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인, 우리는 사회인이다. 일견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이 단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회인이 아닌 사람이 있기에 쓰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사회인이라는 말을 언제 처음 사용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가 처음 사회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군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할 날을 기다리며, 오로지 사회인이 되는 그 날 만을 기다리며 군대생활을 했던 것 같다. 아마 그 때는 사회인이라는 것이 민간인이라는 의미와 같게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도 나는 사회인이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비로소 사회인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만이 사회인이라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직업이 없거나, 나이 어린 사람들 혹은 나이를 먹고 은퇴한 사람들은 사회인이 아닌 것일까? 이 책의 저자 데루오카 이츠코는 사회인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는 개인’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나이나 노동자인지의 여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인과 정의 자체가 다르다. 우리는 직장인이 아니면 사회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료로써,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써 모두가 사회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회사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사회인으로 걸맞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인으로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노숙자, 청년백수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와 어울리지를 못하고, 그리고 고령자나 은퇴자들은 은퇴와 동시에 사회적 관계가 끊어진다. 이런 사람들은 끝없이 개인으로의 분열만 할 뿐, 자신이 사회인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원인을 사회구조 속에서 찾고 있다. 무한경쟁으로 청년들은 취직자체가 힘들어지고, 공동체 붕괴가 심화되면서 개인이 사회인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적 인간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노동이라고 할 때,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노동을 임노동화, 상품화 하면서 노동 자체를 계급화 시키고 있다. 그만큼 사회인으로써의 삶 자체를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동을 삶 그 자체가 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산업계가 주장하는 경쟁원리와 모든 것을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사고는 교육은 물론 정치, 노동, 그리고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같은 노동자임에도 서로가 분열되어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우리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관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 지금의 사회는 인간을 위해 경제활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 봉사하기 위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는 결국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키우는 격차사회를 공고히 할 뿐이다. 생활환경의 커다란 변화 앞에서 한 사람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따라서 인간의 생활에는 서로 돕는 공동부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전에는 지연이나 혈연이 그 역할을 했지만, 그러나 현대사회는 지연, 혈연에 의해 관습적으로 서로 돕는 인간관계는 이미 무너졌고, 그것을 대체할 사회제도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우리가 사회인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똑 같은 인간으로서의 유대를 소중히 여기는 연대의식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나날이 벌어져가는 격차와 차별은 사회인의 의식을 방해하는 커다란 벽이지만, 사회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길러주고 배려를 사회적 관습이나 교육 속에서 끊임없이 길러준다면, 격차와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교육이 제역할을 다하여야 하지만, 신자유주의 사회는 경쟁에 의한 시장경제나 사유재산 보호와 같은 이념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저자는 정치 혹은 사회의 참여자로 개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의 사회참여가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고 자신들을 사회인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사회인으로서의 의식이 사라지면 미래에 대한 책임도, 희망도, 더 나은 사회로의 개혁의지도 사라진다. 모두가 자기이익만을 생각하는 힘든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경쟁보다는 연대를, 분열보다는 공존을, 그리고 절망보다는 희망을 꿈꾸기 위하여 사회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인이라는 것은 직업을 가지고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이든 아니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인간으로서의 유대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가는 연대하는 개인들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사회를 분석하면서 사회인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와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사회인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사회도 일본사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신자유주의의 발호 속에서 오히려 일본사회보다 더한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개인들은 분열되기만 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이 책은 사회인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과연 사회인인지를 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저자의 말 한마디가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는다. “사회에 눈을 뜨는 것은 관계에 눈을 뜨는 것이고, 관계에 눈을 뜨는 것은 새로운 자기자신에 눈을 뜨는 것이다.” (57쪽)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사회라는 단어의 어원은 중국의 《근사록》중 치법류 편에 나오는 “향민위사회(鄕民爲社會)”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회란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일정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회합하는 것 또는 단결하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어의 게젤사프트도 어느 한 지역에 사는 동료를 의미하며, 라틴어의 소시에타스 (societas)도 동료. 공동성을 의미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메이지 10년(1877)무렵부터 근대사회를 의미하는 ‘샤카이’ 社會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사회라고 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인간관계가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관계로 파악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한다. 즉 이로 미루어볼 때 사회인이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상호관계에 따른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을 사회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루오카 이츠코가 쓴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사회인이 무엇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 기술하고 있다. ‘연대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유쾌한 삶의 방식’이라는 부재가 붙은 이 책은 사회인으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조건과 저자가 속한 일본사회의 여러 사회제반현상을 기반으로 일본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그리고 있다. 일본사회는 최근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인한 실업률의 증대와 젊은이들의 개인주의 성향의 증대 및 1인가족의 증대로 사회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지역사회에서 공동현안을 스스로 해결하는 공동체인 협동조합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본을 가진 대기업의 논리 및 무분별한 시장확장으로 인해 지역의 중소상공인들이 어려움에 처해있고, 지역의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현재의 경제상황에서 이러한 제반 현상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 등은 자체 소비하고 단순히 화폐위주의 경제활동이 아닌 상호부조 및 협력의 공생관계를 모색하자고 한다. 그래서 취업이 되지 못한 청년들과 이미 일선에서 물러나 소속감 없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노년층에게도 사회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분배하자고 얘기한다. 현재의 신자본주의 논리에 의한 현재의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가진 젊은이들만을 사회인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생산성이 발생하지 않는 실업자는 사회의 패배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정년퇴직자나 노령자도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 사회에서 외면당해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살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에 매몰된 이들을 구제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구축되는 자생조직인 공동체만이 지금의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이라는 것이 바로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사회인의 기본조건이 반드시 경제활동을 해야 하고 사회구성원의 일인으로서 이 사회에 기여해야만 할 것인가? 사회인의 역할이 이런 대외적인 활동에만 한정된 것일까 우리는 지금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온 국민이 슬픔에 젖어있다. 유가족은 유가족대로, 그걸 바라보는 국민은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에 극도의 우울과 슬픔에 젖어있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로 단 한명의 생존자도 추가하지 못한 채 연일 희생자 숫자만이 증가하고 있다. 사고이후 이 사고에 대해 사고발생 경위부터 원인까지 다양한 분석과 예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다른 모든 원인을 차지하고라도 그 원인은 단 한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사회인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승객을 안전하게 목적지로 이송해야 한다. 혹 사고가 나더라도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둬야 하는 게 그들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근데 그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역할보다 개인의 안전을 우선했다. 선주는 선주대로 좀 더 많은 화물과 인원을 싣기 위해 배의 안전성을 고려하지 않고 배를 개조했고, 규정보다 많은 화물을 실었다. 관할지역에 들어온 배를 관제해야하는 관제센터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재난이 발생한 이후 중대본을 비롯하여 많은 기관들이 효율적인 구조 활동을 벌이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탑승객 숫자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고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 와중에 일부 몰지각한 공직자 및 정치가들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유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언행을 서슴치 않았다. 어느 언론의 지적처럼 이번사고의 처리 과정은 바로 대한민국이 어떤 수준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고였다. 우린 이 사고를 잠시 되돌려보자. 만약 선주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배의 개조를 하지 않았다면, 혹 사고가 나더라도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의 구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면, 혹 사고 직후 원활한 신고체계 및 재난 대응체계가 구축되어 재난에 대한 원활한 대응체계가 이루어졌다면, 그 피지도 못한 생떼 같은 목숨들이 저 차가운 바다속에서 울부짖고 있을 것인가? 지금처럼 온 국민이 이런 좌절감과 슬픔에 빠져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런 슬픔까지도 괜찮다. 생때같은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그 학생들과 그 부모들의 한 서린 그 통곡은 없었을 것이다. 174명이라는 숫자에서 단 한사람도 더하지 못하는 구조활동을 보고 온 국민이 이렇듯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논리를 벗어나 제대로 된 사회인이라면 자신이 현재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될 역할을 최대한 수행하는 것이다.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정밀하게 만들어진 기계처럼 움직이는 조직이다. 이 조직에서 어떤 이가 자신의 본분을 잊은 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이번 세월호 사건처럼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전가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난 구조관련 업무를 한다. 그렇다고 구조관련 업무를 직접 현장에서 수행하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구조관련 재난 시스템 개발업무를 수행한다. 정확히 말하면 민원인의 119신고를 받는 그 순간부터 해당 재난이 끝나는 시점까지 모든 업무프로세서를 전산화하는 일을 한다. 알다시피 119에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대부분 긴박한 여건이다. 그런 긴박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화재가 되었던, 위급환자가 되었던, 위험한 환경에 처해있는 구조의 순간이 되었던 가장 빨리 재난현장에 도착해 그 재난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우리는 골든타임이라고 한다. 생존이나 구조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스템을 개발할 때 가장 고려하는 것은 시스템이 처리되는 속도이다. 처리속도가 빨라야 단 1초라도 빨리 현장에 도착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스템에서 0.1초가 더 걸리면, 그 과정이 10개가 모이면 1초가 늦어지고, 20개가 모이면 2초가 늦어진다. 얼마 전 신고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0.5초를 줄이고 개발자 모두가 만세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만큼 재난이 발생했을 때 시간은 곧 생명이다. 하지만 시스템으로 그렇게 줄인 시간은 길에 나서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 최근 모 방송국에서 ‘모세의 기적’이라는 운동을 시행하고 있다. 즉 재난관련 차량인 소방차나 구급차가 출동할 때 길을 비켜주자는 운동이다. 도로를 주행하는 차량은 바로 노견으로 차를 이동하여 소방차나 구급차가 원활히 현장에 도착하게 하자는 운동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응급차량이 길에 나서서 아무리 싸이렌을 울려도 길을 비켜주기는커녕 자신의 할 일이나 자신의 길만 가는 차량들이 대부분이다. 시스템을 통해 아무리 시간을 줄여도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그 줄인 시간의 수십배를 길에서 허비하는 것이다. 만약 사고를 당한 환자가 자신의 가족이거나, 친척들이더라도 그들이 그런 행태를 보일지 의문이다. 이렇듯 현대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치닫고 있다. 아무리 위급한 환자가 발생해서 길을 비켜달라고 마이크를 붙잡고 방송을 해도 묵묵부답이다. 남의 불행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런 신자본주의 논리에 사로잡힌 이 땅은 자신의 역할이나 의무는 등한시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자신의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제반 사회현상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전의 다른 대형재난사고처럼 이번 재난이 발생하자 정부와 정치권은 온갖 대책을 내놓는다. 검찰은 모든 관계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이전의 대형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서해 페리호 침몰사건 등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많은 똑같은 대응과 방법을 내놓았지만 이 땅의 대형재난은 연일 끊이지 않는다.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예전의 행태를 되풀이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다 또 대형재난이 발생하면 가슴을 치고 아파해야한다. 무기력한 정부와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능력을 한탄하면서 말이다. 이제는 이런 불편한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런 국가적인 재난을 당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그만두자. 그저 슬픔은 유족들의 것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진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 말자. 그럼 이런 재난을 방지하고, 이 사회가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우리가 사회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될 역할에 충실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의무와 역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것이 바로 남을 돕는 일이고 이 사회가 원활하게 유지하게 하는 길이고. 그것이 바로 사회인으로서 이 사회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당을 하시는 분들은 정직한 재료를 써서 손님에게 좋은 음식을 내놓는 것, 선주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 불법개조를 하지 않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는 것, 선장과 선원은 자신을 믿고 배에 탑승한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하는 것, 불의를 보면 “아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 위급한 현장에 출동하는 구급차나 소방차를 위해 자신의 가던 길을 멈추고 차를 비켜주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러한 역할들이 모이고 모이면 이 사회는 온전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러한 사회에서는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이런 슬픔과 고통은 없을 것이다. 하루에 단 한 가지라도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남을 위하고 이 사회를 위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일을 한다면, 그러면서 모두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면, 더불어 그러한 분위기가 이 사회에 고정된 관념으로 정립된다면 세월호 사건같은 비극은 다시는 없지 않을까. 아직 많은 이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세월호 침몰사고, 사고가 발생한지 10일이 되가고 있지만 새로운 생존자는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간절히 바란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단 한사람의 생명이라도 생존해서 돌아와 174명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 숫자가 175,176,177로 계속 움직이기를. 그리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사회를 올바른 사회로 만들기 위해우린 우리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는 사회인으로 살기보다는 한 개인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어쩌면 세월호 사건도 개인으로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잘못이 모아져 오늘의 그런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하게 되지는 않았는지. 세월호 사건에서 이 땅의 국민 모두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이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사회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의무에 충실 하는 것. 그것이 이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의무이며,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아닐까? 나는 사회인인가! 우리는 사회인인가! 우리는 사회인으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에게 더할 수 없는 비통한 심정을 담아 위로를 보내며 단 한사람의 생존자라도 돌아와 이 땅에 기적이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이 리뷰는 예스 24의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싫든 좋든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작게는 가정에서, 크게는 국가라는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때 삶의 가치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다. 사회가 개인에게 좋은 구실을 할 때도 있지만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권력이라는 속성에 억압된 채 부당한 대우를 감수하며 살아온 것이 개인이었다. 하지만 21세기는 지금까지의 사회와는 달리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욕구가 이루어지는 시대다.
이 책에서는 점차 개인화 되어가는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어가면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처음 이 책을 폈을 때 깜짝 놀란 사실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과 책 속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명을 적당히 우리나라 것으로 바꾼다면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될 만큼 두 나라 사이의 간격은 좁았다. 특히 아이들에 대한 현재의 지식주입식 교육에 대한 걱정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노숙인과 생활보호 대상자, 고령화 사회에 대한 내용은 우리와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남의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를 결코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성숙된 사회인의 자세는 남의 불행을 나의 불행으로 인식하고 함께 그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는데서 시작된다. 내가 비록 지금은 정규직에 있더라도 비정규직 직원의 문제가 다음번에는 나의 문제라는 걸 알고 있다면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다. 아래의 좋은 사회와 나쁜 사회에 대한 정의는 이 책 가운데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좋은 사회란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자립과 자유로의 길을 여는 사회다. 나쁜 사회는 그 반대로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긍정적인 사회인으로 자라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교육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일본의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키워주기 보다는 획일화하는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장점을 부각시키고 칭찬해주기 보다는 단점을 보완하는 쪽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는 열등감을 갖기 쉽다. 좋은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감이 있어야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인이란 하나의 국가 안에 존재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지구라는 자연 전체를 생각하며 그 안에서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다 좋은 사회인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그 답을 개인의 노력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으로 찾았다.
사회적인 문제를 국가나 정치가들에게 묻기보다 개인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에 공감한다. 저자는 NGO 활동으로 그 답을 실천하고 있으며 옮긴 이 조차 생협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개인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사회는 20~30가구 정도 되는 마을이라고 한다. 마침 그런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나 역시 마을 주민들과 좀 더 나은 마을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내가 더 잘살기 위해서는 이웃과 함께여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책은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마을공동체를 위한 일을 구체적인 실천 쪽으로 한발 앞당겨 주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사회경제학자 데루오카 이츠코의 에세이. 사회인의 정의란 무엇인가 살피면서 본서는 시작한다. 대체로 스무살 전후의 성인 무렵을 사회인으로 간주하지만, 고교생부터 근로자인 이들이 있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하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드는 현재에는 나이 자체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저자의 설명에 공감할 수 있었다. 프리타 계층을 포함하며 은퇴한 고령자들도 사회인에 속하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주부, 경제 생활이 미약한 장애인,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서 파견직으로 살아가는 계약직 종사자, 그 모두가 요즘 시대의 사회인의 구성원이라고 규정한다. 2008년 이후 일본에도 몰아친 고용불안 사태속에서 20대 젊은이들이 정규직과 직장을 얻지 못한 것을 개인의 문제, 즉 실력이 모자라거나 게으르거나, 노력 부족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저자는 문제로 지적한다. ‘커다란 사회문제임이 분명한 것을 자기책임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혹은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면, 희망의 공간은 좁아지고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기 쉽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1장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의 주변부로 몰려난 사람들을 얘기하면서 사회란 무엇인가 정면으로 묻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회인이 되는 것’이고, ‘좋은 사회는 후세에 전해질 좋은 유산을 남긴’다. 논의를 확장하면서 저자는 2장에서 관계의 문제를, 이어 3장에서 본격적으로 노동의 의미와 일과 삶의 조화를 살피고 있었다. 극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번의 실패가 큰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재기불능을 만드는 상황을 비판한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공격하는 기득권 세력의 문제점도 조목조목 되짚어 독자에게 각성을 일으킨다. ‘레테르를 붙이는 것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인 시민활동이 쇠퇴하기를 노린다. 낙인찍기는 토론하고 행동하는 민주주의사회에 경계선을 긋고 토론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 버린다.’ (p.89) 독일의 전 대통령 바이츠테커의 말은 통렬한 울림을 주었다. “과거에 대해 눈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멀게 된다.” 2011년 대지진과 원전사고를 겪고난 충격 가운데서도 일본의 지성인들이 자국의 정치와 제도를 얼마나 깊게 반성하고 성찰했는지를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안이하게 의존해버리는 위임(委任)사회가 비참한 사고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회적 참사를 부를 것임을 가르쳐주었다.’ 분쟁국가에서 난민 구호 활동을 하기도 한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한 사유(思惟)들에서 현재의 나에게 와닿는 것이 많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실효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개인적으로건 시민단체로써건 사회의 오랜 관습과 부조리의 장벽에 맞서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저자도 알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느려 보이지만 차근차근 연대를 통해 변화를 일구어 가야한다는 목소리가 힘이 있고 따뜻한 위로까지 느껴지게 했다.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움직여보지 않으면 사회의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벽에 부딪치는 것은 진실을 아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온갖 장애와 부딪힘으로써 현실을 깨닫는 것처럼, 자신이 먼저 행동에 나서서 장애가 되고 있는 사물을 알아내는 것, 그것은 곧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다.’ (p.93) 90년대 발칸반도 코소보 전쟁때 난민구호 활동을 벌였던 이츠코는 이제 막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통하여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임을 간파했다고 한다. 현재의 사회인들도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하여 단순히 돈벌이를 넘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며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기쁨을 얻는 것을 바라는 수준에 이른다. 쓰나미 사고 이후 동일본 주민들의 실제 사례를 밝히며, 당시에 이재민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일을 제공했을 때 그들이 기꺼이 그 일을 하면서 회복이 빨라지는 것도 목격했다고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수입이나 보람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쓰라린 현실을 잊기 위한 심리치료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일본 노동에서 40%가 이미 비정규직 사원이라고 한다. 그들은 불안정한 고용, 저임금, 미비한 복지제도 속에서 밤낮으로 노동에 매달리고 있고, 여가생활을 할 여유와 시민정치에 참여할 정신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많이 공통되는 것 같았다. 독일과 영국에서 상담원과 카운슬링을 해주는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정부 당국의 공적인 상담소와 민간의 NPO단체가 유기적으로 조화되어 청년 실업자와 노숙인을 입체적으로 케어하는 사례를 저자는 부럽게 바라본다. 공공기관이 가질 수 있는 맹점과 시민단체가 갖는 약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복지에, 저자만큼이나 나 또한 존경심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법률과 제도와 시설이 있어도 그것을 활용할 지식이 없다면, 그리고 지원을 요청할 용기가 없다면, 또 제도와 연계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이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p.153) 개인의 성공이 비참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외면한 채 추구된다면 그런 사회가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지적한다. 결국 6년전의 후쿠시마 원전사고처럼 생명권이 위험하고, 어린 아이들의 성장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 사회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평범하게 생업에 종사해온 후쿠시마의 부모들이 앞장서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아이들을 방사능으로부터 지키는 후쿠시마 네트워크’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은 그저 임금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생활이 유지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활을 보장할 만큼의 임금이 지불되어야 하지만,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인간적인 성장과 동료와 연대하는 기쁨을 찾아내어 고립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인이란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p.164) 데루오카 이츠코의 고민과 모색은 교육 분야로 귀결된다. 일본은 패전 후 재건을 하면서 경제부흥 일로를 걸었고 거품 시기를 거쳐 어쨌든 현재의 초현대 국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일본의 정치는 실종되었고 모든 분야가 자본과 경제·금융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별이 심화되면 양극화를 낳으며 종국에는 사회를 분열시켜 놓는다. 저자는 서양과 일본의 여러 실제적인 사료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조곤조곤 말하지만 그 내용들은 중대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일본 사회에서 분열로 인해 계층이 단절되면서 벌어진 이상 징후들을 한국이 마치 따라가는 듯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질 때가 많아서 일본 서적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때가 많다.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에서도 그런 경고의 메시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2008년에 한 25세 남자가 아키하바라에서 칼을 마구 휘둘러 무고한 행인들이 죽거나 다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는 비정규직 근로자로 갑자기 해고되었고 무척 외롭게 생활해오고 있었다고 해서 일본에서도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국 버지니아 공대 유학생인 조승희가 학내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해 교수와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일도 책을 읽으며 떠올랐다. 개인의 광기로만 치부하기에는 그가 철저히 또래와 미국 사회에서 떨어진 채 외톨이로 지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미국에서는 그를 진작 이해하고 다가가주지 못한 점을 반성하였다고 한 뉴스도 기억난다. 그렇다고 저자가 반자본주의를 부르짖으며 공산주의라던가 반정부 운동을 하자고 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밑바닥부터 사회의 문제를 차분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고찰하면서 일본 사회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통찰력이 돋보였다. 저자의 전공인 생활경제학의 시각으로 생각을 펼쳐가다 민주주의, 심리학, 언어학 전반으로 논의를 확장해서 점차 넓은 시야로 이끌고 있다. 일본 학계와 출판물에 각 영역에서 특화된 전문가가 많다는 생각을 늘 해왔는데,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의 작가 또한 그런 분임을 알았다. 작가의 내공과 넓은 식견을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문장력을 겸비하여 여러 가지 깨달을 거리를 주고 있다. 헤아림, 자각, 연대, 참여. 이번 책을 통하여 생각하게 된 단어들이다. 소외된 주변인들의 실상을 헤아리고, 구조적인 문제를 자각하고, 같은 한계를 느끼며 서로 연대해서,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개인주의를 넘어 원자화되는 지금 사회속에서, 오지랖의 오해(?)를 무릅쓰더라도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일깨웠다. ‘연대는 사람들 각자의 한계를 깨트리고, 사회적 유대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게 한다.’ (p.243) July 2017 Aslan |
|
누가 사회인인가 과거에는 ‘독재’라는 거대하고도 명확한 상대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행동할까를 결정하는 것도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달리 공통된 적이 사라진 사회이다.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는 것 자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덕분에 사람들은 개인의 어깨에 짊어진 ‘생존’이라는 무거운 짐에 허덕이면서 타인에게 눈 돌릴 여유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회인’이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특별히 의식하고 쓰지 않는다면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 즉 직장인을 ‘사회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사회인 야구단’ 등의 용어에서처럼.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통념에 반대한다. “지금은 사회인이 되는 첫걸음인 취직 자체가 어려운 시대다. 안정된 직장에 취업한 사람은 60%도 채 안 된다는 통계도 있다. 그렇다면 취직을 못 한 사람은 사회인이 아닌가? 실업자나 정년 퇴직한 사람, 주부, 고령자, 장애인은 사회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료로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모두 사회인이다.1)” 즉, ‘사회인’은 취직유무에 상관없이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는 개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인이 아닌 사회인이 되라. 저자는 ‘경제인’의 논리인 ‘경제의 경쟁원리’와 ‘자기책임의 원리’가 타인의 아픔에 무심하고 자기 이익과 생존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키워 희망 없는 사회 - 격차(格差) 사회 - 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즉, “좋은 사회란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자립과 자유로의 길을 여는 사회다. 나쁜 사회는 그 반대로,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2)”라는 것을 전제로 ‘경제인’에 의한 사회는 ‘사회인’으로서의 연대의식이 생기지 못하게 사회를 분열시켜 절망의 사회를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고에 대해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는 사회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또 가까운 주변사회 속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사회가 더 인간적으로 따뜻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지는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라고 하면 거센 반발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사회의 지향점을 ‘사회인’이 사는 사회로 잡는다면 사람들이 그 지향점을 향해 달음박질할 동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얘기들을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저 임금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생활이 유지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활을 보장할 만큼의 임금이 지불되어야 하지만,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인간적인 성장과 동료와 연대하는 기쁨을 찾아내어 고립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인이란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3)”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사회인’이 사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삶의 공간을 인간답게 바꿔가는 시민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그것을 ‘사회인의 생활방식’이라고 이름 붙인다. 첫째, 사회와 관계 맺기 혹은 제도화된 사회안전망 활용하기. 지연(地緣)이나 혈연(血緣)이라는 관습적인 사회안전망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연약한 개인들이 현실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건강보험, 연금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과 같은 제도화된 사회안전망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다면, 개인이 사회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양한 사람이 만나 서로 지혜를 모으고 협력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 자체가 제도화된 사회안전망의 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일 / 개인생활 / 사회 세 영역에서 균형 잡힌 생활하기 인간은 더 잘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회사에만 메인 ‘회사인간’은 되지 않아야 한다. 이는 후쿠시마(福島)원전 사고 이후 원전 재가동과 관련하여 벌어진 ‘규슈(九州)전력 여론조작 사건’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경제산업성의 관료, 규슈전력 등의 임직원이 보인 행태는 ‘회사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회사 이외에 지역사회나 가정을 위해 일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전문성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키울 수 있다. 셋째, 교육을 통해 사회인 만들기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전까지 오로지 애국심을 높이는 교육만 하였다. 나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UN아동권리위원회에서 현재 일본의 교육에 대해 “일본 사회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환경이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어 집단 따돌림이나 등교거부, 학교 기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또 학교에서는 지도보다 관리에 중점을 두고, 권리와 자립보다 순종과 의무에, 창조성보다 협조성에 중점을 두는 건 아닐까? 게다가 학교 교과수업 및 활동이 너무 많아 여가나 레크리에이션 활동, 문화교육시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없는 건 아닐까 4)”라고 우려를 표시하는 것을 감안하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지금의 일본조차도 좋은 교육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 자신이 참관한 베를린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실시한 ‘우리마을’이라는 이름의 사회과 수업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 각 정당의 대표자나 교도소에서 장기복역 중인 사람을 불러 질의 응답을 하는 과정도 들어있다. 이는 처해 있는 환경이나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공통의 가치를 산출하는 민주주의의 실험을 바로 학교에서 시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감성으로 파악하고, 이미 익힌 지식과 서로 호응시키면서,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인간5)”, 즉 ‘사회인’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넷째, 내 손으로 민주주의사회 만들기 정치무관심은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저자는 “우리는 입법권을 가진 국회에 희망을 걸었다가 배신당해왔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신뢰 자체를 상실해서 아예 투포하러 가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한탄할 뿐 그것을 돌파하지 못했다.6)”고 한탄한다. 문제는 저렇게 정치무관심에 의해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것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를 더 좋게 바꿔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사회인의 행동으로 유지7)”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리나가[森永] 비소분유 사건8)을 봐도 알 수 있다. ““어째서 죄 없는 아이가 기업 이익에 희생되어 중증 장애에 시달려야 하는가? 아이들을 저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신발이 닳도록 발로 뛰며 조사를 계속한 소수의 개인들이었다. 그들의 행위에 호응하는 사회인이 속속 늘어나고, 그들의 낯선 타인을 생각하는 활동이 연쇄처럼 확산되어 사회를 바꾼 것이다. 9)” 이처럼 사회 연대에 기반을 둔 생활양식은 한자의 ‘인(人)’을 떠올려 보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사람은 본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나는 연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이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자유 속에 확고하게 발 딛고 선10)” 개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가 필요하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을 사회적인 유대 속에서 찾(기 때문이다.)11)”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에 레테르를 붙이게 된다. 이러한 “낙인찍기는 토론하고 행동하는 민주주의사회에 경계선을 긋고 토론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 버린다.12)” 결과적으로 ‘사회인’이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노력이 거꾸로 ‘경제인’이 사는 사회를 만들어 버리는 셈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저자가 예시한 사례를 참조하여 작은 것부터 ‘사회인’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좀더 나은 사회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1) 데루오카 이츠코[暉峻淑子],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조한소 옮김, (궁리, 2014), pp. 5~6 2)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91 3)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165 4)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p. 216~217 5)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217 6)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91 7)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257 8) 1955년 6월경 오카야마[岡山] 현(縣)을 중심으로 모니라가[森永] 유업(乳業)의 분유를 먹은 유아 12,131명이 비소에 중독되고 130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는 유질(乳質)안정제로 사용된 제2인산소다 속에 포함된 비소로 인해 발생한 일인데 사건 발생 19년째인 1974년에야 피해자들의 인생을 보장하기 위한 항구(恒久) 구제기관이 설립되었다. 9)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259 10)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89 11)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257 12) 데루오카 이츠코, 앞의 책, p. 89 |
|
옆집 숟가락, 젖가락 숫자까지 알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어린 내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동네 어른들의 시선이었다. '박씨네 아들은 10시까지 잠을 잔다던데, 김씨네 며느리는 인사를 잘 안한다던데' 같은 시시콜콜한 참견이 적잖은 부담이었다. 나이가 들어 도시로 이사오니 아무도 관심없는 사회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한의 익명성에 들떠서 예비군복 입은 아저씨들처럼 편한 마음으로 거리를 마음껏 활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정말 모든 세상이 그런 곳이 된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해야겠다. 그런 불안한 이들에게 이 책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라는 울타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는 책이다.
18세기의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일반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를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약속이라는 것이 사회계약론의 골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를 위해야 하는 묘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물질적 결핍의 충족을 위해 스스로를 전체화 시켜야 하면서도 이전과 같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있으려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팽팽한 개인과 사회의 균형 상태가 점점 무너지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데루오카 이츠코는 책의 부제를 '연대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부제에서 보듯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를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마을이 아닌 개개인으로 서로가 만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성원이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완충장치가 더욱 필요해진다.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허울만 좋은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했다. 사회적 완충장치는 개개인의 능력 뒤로 숨어버렸고, 앞서가는 이는 열심히 산 사람, 쳐진 사람은 무능한 이로 규정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구성원은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적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더욱 견고해지고 공동체는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제시하면서 개인이 변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격차사회가 형성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고, 격차가 커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는 현실을 일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예는 일본의 경우이지만 우리와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저자는 결국 사회의 힘을 믿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말한다. 관계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사회인으로 길러진 개인이 늘어날 때 이는 사회 전체의 이익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이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때, 신뢰와 협력이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연대와 공존이라는 유쾌한 삶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할 부분을 짚어주고 있는 책이다. 그 시작은 역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겠다.
|
|||||||
|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편이다. 세상에는 어쩌면 저렇게 사회에서 소외되어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 나는 가슴 아파하면서 때론 눈물까지 흘리며 보곤 한다. 그러나 그 뿐, 내가 그들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보여주었던 적이 있었는지 자문해 보면... ARS 전화 한 통 정도 걸어 주었던 것? 그러나 혹시 그 돈이 그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못했다면? 사회고발성 프로에서는 또 너무도 부조리한 모습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문득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아무런 일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해서 저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한다면, 사회의 몇몇 부조리한 모습을 보고서도 내 일이 아니라고 침묵한다면. 언젠가 그 일이 나에게 닥쳤을 때 나 역시 똑같이 처참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런 일이 영영 내겐 일어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자신할 수 있을까? 바로 어제만 해도, 세월호의 침몰로 온 사회가 비통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더 발생해 주기를 기도하며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렇게 사고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갑자기 닥치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어떻게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보다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말하는 사회인이란 정말 모든 사회 구성원을 의미한다. 경제적 활동을 한다거나, 특정 연령에 도달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회에 소속되어 서로 상호 관계를 맺어나가는 모든 인간을 사회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경쟁적인 분위기와 어려운 경제환경, 개인화된 문화 속에서 우리는 때로 '사회인'으로서의 의식이 사라지면서 자신의 안위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지곤 한다. "사회에 눈을 뜨는 것은 관계에 눈을 뜨는 것이고, 관계에 눈을 뜨는 것은 새로운 자기 자신에 눈을 뜨는 것이다.(p 57)" 사회는 나와 무관하게 돌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뿐만 아니라 이웃과 미래를 시야에 넣고 함께 하는 공생을 되새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좋은 사회란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자립과 자유로의 길을 여는 사회다. 나쁜 사회는 그 반대로,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p 91)
때로 우리는 저렇게 그 사람이 무능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저런 상황에 빠진 거라고 비난하지는 않았던가? 모두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개인에게 과다한 짐을 지우고 있지는 않은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도 모두 개인의 책임 문제로 귀결짓고 있진 않은가?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사회에서의 다양한 현상을 실제 예로 들며 굉장히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어쩌면 우리 나라와 이렇게 비슷한지 그 기시감에 무섭기까지 했다. 그리고 외국의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며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사회 및 의식 있는 사회인이 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공감해 주는 것, 그리고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고 인권의 평등을 위한 노력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반이란 사회인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제도와 각종 사회보장제도, 사회자본 및 공공서비스이다. 더불어 시민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 활동도 중요하다 하겠다. 지금 우리는 마치 세금을 내기만 하면 모든 책임감을 다하고 있는 듯, 실제로 협력과 공동의 세계는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회에서 국민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면, 결코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의 인간다운 하루하루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회인으로서의 자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은 의식적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회인으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도,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기분 좋은 삶의 방식이다. (p 251)
낯선 타인을 생각하는 활동이 연쇄처럼 확산되어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활동이면서도 연대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삶의 유쾌한 방식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 우리는 성인이라고 말한다. 본인들은 만19살이 넘으면 성인으로 생각하면서도 정작 성인으로서의 자립심은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다. 헌데 대학교를 졸업하거나 빠르면 24~5살, 늦어도 30살이 되면 그 때부터는 진짜 직장을 다니는 사회인이란 인식을 가지게 된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인하면 직장인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헌데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에서는 사회인이 곧 직장인이 아니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사회인이지만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인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사회인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뉴스를 통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다른 나라에 비해 행복지수가 무척이나 낮다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공부에 매달리고 대학교에 가서도 온갖 스펙 쌓기에 열중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지만 예전처럼 한 번 들어간 직장에서 정년 퇴직 때까지 근무하기 힘들어진 시대에 살고 있어 불안감이 높다. 평생직장이란 말이 없어진 지금... 자의에 의해서든, 분위기상 퇴직을 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직장을 떠나면서 사회와 분리 된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떨어져 나와 여러 가지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데 커다란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느낀다. 직장을 그만두어도 여전히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근무 시간이 많은 나라로 우리나라가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일본 역시도 우리와 비슷하며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도 집에까지 일거리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노동시간은 길고, 업무적으로 여유가 없으며 상사에게 혼이 나 마음의 상처를 받은 직장인들이 마음의 병을 얻어 TV에 자주 등장한다는 말에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일한 시간이 많으니 임금이 높으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겠지만 임금이 낮아 가족을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항에 몰리는 직장인들... 노조가 잘 형성되어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있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직장에 다니면 그나마 낫지만 아르바이트나 임시직, 같은 적절하지 못한 대접을 받아도 참고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그 고충이 더 심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면 괜찮겠지만 현실적으로 암울한 사람들이 더 많기에 영국이나 독일의 NPO와 같은 체계화된 상담소가 운영된다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는 적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NPO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가 일본인이라 일본의 다양한 사례를 예로 들면서 사회현상, 사회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있다. 여기에 자국을 넘어 터키, 독일 등에 대해 예로 들며 어떤 식으로 사회인이 되는가에 대해 알려준다. 책을 보다보니 우리나라와 일본이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겪는 고충과 문제점이 있으면 파업이나 노사쟁의를 바로 거치지 않는다고 한다. 고충이 무엇인지 직장평의회를 통해서 듣고서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그럼에도 생각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때서야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낼 방법을 찾는다. 이런 방법을 찾는 노력은 직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먼저 학교에서 토론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우리 앞에 있다. 세계인 모두가 신경 써야 하는 일도 있고 나라, 국민간의 분쟁도 여전히 존재하기에 탄력성을 가진 사회인이 많이 필요하다. 누구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은 꼭 필요하다. 사회가 갖은 어려움을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사회인으로서 자신이 어떤 역활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사회인이다. 직장인만이 아닌 우리 모두는 관계를 맺고 사는 사회인이다.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올바른 관계 형성이 필요하고 사회를 위해, 더 넓게는 인류를 위해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사회인'이란 말에 나도 얼른 직장인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은 어느 정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직장에 나가 제 밥벌이를 스스로 한다는 식으로. 데루오카 이츠코에 따르면 '사회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온 모양이다. 일본인들도 '사회인'을 흔히 '취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랬을 경우 여기엔 어쩔 수 없이 배제되는 이들이 생긴다. 오늘날 취업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청년 실업률이 날마다 오르고 있는 추세다. 그렇다면 비사회인들이 많아진다고 여겨야 할까? 도대체 이런 식의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그건 아무래도 70년대와 80년대 무렵인 것 같다. 그 때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고도 성장기로 노동력의 수요가 한창 많았던 때다. 최인호의 소설 '바보들의 행진'에서 보듯 그렇게 낭만과 자유를 구가하고도 대학만 졸업하면 얼마든지 취업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누구나 쉽게 직장을 얻을 수 있었으니 사회인이란 곧 직장인이란 등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취업은 빙하기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회인이 곧 직장인인 이 두 나라에서 취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엿한 성인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을 당사자 내적으로도 가지고 타인들로부터도 받게 된다. 영화에서 백수들이 불쌍하게 흔히 묘사되는 것도 그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인간성 평가까지 당하게 되므로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아진 취업문은 청년 세대들에게 더욱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하여 자기 연민과 비하를 가져오고 자신 이외의 일에 무심하게 만들며 정치적으로도 소극적으로 만든다. 날이 갈수록 젊은 세대의 투표율이 떨어지고 보수적이 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불안이 만연해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점이 잘못 맞춰져 있다. 젊은 세대들이 취업되지 못한 것 하나로 불안감에 빠져들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은 그 취업되지 못함을 오로지 자기 책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생각의 오류이다. 취업난은 어디까지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그것은 개인의 능력 여부와 관계가 없다. 앞서 70년대와 80년대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떠올려 보라. 그 때는 지금 요구되는 스펙의 10분의 1만으로도(아니 졸업장만 있어도) 취직이 가능했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이 그다지 변수가 되지 않았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취업이 호황일 때 그랬다면 취업난일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분명하다. 사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정부가 구조적으로 이런 취업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아니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여 취업하지 못하더라도 생존에 대한 걱정 없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사회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말이다. 도대체 '사회인'이라는 게 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오로지 자본이 만든 규정일 뿐이다. 노동력은 언제나 자본이 요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자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스스로를 '비사회인'으로 비하 한다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엔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이란 책으로 첫 선을 보여 모두가 부자와 성장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신자유주의가 흑사병처럼 만연하고 있을 때 진정한 사회의 풍요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일본 경제학자 데루오카 이츠코는 이제 그동안의 편협한 사회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제 우리가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것에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책이다. ![]() 사회인이 된다는 건 취업하는 것과 다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후자를 '회사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따로 규정하는 이유는 사회인과 회사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20년 전에 인상 깊에 읽었다는 다나카 미쓰히코의 '원자력 발전 왜 위험한가? 전직 설계기사의 증언'이란 책을 통해 설명한다. 다나카 미쓰히코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원전 사태를 일으킨 후쿠시마 원전의 설계 부문에서 일했다. 거기서 그는 우리나라의 원전 비리처럼 원전의 심장부라는 압력 용기에 법규를 초과한 결함을 발견했는데 그건 안전 검사에도 통과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다나카 미쓰히코는 그 문제가 어떻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처리될 수 있었는지 당시 기업의 사고 방식, 국가의 대응, 그 배경에 있는 일본 사회의 습성을 모두 망라하여 자세하게 소개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의 처사에 대해 말하는 건 함구령이 엄격하게 내려져 있었다. 그는 갈등을 겪었다. 그 결함을 발견하기 전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원전 설계가 지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말한다. '조직의 역학은 사람의 마음을 어떤 특유한 상태로 만든다'고. 그렇게 그는 조직의 원리로 움직였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회라는 더 큰 맥락에 놓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결함을 발견한 후엔 더이상 조직의 일원으로 있을 수 없었다. 그 압력용기가 이대로 도쿄 전력의 원전에서 사용되면 장차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연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이대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일원으로써 발언할 것인가? 그것을 두고 고민했다. 결국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하여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회사인'은 다나카 미쓰히코의 고백에서 보듯 '사회인'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회사인'은 조직이 규정한 범위 밖에는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이기 때문이다. '회사인'은 지금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오직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느라 사회 전체에 해를 입히기도 한다. 최근 이상호 기자가 연합 뉴스 기자에게 한 욕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연합 뉴스 기자가 구조하기 좋은 정조의 시기에 고작 소수만 수색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며 왜곡, 과장 보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검색 순위 상위에 오르고 네티즌에게 비난을 받자 그 기자도 억울했던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여기서 데루오카 이츠코가 말한 '회사인'의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들은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사회 전체의 이익 보다 조직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아니, 조직의 이익을 지켰을 경우에 따라오는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그래놓고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거, 다들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이런 핑계를 댄다.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차마 입밖에 내기도 힘들 만큼의 어마어마한 학생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조금이라도 그들을 생각했다면 구할 수 있었던 목숨들이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제 목숨만 생각하지 않고 빨리 빠져나가라고 안내 방송만 했더라도, 최소 신고에서 침몰까지 걸린 세시간동안 해경이든 어디든 빨리 구조 헬기와 배만 보내줬더라도, 국민 안전에 더욱 치중하겠다고 선언했던 정부가 그 말 그대로 유속이 어떻다는 둥, 책임 소재가 어디라는 둥 핑계를 대지 말고 그냥 총대를 매고 적극적으로 구조에 총력을 기울였더라면 정말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과 기업으 이익을, 해경은 해경의 이익을, 해수부는 해수부의 이익을, 언딘은 언딘의 이익을, 선거 후보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정부는 정권의 이익만을 앞세웠다. 그들에게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항의는 미개한 짓거리였고 그들의 절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었다. 총리라는 작자 역시 그 부모들이 제발 대화좀 하자고 차창 밖에서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도 잠을 잤으니 말 다했다. 정말 오늘의 비극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협소한 회사인의 시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회사인으로 있으려고 하는 것. 그것 역시도 사회인으로 있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저 연합 기자의 글에서도 보듯, 잘못된 사회인에 대한 시각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빨리 '사회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그건 이런 비극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인'은 어떤 존재인가? 핵심은 연대와 공존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왜 이것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지를 은퇴한 자들의 고백들을 통해 훌륭하게 증명한다. 다음은 그 고백들 중 하나이다. 너는 아직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곳이 있고 자기 의견에 응답해줄 상대가 있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없어. 그런 게 없다는 허기를 과연 너는 알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응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는 것, 모르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얻는 놀라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 이런 게 아닐까? 그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야. 현역 시절과 달리 혼자가 되고 보니 새삼 그런 욕구르 느껴. 타인고 대화하면서 그 욕구를 채우고 싶어도 요즘 사회는 그걸 민폐로 여기고 차갑게 떠나가버려. 응답해줄 상대가 없으니 나는 고독해질 뿐이야. 이래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p. 51)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이처럼 협소한 조직의 이익을 넘어 전체 사회와의 연대와 공존으로 그 책임마저 적극적으로 떠맡는 진정한 '사회인'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강화된 역량으로 성숙한 시민 사회를 만들어 결국 '좋은 사회'를 이루고 싶어 한다. 그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좋은 사회란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자립과 자유로의 길을 여는 사회다. 나쁜 사회는 그 반대로,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p. 91) 좋은 사회란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에서 말했던 진정한 풍요의 나라와 다르지 않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영유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좋은 사회다. 나쁜 사회란 그 반대다. 지금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나쁜 사회라 할 수 있다. 구조에 너무나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결국 모든 걸 부모에게 떠넘기지 않았던가?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부모들에게.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걸 잃게 만들지 않았던가?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한 부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CBS 노컷뉴스 김민재 기자 페이스북에서) 내가 이번 일 겪으면서 첫번째 느낀게 내가 참 못난 부모였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내가 참 부족한 부모구나. 이 나라에서 사려면 나 정도 부모여서는 안된다, 내 새끼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자식을 지키려면 최소한 해수부 장관은 되야 돼. 무슨 말인지 알죠?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사회야 이 사회는.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어 내 자식들한테. 내가 20대 때만해도 이 사회가 이렇다는 걸 알았어. 전두환 정권 잡고 살 때 나도 내놓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회가 썩었다는 거 알았어. 그래서 내가 잘 되어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나름 발버둥쳐서 이렇게 왔는데 근데 지금 이렇게 내 자식 잃고 보니까 나는 못난 부모더라고. 난 능력없는 부모고 자식을 죽인 부모에요. 살리지 못한 부모에요. 이렇게 능력 없는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방송에 떠들어요. 한국정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내가 던진 계란이 그 바위를 더럽히는 그 정도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전 세계에 떠든 거야. 나쁜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은 데루오카 이츠코의 표현대로 하자면 '격차사회'다. 사람들을 의식 면에서도 생활 면에서도 '격차와 차별의 벽'으로 사회적으로 분리해버리는 사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는 것 혹은 종북 프레임을 씌우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지금 사회는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그 격차를 더욱 벌여나가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격차는 분열을 낳고 적대를 낳는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위치에 있던 구성원이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를 한없이 좁힌다. 타자에 대해 공감과 배려를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과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며 거기에 방해되는 타인들은 모두 방해꾼이나 적으로 간주한다. 결국 격차 사회는 회사인들을 가득 생산한다. 그리하여 종국엔 이렇게 된다. 분열된 사회를 내버려두면 폐해가 생긴다. 분열을 역이용해서 자기 세력의 확대를 꾀하는 권력자가 있고, 합의 보다도 힘으로 억누르는 결정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정치가도 나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일을 어쩔 수 없다며 무기력하게 체념해 버리거나, 스스로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있을 수 없는 영웅이나 리더십이 나오기를 기다려 전부 맡겨 버린다.(p. 174) 이런! 이건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해도 별 소용없을거야!'라는 무기력,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는 체념. 나 대신 이 사회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입과 손가락으로만 욕하는 사이, 결국 우리는 오늘의 저 커다란 비극을 부르고 말지 않았던가. 앞에서 인용한 어머니는 같은 인터뷰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할 수 있으면서도 안하는 것과 못해서 안하는 건 다르잖아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데 물살이 세든, 장비가 부족하든 간에 한명이라도 구조하겠다고 애쓰면 부모 입장에서는 정부가 우리를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피눈물 나도 저 사람들도 귀중한 목숨인데 감사해요. 설사 못 건졌다하더라도 감사하죠. 근데 걔네들은 어떤 액션도 하지 않았다. 역으로 얘기하면 죽을 시간 기다린거죠. 가장 골든타임이라 첫째날 둘째날 다 시간 놓쳐놓고 셋째날부터 뭔가 해보겠다고. 근데 한 거 없다. 액션만 한 것 뿐이지 배 갖고 돌기만 하고. 해경이 첫날도 둘째날도 뭐하겠다고 브리핑했는데..아무 것도 한 게 없어서 학부형들이 찾아가서 보면, 이 사람들 여기서 브리핑한 거 아무것도 안한 거에요. 헬리콥터 15대 뜬다고 했는데 1대 돌고 있고요. 잠수부도 내려간댔는데 물살이 세서 못한대. 4시간 지나서 해야한대. 또 근데 4시간 지나서 한다는 말이 또 못한다는 거에요. 그런 게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날이 지나서 애들 다 죽었어요. 대한민국 머리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부가 인원이 한 명도 안나오고 있는 거면, 문제가 있다는 걸 다 알죠. 저거 문제가 있다, 290명이 들어가 있는데 구출해내는 사람이 없고 똑같은 방송만 할 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멍청한 국민만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물살이 세서, 장비가 어째서. 구조할 수 있는 배 만들어놨다면서요. 실험을 해도 여기 와서 실험해도 되잖아요. 어차피 죽일 바에는 와서 실험해도 되잖아요. 그러면 억울하지라도 않다니까 민간구조대들이 이정도면 내려갈 수 있다고 할 때 해경이 못 내려가게했잖아요. 막지라도 않았다면, 살리려고 액션을 취한 거잖아. 그것도 안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미치는 거에요. 우리 학부형이 미쳐 돌아가는 건 자식이 죽은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것보다도 자식이 죽어가는데 구조하겟다는 의지 아무 것도 없이 방송에서만 열심히 구조하고 있다고 거짓보도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모들은 피가 말라가는데 잠수부들 들어갔다 몇 번 하고 다시 오고 들어갔다 몇 번 하고 3일 4일, 그렇게 해놓고 방송에는 헬기 열다섯대 띄우고 물살이 세서 못 들어가고 계속 그렇게 방송했어요. 우리 친척 중에 같이 있던 사람이 집에 가더니 전화 와서 하는 얘기가 "진정해라. 잘하고 있으니 믿고 가라"는 거에요. 잠깐 보고 간 사람이 텔레비전 보고 마음이 바뀌어서 그러는데. 결론은 같더라도 액션을 취해졌으면 안 돈다 이거에요. 미국 군함이 도와준다는데 안해도돼, 그런데 네이버에는 와서 있다고 뜨고. 뭐하자는 거냐고. 니 자식이 이렇게 들어가도 이럴 거냐고. 내가 못난 부모니까 내 자식 죽인 거라니까. 자식 낳지 말라니까. 인터넷으로 유명한 나라고, 3, 40대 똑똑한 인재가 많은데 그 사람들 앉아서 뭐하냐니까? 그 사람 앉아서 쓸데없이 수다 떨고 있어요? 이 상황 알면 분연히 일어나야지. 그 사람들 50대 되면 나하고 똑같은 상황 겪을 텐데. 내가 30대 때 삼풍백화점 무너졌어요. 그 때 사연을 보고 제가 많이 울었어요.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나 울었어요. 그런데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더라고. 같이 슬퍼해준 것 밖에. 10년 간격으로 대형 사고 나는 나라에서 구조적인 일에 내가 봉사를 했다든지, 데모를 했다든지 뭔가 해놨으면 이런 비극이 안 일어났을텐데 내가 그저 슬퍼만 하고 울기만 했기 때문에 이런 일 겪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결혼해야하는 그 분들, 자식들 낳을 거 아니에요? 지금 나처럼 슬퍼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 내 나이 됐을 때 똑같은 일 겪을 거라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놓고, 개선 안할 거면 결혼하지 말고 자식 낳을 생각이면 해수부 장관이 되든지 그것도 아니면 뭔가 액션을 취하려고 해야지 같이 슬퍼하는 거 이제 바라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는 거 바라지 않아요. 동정 바라지 않아. 내가 왜 동정받을 사람입니까? 나 동정 필요없어요. 당신들 할 일은 분연히 일어나서 지금 이 상황 같이 분노해주고 바뀔 수 있도록 행동을 해주는 거에요. 그거 아니면 울어주지 말라고. 리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꼭 기억해두기 위해 여기 인용해둔다. 결국 데루오카 이츠코가 말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건, 이 어머니가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안이하게 의존해버리는 '위임사회'가 비참한 사고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회적 참사를 부를 것임을 가르쳐주었다.(P. 92)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사회에 위임해버리지 않았던가? 당장 내 일에 관계없다고, 내 이익이랑 무관하다고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내버려두지 않았던가? 귀찮다는 이유로 또는 불이익이 두렵다는 이유로.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방관은 씨랜드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으로 이어지고 또 그것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듯이 내내 커다란 비극의 반복만 부를 뿐이다. 내 일, 내 비극으로 여기고 같이 분노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것만이 우리를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안전하고 좋은 사회에 살고 싶은가? 진실로 그건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개척하고 개간해야만 얻을 수 있다. 당신의 적극적인 참여만이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길이다.
민주주의는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 실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P. 226) ![]() |
|
귀여운 그림이 오밀조밀하다. 노란색 표지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또다른 큰 사람의 얼굴을 만든다. 그 아래, 분필로 꾹꾹 눌러쓴 듯 제목이 적혀있다.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아무 생각없이 봤다. 살짝 이상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듯한 기분. 난 이럴때 내가 무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회인이라...이런 단어를 내가 사용했었나? 아님 들어는 봤던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사회 혹은 사회생활이라는 말은 많이 썼지만 사회인이라는 말은 익숙치 않다. 오히려 직장인, 아줌마, 학생 등 나의 위치(?) 혹은 직위를 말하는데 익숙했지, 이 많은 것을 하나로 통칭하는 사회인이라는 말은 알듯모를듯 알쏭달쏭했다.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으련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 않았느냐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아주 좋았다. 요즘 내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던 부분에 대해 일말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실천의 문제이지 앎의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읽기 위해서 전과 달리 포스트잇과 줄긋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내 머릿속도 정리하기 위해서.
이상하지만 이 책을 읽고 교육을 떠올렸다. 난 교육과 관련 없는 사람인데 왜 맨날 교육일까. 모르겠다. 아마도 여기서 보여지는 수많은 예시들이 기실 한자도 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식 교육에 많이 젖어 있는 우리의 교육이, 역시나 비슷해져가는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과 우려. 세상이라는 게 다 비슷하지만 그 중 너무나 비슷한 두 나라의 모습에 씁쓸해지는 느낌이였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앞으로의 교육은 어떨지, 우리 어른은,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였다. 요즘 사회와 맞물려서 말이다.
이 책은 5개의 목차로 나눠져 있다. 사회인의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와 관계맺기, 사회에서 일의 의미, 격차사회에 산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떻게 사회인을 길러낼지에 대한 고민까지 다양하게 살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은이가 얼마나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관여하고 행동했는지 엿볼 수 있다. 28년생인 그를 보면서 나는 무얼 생각하고 했는지 반성한다. 매 페이지마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과 하나하나 맞춰보고 생각하고 줄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의 말대로 우린 너무 자기 책임론에 빠진 것은 아닐까. 혹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건 아닐까.
지은이는 개인과 사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개인이면서 사회인, 공존의 관계로 보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만든 사회에 우리의 인생이 좌우된다. 단순히 개인의 총계가 사회인 것은 아니다. 사회는 어떤 역학을 가지고 움직이며, 개인의 인생을 끌어들인다. 사람들은 모여서 반드시 사회를 만든다. 아니 그보다, 개인이 있을 때 이미 사회는 있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반드시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인으로서 사회에 관여해 가지 않으면, 사회는 제어할 수 없는 곳으로 폭주할지 모른다." (64p) '일, 개인생활, 그리고 사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개인의 시간과 동시에 사회인에 걸맞은 시간 사용법도 필요할 것이다." (143p), "사회에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지만, 사회와 자신을 연결 짓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 책임과 자기책임은 표리일체이기 때문이다."(144p)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에서도 말한다. "인터넷과 블로그를 통해 널리 사회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것 같아도, 의욕적이고 자발적인 경험이나 참가활동이 없으면 사회라는 말은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213p)
사회란 누가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사회인을 지향할 때,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토대가 되는 것은 본인들의 자유로운 의견과 교환일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가 예로든 독일의 토론문화는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나라 학교나 사회 전반적으로 토론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고 변화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꽤 긍정적이라고 나름 생각한다.
표지의 아기자기한 맛과 달리 내용은 꽤 묵직하다. 아무곳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속앓이를 하던 나는 내심 기쁘다. 나도 사회의 일원인 사회인이라 인정받는 것같아서 말이다. 사생활이 보장되야하는 개인이지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인. 그렇다. 나도 사회인으로 살고 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