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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 토머스 H. 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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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토머스 H. 쿡(Thomas H. Cook)"의 2012년도 작품 "줄리언 웰즈의 죄(The Crime Of Julian Wells)"입니다. 이 작품은 "제3의 사나이"나 "디미트리오스의 관" 등 고전 스파이 소설들을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중년의 작가 "줄리언 웰즈"는 집필을 위한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호수로 나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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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토머스 H. 쿡(Thomas H. Cook)"의 2012년도 작품 "줄리언 웰즈의 죄(The Crime Of Julian Wells)"입니다. 이 작품은 "제3의 사나이" "디미트리오스의 관" 등 고전 스파이 소설들을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중년의 작가 "줄리언 웰즈"는 집필을 위한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호수로 나가 배위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리언"과 친구였던 "필립 앤더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 했다는 후회와 그동안 친구가 힘들어 했던 징후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겨워 하던 "필립" "줄리언"이 죽기 직전까지 '아르헨티나' 지도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언젠가 줄리언은 해결되지 않은 범죄보다 더 잊히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는 이야기는 없다고 썼지만, 의문이 풀리며 드러난 진실도 잊히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발견한 진실도 그러했다.

인간들이 자행해온 잔인한 범죄와 학살, 고문 등에 집착하며 그런 이야기들에 관해 책을 썼던 작가 "줄리언"은 러시아의 유명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6년간 러시아를 돌아다니다 집으로 옵니다. 며칠 후 그는 배를 타고 집 앞 호수로 나가 손목을 긋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하며 많은 것을 공유했던 "필립"은 친구 "줄리언"의 자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줄리언"이 오랫동안 너무 잔인하고 어두운 이야기에 집착하다 진이 빠져버려 자살했다고 말하지만 "필립"은 쉽게 납득하지 못합니다. 밝고 자신만만하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젊은 시절의 친구를 알기에 자꾸 친구가 자살한 이유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줄리언"이 죽기 직전까지 '아르헨티나' 지도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필립"은 오래전 자신과 "줄리언"이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사건을 떠올립니다. 한 여인의 실종. 그리고 실종사건을 계기로 바뀌어 버린 "줄리언". 당시 군사정권 말기의 '아르헨티나'는 '길을 잃은 국가' 였고 수많은 납치와 고문, 살인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둘의 관광 가이드였던 여인 "마리솔"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줄리언"은 그녀의 행방에 오랫동안 집착을 했었습니다. 국무성에 지원서를 내놓고 언젠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며 활기찼던 "줄리언"은 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변해버렸고, 잔인한 이야기에 집착하며 세상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필립" "줄리언"의 유품을 정리하러 프랑스로 가면서 "줄리언"이 썼던 작품들과 함께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갑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줄리언 웰즈의 죄."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학 비평가인 "필립"이 친구였던 작가 "줄리언"을 자살로 몰게 한 원인을 찾아가는 이 작품 "줄리언 웰즈의 죄"는 한마디로 어떠한 소설이다 라고 말하기 힘든 독특한 작품입니다. 친구의 자살의 원인을 찾기 위해 친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평범해 보이는 구성 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속임수, 고문, 살인, 학살 등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자행해온 범죄들입니다. 목차의 제목 자체도 소설 속 인물 "줄리언"이 쓴 작품들의 제목으로 되어있어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반인류적인 범죄들이 벌어졌던 곳으로 가서 그 참상을 같이 마주하게 됩니다. 피의 백작부인이라 불렸던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성이 있던 '짜흐띠쩨', 한 시간 동안 프랑스 인 642명이 학살당한 '오라두르', 소설 "차일드 44"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안드레이 치카틸로"가 연쇄 살인을 저지른 '러시아' 등을 거쳐 "필립" "줄리언"의 젊은 시절 첫 해외 여행지였던 '아르헨티나'로 돌아옵니다. "필립"은 그동안 떠올리던 기억 속의 이야기들이 전혀 다른 걸 의미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줄리언"이 저지른 죄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마주하기 힘든 진실 또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사람들은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사람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란다."

작가 "토머스 H. 쿡"은 평범한 우리 삶에 우연히 끼어드는 사건이 불러오는 비극과 그로 인한 파멸을 다루는데 있어서 정말 독보적인 작가입니다. 반대로 그 비극을 다루는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가끔 이런 글 솜씨로 연애편지를 쓴다면 웬만한 여자는 다 반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문장으로 비극을 다루기에 그 비극이 더욱 우울하며 애처로운 느낌을 준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 작가는 참 신기한 작가입니다. 작품을 읽을 때마다 사람을 저 밑바닥 어두운 곳까지 끌고 내려갑니다. 그게 잔인하고 역겨운 묘사나 전개 때문이 아니라 비극을 구성하는 문장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애잔함과 작품을 관통하는 애수에 젖은 우울함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복선들이 정말 정교합니다. 결말까지 읽고 나서 그전에 그냥 넘겼던 대사나 묘사들을 상기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정말로 기억이 어느 순간 지뢰가 곳곳에 뿌려진 해변이 되고,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그 모래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디서 들은 말인데,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 채찍을 휘두르기 전이 아니라 휘두르고 나서래." 마을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줄리언이 말했다. 그러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정작 중요한 건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아니겠어? 죄책감은 사치야, 필립."

고전 스파이 소설들에 경의를 보이며 오마주를 바치는 "줄리언 웰즈의 죄"는 여전히 "토머스 H. 쿡"의 다른 소설들처럼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론 단순한 인간의 본성, 그런 인간들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어처구니없는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의 원인을 제공한 생각지 못한 행동, 그 모든 게 엮여서 발생되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바로 갑자기 찾아오는 변화을 두려워하는 우리네 인생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게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 삶의 수레바퀴가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길 바라고 삶이 힘든 사람들도 행운을 바라기 보다는 지금 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더 바라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언제나 품위 있고 우아한 범죄소설들을 써내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H. 쿡"은 호불호가 좀 갈립니다.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는 분들에게 더욱 그렇더군요. 하지만 그동안 "토머스 H. 쿡"의 소설들을 읽고 만족하셨다면 이번에도 분명히 만족하실 겁니다. 이 작가는 정말로 특별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g*****r 2014.03.2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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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 토머스 H. 쿡]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줄리언 웰즈의 죄
"[스릴러 / 토머스 H. 쿡]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줄리언 웰즈의 죄" 내용보기
이 책의 헌정사에서 나는 줄리언이 지은 죄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 되었지만, 그가 지은 죄를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죄가 될 만한 일을 목격한 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한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줄리언도 자신의 죄를 잊고 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한 것은 아닐까?   -P.71-   1.     '인생이란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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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헌정사에서 나는 줄리언이 지은 죄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 되었지만, 그가 지은 죄를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죄가 될 만한 일을 목격한 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한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줄리언도 자신의 죄를 잊고 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한 것은 아닐까?

 

-P.71-

 

1.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남아있는 구절이였습니다. '사투르누스(Saturn)'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크로노스와 동일인물로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의 신 입니다.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그는 '자식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게되고, 그것이 실현될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자식들을 차례로 잡아먹습니다.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란 이처럼 갑작스럽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은 우리를 비극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책의 주인공 줄리언 웰즈 역시 이렇듯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죄를 짓고마는 인물입니다. 그의 자살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친구 필립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그가 남긴 유서를 흔적삼아 자살한 이유를 찾아나가는 필립. 이야기의 끝 필립이 마주한 진실은 참혹합니다. 젊은 날 전도유망한 인물이였던 줄리언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던 이유는 어쩌면 그들의 범죄에서 최소한의 인간성을 찾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줄리언이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처럼 혼자 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건데, 줄리언이 본 것을 보고, 그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갔던 곳에 가보고, 그가 자신이 연구했던 악독한 범죄자들이 되어 보려고 했던 것처럼 나도 그가 되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길을 따라가는 것은 타인의 신경 회로의 급류를 건드리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줄리언의 마음속으로 조금씩 더 깊이 빠져드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P.143-

 

2.

 

 젊은 시절 필립과, 줄리언은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갈등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파이로 몰리고 처참한 고문과, 실종, 살인이 공공연하게 발생하던 국가 아르헨티나. 그리고 그 잔혹한 시대 속에서 정의로운 청년 줄리언은 '마리솔'이라는 아르헨티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그녀는 필립과, 줄리언의 가이드가 되어줍니다. 고아였지만 타고난 총명함으로 대통령궁의 통역담당으로 일했던 그녀. 정치적인 성향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녀가 어느날 실종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이 납치되는 곳에서 마리솔의 실종은 두 사람에게 큰 충격으로 남습니다.

 

 줄리언의 죽음 이후 필립은 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쫓아가며 죽음의 이유를 찾아나섭니다. 그리고 그 이유의 한 가운데엔 '마리솔'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스파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그리고 줄리언이 그녀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 스파이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하나 둘 풀려가는 듯 보이는 이야기는 또 다른 증인을 만나며 반전됩니다. 과연 마리솔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줄리언 웰즈를 죽음으로 몰고간 그의 죄에 그 정답이 있었습니다.

 


 

 

 

미스터리의 다양한 요소들이 퍼즐 조각들처럼 모여서 이리저리 다시 놓이다 보면 각각의 조각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전체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이 꼭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제 내 이야기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서 최종적인 그림이 드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림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대신 충성심과 정체성이 자꾸만 바뀌는 훨씬 더 어두운 세계, 젊고 순진했던 줄리언이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을 그 암흑의 세계와 대면하게 되었다.

 

-P.240-

 

3.

 

 스릴러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 탓인지 읽는 내내 새로웠습니다. 마초 느낌의 형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묘사하는 듯한 짧은 문장 대신 세밀하고 유려한 감정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요. 찾아보니 토머스 H. 쿡이라는 작가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스릴러라는 장르물을 쓰지만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요 네스뵈나,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그 때문일까요. 그 결말에 있어서도 여운이 남는 듯한 느낌이 아릿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감성적인 스릴러. 새로운 느낌의 스릴러를 읽어보고 싶은 분에게 강력 추천 드립니다.

 

 

l****4 2014.04.08.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토마스 H. 쿡 《줄리언 웰즈의 죄》, 인류애에 반하는 인간과 사건의 행적을 좇았던 죄의식...
"토마스 H. 쿡 《줄리언 웰즈의 죄》, 인류애에 반하는 인간과 사건의 행적을 좇았던 죄의식..." 내용보기
소설은 한 남자가 집 앞의 호수로 나룻배를 타고 나간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도록 호숫가에서 30미터쯤 멀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물에 가라앉도록 밀어 넣는다. 다음에는 왼팔을 뱃전에 올려 놓고 칼로 손목을 긋는다. 오른팔 역시 순서에 따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다. 그 상태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이름은 줄리언 웰즈이고, 50대의 지금까
"토마스 H. 쿡 《줄리언 웰즈의 죄》, 인류애에 반하는 인간과 사건의 행적을 좇았던 죄의식..." 내용보기
  소설은 한 남자가 집 앞의 호수로 나룻배를 타고 나간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도록 호숫가에서 30미터쯤 멀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물에 가라앉도록 밀어 넣는다. 다음에는 왼팔을 뱃전에 올려 놓고 칼로 손목을 긋는다. 오른팔 역시 순서에 따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다. 그 상태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이름은 줄리언 웰즈이고, 50대의 지금까지 그는 잔혹한 범죄와 악한 인물에 대한 다섯 권의 책을 썼다. 

  “로레타가 말한 처녀작은 1911년 스페인에서 자행된 전설적인 잔혹 행위를 다룬 줄리언의 소설 《쿠엥카의 고문》을 뜻했다. 그 책 이후로 줄리언은 사실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작품이나 글을 구상하러 잠깐씩 들를 뿐이었다. 《쿠엥카의 고문》 이후로 그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외국으로 나가 집필을 하고, 잠깐 돌아오고, 다시 떠나 글을 쓰고, 잠깐 돌아오는 식이었다. 로레타와 공동으로 물려받은 몬턱의 농가를 떠났다가 해변으로 떠밀려온 시체처럼 불쑥, 미리 연락도 없이 나타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p.19)

  그가 쓴 첫 번째 책은 《쿠엥카의 고문》이다. 두 명의 농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실종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백을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농부들은 무고한 이들이었고, 실종자는 오랜 시간이 흐른 멀지 않은 곳에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번째 책은 《오라두르의 눈》으로 나치에 의해 작은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그 도시의 많은 여성들이 금이나 은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녔지만, 마리솔은 소박한 나무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줄리언은 처음부터 그녀가 허튼짓을 하지 않고, 한결같으며, 진지하고, 지극히 보수적이고, 굳건한 벽을 이루는 벽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그는 과도한 혁명적 열정에 저항하고 급격한 변화의 바람을 늦추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내게 말했던 그녀의 첫인상을 그래도 빌어다 쓰기도 했다.” (p.91)

  세 번째 책은 《공포》이고, 연쇄 살인범 질 드 레와 그를 도와 어린애들을 꾀었던 노파의 이야기이다. 네 번째 책은 《암호랑이》, 수백 명의 처녀를 살해해 그 피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가진 귀족 출신의 여성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잔혹 행위를 다루고 있다. 다섯 번째 책은 《코미사르》인데, 조심성이라고는 없었던 러시아의 연쇄 살인마 치카틸로가 나온다. 그리고 이 책들의 제목은 소설 속에서 각각의 챕터의 제목이다. 

  “...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건 행운이었다. 사실 줄리언의 책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알아낸 상태였다. 진실을 찾는 여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행운뿐이었다. 나는 줄리언의 책들은 물론이고 그가 남긴 메모와 편지까지 전부 읽고 또 읽었다. 그가 갔던 길을 따라 파리, 오라두르, 런던, 부다페스트, 짜흐띠제, 로스토프까지 갔다가 이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와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다 했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내 친구의 밀실로 들어가는 문을 살짝 열어보지도 못했고, 그가 왜 호수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갔는지, 내가 거기 있었다면 그의 비극적인 선택을 막기 위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p.277)

  소설은 모두 여섯 개의 챕터로 되어 있고,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사투르누스는 농경의 신이지만 자식에게 왕관을 빼앗긴다는 예언 때문에 자식을 죽이는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크라노스에 해당하는 로마의 신으로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간의 속성을 상징학도 한다.) 줄리언이 쓴 소설은 아니지만 어쩌면 줄리언이 쓰려고 하였으나 쓰지 못한 책의 제목일 수도 있다. 

  “줄리언 오빠가 자살을 한 건 오빠도 마리솔처럼 사투르누스의 기습의 피해자이기 때문이었어... 줄리언 오빠의 선량함이 오빠를 잡아먹은 거야... 바르가스가 마리솔의 순진함을 악용해 마리솔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처럼, 인생이 오빠의 선량함을 악용해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지... 온순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없어, 필립 오빠.” (p.322)

  줄리언은 죽기 전날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라는 문장을 적은 바 있고, 로레타가 악에 대해 물었을 때 ‘선은 악의 가장 좋은 가면이다’라고 답변했다. 줄리언이 제 삶의 첫 번째 여행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마리솔이라는 가이드, 그리고 그녀의 실종 이후 평생에 걸쳐 마주하고자 하였던 사실과 그가 결국 떨쳐내지 못하였던 ‘줄리언 웰즈의 죄’가 곧 이 소설이다.


토마스 H. 쿡 Thomas H. Cook / 한정아 역 / 줄리언 웰즈의 죄 (The Crime of Julian Wells) / 알에이치코리아 / 327쪽 / 2014 (2012)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6.01.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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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판타스틱픽션 Gold 05 토머스 H. 쿡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타고난 재주와 뛰어난 통찰력으로 독보적인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 줄리언 웰즈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양 팔목을 칼로 긋고 자살하는 장면에서 프롤로그는 시작한다. 젊은 시절부터 줄리언을 지켜봐왔던 필립 앤더스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 줄리언이 작가로서는 한창인 50대의 나이에 선택한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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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판타스틱픽션 Gold 05

토머스 H. 쿡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타고난 재주와 뛰어난 통찰력으로 독보적인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 줄리언 웰즈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양 팔목을 칼로 긋고 자살하는 장면에서 프롤로그는 시작한다. 젊은 시절부터 줄리언을 지켜봐왔던 필립 앤더스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 줄리언이 작가로서는 한창인 50대의 나이에 선택한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친구의 극단적인 선택을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와 책임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필립은 줄리언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밝혀내고자, 헌정사 “내가 지은 죄의 유일한 목격자인 필립에게 이 책을 밝힙니다.”에 뜻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자살 직전에 보고 있었다는 아르헨티나 지도와 역사적이고 반인류적인 범죄들을 다룬 줄리언 웰즈의 책을 따라 친구의 과거를 추적하게 된다.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인해 군부 정권이 들어선 후, 정부는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공포 정치를 펼쳐 아르헨티나를 장악한다. 반정부 집단, 좌익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더러운 전쟁’에서 죄 없는 일반 국민들이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란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국가에 의한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을 자행한 시기를 일컫는다. 학생·기자·페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게릴라 및 동조자가 주피해자이다. 약 1만명 정도의 몬토네로스와 인민혁명군의 게릴라가 실종됐고, 9,000명~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러운 전쟁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시작, 아르헨티나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운영했다. 수용소는 주로 변두리 지역의 학교나 체육관 등 대규모 건물을 개조해 비밀스럽게 사용했는데,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만 이런 수용소가 한때 수 십개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 소설에서 핵심이 되는 젊은 시절 줄리언과 필립의 이야기는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막바지인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젊은 줄리언과 필립은 미국인의 신분으로 보호받으면서, 일종의 관찰자로서 시대의 아픔을 지켜보았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절망적으로 여기면서도 순수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가이드 마리솔 메넨데스의 신선한 모습에 줄리언과 필립은 매료되지만 마리솔은 갑작스럽게 실종되고, 마리솔을 찾기 위한 노력도 헛수고로 잡혀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줄리언의 자살,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성 마리솔의 30년 전 실종 사건, 줄리언이 책으로 펴낸 《쿠엥카의 고문》, 《오라두르의 눈》, 《공포》, 《암호랑이》, 《코미사르》의 다섯 가지의 반인류적 범죄를 치밀하게 이어 붙여 거대한 비극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친구인 르네 브로샤르와 에두아루도 신부, 월터 헨드릭스를 통해서 절친한 친구였던 필립조차도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밝혀질 때마다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는 과거의 기억들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과연 줄리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로레타에게는 좋은 오빠이자 재능 있는 작가였던 줄리언에게 숨겨진 비밀을 찾아 이레네 요삭과 미하일 소보로프를 만나러 짜흐띠쩨로 엘 아라베를 만나러 이과수 폭포를 찾아간다.

줄리언 웰즈를 괴롭혔던 죄의 정체는 그가 차마 쓸 수 없었던 책의 제목으로 어울릴 법한 마지막 장 ‘사투르누스의 기습(사투르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경신으로 그리스에서는 크로노스라고 일컫는다. 그는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는다.) ’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2014.12.30.(화)
 두뽀사리~

 

i***2 2014.12.3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140331 | 미스터리 / 추리 / 미국소설] 토머스 H. 쿡, 줄리언 웰즈의 죄
"[140331 | 미스터리 / 추리 / 미국소설] 토머스 H. 쿡, 줄리언 웰즈의 죄" 내용보기
로레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줄리언 오빠가 어떤 상태였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로레타가 말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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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레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줄리언 오빠가 어떤 상태였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로레타가 말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줄리언 웰즈의 죄.”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갑자기 그녀는 오랜 비행의 피로를, 더 나아가 아들이 죽은 뒤로 오래도록 무미건조했던 삶의 일부를 떨쳐내버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p, 216








아 - 이렇게 푹 빠져 정신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추리소설 정말 좋아요.


따뜻해진 날씨와 일찍 피어버린 벚꽃 덕에 안그래도 마음이 두둥실 떠있었는데, 얼마 전 읽은 달달한 에세이 <당신이 좋아진 날>로 그 마음이 가라앉을 생각을 안하고 있었어요. 해야 할 일들은 손에 안잡히고 ‘이런 걸 보고 봄을 탄다고 하는거구나’ 하고 있는 와중에 표지부터 어두침침하니, 무거워보이는 분위기의 책 <줄리언 웰즈의 죄>를 골라 잡았네요.









스토리에 반하고, 흡입력에 반하고, 구성까지 반한 소설이었답니다. 이 작품에 대한 평을 보니 토머스 H. 쿡은 어마어마한 작가임에 분명한데, 부끄럽게도 전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은 장난 삼아 개구리를 죽이지만, 개구리는 진짜 죽는다.’ 라는 이 한 문장이 소설을 야무지게 요약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소설은 작가인 줄리언 웰즈가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잔인한 고문을 행하고, 아무 이유 없이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등 악한 짓을 행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을 쓰는, (소설이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평범하지 않은 작가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자살을 택한 것에 의심을 품은 그의 친구 필립과 줄리언의 여동생인 로레타가 그의 행적을 좇게 됩니다.


줄리언 웰즈가 썼던 작품들의 제목들이 각 챕터를 이루고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줄리언 웰즈는 이미 죽은 사람임에도 그가 계속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했고, 마치 그의 소설을 제가 직접 다 읽은 듯한 기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북리스트의 서평에 따르면 ‘토머스 H. 쿡은 유혹적으로 글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백 번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잔인하게 고문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가 언급이 되어서 그런지 얼마 전 읽었던 <양심을 보았다>라는 책이 자꾸 생각나기도 했어요. 언뜻 보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만큼 흡입력이 강력한 소설이니, 이런 추리소설에 푹 빠져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해드릴게요.





지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루지 못한 야망, 특히 예술가의 이루지 못한 꿈이 남긴 재만큼 차가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달성한 야망이라는 것도 없지 않은가? 알렉산더 대왕은 스물세 살 때 더 이상 정복할 세계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어떤 면으로든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좌절한 알렉산더 대왕 같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며, 경제 형편에 불만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자식이 없다는 것과 홀아비가 된 것이 최대의 불만이었는데, 이젠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p, 15, 16


세상에는 되돌아 건너갈 수 없는 다리들이 있다. 그런 다리를 만나면 자신이 선택한 강기슭에 최대한 적응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p, 26


나는 아버지의 의자 옆에 있는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보기 흉한 주황색 혹처럼 옹기종기 모인 약통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인간은 그냥 늙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왜소해지고 불편해지면서 늙는 거구나 싶었고, 앞으로 개선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늙는 것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맞이할 그 어떤 날도 지난날보다 더 밝은 태양이 떠오르진 않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이런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p, 36


그는 《조용한 미국인》에 나오는 에이든 파일처럼, 특권을 누리는 미국인의 질서정연한 삶을 넘어서는 다른 것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청년이었다. 줄리언 웰즈, 세상의 정복자, 수많은 재능에 의해 보호를 받고 위대한 인간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 천하무적 그의 조국처럼. -p, 46


나는 내 방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눕기 전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7층 밑에 있는 그 카페에 줄리언이 그대로 앉아있었다. 내가 떠날 때와 똑같은 자세로 여전히 산마르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뭔가 괴로운 게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줄리언에게로 내려갔어야 했다. 인생에 해피엔딩만 있다면, 친구라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어스름한 불빛 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친구는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며 당장 그 안으로 들어가 눕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베개와 시트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감에 단잠과 꿈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 괴로워하는 친구를 마주 보고 앉아 “얘기 좀 해봐.”라고 말했을 것이다. 젊고 경험도 별로 없지만 때로는 그런 몸짓만으로도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삶이란 게 인간에게 우호적인 얼굴을 보여주도록 설계된 거라면, 이 친구는 이런 것들을 알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p, 129, 130


“줄리언은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 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에두아르도는 또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이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왜’라는 뜻이지.” 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당혹스럽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말이 줄리언의 마음에도 쓰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배신이 적어놓은 단어라는 생각도 들고.” -p, 151


내가 무솔리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백마를 타고 뽐내며 돌아다니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유치하다고 말했을 때였다. 줄리언은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우울해진 것 같았고,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우스운 존재가 아니었어.” 그러고는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덧붙여 말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어린애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지.” -p, 191, 192


“한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겪어보지 않으면 그 민족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걸세.” 그가 말했다. -p, 196


로레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줄리언 오빠가 어떤 상태였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로레타가 말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줄리언 웰즈의 죄.”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갑자기 그녀는 오랜 비행의 피로를, 더 나아가 아들이 죽은 뒤로 오래도록 무미건조했던 삶의 일부를 떨쳐내버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p, 216


모든 문학작품은 인류의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다른 식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살짝 피해간다. 허구 속 등장인물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맞닥뜨리는 모든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적을 행한다. 런던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도중 어느 도시의 기차역에 내려도 현지인들이 영어로 말한다. 허구의 세상에서는 바벨탑은 폐허가 되었고, 우리의 주인공이 아프리카 오지 주민이나 배두인 상인을 처음 만날 때에도 모든 해독불가능성은 홀연히 사라지고 만나자마자 삶과 죽음과 영원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현실에서는 가장 가까운 술집 하나 찾는데도 고생깨나 할 텐데 말이다. -p, 217


“언젠가 줄리언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내가 대답했다. “실은 소로의 말이죠. 아이들은 장난 삼아 개구리를 죽이지만, 개구리는 진짜 죽는다는.” -p, 311 






s*****2 2014.04.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곰곰히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책.
"곰곰히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책." 내용보기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내용이 만만치 않게 쓰는 작가가 있다. 처음에는 그냥 물흐르듯이 책을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되면 뭔가 깊은 굴속에 들어가는 마냥 내용에 깊이가 느껴진다. 한번보단 두번 읽어보면 그 느낌이 느껴진달까. 그런 글 쓰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게 쓰는 작가 바로 토머스 H 쿡이다. 평에 이르길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언어로 슬픔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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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내용이 만만치 않게 쓰는 작가가 있다. 처음에는 그냥 물흐르듯이 책을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되면 뭔가 깊은 굴속에 들어가는 마냥 내용에 깊이가 느껴진다. 한번보단 두번 읽어보면 그 느낌이 느껴진달까. 그런 글 쓰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게 쓰는 작가 바로 토머스 H 쿡이다. 평에 이르길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언어로 슬픔을 노래한다'라고 하는데 사실 가장 아름다운지는 모르겠다. 영어로 쓰여졌으니 영어로는 아름다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말로 된 책에서는 그걸 못느끼겠으나 적어도 글자 한자 한자 파내듯이 정성스럽게 글이 쓰여졌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이번에 나온 책은 형식면에서 그전에 보여줬던 책과 좀 색다른 식으로 서술되는 내용이다. 결론은 나 있고 그 결론의 이유에 대해서 추적해가면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 물론 그 마주치는 부분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나칠수 있는 작은면도 놓치지 않고 뜻을 담아낸다.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있는 줄리언 웰즈이다. 초반에 그는 자살한다. 줄리언은 그야말로 인간말종인 존재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작가였다. 세계 곳곳에 있는 잔악하고 반사회적인 범죄를 직접 찾아가서 조사하고 그런 실화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근데 그가 갑자기 죽는다니?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화자인 필립과 줄리언의 여동생인 로레타가 그 이유를 알수없는 자살에 의문을 품고 그 수수께끼같은 동기를 추적하게 된다. 도무지 알수 없는 그의 행동. 전혀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더욱더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다. 다만 몇년전 필립과 함께 갔던 아르헨티나에서의 일들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수 있을뿐. 과연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과 거기에서 만난 사람이 그 후 줄리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책은 장르를 규정짓기가 애매하다. 원칙상은 추리 스릴러다. 자살한 줄리언의 행로를 추적하면서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하니까. 하지만 아주 복잡한 추리 기법이 동원된것도 아니고 가슴 두근거리는 추적장면이 있는것도 아니다. 내용이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하나하나 곱씹어보면 의미가 간단하지 않으면서 뭔가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게 한다. 심리소설인가싶을때도 있다. 작가는 그런 형식을 통해서 뜻한바를 나타내고자 한것인가.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형식이라고 할수 밖에 없을꺼 같다.

 

책은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게 일단 내용 전개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다. 어찌보면 단순하다. 하지만 내용중에 나오는 수많은 문학 작품을 생각해보면 헉헉거리게 만든다. 필립과 로레타의 대화에서 여러 작품들에서 나오는 주옥같은 대사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둘 사이가 오랫동안 알고 친한 사이고 또 두 사람 모두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어서 그런 대화가 가능하겠지만 그 수많은 책을 읽지 못한 일반 독자로서는 쉽지 않을밖에. 그리고 그런 대사를 잘 집어내서 적절하게 글을 이어나가는 작가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독특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결국 작가가 말하고 싶은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본성과 내면은 무엇이고 어두움과 진실의 밝음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 치열한 의식이 소설에 투영되었는것이고. 그래서 그 속의 단단함이 책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거 같다.

 

책의 화자는 친구인 필립이지만 주인공은 줄리언이다. 책을 읽으면서 참 매력적인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인 스릴러에서 보여지는 캐릭터 구축을 굳이 하지 않았는데도 있을법한 사람으로 잘 그려진거 같다. 물론 필립이나 로레타같은 다른 사람도 참 자연스럽게 인물 묘사가 되어서 극의 사실성을 더 높이는거 같다. 그래서 내용이 주는 진득함과는 관계없이 글은 잘 읽히는 편이었다.

인간의 삶의 형태를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서술로 다양하고도 다채롭게 보여주는 토머스 쿡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s******0 2014.04.0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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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 누군가가 소개한 책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긴장을 잘하는 편인데도 이상하게도 독서모임은 내 안의 적극성과 수다스러움을 발견하게 한다. 아마도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듯하다. 무엇보다 밥을 먹여주는 일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이런 시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놀랍고 사랑스럽다. 물론 자리에 함께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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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

 

누군가가 소개한 책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긴장을 잘하는 편인데도 이상하게도 독서모임은 내 안의 적극성과 수다스러움을 발견하게 한다. 아마도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듯하다. 무엇보다 밥을 먹여주는 일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이런 시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놀랍고 사랑스럽다. 물론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이가 스며들고 같이 물드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새벽에서야 책을 간신히 끝내고 생각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는데도 스스럼없이 내 생각을 발언하고, 또 다른 사람이 일깨운 내 생각을 말하고, 이전과 조금은 다른 생각에 이르러보는 것은 살면서 경험하는 몇 안 되는 흥미로움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선 <줄리언 웰즈의 죄>는 가독성이 있다. 책등에 박힌 “지적이고 우아한 작품”이라는 평에 동의한다. 잔혹함과 악이 발생시키는 피와 오물이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튀지 않게 잘 처리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상세히 기술하여 같은 모습과 인상을 각인시키는 게 아니라 독자의 경험과 상상력을 토대로 거름망을 거쳐 인간의 잔혹성과 악마성을 비추어보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상반된 저것이 뒤따라 붙여 독자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나 단언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분명히 회전문을 밀고 들어갔는데 다시 문밖으로, 원래 자리로 되돌아와 있다. 이 책은 잘 읽히면서도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장소 외에도 여러 문학작품들을 얽혀놓았지만 억지스럽지 않다. 장르 문학이라지만 소설은 마치 미로 같은 거미줄을 닮아 작가 토머스 쿡을 거미로 연상시킨다. 자기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온 독자가 미로 속에서 어떤 길을 더듬을지, 그 중심에 가닿을 수 있을지 멀리 떨어져 주시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주, 학교 복사실을 방문했는데 아저씨가 안 계셨다. 지난 15년간 봤던 아저씨가 없지만 그곳은 여전히 복사집이었다. 내게 그곳은 학교에 귀속된 일부라기보다는 복사집 아저씨 고유의 독립된 공간으로 인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아저씨는 복사집을 지켰지만 그 공간은 아저씨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아저씨의 자취는 그 공간에서 깨끗이 지워지고 없었다. 아저씨의 흔적은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손님에 의해서만 알아차려지는 것으로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 “왜?”라고 묻지 않는다면 아저씨는 그 공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아저씨가 혼자 다른 곳에서 자신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어떤 시간을 이어갔는지를 더듬는 일은 아저씨가 사라지고 없는 곳에서 타인이 “왜?”라고 묻는 것과는 다르다. 나와 같은 타인이 아저씨가 머문 곳을 보면서 “왜?”라는 질문과 함께 기억을 더듬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아저씨의 부재를 애도하며 여전히 함께 하는 현재성을 지니게 된다. 이 소설에 유독 “먼지 같은 존재”라는 비유가 많은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겠다.

 여기서 길게 복사집 아저씨에 관한 일화를 언급한 이유가 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상황은 다르지만, <줄리언 웰즈의 죄>의 줄리언 웰즈를 아저씨에, 화자 필립 앤더스를 아저씨를 기억하는 손님 자리에 대입하고 싶다. 토론 때, 줄리언이라는 인물을 놓고 평가가 갈렸다. 그런데 이 상반된 평가의 불꽃을 진화하는 것이 필립의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전혀 위대할 것 없는 개츠비를 화자 닉은 통념적인 위대함의 개념을 부수고 자기만의 관점의 ‘위대함’을 그에게 부과한다. 그런 것처럼, 필립도 외롭게 죽음을 감행했을 친구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여행을 감행한다. 어떤 말로 친구가 나룻배를 돌려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의 책과 행방을 거슬러 따라간 후 친구에게 해줄 말을 찾는다. 친구에게 해줄 말은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세상은 소음들로 가득하지만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너는 어둠에 대해 밝히는 목소리였노라며 친구를 잃은 슬픔의 비가를 완성한다.

 줄리언이 첫 책에서 “나의 죄의 증인인 필립에게”라는 헌정사를 남긴 것은 그의 삶을 돌아보고 심판할 자격을 애초에 필립에게 부여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 자행한 뜻밖의 죽음 앞에 “왜?”, “고작 그런 이유로?”, “남겨진 사람은 생각 안 하나.”라며 그 죽음에 대해 비정한 말과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줄리언이라는 인물도 독자들에게 그런 비난 섞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줄리언의 인생을 꼬리에 꼬리무는 질문으로 파고든 후 필립이 하는 말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뭐?’라는 물음이 그대로 유효한 소설이지만, 이런 점에서 독자는 소년에게는 영웅이 필요한데,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잃은 위기도 이겨낸 그가 사회학적인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잃는 순간 그의 삶이 허물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도 강도의 차이일 뿐 무심히 던진 돌로 개구리를 죽이는 ‘실수’를 곧잘 한다. 여기서 말한 영웅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 말하자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끌고자 했던 야망과 꿈, 이상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특출났던 줄리언은 일종의 성인(남자)되기 관문으로 더러운 전쟁을 치르던 아르헨티나로 성장통을 치르러 건너갔지만 그 여정은 그에게 문제해결의 열쇠를 제공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그를 미궁에 빠뜨려 죽을 때까지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로 만든다. 스파이에 대한 환상으로, 자신이 지닌 힘(거짓말과 위장)을 검증해보려던 의도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목을 죄는 결과를 부른다. 애들 장난 같이 시작하여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은 자신의 손을 그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그일 수 없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뜯어보기가 그의 평생의 화두가 되었을 것이다. 무고한 마리솔을 처참하게 죽게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 또한 어리고 무지했음을 위안 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폭력과 잔혹함으로 자신의 죄를 설명하고 가리고 싶었겠지만 그 일은 바깥을 향하기보다는 결국 자신을 찌르는 겨누기가 되어버린다. 너무 멀리 가서 되돌아올 곳을 잃어버린다.

 줄리언은 유고작까지 합쳐 여섯 권의 소설에서 억울하게 죽은 자의 입장을 다루면서 자기치유와 과거 속 자신과의 화해를 모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희생자의 이야기에 포개지지 못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수록 가해자인 자신의 무모함을, 권력에 대한 광기어린 야망을 드러냈을 것이다. 줄리언은 생전에 자신이 초래한 살해(범죄)를 면죄받기 위해 빛과 따뜻함, 안온함과는 거리감 먼 곳에 자리의 위치를 점하고 스스로를 벌세우며 비하하였을 것이다. 줄리언은 인생을 정산하는 시점에서,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에서처럼 아름다운 이는 죽고 쓰레기 같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살아있을 때도 그에게 허락된 삶은 타나토스에 휩싸이고 어둠이 짙게 드리운 ‘결박’된 것이었기에 그는 죽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삶의 거미줄이자 덫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토론 때 고백한 것처럼, 나는 내 안에 폭력성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했고 그것이 밖으로 아니면 나에게로 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폭력성은 늘 그 곳에 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만 인식되어지는 듯하다. 그렇게 알아차린 나의 또다른 모습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존재일 수 없어진다. 또한 방패만 갖고 살아온 삶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앞으로 다른 한 손에 창도 거머쥐기로 했다. <줄리언 웰즈의 죄>가 말하듯, 언제 어떻게 잡아먹힐 줄 모르는 게 삶이라면, 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성장통이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의 멍에이자 치부로 남아 영영 빛이 허락되지 않는 암흑으로 밀어 넣는 구멍이라면, 나는 나(내 이상)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자 창을 빼어들 생각이다. 세상이 악이고 위장이고 거짓일 때는 순진무구함과 선량함만이 답이 되어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의심 없음과 맹신이 나를 멸하게 하는 독이자 암덩어리일 수 있음을, 지금 손아귀에 꽉 쥐려는 것이 무엇인지 힘을 풀어 펼쳐보게 한다.

 소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소설 속 소설’, ‘탐정가 안의 탐정가’ 식으로 중요한 서술구조라고 생각한다. <어둠의 심연>의 화자 말로는 처음에 식민주의자 커츠에 대해서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그를 만나며 그를 둘러싼 실체를 마주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독자적인 판단을 내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의, 도덕과 같은 말도 심지어 백퍼센트의 순도를 지닌 말이 아님을 의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의심과 자기 판단과 생각 고치기의 작업은 사람을 두렵고 암울하고 지치게 한다. 하지만 절대적인 진리와 신념이 자취를 감춘 이 시대에 우리가 따라 갈 길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소신과 판단이 되어버린다. 거대 담론과 사상이 허물어지는 시점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사적인 판단이 도리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특히 인생의 노년기에 자기 삶을 정산할 때 우리가 마주하기 가장 두려운 것은 쓸모 없거나 소모적인 삶이다. 한심하고 못난 인간이라는 좌절감과 패배감에서 벗어나 그래도 우리가 내일 떠오를 해를 고대하게 하는 것은 나의 삶의 의미를 함께 알아봐주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삶은 가치 있어!”라고 개별성을 부여해준다면 살만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도 그런 빛나는 말을 상대에게 반사시켜 말할 수 있어야겠다.

 토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내가 줄리언 웰즈를 그리 괘씸해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안에 도사리던 독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물어봤다. 결국 소설을 읽는 행위는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일인 것이라는 확인과 함께 내 안에 줄리언과 겹쳐지는 모습이 많았고 그런 모순덩어리인 그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 필립과 여동생이 고마웠던 것 같다. 따지고 들어가니 뭔가 위대한 일, 적어도 남과 다른 일을 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뜻이나 그렇지 못함이 빚어내고 같은 선상을 맴돌며 지하로 내려가는 마음상태로 인한 자살 충동, 그리고 필립의 아버지와 같은 남의 눈에 반려자나 자식 없는 소모적인 삶으로 비춰질 수 있는 우려, 밝고 활기차기보다는 생각이 많고 암울하고 밀폐적인 성향, 어디에서도 안식과 만족을 취하지 못하는 방황하는 습성 등이 나와 많이 비슷했다. 줄리언의 삶에 대한 필립의 리뷰와 비평은 그 역시 믿을 만한 화자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자격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의 삶에 대한 기술은 그의 평론가적 한계와 오랜 질투심을 털어내고 그가 진짜 친구이자 성인, 그리고 작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한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해외에 비해 그래도 한국은 비교적 범죄가 덜한 나라인데 왜 이렇게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정치를 불신하게 되었나?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해외에서 빚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에 견주어볼 때 한국이 겪는 사건사고는 별 것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람이 가장 본모습에 가깝게 위장 없이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믿음 혹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뭔가를 계속 벗겨보고 의심하고 자문하고 물고 늘어지는 일이 근대인의 정신이고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사람을 너무 지치고 고단하게 만든다. 어떤 앎이나 방향성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미로속의 허덕임과 관망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무력하고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나친 미로화는 존재의 의미 자체를 공중분해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인생이 지도와 미로 사이를 적절하게 오고 갈 때, 그 흩어짐과 방향성을 동시에 품고 있을 때, 적어도 살아볼 기력을 얻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 아닌 생존의 기력인 것이 서글프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이달의 사락 s********d 2017.08.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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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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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줄리언 웰즈의 죄”는 네 번째로 만나게 된 토머스 H. 쿡의 작품이다. 첫 만남이었던 “심문”은 전형적인 미스터리물이었고, 현재의 그가 가진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달까, 각인되어 있는 쿡 스타일로 안내했던 것은 “붉은 낙엽”이었고 다시 “채텀 스쿨 어페어”로 정서의 깊이를 더해갔다. 점점 더 진화하는 것 같고, 더 어려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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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줄리언 웰즈의 죄는 네 번째로 만나게 된 토머스 H. 쿡의 작품이다. 첫 만남이었던 심문은 전형적인 미스터리물이었고, 현재의 그가 가진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달까, 각인되어 있는 쿡 스타일로 안내했던 것은 붉은 낙엽이었고 다시 채텀 스쿨 어페어로 정서의 깊이를 더해갔다. 점점 더 진화하는 것 같고,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쿡의 작품세계. “줄리언 웰즈의 죄는 이제껏 읽은 그의 작품 중 대중성 측면에서 가장 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단순히 그 점만으로 가치를 폄하할 수 없는 고유의 완성도가 있다.

 

 

해결되지 않는 범죄보다 잊히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는 이야기는 없다고 썼지만

의문이 풀리며 드러난 진실도 잊히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발견한 진실도 그랬다.“ (P.14)

 

 

줄리언 웰즈의 작가적 재능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한창 작가로서의 전성기를 누려야 할 50대에 돌연 호수 한가운데에서 팔목을 긋고 자살로 생을 고한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절친 필립은 줄리언의 책을 따라 과거로의 여정을 따라 올라가게 된다. 하나 뿐인 진정한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필립은 황금 같은 청춘기와 작가라는 제2의 인생서막을 제대로 누리지도 않은 채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헛된 기다림과 찰나의 고독을 감히 짐작조차 못했을 그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과거행적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줄리언이 죽음 직전 보고 있었던 남미 아르헨티나 지도로 시작하여 반인륜적 역사를 다룬 친구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의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불행한 실종사건에서 단서를 잡는다. 책의 헌정사는 이랬다. “내가 지은 죄의 유일한 목격자인 필립에게 이 책을 밝힙니다.”라고. 그랬다. 아직 민주화의 봄이 도래하지 않았던 남미 대륙은 정국이 혼란했다. 그 중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소위 더러운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추악한 만행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더러운 전쟁(Guerra Sucia)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국가에 의한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을 자행한 시기를 일컫는다. 학생·기자·페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게릴라 및 동조자가 주 피해자이다. 1만명 정도의 몬토네로스와 인민혁명군의 게릴라가 실종됐고,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러운 전쟁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시작됐다. 이들 대부분은 억울하게 죄목을 뒤집어쓰고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러운 전쟁말기인 1980년대 당시 줄리언과 필립은 방관자적 위치에 서 있었다. 30년전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성 마리솔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고 그것의 진실이 수면 위로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과거와 현재는 진실공방으로 이어지며, 기억의 모호함에 가려진 선악의 근간마저 뒤흔들게 된다. 위태롭게 흔들린 양심은 줄리언에게 죄를 물을 만큼 무겁게 짓눌러왔으니 감당하지 못한 그를 끝내 자살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유를 속히 알아내고 싶지만 중반까지 는 그날의 기억들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히 마리솔의 실종에 어떤 책임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더러운 전쟁에서 일어난 실종사건 중 마리솔의 경우는 왜 그랬던가? 에 대한 해답은 후반부에 비로소 제시되기에 거기까지 도달하는 여정은 모호한 안개 정국이다. 그래서 후반부에서는 막힌 속을 뻥 뚫어주려고 작정한 것 마냥 상세히 설명해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마저 든다.

 

 

아이들은 장남삼아 개구리에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진짜 죽는다는 것. 젊은 용기를 의도하지 않는 결과로 호도한 대가는 컸었다. 설마 그러할까? 싶었는데 순진한 청춘은 이를 고이 곧대로 새겨듣고 실천한다. 세상을 너무나도 낭만적으로 생각한 것인지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라는 조언의 이면에는 부디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랐던 기성세대의 무기력한 심술이 있는 줄 몰랐던 무지가 2차 책임이었다. 사내아이들의 장난 같은 망토와 단검이론에 넘어가 어리석은 수렁에 깊이 빠져 들어간 후였으니, 선의의 피해자는 반인륜적 역사에 희생당하고 만 것이었다.

 

 

관건은 적에게 던져줄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해야 한다는 거지.

 사투르누스에게 잡아먹힌 자식들처럼 영문도 모른 채

 잡아먹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다.“

 아버지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래서 그런 술책을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라고 부르지.“ (p.318)

 

 

차라리 이 책의 제목으로 그대로 썼어도 좋았을 이 말, ‘사투르누스의 기습’. 사투르누스는 그리스에서는 크로노스라고 일컫는 고대 로마의 농경신으로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었다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시간의 의미와 함께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는 인간성의 타락을 상징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다. 때론 사람들은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는 약점이나 치부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그 내면에는 죄의식도 함께 들어있어 꽁꽁 숨겨 왔던 그것들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빗장을 몰래 열고 세상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산다.

 

 

 

믿음에 일순간에 배신당해 파멸당한 사투르누스의 자식들처럼 줄리언의 삶도 산산조각 났듯이 대부분의 사람들도 아차 하는 순간, 송두리째 달라진 변화를 겪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순간이 사투르누스의 기습이 된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이처럼 섬뜩하게 경고하는 표현이 또 있을까? 서정적이며 시적인 문장과 잔인한 원죄 의식은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해서 완전한 이해까지는 못했어도 여타 작가들과 그 심오한 경지가 다르다는 건 인정하게 된다. 이번에도 감탄했다.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같이 먹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짬짜면이다.

 

 



q****5 2014.04.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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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내용보기
[신간] 토머스 쿡 <줄리언 웰즈의 죄>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 '사투르누스(Saturn)'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해당한다.   사투르누스는 '자식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고, 그것이 실현될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자식들을 차례로 잡아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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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토머스 쿡 <줄리언 웰즈의 죄>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 '사투르누스(Saturn)'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해당한다.

 

사투르누스는 '자식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고, 그것이 실현될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자식들을 차례로 잡아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의 광기어린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잔인하게 묘사된 그림과는 달리 고대로마에서는 사투르누스를 기념하여 매년 말이 되면 떠들썩한 축제를 벌였다. 또한 사투르누스의 이름은 토성(Saturn)과 토요일(Saturday)에도 남아있다. 이런 사투르누스가 우리의 인생을 기습한다?

 

모호한 말을 남기고 자살한 작가

 

위의 한 문장은 토머스 쿡의 2012년 작품 <줄리언 웰즈의 죄>에 등장하는 인물 줄리언이 자신의 공책에 남긴 글이다. 작품 속에서 줄리언 웰즈는 평생동안 세상을 떠돌며 어두운 인물들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글로 남긴 작가였다.

 

줄리언은 러시아의 연쇄살인범, 헝가리의 마녀, 미제로 남겨진 스페인의 살인과 고문사건 등을 추적해왔다. 줄리언의 한 지인은 그를 가리켜서 '그런 인간들을 머릿속에 넣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구나'라고 말을 할 정도다.

 

그런 줄리언이 어느날 자살을 했다. 작은 배를 타고 호수 한 가운데로 들어간 뒤에 칼로 자신의 양 손목을 그엇다.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장을 남긴 채로. 줄리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필립은 충격을 받고 슬퍼하지만 곧 줄리언의 자살을 조사하기로 마음먹는다.

 

줄리언은 그의 저서 <쿠엥카의 고문>의 헌정사에서 '내가 지은 죄의 유일한 목격자인 필립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필립은 아무리 생각하고 기억을 더듬어도 줄리언의 죄를 목격한 적이 없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결국 자살하고 말았을까. 필립은 줄리언의 여동생과 함께 그의 죄를 추적하기 위해서 파리와 런던, 헝가리, 러시아 등을 떠돌기 시작한다.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밀실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는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기이한 욕망이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상한 약점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끄럽고 슬픈 인식도 함께 담겨 있다. 어쩌면 그 밀실 안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죄'가 들어있을 수도 있다.

 

가끔씩은 이런 밀실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아 걸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들 수 있겠지만, 이 밀실을 더 이상 유지하거나 숨기기 힘들 경우에는 줄리언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삶이란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모든 것이 달린 복권과도 같다. 가슴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것들이, 평소에 두려워하던 어떤 것들이 언제 눈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그것은 사투르누스의 기습과도 같다. 믿고 있던 아버지에게 잡아먹혀서 인생이 끝장난 자식들처럼, 우리의 인생도 영문도 모른채 단 한 순간에 바뀌어서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만, 살다보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결국 사투르누스의 기습이기 때문이다.

t****o 2014.03.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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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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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H. 쿡의 소설 줄리언 웰즈의 죄는 친구 줄리언 웰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찾아가 친구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친구의 행적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 나가고, 그러면서 왜 친구가 죽었는지에 대해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친구는 굉장히 거대한 죄악 때문에 죽은 것이고, 그 죄악의 무게를 설명하기 위해 초장에 묵직하게 세상의 악에 대해 돌아 본다는 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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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H. 쿡의 소설 줄리언 웰즈의 죄는 친구 줄리언 웰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찾아가 친구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친구의 행적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 나가고, 그러면서 왜 친구가 죽었는지에 대해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친구는 굉장히 거대한 죄악 때문에 죽은 것이고, 그 죄악의 무게를 설명하기 위해 초장에 묵직하게 세상의 악에 대해 돌아 본다는 분위기를 잡는데, 이 부분이 잘 표현되어 있었고, 차분하고 쓸쓸하면서도 그런 음침하고 거창한 분위기가 잘 살고 있었던 점은 훌륭했습니다. 친구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알아 보는 것인데, 세상 전체의 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커다란 느낌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중반이 조금 늘어 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감당 못할 진실이 있다”로 뜸을 들인 상당수 이야기들이 그렇게 분위기를 잡은 것에 비해 막상 결말을 보면 별로 그렇게 어마어마하지 않아서 실망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이 책도 저는 그런 쪽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막판 반전이나, 사람의 행동과 거대한 악이 맞물리는 마지막 결말의 주제는 초반에 비해 부족했다고 느꼈습니다. 아주 헛도는 것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대신에 주인공과 친구가 같이 있었던 시기인 아르헨티나 독재가 많은 희생을 불러 왔던 “더러운 전쟁” 시기에 관한 이야기들은 무척 읽을 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돌아 보면 중심 이야기보다, 친구가 남긴 책에 쓴 “악행”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개해 주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더 재밌기도 했습니다.


친구가 남긴 책들의 소재가 된 세상의 악행으로 작중에 언급된 것들은:


- 러시아에서 일어난 잔혹한 미성년자 연쇄살인

- 바토리 백작 부인의 전설적인 살인들

- 감금 사건인 인도의 캘커타 블랙홀 사건

-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등입니다.


사건을 따라가는 재미가 약간 모자랐다고 느꼈고, 결말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서술에 처음부터 끝까지 깔려 있는 무거운 분위기와 친구와 기억에 대한 아련한 느낌이 붙드는 면은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g******r 2015.05.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