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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지혜로운 사람이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꾀나 재치, 융통성, 경험이 많은 것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이나 경험을 현실에 삶에 알맞게 적용하거나 응용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후반까지 나름대로 생각하며 정의하던 지혜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였다. 그러나, 이 지혜나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와 ‘토리L.헤이든’이라는 특수교사의 체험사례집 ‘한 아이’(샘터 간)를 최근에 새롭게 곱씹게 되면서 너무나 협소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특히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지혜’는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면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며 목말라 할 때 한 줄기 빛처럼 ‘한 아이’가 떠오르며 정말 이것이 ‘듣는 것’이며,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다양한 말하기 쉴라는 마음이 아프기에 그 고통을 견디거나 상처가 낫고 싶어서 다양하게 표현하는 아이였다. 언어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증오에 가득찬 눈이나 절대로 울지 않는 것, 헝클어진 머리, 악취를 풍기는 것 등으로 말하였고, 여섯 살 때는 세 살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다음 근처 숲속 나무에 묶어 놓고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외쳤다. 이런 아이였기에 어떤 아이도 선생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쉴라를 가르치게 된 토리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난 기사로 쉴라를 처음 알게 되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특수학급(쉴라 말로 미친반)에 아이가 하찮은 돌멩이처럼 맡고자 하는 선생님이 없어서 떠밀려 오게 되었을 때 부담스러워 하였다. 아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겨우 한 말이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게 할 수 없어요. 하게 할 수 없어요’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 외에는 언어로 된 말을 하지 않았다.
듣는다는 것 이렇게 힘들게 아이와 씨름하던 토리 선생님은 ‘피보디 그림 및 어휘검사(PPVT)'를 할 때에 쉴라가 잘 맞추는 것을 보면서, 오래된 오줌 냄새를 풍기는 쉴라를 자신의 무릎에 끌어다 앉히고 껴안아 주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거나, 머리핀을 사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겨주기, 쉴라를 개수대에 데려가 씻겨주는 일 등을 하면서 아이의 몸으로 하는 호소를 들었다. 쉴라의 말을 듣는 것이 고통스러웠기에 토리 선생님 또한 말 없이 몸을 움직이거나 쉴라와의 신체접촉을 통하여 들을 때도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점점 개선되어 가던 토리 선생님과 쉴라와의 관계는 토리 선생님의 고정관념에 따라 위기를 맞기도 한다. 시험지 풀기를 강제로 하게 하는 것과 같은 건성으로 이루어지는 들음이 있을 때, 잠시 토리 선생님이 회의 겸 휴가를 다녀와서 쉴라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쉴라가 이웃에 사는 아저씨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도 잠시 솔직하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서 토리 선생님의 깊이 있는 듣기가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쉴라의 말하기 뿐만 아니라 듣기가 정확하기 않았던 까닭도 어머니에게 길가에 버려지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의 잘못된 말하기에 쉴라가 바르지 않게 알아 들었던 것이다.
인내 그리고 길들여짐 쉴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었고 버려지는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난폭한 행동이나 울지 않는 것을 통해서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리 선생님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어린 왕자를 읽고 토리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서로 길들여진 존재 즉, 토리 선생님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한다. 토리 선생님의 진실한 듣기를 통해 쉴라의 마음이 더욱더 치유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쉴라의 경우도 한 학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듣기와 말하기 능력은 내가 본 수능시험에서 에서 국어듣기와 영어듣기 점수를 생각해보면 꽤 높은 점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하는 양보다는 듣는 양이 훨씬 많다. 그래서, ‘창가의 토토’라는 책을 보았을 때의 토토의 다양한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공립학교 담임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난 교사가 되면 저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오히려 4시간이나 말없이 토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대안 학교의 교장 선생님처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하였다(결국은 교장 선생님이 지혜로운 교사요, 교장 선생님의 듣기를 통해서 토토의 잠재능력이 계발되고 토토가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차이가 큰 평가 혹은 비교대상이 나타난 것이다.‘한 아이’의 토리 선생님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듣기에 실패도 하지만 ‘토토’의 교장 선생님보다 듣기에 고수(더 지혜로운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토토보다 더 많이 몸으로 말하는 쉴라를 몸으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 공립학교 교사인 나의 모습을 보면 듣기 점수가 형편이 없다는 것을 점점 보게 된다. 수업시간이라는 핑계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다른 일처리 한다는 이유로 30여 가지의 다양한 상황과 아픔,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몸으로 말로 하는 이야기에 시선-마음-을 향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에게 길들여진 존재(특별한 존재)가 아니기에 교사인 나의 말도 아이들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가 많다. 또 아이들이 말이 채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의 말을 판단하거나 한편의 아이의 말만 듣고 이렇게 저렇게 판결을 내려버리는 경우도 많아서 사실이 밝혀진 후에 미안하다고 사과한 경우도 있다.
나는 지혜로운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이렇게 진단결과가 지혜로운 사람은커녕 어리석은 교사라고 나온다. 어리석은 교사는 잘못된 듣기를 하는 것이기에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쉴라의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 처음에 쉴라를 맡았던 다른 선생님들처럼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 오히려 학대를 하는 것이기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다. 먼저 눈을 내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향하고 눈높이을 맞추며 몸을 아이에게 기울여 주는 것이 크기는 작지만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한 번에 안 될 것이다. 영어듣기도 몇 개월을 들어야 귀가 뚫려 영어가 들리는 것처럼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반복 훈련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다보면 들을 수 있는 마음의 크기도 점점 커질 것 같다. 단지 아이들을 쉴라처럼 상처를 치료하고 성장 혹은 성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더욱 자랄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 2권도 출간되었다고 한다. 토리 선생님과 쉴라가 헤어진 7년 후 청소년이 된 쉴라를 다시 만난 후에 이야기라고 한다. 토리 선생님이나 쉴라의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커져 있을까
*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중고책으로는 살 수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2008년 경 쓴 것이다. 그때 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 글을 다시 보니 여전히 지혜가 부족하다. |
| (여기에는 표지가 나와있지 않지만)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 그대로 한 아이가 서있다. 그 아이는 추레한 몰골을 하고 손을 주머니 속에 깊이 찔러 넣은 채 반항적인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다. 글 속의 쉴라도 이 그림과 비슷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고 아주 반항적인데다가 공격적이어서 모두들 쉴라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러나 토리 선생님은 그런 쉴라를 사랑으로 감싸안으며 심리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어릴적인 젖먹이 때라고 한다. 쉴라는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토리 선생님도 경계한다. 그러나 토리 선생님은 커다란 소동을 일으키고 포악하게 굴기도 하는 쉴라의 모든 행동을 부드럽게 받아주며 신뢰감을 심어준다. 결국 쉴라는 토리 선생님을 믿게 되고 점점 스스로를 고쳐나가게 된다. 내가 아동상담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 책이었다. 지금은 여러가지 이유로 아동상담사의 꿈을 접었지만 "한 아이"는 아직까지 나의 베스트 서적에 올라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계속 상위권을 지키리라 생각된다. |
| 이 책은 읽는 내내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분명 감동은 감동이었는데.. 읽은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2권을 읽고 있지만.. 그 감동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예전부터 아주 나쁜 버릇이 있는데 남들은 다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감동받는 것들을 나는 머리로 이해하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 오래 살아 보지 못해서 아직 감정적 변화를 느낄만한 일들이 없었다고 할수도 있지만, 나는 주관적 입장에서 유년 시절을 좋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뒤틀린 사고 방식들이 부정적 시각을 형성했고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습관을 들인것이다..(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책은 간단히 말하면 특수교육사 토리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쉴라라는 천재적인 6살짜리 소녀를 교육시켜 나가는 과정을 토리의 기억에의해 기록된 것이다.. 전적으로 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기억에 의한 기록이니 만큼 주관적 생각도 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나도 쉴라가 변해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적잖은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좀전 자습시간에 쉴라가 14살이된 2권을 읽었을때 읽으면 읽을수록 좀 지루하다는 느낌을 감출수는 없었다.. 분명 생각하기에도 감동적이고 사람의 감정적문제를 파고드는 내용이었다... 토리는 특수교육사로써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쉴라도 그의 제자로써 그녀의 교육에 따라 사회에 익숙해졌다.. 한 사람의 감정도 실리고 독특한 시각도 실린 내용을 읽다보니 내 생각은 많이 하지 못했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좀 비현실적인 문제가 나를 건들였다.. 이 책 내용을 좀더 깊이 파고 들면 인간의 사회화과정을 그렸다고도 할수 있는데, 사회화는 분명 사회를 유지시켜나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명분아래 사람들은 획일화 되어가고 정상, 비정상을 구분짓고 있다... 정상인들은 이른바 사회부적응자들을 정신병원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고서 정상인만의 권리와 행복이라고 믿는 것들을 누리면 살고 있다.. 그 사회부적응자들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사회화라는 답답한 제도의 피해자 들이다.. 정상인들은 그들을 자기처럼 만들기 위해 특수 교육을 실시 하고 이것에서도 걸려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가두어 버린다.. 정상인들에게 있어서 사회부적응자, 혹은 정신이상자들은 분명 윤택한 사회를 유지시켜 나가는데에 걸림돌이다.. 정상인들, 우리는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우리가 착각이라 부르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에서 나오는 거부반응은 정신이상자 스스로도 자신이 비정상이라는것을 느끼게 하고 영원한 사회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정상이 되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에 태어났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그에따른 만족도 느낄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어디까지나 우리들이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을 단 한사람으로 보았을때 사회부적응자들은 이를테면 '일탈'같은 것이다.. 무조건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억지로 끌어 당길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를 인정하고 딱딱한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 자유라는것을 줄수는 없을지.. |
| 어머니에게 조차 버림받았으며 술주정꾼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라게 된 쉴라는 다른 아이들에게 잔 인한 학대를 가함으로써 결국 문제아들을 위한 특수 학 급에 배치되었다.아무도 그 조그만 아이를 더 이상 어 떻게 할수 없다고 보았고,포기하고 방치하였다.그러나 토리 헤이든은 그 아이의 가능성을 보았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버림받았다는 마음의 상처와 악몽 에서 발버둥치는 쉴라를 구하기 위해 토리는 쉴라에게 조금씩 다가가 진정한 친구가 되어 그 아이의 마음의 상 처를 어루만진다.쉴라는 진정 강하고 천재적인 소재를 가진 아이였으며 토리에게 사랑에 찬 세상을 처음 경험 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며 변화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