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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기호의 제국="">에서 하이쿠를 가리켜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성격의 문예'라고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해묵은 연못이여/개구리 뛰어드는/물소리', 이 하이쿠가 과연 어떤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쉽게 읽어낼 수 있겠는가? 바르트의 경우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이라는 개념으로 풀이했거니와, 하이쿠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파악의 예술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전이성적인 깨달음을 요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 일본 문화에 문외한인 내가 하이쿠를 읽어내는 데 부족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 수 있었다. 하이쿠가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으로 모든 것을 말해내는 기묘한 역설의 문학이라는 것.
일면적 의미로 귀납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다양한 의미의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달리 말해 하이쿠가 독자의 능동적 상상력을 통한 이해에 폭넓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하이쿠는 서경의 단계에 머무르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의 상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설명하려 들지 않고 깔끔한 침묵을 택하고 있다. 하이쿠를 읽는다는 것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것이며, 읽어내야만이 그것이 하이쿠의 진정한 참맛일 것이다. 하이쿠를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이 책은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 바쇼의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번역이다. 나름대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주를 인용하고 있긴 하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그것이 바쇼의 기행과 그 생활 속에서의 하이쿠들을 읽어내는 데 방해가 되었다. 물론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해서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어내는 데 있어 쓸데없는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각주의 남용은 불만이다. 각주 인용들을 통해 하이쿠에서 계절어가, 우리의 시조에서 종장 첫 구가 반드시 3음절이어야 하는 것처럼 필수적이란 사실을 안 것은 큰 소득이라 할 수 있지만.
여담이지만 또 한가지를 얘기한다면, 느낌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내가 하이쿠를 처음 접한 것은 류시화가 엮은 <한 줄도="" 너무="" 길다="">였다. 그런데 류시화와 이 책을 번역한 김정례의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예를 들어 류시화가 '고요함이여/매미 소리가/바위를 뚫는다'라고 옮긴 것을 김정례는 '조용함이여/바위에 스며드는/매미 울음소리'라고 옮기고 있다. 물론 번역한다는 것이 으례 그런 것이겠지만, 사족을 더 달자면 원어로 읽어보고 싶었다. 결국 하이쿠는 자신의 느낌대로 읽어내는 것이니까 어느쪽도 틀린 해석, 틀린 번역이라 단정지을 순 없을 것이다. '내 눈'과 '내 마음'이 어떠한 문학 장르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하이쿠일 테니까.
바쇼가 이 책을 통해 얘기하는 것은 삶의 무상, 그 속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고 방랑으로 떠돌며, 삶의 단면마다 가슴을 울려가며 짓는 하이쿠 한편의 소쇄한 아름다움이다. 그 하이쿠들을 읽고, 또 짓기 위해서 수많은 지식과 난해한 논리들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며 일상적으로 느끼는 삶 자체의 지혜들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들- 말인즉슨 거창하지만, 실은 생의 한귀퉁이에 서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체득하고 있는 '가슴의 움직임'만은 꼭 있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합 조개가/두 몸으로 헤어져/가는 가을이어라'라는 하이쿠의 행간에 묻어나오는 이별의 아쉬움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인상깊은구절] 한 지붕 아래 유녀 함께 잤다네 싸리꽃과 달님 허무한 나를 쓸쓸하게 해다오 저 뻐꾸기여한>오쿠로>기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