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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람 인(人)이라는 글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하는 말과 행동 등으로 도움과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상처를 받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과거와 같은 공동체나 대가족 단위에서 벗어나 개인이나 소가족 단위로 나뉘어지면서 서로에게 도움이나 위로, 그리고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정신적인 외로움과 고독은 늘어났을 것이다.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일하지만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은 더 꼭꼭 숨겨놓고 혼자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인지,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싫어하거나 무관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 아무런 조건이나 이익의 고려없이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그래서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종교의 필요성이 더 부각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듣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듣기’를 본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받아 들였다는 확실한 ‘사건’이다.... 나는 ‘듣기’,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하는 이에게 자기 이해의 장을 열어주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P. 19~20.
<듣기의 철학>은 고뇌하는 인간, 즉 호모 파티엔스인 현대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하기 또는 말하는 방법에는 엄청나게 뛰어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철학적으로 풀이한 책이다.
특히 저자가 ‘인간이 특정한 누군가로써 다른 누군가와 만나는 장면이나 자기 자신 역시 변화되어 가는 경험의 장면, 고통의 장소’로 정의하는 임상의 현장에서 듣기가 중요함을 상세히 이야기한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글들과 일본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듣는 방법’이 아닌 ‘듣기 그 자체’로서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철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철학하는 사고를 이야기하듯이.
“‘듣기’에 관한 철학적 연구가 아니라 ‘듣기’ 그 자체로서의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알고 싶다, 다른 사람과 닿고 싶다,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다’고 하는, 절박함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그래서 듣기의 철학은 이런 소통의 장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 P. 11.
“그런데 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임상’이라 불리는 장소에 등장하는 사람일까. 임상과 비-임상은 ‘직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우, 혹은 공사를 불문하고 상담을 받는 경우, 바로 ‘임상’이 되는 것이다. 즉 사회의 베드사이드가 되는 것이다.” - P. 136.
다만 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려운 현대의 철학용어와 낯선 일본식 단어들이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단어와 용어들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인지 아쉽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험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읽혀지고 이해시키고자 글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했을터인데, 그러기엔 어렵다.
이래서 일반인들은 철학을 더 어렵게만 느끼고 멀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철학의 위기’는 ‘누구 앞에서, 무엇에 대해 대화가 이뤄지는가?’ 라는 질문을 철학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철학에서 ‘반성’이라고 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장을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다.” - P. 37.
듣는다는 것은 이야기하는 상대방과의 연결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흘린다면 서로의 연결은 불가능하겠지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것은 서로가 느끼고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공유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듣는다는 것, 들어준다는 것.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는 것이 뛰어난 현대인들에게 ‘듣기’는 자기수양의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 ‘길고 굽어진, 울퉁불퉁하고 잡다한’ 유보의 길에서 인간은 진정한 사색과 만난다. 생각지도 않은 우연한 만남이다. 쓸모없는 것들에도 눈을 돌려본다. 스스로가 방법의 길 위에 있으면 절대 접할 수 없는 것들과 만나는 것이다. 호스피털리티의 길은 틀립없이 적당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가능하면 함께 쉬면서 도중에 놀기도 하고 돌고 돌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이 진정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함께하는 일, 어떤 목적도 없이 함께 걷는 일, 이렇게 어슬렁어슬렁 걷는 일이 가지는 의미를 걸어가는 길 위에서 생각학는 것, 거기에 듣기의 철학, 임상철학의 길이 있지 않을까.” -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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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 및 생활사에서 몇몇 예외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듣기라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다. 굳이 경청하기, 흘려듣기, 감상하기 등 그 듣기의 농도(!)를 세분화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 그 일상에 무언가를 부여하고자 하는구나! ‘듣기의 철학’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은 그랬다. ‘타자에게 닿기 위한 철학’이란 제목의 서문도 아주 그럴 듯하다. ‘타자’라는 조금은 낯선 단어가 걸리긴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이것은 ‘철학’ 서적이라는 표지를 달고 있지 않은가. 조금은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책장을 넘겼다. 나는 열린 마음의 독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아... 책장을 넘길수록 내 마음에 쌓이는 것은 일종의 분노였다. 아무리 ‘철학’이란 마법의 단어로 보호막을 치려고 해도 허사였다. 분명히 읽을 수는 있으되 대부분 이해할 수는 없는 ‘한글(로 적힌)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의 더미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그 원인은 이번 경우 절대적으로 ‘임상의 주체’인 책에 있음이다. 엉성하고 무성의한 문장들의 미로에서 나는 주제와 맥락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목차를 확인했고 서문의 내용을 되새겼다.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의 주제는 분명 소통의 장과 듣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풀이일 터인데 일관성의 뼈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철학 일부의 역사를 늘어놓는 장황함, 군데군데 삽입된 철학 서적 인용도 도대체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작가는 단순히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무례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백 번 양보하자. 철학(본문에 의하면 ‘철학학 Philosophie-Wissenschaft’ p.40) 문외한인 나, 생경한 단어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 것이 내가 초보자인 탓이라고 하자. 철학에 대한 소양이 제로에 수렴한다고 자기비하에 가까운 겸손을 기본에 깔아보자. 그렇다면 이 책은 철학학자(Philosophie-Wissenschaftler)들만을 위한 책인가? 아니라고, 작가는 야심차게 부르짖었다. 그것을 지양한다고 밝힌 바 있다. 주제를 일단 배제하고, 작가가 인용한 일상의 예들만 보더라도 보편적으로 동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서문에 있는 '신선한 달걀 vs. 지금 먹을 달걀'의 이야기도 얼핏 그럴 듯하지만, 그리고 작가의 의도는 짐작할 수 있다지만, 그 예에서 신선함을 측정하는 방법은 달걀을 깬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미 깨진 달걀에서는 신선한 달걀을 먹는 것이 보통 아닌가? 냉장고에 있는 달걀에서 오래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책에서와 같이 ‘생활인의 알뜰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지만 이미 깨진 상태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신선한 것을 같이 식사 하는 제 삼자에게 양보하는 입장인가? 책에서는 그런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 않으니 엄밀히 따지면 그 그럴 듯해 보이는 예화도 허점투성이인 것이다. 단순히 순수하게 차를 접대하는 예화도 그렇다. 그 상황을 반기지 않는 ‘타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은 ‘주체’의 의도보다는 ‘타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더 예속되는 상황이라 생각된다. 영혼이 있는 사람이 아무런 의도도 없이 차를 건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인용한 한 작가의 문장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반문하는 상담내용은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 내가 만약 그 입장이라면 그 작가가 빈정거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담이란 것이 개인차가 심한데 그렇게 일반화시켜 인용을 해버리면 그 상황에서 빈정거린다는 느낌을 받고 불쾌해지는 피상담인은 비정상적으로 못된 인간이란 말이니, 이는 위험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닌가 듣기라는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서문에 나온 예시(엄밀히 말하자면 그것도 오류가 있다고 보지만)만으로도 충분히 임팩트가 있었고,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설정도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 한 수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을 장황하게, 아리송한 말들로 풀어놓았다. 환대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면 상황 종료가 될 듯싶다. 모든 사람이 알아듣는 친절한 문장들로 말이다. 모든 편견을 배제하기 위하여 나는 작가의 이력이나 경력을 훑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 다 읽은 후 이런 주제 실종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글을 쓴 사람이 궁금해 살펴본 작가는 무려 ‘논리학’ 전공 교수다. 책을 읽으며 듣기의 철학이라 명명된 탑의 터 주변에 의미 모를 단어들이 아귀가 맞지 않은 표면의 벽돌처럼 흩어져 있고 한 구석에는 불량 시멘트가 굳어진 풍경을 상상하며 망연자실한 나, 뭐라 말해야 좋을까 나는 일본어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많은 한자어를 쓴다는 것은 알고, 그 한자어가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다른 부분이 상당하다는 것도 들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정말 읽을 수는 있고 음미하면 뜻은 파악할 수 있으되, 받아들이기에 어색한 한자어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이 철학 용어라 그런지 일본식 단어라 그런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 원인이 후자라면(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번역자에게도 불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음에 독자로서 분노를 느낀다. 외국어를 자기 나라 정서에 맞는 맞춤한 단어로, 최대한 비슷한 뉘앙스의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 번역자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책엔 그런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 영문학자가 영어로 된 물리학이나 생화학 책을 제대로 번역할 수 없듯이 단순히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흡수해서 소화시키지 못한 지식을 남에게 전할 때는 예전에 자신이 배울 때의 그대로,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그대로 전하고자 애쓰게 된다. 그러나 완전히 자기 것이 된 지식은 자신의 언어로 남에게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이해 못한 글을 번역할 수 있을 것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과 주어 목적어가 모호한 문장들, 번역자는 이 책을 이해하고 번역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다 번역하고 한번 읽어보기라도 했냐고 묻고 싶다. 글에는 퇴고의 과정이 있다. 하물며 ‘책’이라는 인쇄물은 일종의 신성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창작이든 번역이든 상관없이 그렇다. 교열 교정은 필수의 과정이 아닌가? 수많은 독자들의 앞에 나서기 전에 그것은 기본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오타와,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럴 수 있지’의 수준을 훨씬 지나쳤다고 본다. 일일이 예로 들기도 성가신 오타들, 급기야 243 페이지 넷째 줄의 ‘우유를 물린다’는 표현에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젖을 물리는 것도 아니고, 젖병도 아니고, 우유병도 아니다. 우유를 물린다? 우유를 머금는 이외의 의미(그것도 억지로)로는 전혀 해석되지 않는 이 문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케어의 뿌리를 얘기하는 장에 쓰인 말인데. 작가의 논리에 대한 공감/비공감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읽기에 투자한(너무 거창한가?) 내 시간과 정열에 대한 미안함, 허탈함, 그것이 나의 독서 후 감상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마디로 ‘임상실패’이다. 나는 설득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내용 이전에 접근 방식의 문제다. 이런 인쇄물이 세상에 나온 원인도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 열풍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원서 ‘聽くことの力’ 은 1999년 4월에 나왔다(인터넷 교보문고 검색) 한국 번역본은 15년 후인 2014년), 급조된 번역과 교열 교정,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한 비전문가의 번역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사실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독자로서의 나는 더 양질의 것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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