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윤병원의 시작은 모범적인 이야기었다. 가난했던 가정에서 태어난 한 천재가 외압에 굴하지 않고 결국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 외압에 복수하겠다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핏줄에 집착하는 마음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서 씨 성을 가진 후계자가 이보영의 아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필환 원장은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서 키우려고 한다. 하지만 서윤병원과 떨어져서 살고 싶었던 서필환 원장은 그녀의 반대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고서는 준현을 데려와서 같은 아버지를 둔 나현과 같이 키우게 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보영을 사랑했고, 그 비틀린 욕망은 그녀와 닮은 준현을 성추행하는 결말로 이어지게 된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준현. 방치하는 어머니와 괴롭히는 아버지 사이에 놓인 그에게 의존할 수 있는 존재는 나현밖에 없었고, 나현은 그런 그를 보며 저주에 걸린 개구리 왕자를 구원해 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추행은 계속 지속되고, 점점 한계에 내몰린 준현은 나현에게 말한다. 너가 나를 위한다면, 그들을 죽여 달라고. 그리고 나현은 그렇게 했다. 그렇게 사건이 벌어지고, 그제서야 자신이 나현을 얼마나 밀어붙였는지를 깨달은 그는 나현이 자신을 위해줬으니, 자신도 나현을 위해주기로 결심하고, 사건을 자신이 부모를 살해한 것으로, 성폭행 당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나현인 것으로 사건을 조작한다. 그것이 사건의 진실이었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결말부에서 나현과 준현이 같은 아버지를 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피로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다른 누구와도 가까워 질 수 없는, 서로에게만 가까워 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둘의 생각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 보자. 나현은 진심이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방해되는 사람들은 전부 죽일 수 있다는 마음이. 하지만 준현은 그렇지 않았다.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지만, 그 결과가 피로 끝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들의 미래를 향한 장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현은 고백한다. 자신이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우리들에게 돈과 권력을 넘겨줄 수 있는 서필원 원장. 악의와 욕망으로 가득 찬 그의 큰딸. 자신들의 관계를 부정하고 설득하려 한 작은딸. 작은딸을 자신들이 죽였다는 비밀을 알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해 주었던 그녀의 진짜 아버지. 이들을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마치 오늘 아침으로 콘프레이크를 먹었다고 말하듯이 가볍게 말한다. 앞서 나현이 개구리 왕자 비유를 했을 때, 그녀는 추가로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 어쩌면 저주에 걸린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고.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 혹은 준현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나현이기에 그 독백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으리라. 자신의 진심을. 그렇게 안심하고 싶었으리라. 자신들의 미래를. 하지만, 잔혹한 세상은 해피앤딩을 허락하지 않았다. 준현은 자살을 선택했다. 나약한 자신을 없애 준 나현에게 고마워하며. '나약한 자신'. 고통 속에서도 나현을 생각하며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계속한 준현. 왜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자백하겠다는 임현택 변호사를 죽였냐는 질문에 증인은 살려두면 위험하니까라고 답한 나현. 그 대답에서 준현은 깨달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날 밤 자신이 나현에게 한 말이 불러온 결과를. 그리고 자신도 임현택 변호사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모든 더러운 일들을, 그리고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가진 나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자신이 더 이상 나약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그렇게 그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바람대로 나현이 행복할 수 있었으면 그래도 좋았을 텐데, 소설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그가 자살했을 때, 나현은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을 출산한 나현은, 자신의 아들로부터 준현을 투영한다. 준현의 아버지가 준현에게서 보영을 투영했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나현은 그녀의 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난다. 결국 끝과 시작이 이어진다. 그저 시간만 흘렀을 뿐. 서윤병원도, 자신의 자식으로부터 죽은 연인을 투영하는 시각도, 절대적인 지배자도. 결국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피를, 유전자를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금기들의 연쇄로 이어지는 작품은 비현실적인 면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끝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강렬하다. 강렬한 설정과 복선들을 깔아두며 속도감 있게 이어지는 전개 덕분에 재미있으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소설을 즐길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