배치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에는 분명히 잉여가치가 형성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배를 불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분별하게 도시를 개발하고 확장하며 미친듯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지금처럼 이렇게 펌프질 하는 미친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형성된 잉여를 갖는 자(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도시의 모든 이권을 독차지 하고 있는 자들이다. 단순히 건물 몇채를 가진 건물주가 아니라 도시를 재배치하고 개발하는 등의 구조를 만들게 한 장본인들, 정치·경제 엘리트들이라 볼 수 있다. 도시에 건물이 들어서게 하고 큰 도로가 생기게 하는 등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동네 꼬마들과 바보형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도시는 더 이상 동네 형들과 친구들, 바보형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이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독서실이다 도로와 골목을 뛰어다닐 시간이 없다. 물론, 그런 골목 또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살아남이 위해 매일 고군분투 중이다. 반란과 혁명을 꿈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국가와 사회가 더 이상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사람들은 집단 우울증에 빠진 것처럼 힘들어졌다. 최소한 국가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고 위기에 빠진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그리스의 파업 노동자 그리고 런던에서 더반, 부에노스아이레스, 선전, 뭄바이 등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는 전투적 대항운동도 민중 대 월스트리트당 투쟁의 일환이다. 대자본과 화폐 권력의 야만적 지배는 이제 세계 어디에서나 수세에 몰렸다.” (p.274)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서 소개되는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도시의 반란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이 가진 자, 정치·경제 엘리트를 위해 존재하는 도시와 국가에서는 애초에 도시권을 가진 시민, 국민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팔 자기가 흔들기’를 해야마나 한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고 지켜주지 않는 사회와 국가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분명히 이번 달에도 피같은 내 돈이 국가의 주머니에 세금으로 정확하게 들어가고 있는데, 내 팔은 여전히 내가 흔들어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가끔 해외에서 들려오는 ‘반란의 기운’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야만스러워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힘겹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야만적 정치인은 지출 경비를 속이며 국민의 혈세를 가로챈다.” (p.262)

“대량 약탈의 정치경제, 백주의 강도짓을 방불케 하는 약탈적 수법의 정치경제는 이제 일상사가 되고 있다.” (p.263)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난 후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거대 자본권력이다. 거대 자본권력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력과의 결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야만적 정치인, 야만적 기업인, 야만적 지식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단지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 골목과 그 골목에서 함께 존재했던 바보형들만 판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정당하게 도시권을 주장하고, 아니 굳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누려야 할 도시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책에서의 표현처럼 벌건 대낮에 강도짓을 당하고 있지만 하소연 할 데도 없다. 계속되는 표현처럼 일상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노하고 짱돌을 들고 봉기하고 반란을 도모하거나 일으키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전해 듣지만 우리의 일상을 바꿀만큼은 아니다.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가 특별히 굼뜨거나 약한 사람들은 아닌데,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쉽게 일어서지 못한다. 쉽게 반란을 꿈꾸지 못한다. 오랜 독재정권의 무시무시한 공권력의 발로가 지금세대의 DNA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일상이 되어 버리면 나중에는 불편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 왔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라는 패배주의적인 자각.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계속해서 끝까지 지금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도시와 사회와 국가를 움켜쥐고 모든 것을 가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너무 참담하다. 정치적 각성만으로 반란을 도모할 수 없다. 애초에 우리에게 도시권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은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특권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현재 정권과 기득권 혹은 자신과 정치적 방향이나 이념이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설익은 채 나무에서 떨어져 썩어가는 어느 열매처럼 그렇게 없어질 뿐이다.

 

 

*인문교양 특별리뷰전에 응모한 리뷰가 아닙니다.

 

 

 

 

 



l****h 2014.06.18.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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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26. YES24하비의 책이라 샀다. (사은품인 치맥 맥주캔과 에코백을 얻기 위해, 포인트가 가장 높은 책을 골랐다)도시에 대한 권리라...하비가 지리학자인 만큼 이 책은 하비의 정수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과연 <도시>와 <자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도시는 누구의 것인가?내가 기대한 방향의 서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실망했다. 내가 기대한 것은 '도시의 대한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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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26. YES24
하비의 책이라 샀다. (사은품인 치맥 맥주캔과 에코백을 얻기 위해, 포인트가 가장 높은 책을 골랐다)
도시에 대한 권리라...하비가 지리학자인 만큼 이 책은 하비의 정수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과연 <도시>와 <자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내가 기대한 방향의 서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실망했다. 내가 기대한 것은 '도시의 대한 권리', 즉 도시권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다양한 쟁점들, 그리고 그 과학적 원리와 도시권 점유에 관한 하비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거였는데 본 서적은 그런 것이 잘 드러나진 않는다. 도시권에 대한 좌파의 통합적 전술이 필요하다는, 다소 좌파를 위한 정책서 같은 냄새가 풍겼다. 

다만 하비의 생각 중 조금 창의적이라 할 만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주장들도 자칫하면 신자유주의 기류에 편승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예컨대 좌파들이 흔히 주장하는 아나키즘, 자치주의 등은 반자유주의를 표방하지만, 엘 알토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신자유주의 지지자들이 들고 나오는 카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하비는 말한다. 흔히 우파의 것이라 여겨지는 권위주의를 어느 정도 채용할 필요가 있고(글로벌 문제나 외부 세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그러면서 좌파적 정책인 자치, 자율주의를 맹신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s********3 2015.09.18.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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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권리를 중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권리를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투쟁의 대상이며, 또 권리를 정의하는 투쟁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병행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은 진실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정확하게 물어야지 정확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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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권리를 중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권리를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투쟁의 대상이며, 또 권리를 정의하는 투쟁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병행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은 진실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정확하게 물어야지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접근 수단이 차단당한 상황에서는 공공 공간에 사람이 모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항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수다 떠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광장에 모여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의 시스템은 아직 파탄을 맞이하지도 그 정체가 충분히 폭로되지도 않았지만, 탄압 말고 뾰족한 대응방법이 없다. 우리 민중 역시 이 시스템을 누구에 맞게 재구축해야 하는가를 결정한 집단적 권리를 얻으려고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권의 탐욕과 무책임함에 대해서 그리고 극심한 불균형과 불평등함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었다. 한동안 거리와 광장은 분노한 민중들로 가득해졌고 사람들은 온라인과 다양한 방식으로 개개인이 아닌 조직되고 집단적으로 행동을 보여주었다.

 

약간의 소란스러운 방식이기는 했지만 분명하게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약간의 해결의 실마리도 찾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어떤 해결도 개선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지만 무척 이례적이고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다시금 사람들은 함께하기 시작했고 과연 언제까지 그 순간처럼 폭발력 있게 뭉쳐져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자본의 힘에 짓눌리기만 했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저항을 했다는 점에서 분명 월가를 점령하라는 선언은 의미 있는 순간-선언일 것이고 반란의 도시의 저자 데이비드 하비는 그걸 좀 더 특별하게 주목했던 것 같다.

 

반란...’은 월가에서의 큰소리로 울려진 분노로 가득한 함성에 대한 데이비드 하비의 응답처럼 읽혀진다. 정확하게는 어떤 의도에서 어떤 의미로 글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느끼기에는 그렇게 느껴진다.

 

데이비드 하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중 데이비드 하비는 국내에서는 비교적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하고 최근에서야 여러 주요 저작들이 조금씩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개인적으로도 데이비드 하비의 저서를 몇 권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란...’의 논의는 무척 신선했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론적인 세세한 논의가 아니라 조금은 읽기가 쉬웠다. ‘파리, 모더니티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정도로 쉽게 읽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데이비드 하비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는 쉽게 읽혀졌다.

 

우리가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가, 자연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가, 어떤 생활양식을 원하는가, 어떤 미학적 가치관을 품고 있는가 등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도시권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보고 있는 반란...’은 도시라는 장소-공간이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장소-공간이라는 단순한 이해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불만의 폭발 혹은 투쟁-저항의 시작점이자 첨예한 계급갈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장소-공간이지만 반대로 반자본주의를 위한 장소-공간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정교하게 다듬으려고 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려고 하고 있다.

 

도시

 

저자는 우선 도시에 대해서 그동안과는 조금은 다른 입장과 생각을 주장했던 앙리 르페브르의 논의에 주목하며 도시와 도시권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 지배와 억압의 공간인 도시가 해방 공간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도시와 도시권을 이해해야 할 것인지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파리코뮌에 대해서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데, 그동안의 파리코뮌에 대한 여러 생각들과는 다른 방식의 이해가 필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가 반자본주의적 장소-공간이 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어떤 식으로 (필연적으로) 도시화가 이뤄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밀려들게 되었는지를, 도시는 또한 어떤 식으로 새로운 유형의 도시형 인격을 구축하게 되는지를, 도시라는 거대한 장소-공간에서 계급갈등이 첨예하게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식으로 사회 안정을 모색했고 그게 가능하도록 통치했는지, 이윤의 증대(잉여가치 생산)가 계속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 자본은 어떤 전략을 보여주었는지를 알아가면서 자본의 전략에 저항하고 대응했던 모습들은 어떤 식으로 (그것이 자연발생적이든 인위적이든) 생겨났는지를 함께 설명해주고 있다.

 

도시화

교외화

공동화

그리고 도시의 위기까지

 

자본주의가 위기로 빠져드는 과정 속에서 도시는 어떤 역할(중요성이 있는지)을 했는지 속도감 있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읽어내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의 논의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읽어내기가 쉽다) 저자의 논의는 분명 흥미로우면서 그동안은 접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도시를 이해해보고 있기 때문에 무척 인상적이었다.

 

부동산 개발이 어떤 식으로 도시를 재편하게 만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 극심한 고통과 내쫓김을 당하게 되는지를, 그것이 어떤 식으로 계급적인 성격을 보이게 되는지를 살펴본 다음 도시의 형성과 개발에 있어서 배제와 약탈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측면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가진 자()의 편의에 맞게 도시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계속해서 내몰려지고만 있을 뿐이고 도시가 만들어내는 불균형상태는 점점 더 극심해져만 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과 그로 인해서 (그렇기 때문에) 대항과 저항이 그리고 투쟁과 사회운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잘 이해시키고 있다.

 

도시 개발이 갖고 있는 약탈적이고 탐욕적인 측면을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그런 마구잡이 식 약탈이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위기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보완하며 기존의 도시 재개발에 대한 논의들 중 저자가 특별히 주목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언급하고 있고 그 논의들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따로 추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약탈에 의한 축적

 

저자는 도시 개발에 대해서 위와 같은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최근의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부동산 문제가 덜 주목받고 그 관련성을 은근슬쩍 덮으려고 하고 있지만 언제 또 부동산 문제 시작해서 경제위기로 폭발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과 부동산 거품의 발생과 붕괴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위기는 여전하고 언제 어떤 식으로 부동산 거품이 터질지 혹은 경제위기가 발생할지 예상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과거의 사례들로는 현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기에 어려움은 항상 있어왔지만 분명히 지금 현재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고 모든 것들이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위기가 나타나게 될지 쉽게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시금 폭발이 일어날 것을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불평등은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도시는 저항과 투쟁의 중심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말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저항의 공간으로 나와서 함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활용하고 보완하며 도시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는데, 그 검토 방식에 있어서 조금은 낯설고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들도 있었지만 무척 인상적이고 색다른 방식이었다.

 

도시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 살펴볼 수 있을지를 고민해본 적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나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y*******o 2017.06.0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