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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태초의 지식에 대하여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태초의 지식에 대하여" 내용보기
어떤 철학 책을 읽다가 사람의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선천적인 본능에서 기인하는지, 아니면 문화와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철학자들이 논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책에선 수치심은 후천적인 걸로 결론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럼 후천적이라는 수치심 말고 동물이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다가가 젖을 빠는 것'이나 '철새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데 그 경로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태초의 지식에 대하여" 내용보기
어떤 철학 책을 읽다가 사람의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선천적인 본능에서 기인하는지, 아니면 문화와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철학자들이 논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책에선 수치심은 후천적인 걸로 결론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럼 후천적이라는 수치심 말고 동물이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다가가 젖을 빠는 것'이나 '철새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데 그 경로를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날 때부터 아는 것' 같은 생물체의 선천적인 욕구나 본능들은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달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생물체는 배우거나 경험해 보지 않은 지식을 어떻게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고 있을까? 마침 최근 과학 신간들을 둘러보던 중에 이 책을 본 기억이 나서 이 질문에 답이 될 것 같아 바로 사 읽었다. 귀여운 병아리 삽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온다. 이 책은 생명체가 최초로 습득한 지식의 근원을 파헤치고 그 지식이 후세에 전달되는 과정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와 연구진들은 여러 동물로 실험을 해 왔으나 이 책에선 귀여운 병아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들만을 소개한다.
연구진은 병아리가 태어나자마자 처음 본 대상을 부모로 인식하고 졸졸 따라다니는 '각인'습성을 이용해 병아리로 온갖 기상천외한 실험들을 하는데(고통을 가하는 실험은 없다) 이 다양한 실험들의 결과에 따르면 의외로 병아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듯하다.
3차원 현실에선 불가능한 펜로즈 도형(4차원 물체)를 병아리에게 보여줬더니, 병아리들은 펜로즈 도형을 기피하고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도형만을 선호했다고 한다.  덧셈과 뺄셈도 훌륭하게 수행해 내는 우리의 놀라운 병아리들. 가림막 뒤에 숨은 각인 대상(동료)들의 수를 본능적으로 파악한다.  빛의 음영을 위아래로 바꾼 것만으로 우리 뇌는 이 원들이 볼록하거나 오목하다고 판단한다. 갓 태어난 병아리들도 우리와 같은 판단을 내렸고,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아래쪽에서 빛이 비치는 환경에서 살아온 병아리들조차도 검정 음영이 아래쪽에 있는 원을 볼록하다고 여겼다. 이는 경험보다 뇌에 각인된 지식이 훨씬 강하다는 걸 보여준다.
책에서 소개한 여러 실험들을 통해 저자는 병아리가 똑똑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경험과 학습이라는 과정을 가질 시간이 없던 갓 태어난 병아리임에도 어느 정도의 판단력과 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구상 모든 동물들은 지구의 중력은 땅으로 향하고, 빛은 대체로 위에서 내리쬔다는 것을 안다. 물은 마셔야 할 것이고 천적은 피해야 할 것임을 안다. 이런 당연한 지식들은 수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개체마다 매번 새로 습득하는 대신 생물체의 뇌에 아예 물리적으로 각인되었고 따라서 갓 태어난 새 생명이라도 그 뇌가 완전한 백지가 아니다.  작고 따끈따끈한 병아리의 두뇌에도 사물은 일정 공간을 그 부피만큼 차지한다는 법칙, 빛의 농도가 변하면 색깔의 겉보기 색이 변한다는 사실, 기초적인 수학적 개념과 연산 기능 등등 기초적인 자연적 패턴과 지식들이 알에서 깨고 나올 때부터 탑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귀여웠던 실험의 삽화. 천장에 움직이는 점이 보이면 병아리는 긴장하고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다가, 그 점이 갑자기 확 커지면 냅다 도망친다. 아마도 점을 천적인 맹금류가 덮치는 걸로 느낀 모양이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맹금류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 가지고 있었을까? 책의 주 소재가 병아리다 보니까 귀여운 삽화가 많아 책을 보면서 미소를 여러 번 짓게 했다. 실험들의 내용들은 매우 흥미로웠고 병아리와 집념의 실험자 양쪽 다 나를 놀랍게 했다. 또한 쓸데없는 내용은 다 쳐내고 핵심만 간결하게 적어서 분량은 적은 편이었고 덕분에 금방 완독했다.
여러 실험들을 보여준 후 저자가 내린 결론은 아주 논리적이고 간결했다. 책이라기보다는 마치 귀여운 논문을 한 편 읽은 느낌이었다. 책을 읽기 전 내가 궁금했던 점들(본능이 어떻게 생겨났고 후세에 전달되는지)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이 책은 좋은 과학 책의 훌륭한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각인된 지식

각인된 지식
글쓴이
<조르조 발로르티가라> 저/<김한영> 역 저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h******s 2024.03.16. 신고 공감 20 댓글 15
리뷰 총점 eBook 구매
생명체의 근원적 지식을 알 수 있다면?
"생명체의 근원적 지식을 알 수 있다면?" 내용보기
생명에 대해 공부할수록 점점 더 많은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를 이루는 같은 DNA를 갖고 있지만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수십 억년의 진화를 통해 빚어진 유전자는 생명체가 태어날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가장 유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고 긴 진화의 시간동안 축적한 지혜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날 때
"생명체의 근원적 지식을 알 수 있다면?" 내용보기
생명에 대해 공부할수록 점점 더 많은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를 이루는 같은 DNA를 갖고 있지만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수십 억년의 진화를 통해 빚어진 유전자는 생명체가 태어날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가장 유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고 긴 진화의 시간동안 축적한 지혜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진화의 지혜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주제와 관련해서 폴 블룸 (2013) 《Just Babies》 (번역본 《선악의 기원》)을 읽었던 적이 있다. 심리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의 진지하고 기발한 연구들을 통해 우리는 복잡한 행동을 하는 동물들이 가진 선험적 지식의 속성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폴 블룸이 인간 아기의 사회적 본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면, 이 책은 병아리를 통해서 인간에게 할 수 없었던 더욱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동물의 근원적 지식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이 분야의 지식을 확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설적인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조류의 어미 각인을, 니코 틴버겐은 조류의 초정상 자극이라는 개념을 알리면서 동물 행동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개념들을 확립했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동물행동학 연구의 전통을 이으며 더욱 정밀하게 설계된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최신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가독성도 높고 내용도 매우 흥미롭다. 더군다나 분량도 매우 간결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YES마니아 : 골드 g*****e 2025.01.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