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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번역>을 읽다.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현재 위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 가를 알려주는 책, 이라 해야 할까. 그렇지만 그 말도 이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가 없다. 그만큼 방대하고 깊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학자 윤여일은, 이미 고인이 된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케이치 요시미에 관한 연구를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아시아 연구가, 쑨거의 저술을 통해 다케이치의 사상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셈이니 간접 연구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의 사상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와 그가 남긴 글, 말, 그와 관련된 책, 그가 받은 비평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 배경까지 포함하는 통합된 지성이 필요하다. 책의 내용은 중국과 일본 사상이 중심이고 한국은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도 분명 동아시아에 포함되니 동아시아 연구에서 한국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이 씌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에 태어나 1977년 죽을 때까지 중국 속에서 본 일본, 일본 속에서 본 중국의 사상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을 거쳐 한일강제병합, 8.15 광복, 6.25 그리고 4.19, 5.16을 거친다. 그리고 일본은 대동아 공연권을 주장하며 우리나라를 병합하고,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 대동아 전쟁의 패전으로 미국의 식민 지배와 경제지원을 받고, 한편으로 적극적인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며 경제가 발전했던 시기이다. 그는 중국학을 전공하며 중국을 만난다. 특히 중국을 통해 만난 <아Q정전>의 루쉰은 그의 평생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윤여일은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란 책을 이용하여 다케우치 요시미의 정치적 사상과 문학적 태도, 역사관, 동아시아 관을 알기 쉽게 전개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인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말하고 있지만 그 사상 속에서 우리의 역사와 정치를 충분히 투영하여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일본과 중국, 한국은 동시대를 아주 밀접하게 보냈고 지금도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을 가지려면 올바른 사상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책으로 <사상의 번역> 같은 인문학 책은 참 중요한 것 같다. 나도 윤여일을 통해 우리나라의 ‘현재’를 바라보는, 조망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P74 쪽 다케우치 요시미의 정치적 사고 번역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비교하였는데 지금의 정치 상황이 그대로 적용된다. 아래에 본문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본다. ‘보수주의는 한 가지 주의를 고수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른 처세술에 가깝다. 원리 없음의 원기주의다. 보수주의는 뼈대를 가지 않기에 그 실체를 거머쥐고 비판하기 어려우며, 역으로 보수주의가 일상감각에 침투하기란 쉬워진다. 보수주의는 습관화 된 생활양식이나 타성적 정치 인식에 조응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자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무장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체제를 적극적으로 바꿔가려는 진보주의는 기존의 권력 구조, 사회제도, 문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인식해 당면한 정치상황에서 미래의 전망을 확보해야 하기에 이론적 무장에 대한 요구가 강하다’ <중략> 보수파는 이론적 일관성을 지향하기보다 상황에 맞춰 심정에 호소하다 보니, 진보파가 이론적 공박에 나서도 보수파의 영향력을 감퇴시키기는 어렵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피력해도 현실 정치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그리고 ‘6장, 자신의 근대’를 읽어보면 오늘날의 일본이 중국과 한국에 대해 갖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아래에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일본은 애초 정신의 공석이었던지라 서양의 진전이 곧 동양의 후퇴라는 상관성을 놓치고 서양의 진보를 고립된 실체로 여겨 그것을 쫓는다. 그렇게 일본은 동양의 타국에 비해 재빠르게 근대화를 성취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는 일종의 우등생 문화이도 근대화를 위해 다케우치가 말하는 이차적 저항(자신이 패배하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 철저하게 패배자, 약자, 노예의 입장을 견지하고 그 한계 조건을 내재화하는 저항)을 방기했으니 노예 문화이고 전향 문화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분발해 노예에서 노예주가 될 수 있었을 따름이다. 다케우치는 신랄하게 표현한다. ”우월함과 열등감이 병존하는 주체성을 결여한 노예감정의 근원이 여기에 있으리라.”’ 일본은 대동아 전쟁 패배 후 미국에 의한 식민과정을 거치고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경제발전을 한다. 그런 와중에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고 선진문화를 먼저 받아들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아시아의 선진국에 만족한다. 그리고 서구문화에 대한 노예근성을 발휘하며 노예주로서 한국과 중국을 대하고 있다. 일본의 그러한 태도는 다케우치 시절부터 다케우치가 죽고 없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나는 분노했다. 각 개인들도 세상을 비판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 시각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작가는 쩡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P113쪽에 쩡짜라는 용어가 있다. 그 용어에 대한 본문의 설명이다. ‘쩡짜와 저항이다. 낯선 용어인 쩡짜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곧잘 사용하는 말로서 루쉰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쩡짜라는 말은 지금 처음 꺼냈지만 그 뜻은 이미 밝혀두었다. 바로 서두에 진정한 사상적 만남은 자신을 상대에게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바로 쩡짜의 의미 이다. 아니, 의미라기보다는 쩡짜는 사상적 만남에서도 생길 수 있지만 사상이 살아가는 법이자, 지식을 일구는 방식이자, 더 나아가면 동양이 자신의 근대를 실현하는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사상이 살아가는 법의 용례는 루쉰에게서 확인해두자. 다케우치는 말한다. “루쉰은 이러했다. 물러나지도 추종하지도 않는다. 먼저 자기를 신시대와 대결하도록 만들고 쩡짜로 자신을 씻고, 씻긴 자신을 다시 그 속에서 끄집어낸다. 이런 태도는 한명의 강인한 생활자라는 인상을 풍긴다. 루쉰만큼 강인한 생활자는 아마도 일본에서는 찾기 어렵겠다.”..... 지식을 일구는 방식의 용례는 다케우치 스스로가 보여준다. 다케우치는 자신의 연구대상인 중국으로 진입하면서 온 몸과 그리고 온힘으로 중국을 체험하고 감수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동시에 부단하게 연구 대상 속에서 자신을 선택하고 자신이 중국화 되는 것을 거부했다. <중략> 쩡짜는 중국어로 참다, 용서하다, 발버둥 치다, 고집을 세우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루쉰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하여 원어 그대로 인용된다. 굳이 일본어로 옮기면 요즘말로 저항에 가깝다. <중략> 쩡짜는 통상의 저하와는 힘의 방향이 다르다. 흔히 저항은 주체가 자기외부에 있는 대상과 대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쩡짜는 타자를 향하는 만큼이나 자신을 향한다. 타케우치는 투입하다-끄집어내다라는 행위의 양상을 끌어와 쩡짜의 이미지를 그리곤 한다. 쩡짜는 타자 속에 자기를 투입하고 거기서 자신을 끄집어내는 선택의 과정이다.‘ 쩡짜는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쑨거, 그리고 저자인 윤여일 모두가 사상을 번역하고, 사상적 이론을 세우는 중요한 기조가 되는 낱말이다. 작가는 우리 역사에 대한 재해석, 우리 사상의 분석 등 아시아 연구에도 쩡짜를 원하는 것 같다. 책을 읽고 있으면 우리나라도 극복해야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란 생각이 절로 든다. 민주시대를 살고 있지만 조선시대를 떠받드는 사대주의적 감각,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식민사관, 6.25전쟁으로 대화된 이데올로기의 함정,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열등감 까지. 우리에게도 다케우치가 말하는 노예근성이 있는 것 같다. 다케우치의 노예론(P109~112)을 읽어보면 참 재미있다. 다 옮기기 힘드니 사서 읽어보시길. 나 개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쩡짜가 필요하다. 책 읽기를 끝내고 이 책을 왜 읽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을 적는 것보다 P231쪽 발간사에 있는 글을 옮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내 생각은 두서없으나 책의 내용을 보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의 고전은 철저하게 그 고전을 산출한 시공간의 장소성을 벗어나서 해석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중략> 또한 이러한 장소성에 대한 자각은 고전의 정전화 과정 속에 침투해 있는 다양한 권력과 이데올로기들을 드러내 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구 중심주의와 그에 기대고 있는 민족주의다. 서구의 발전을 이상적 준거 틀로 삼는 서구 중심주의든, 서구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서구적 모델을 자기 내부에서찾고자 하는 민족주의든 모두 고전을 서구적 모델의 견지에서 인식해왔다. 그 결과 서구의 고전들은 서구적 수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억압되거나 아예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우리시대의 고전을 보다 철처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서구 중심주의의 단일 보편성을 비판하는 한편 주변부에 다양한 보편적 텍스트들이 존재함을 재인식하는데 있다‘ 발간사에서 말한 같은 이유로 나는 성장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인문서를 권장하고 싶다. 단 한 가지, 출판사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책에 사용된 한자어를 좀 더 알맞은 우리글로 바꾸어 쉽게 이해하게 한다면 하는 것이다. 좋은 글을 읽게 해준 현암사에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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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1910년부터 1977년 사이에 활동한 평론가이자 이론가다. 다케우치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필력으로 일본이 직면했던 주요 역사적 상황에서 제 목소리를 내왔다.왜 그런 사람 있잖은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시야는 드넓은 곳을 향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다케우치가 딱 그랬다.
▲쑨거와 윤여일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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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언제나 글을 쓰지 않는 마이너리티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마이너리티를 대변해서, 마이너리티의 뜻대로 책임지고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밀고, 자신의 도주선 위로, 서로 결합된 탈영토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우연한 마주침이 있다는 말이지요. 글쓰기는 항상 다른 어떤 것 - 자신의 고유한 생성이 되는 어떤 것과 합류합니다.( 들뢰즈의 '대담' 중에서) 들뢰즈는 글쓰기를 단적으로 '타자-되기'로 정의한다. 여성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되기'이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동물-되기'이며 흑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흑인-되기'이다. '타자화'라는 점에서는 번역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다. 번역은 무엇보다 타인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의 언어를 제대로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그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번역하려는 타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 또한 '타자-되기'라 할만하다. 윤여일의 이 책 제목이 '사상의 번역'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사상을 내 것으로 하는 것도 번역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번역은 일종의 대화다. 그런 까닭에 타인의 사상과 만나 나의 것으로 내재화 하는 일도 답습이 아니라 대화라 할만하다. ![]() '사상의 번역'은 현암사에서 나오고 있는 우리시대 고전 읽기 총서 중 한 권이다. 이 총서시리즈는 한 권의 책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특징이다. 총서의 네번째로 발간된 '사상의 번역'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 여류 학자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주된 텍스트로 한다. ![]() ![]() 작품이 진정 작품이라면 그 제약을 딛고 나와 타인에게로 손을 뻗는다. 자신의 진실에 천착했던 유한한 개체의 지난한 사고의 흔적이 타인에게 물음으로 육박해간다. 작품의 문제 의식은 짙은 농도로 말미암아 읽는 자에게로 삼투되고 읽는 자는 작품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투사해 거기서 잠재되어 있던 여러 물음이 모습을 이룬다.그런 작품에는 어떤 번역성이 감돌고 있다. 원문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되고 있다.(p. 8)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한 개체의 사상을 번역한 번역서라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윤여일의 이 책 또한 쑨거가 번역한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금 번역한 번역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번역인 게 단순히 그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결부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이 취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는 얼른 파악하기가 힘든 사상가다. 그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유형의 사상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공헌이 그의 한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이란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어렵게 내린 개인적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그 결단을 내린 시점의 당사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따라서 내재적 비판이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내재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 내재적 비판이란 상대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상대가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이다.(p. 19) 쑨거처럼 이 책도 이 방법을 취한다. 윤여일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을 파고 들고 그를 번역한 쑨거의 문제의식으로 파고들어 그들이 봉착한 한계에서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대화이다. 무엇보다 타자-되기의 대화이다. 들뢰즈는 언젠가 자신의 철학은 남의 등에 달라붙어 자라났다고 고백한 적 있는데 이 책이 취하는 내재적 비판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주목했던 이유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타자인 중국과 대면하면서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 중국을 보고 그것을 일본적으로 동일화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이라는 타자의 중심에 서서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오히려 일본이라는 자기 내부를 지속적으로 허물어 갔음에 있었다. 그 타자 지향성에 쑨거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그대로 서구 중심의 근대에 간직된 한계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하이데거가 말했던 대로 근대는 어디까지나 포식자와 같았다. 즉 자신과 차이 나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모조리 삼켜서 자기와 똑같이 만들었다. 푸코가 말했던 대로 근대의 이면엔 선택과 배제가 차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을 수 있는 것은 선택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가차없이 배제되었다. 그렇게 자기 동일화의 이데올로기가 근대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게 단일한 전체가 되는 파시즘이 근대에 들어와 태동되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쑨거가 보고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은 그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엔 자기 동일화가 없었고 오히려 타자와 대면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가는 '타자-되기'가 있었다.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해악을 치유할 수도 있는 대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윤여일은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와 대면하면서 찾아낸 대안의 맹아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먼저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다. 어떤 태도인가 하면, 자기부정만이 진정한 부정의 가치를 지니며, 자기부정을 거치지 못한 지식, 바깥에서 주어진 지식은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문학이란 태도며, 자기부정적 태도다. 문학가라면 마땅히 유동적 상태로 자기를 갱신할 수 있어야지 굳어버려서는 안된다.(p. 58)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자기부정의 태도였다.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부정하기 위해 중국 문학을 대했고 중국을 대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평생 연구했고 늘 닮고 싶어했던 루쉰의 문학도 대했다. 사실 자기부정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는 루쉰을 연구하며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쉰 역시 늘 자기 한계를 긍정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한 결과 나온 것이 그의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스스로를 노예라 여겼다. 그건 현실 중국 사회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으나 다케우치는 그 절망 때문에 루쉰은 저항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저항은 절망의 행동화로 드러난다고. 구원을 바란다는 사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가야 할 길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지만 깨어나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 공포를 견뎌야 한다. 만약 공포를 견디지 못한 채 구원을 바란다면 그는 노예라는 자각마저 잃는다.(p. 109)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를 다케우치는 '깨어난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노예를 거부함과 동시에 해방의 환상 또한 거부한다. 깨어난 노예는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취와 차별의 한 축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근저에 놓여진 구조를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밖에 보지 못하는 '노예근성'과 구별된다. 그렇게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개인이란 내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사라지면 사상은 평면화되고 그렇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통속화를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지향한다. 진정한 사상가는 오로지 거기에 있을 때라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쑨거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태도를 루쉰의 말을 빌러 '쩡짜'라 부른다. 바로 서두에서 진정한 사상적 만남은 자신을 상대에서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바로 쩡짜의 의미다.(p. 113) 쑨거는 '쩡짜'가 깨어난 노예의 숙명이라고 한다. 주체는 쩡짜로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을 씻어낸다. 동시에 부단히 회심의 축을 향해 돌며 자기를 재형성한다. 이로써 주체가 얻는 것은 유동성이다.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런 의미다.(p. 115) 즉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것은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디든 고여있지 않고 그 어떤 곳이든 기꺼이 흐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상을 하는 주체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다케우치와 다케우치를 번역한 쑨거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생각들이 한창 민족주의가 강해지던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이었던 '루쉰'은 참전 직전에 죽을 것을 염두에 둔 그가 마치 마지막으로 할 말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에 대해 배타적일 때 다케우치는 타자인 루쉰과 만나면서 주체는 무엇보다 흘러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쑨거는 그런 다케우치를 1988년에 만났다. 그 한 해 뒤에 중국에서는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만한 '천안문사태'가 벌어졌다. 민주화를 바라는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염원을 탱크로 처참하게 짓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천안문사태는 80년 후반에 들어와 더욱 거세어지던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도 같았다. 그 열망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조금도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무력으로 짓밟으려고만 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모습은 다케우치의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시기에 쑨거는 다케우치를 만났고 그의 '쩡짜'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어온 다케우치와 쑨거의 사상 편력은 지금 날로 우경화되는 추세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진정한 주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을 주체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 거리를 가져다 준다. 그런 면에서 '사상의 번역' 역시 다케우치와 쑨거처럼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고 하겠다. 날로 동아시아 삼국 서로에 대한 적대의 시선을 키워가는 요즘 이 책을 통해 '쩡짜'로서 타인을 한 번 헤아려 보는 시선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쩡짜'를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꽤나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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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번역》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思想(사상)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러한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두 번째는 <철학에서> 판단, 추리를 거쳐서 생긴 의식 내용. 세 번째는 <철학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통일된 판단 체계.네 번째로는 <철학에서> 지역, 사회, 인생 따위에 관한 일정한 인식이나 견해. 마지막으로 <문학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지는 견해와 주장이다. 대부분이 사상 하면 첫 번째의 뜻을 떠올리겠지만, 이 책 <사상의 번역: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네 번째 책>인 이 책에 해당되는 뜻은 마지막 의미인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지는 견해와 주장’의 의미에 다 가깝다. 굳이 이렇게 사상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 책의 구성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이 책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이란 무엇일까? 바로 쑨거가 쓴 [다케우치 요시미의 물음]을 통해 보는 루쉰의 사상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쑨거의 견해와 주장을 새롭게 번역한 것이다.
쑨거가 이 책을 통해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번역 하는 패턴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역사상 인물로 크게 시사를 받았기에 숭배에 가까운 감정에 빠져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의 말투마저 흉내 내기에 이른다. 둘째. 역사상 인물을 추종하는 분위기에 반감을 폼어 상대의 사생활을 검증하는 등 아우라를 꺠뜨리려고 노력한다. 셋째, 역사상 인물이 범한 사고의 한계를 파고든다. 넷째, 역사상 인물이 지적 전통을 일궜다면 상대를 비판해 새로운 지적 전개를 꾀한다. 다케우치의 사상적 원점은 [루쉰]이다. 일본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서 다케우치가 자신과 시대의 불행을 자각하며 전 생을 관통하는 사상은 루쉰을 통해 형성되었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물음]에서 루쉰을 통해서 일본 사상과 일본 문학에 육박하는 기반을 다지는 것을 살펴본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이란 사상이며, 행위이며, 정치이며, 미학이다. 그러나 문학은 그 모두를 초월해 그것들을 생산하고 또 지워버린다. 문학은 희망과 아울러 절망마저도 일신에 모아 사상과 정치와 예술을 토해낸다. 그렇듯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실현하지만 자신은 정해진 틀을 갖지 않는다. 문학은 그것들 모두를 내뿜고 빨아들이는 궁극의 장소다. 그 장소에서 주체는 사상을 정치를 예술을 하며 부단히 자기를 갱신한다. 다케우치가 이런 문학관을 체득하게 된 계기는 바로 루쉰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루쉰]을 작성하면서 문학을 하나의 창작 행위로부터 궁극적이며 본원적인 자기 갱신의 장으로 끌어올렸으며, 동시에 이런 문학관을 세계관에 접목해 세계관이 유동적 양태를 획득하여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끌어내렸다. -P60 위와 같이 사상가로서가 아닌 문학가로서 루쉰과의 만남을 다케우치는 ‘쩡짜’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을 상대에게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사상적 만남을 쩡짜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케우치의 사상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쩡짜’는 깨어난 노예가 자기부정과 자기재건을 거쳐 주체성을 획득하는 길로 동양이 자신의 근대로 나아가는 길로써 달리말해 ‘루쉰적 저항’을 함의한다.
원문 속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된다. 사상이란 번역이다. 작가의 사상이 녹여있는 텍스트는 독자의 의식 안에서 새롭게 번역이 시작되며 유동한다. 이러한 유동하는 의식을 따라 글을 쓴다는 자체가 무척 대단하게 여겨지는 책이었다. 다케시마 요시미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루쉰을 투영하여 시대를 읽는 것도 아니다. 다만 쑨거는 다케우치라는 문학가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다져가는 '쩡짜' 정신을 승계하는 글쓰기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루쉰에 이어 다케우치, 다케우치에 이어 쑨거를 잇는 사상의 궤적은 이렇게 유동하는 텍스트가 문학가에게 흘러들어가 그려지는 번역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 안에 시대를 고민하는 사상가가 있고, 그 안에 시대를 깨우는 문학가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쩡짜의 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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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에세이라고 선택해서 선택한 이책이 내가 상상한 책 내용과 달라서 당혹스러웠다. 문득 안철수의 서재를 읽고 추천한 책을 읽다가 멘붕이었던 오래전의 나를 생각해냈다.
이 책을 다 읽기는 했지만 사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쑨거와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해 알아보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부끄럽지만 쑨거라는 인물도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인물도 처음 알았다. 네이버에 다케우치 요시미와 쑨거를 검색해보니 둘은 연관된 부분이 많고 책 또한 꽤 있는 편이다. 나의 무지에 잠시 반성했다가도 쑨거라고 검색을 했더니 인물정보에 나오질 않는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경우 중국문학자 이며 루쉰의 연구를 주로 했다고 간략하게 나오는데 사상의 번역의 시작에도 이부분은 간략하게 나온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을 연구하고 중국의 쑨거는 일본 다케우치 요시미를 연구한다.
이 책의 간략한 내용은 일본의 대표적 칭송과 학자에 이르지 못한 평면가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경로를 추적하고 동양의 두 논자라 불리우니 다케우치 요시미와 쑨거가 펼치는 방황 좌절 그리고 희망 연대기의 내용을 담았다.
사상의 번역이란,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 -윤여일
사상의 번역이라고 해서 번역이 '해석'이라는 뜻인 줄알았건만...여기서 나온 번역은 그런뜻이 아니었다. 역사,국적,세대를 가로지르는 역사적 인물간의 만남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라는 뜻이란다.
예상치 못한 내용에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여기서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은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아큐정전의 루쉰을 연구한 중국문화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 그리고 그를 번역(해석의 의미가 아니다)하는 쑨거 이 세명의 관계 는 연결되어있고 이 책은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책이라는 거. 솔직히 한 번 읽어서는 모르겠다. 몇 번 더 읽어봐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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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읽고 있는 중.
이해의 이해를 위한 번역의 해석이라고 보면 되려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에 대한 연구를 한 쑨거의 책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그 책[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번역한 윤여일 작가.
번역가인 윤여일 작가가 쓴 [사상의번역] ; <쑨거의[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읽기와 쓰기>.
여는 글에서 윤여일 작가는.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은 '사상의 번역서'라고 말한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번역해 간 쑨거.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를 통해 자신을 응시해간 기록에 가깝다.p9
결과적으로 보면.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따라가는 방법으로
'리뷰'를 윤여일 작가가 쓴것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해석학이며 또한 번역자 스스로 들어간 또 다른 점을 이은 선이라고 본다.
맺는 글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은 복잡하다. 그러나 사상을 지향하는 자라면, 현실의 복잡함을 정돈하기에 아서 복잡의 복잡을 사고해야 한다. 바깥의 빛이 비추지 못하는 자기 현실의 어둠을 구서구석 더듬으며 길을 내야 한다.p206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리뷰는 내가 그책을 읽기 위한 선험적인 지식이라고 본다. 책을 읽기전에 미리 이해가 된 내용은 책을 더 읽기 쉽게 만든다.
결국 이 책 [사상의 번역] ; <쑨거의[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읽기와 쓰기>.를 통해 쑨거의[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를 접하게 되는것이며.
작가는 말한다.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이다.p208
아직 여전히 천천히 읽는 중이며. 그안에 담긴 사상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 일어나는 상황을 보는 식견을 넓혀주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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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어달리기 같은 책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인물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시도해봤는데, 타케우치 요시미를 알기 위해서는 루쉰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 뒤로 쑨거가 이어진다. 단 하나 제대로 건진 정보가 있다면 타케우치 요시미가 남성이라는 것. 반대로 그만큼 배경 지식이 없는 채로 책을 들었다는 뜻도 된다. 사상과 학문이라는 것이 원래 다 이렇게 이어지고 갈라지는 것인지. 독자를 시험하는 듯한 사실은 이래도 계속 다음장으로 읽기를 계속할 것이냐고 확인하는 듯한 내용이 계속되고 있는 책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생각 이상으로 비워진 공간이 많은데 결국 마지막까지 가긴 했으니, 한보 나아가고 두보 밀려난 느낌이 든다.
상대의 상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더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쩌면 그저 여기서 논의되는 타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에 대해서만 포커스를 잡고 읽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다. 책의 내용 안에서도 나온다.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이다." 라고. 책을 마주하고 되새기자,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자기화 된 결과물 외에는 없을 것이란 사실을. 자기화의 범주가 더 크고 넓어지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말이다.
타케우치 요시미, 루쉰과 쑨거가 일본과 중국의 문학가이자 비평가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내용이 나오는 부분도 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특히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 나오거나 일본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불편하기도 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거론한 부분 등이 특히. 그 외에도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담론도 나오기 때문에 그런 사상이 담긴 부분들은 매우 흥미롭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과 동양의 구도를 두고 어떤 시선으로 세계의 흐름을 인식해야 하는지, 근대화의 과정에서 두 문화가 충돌하며 우와 열의 위치를 형성하는 상황에 대해 어느 위치에서 문제 인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는 6장의 내용은 특히 재미있었다. 다소 생소한 쩡짜의 방향이라는 표현에 공감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리뷰가 아쉬웠다. 나같은 겉핥기가 아니라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글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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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번역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사상의 번역'이란 단어 자체조차 나에겐 어려운 단어였다. 그리고 몰랐던 단어였지만, 이 책을 통해 한문장 한문장 이해하면서 읽으려 노력했고, 그래서 이 책을 다 읽는데에 조금 인내의 시간이 걸렸다.
사상의 번역이란 온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상대와 동화될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려 하는 노정이다.
이 책은 저자 윤여일께서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이다. 그러기에 앞서 책의 내용은 쑨거라는 분은 둘째치고,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분도 알아야 했다. 처음엔 이분들에 대해 알아가지 않고 읽어보려고 노력했으나, 이해도 더딜뿐더러, 어려워서 검색으로 이 두분에 대해 읽어보고 다시 책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검색해서 좀 알아가는 것이 힘겨운 분들에게는 친절하게도 이 책의 뒷부분에 두 인물의 연보가 자세하게 나와있으니 그것만 읽어봐도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중국 문학 연구자인 다케우치 요시미 라는 분이 평생 루쉰을 탐구한 것처럼 쑨거도 다케우치를 탐구하였고 '사상의 번역'을 하셨다. 쑨거에게 다케우치는 그녀의 박사 논문 대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을 놓고 본다면 이 두사람은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 그 사람에 대하여. 루쉰과 다케우치에 대해 자신만의 사상의 번역을 하게 되는 두 사람. 또 이 두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읽을 거리를 만들어주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윤여일 씨는 같은 선상에 있게 된다.
쑨거가 다케우치에 대해 어떻게 번역해 나갔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번역을 일구어 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저자만의 시선. 또한 곁들여 다케우치와 루쉰의 만남. 그리고 그의 일생에 대해서 또 한번 지식을 안고 가는 책이었다. 나에게는 좀 어려운 책이었으나 새로운 지식의 황홀한 책이라고나 할까. 다음에 한번 더 정독을 하게 된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이것으로 만족을 하며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다.
다체우치에게 중국은 내재하는 타자(내재하는 외주)였다. 타자는 어디에 있는가. 내 안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타자는 나에게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타자와의 관계는 내게 고통을 안긴다. 자신을 깨뜨리도록 이끈다. 바로 다케우치에게 내재하는 중국의 가치란 자기를 상대화하고 개방해가는 데 있었다. (p.56)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을 계몽가라기보다 문학가로서 이해했다. 다체우치가 이해한 문학가 루쉰은 선각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시대에 반보 뒤처진 존재였다. 또한 다케우치가 이해한 문학은 응고되지 않은 채로 사상과 정치와 예술을 토해내는 장이었다. 그리고 다체우치 역시 소설 짓기와 같은 창작 활동에 나서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해한 의미에서 문학적이었다. (p.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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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무엇이고, 그 번역은 무엇일까? 사상의 번역이라는 말이 이렇게 어렵게 다가올줄이야. 또한 나는 사상의 번역이라는 재미있는 세상에 빠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나는 한페이지를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리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대학 교양수업을 받을때 쉬울것만 같았던 철학수업을 신청하고 괴테 전집을 읽으면서 멀미를 느낀이후 한 장을 넘기기 위해 읽고 또읽기를 반복한것이 실로 얼마 만인지. 동료는, 가족들은 아직도 여기 읽고 있어? 라는 말을 건낼정도 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루쉰부터 알아야 하겠구나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 도중 루쉰을 검색하고, 지나문학에 대해 찾아보았으며, 쑨거라는 인물을 들여다 보았다. 쑨거는 올해 초에 우리나라에서 강연도 했다는데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꼭 들어보았을것 같다.이렇게 나는 쑨거라는 인물과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되어 왠지 모를 뿌듯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꽤나 잘 알려진 인물들임에도 나는 참 생소했다. 다만 루쉰을 알고 있었던걸 보면 대학때 분명 이들에 대해서도 공부한적이 있거나 들었음직 했을텐데 전혀 생각나지 않아 이 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읽는데에는 전혀 걸림돌이 없었다. 아마 조금의 배경지식이 깔려있었다면 나는 비교하느냐고 제대로 책을 읽지 못했을것 같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다케우치와 일본의 시대적 배경에 또 눈을 돌려 보게 되었고, 이상하게 다케우치는 반중감정이 있거나 하프극우주의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쑨거가 이를 향해 열정을 쏟지 않았을것인데.... 나름의 기준으로 이 책을 들여다보니 재밌는 부분들이 쏙쏙 등장했다.
담배를 입에 문 다케우치는 지나에 심취해서 그런것인지 일본인보다는 중국인의 느낌이 나는 사진이다. 루쉰을 너무나 사랑했다고 해야할지, 집착해야 했다고 해야할지 책대로라면 그는 루쉰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아 그대로 실천했다고 보면되지만 걸어온길은 많이 다른듯하다. 그렇게 쑨거도 이런 다케우치를 따라가면서 그의 사상을 번역해놓은것이 바로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다. 쑨거는 연신 절대 만날수없는 시대상에 살았으면서 늘 책에는 만난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 만난다라는 표현이 이렇게도 잘 어울리는구나 어렵고 복잡한 책에서 명확히 느낄수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않은 고전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우리의 시대. 유렵과 아메리카의 이름난 사상가들이 아닌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우리와 너무나 가까운 인물들에 대해 제대로 다가가고, 외국글자를 옮겨놓은것이 아니라, 단순 텍스트에 감각을 입혀놓은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국적, 세대를 어우르면서 확립되고 재정비된 맞춤 사상을 엿볼수 있을것 같다. 물론 엄청나게 어렵다는 (누군가 이책이 쉽다라고 한다면 머리숙여 경의를 표하고싶다.) 단점이 있었지만 이 책을 다 읽은 후 그 희열감은 뭐라 표현이 안된다. 내가 이런책도 읽을수 있구나 라는... 희한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다음의 도전은 책속에 작게 써놓은 책들을 읽어보려고 한다. 특히 다케우치가 써놓은 그 루쉰에 대한 책들을 말이다.
이 책을 만나게 된것이 나의 새로운 독서의 기준이 될것같다. 한정되어 있던 분야, 좁은 지식의 흡수층을 아주 많이 넓혀주는 멋진 책으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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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읽기와 쓰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한마디로 쑨거와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두 학자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의 사상 탐구서라 할 수 있겠다. 2005년에 이미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의 한국어판도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이 분야의 문외한 나로서는 일단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두 사람의 학자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물론 이 책의 맨 뒤편에 이 두 사람의 자세한 연보가 실려 있지만 일단 다케우치는 1910년에 태어나 1977년에 사망한 일본의 중국연구자라고 한다. 지나철학, 지나문학과를 나왔고 중국문학연구회를 꾸렸던 이 사람을 연구한 쑨거는 1955년생으로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박사 논문을 쓸 때부터 본격적으로 다케우치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이 책이 사상의 번역이라는 타이틀을 단 것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쑨거가 어떻게 해석해냈는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번역의 문제는 어학이나 표현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으며 결국 인간의 문제라는 지적에서부터 좋은 번역이란 번역자가 원문을 곧이곧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원문의 한계까지 해석해 해석의 한계를 문장에 담은 것이라 주장하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엮은이는 독자가 다케우치의 글을 읽는다고 그의 체험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면서 거기에는 어떤 정신적 문턱이 있으며, 독자는 자기전환을 통해 체험의 의미를 자기 안에서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면서 사상의 번역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어쨌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쑨거의 논점으로 본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은 한마디로 해석하기 힘들다. 맨손으로 문제 상황에 뛰어들었고 거듭해서 좌절했던 인생을 살아왔으며 정반대의 상이한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다케우치의 사상의 원점이었다는 루쉰과 비교 해봐도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두 이웃 중국과 일본의 사상사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물론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한 축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한학과 지나학의 문제들, 태도로서의 문학이라는 논점, 루쉰적 저항이라는 쩡짜의 의미, 동양의 위치에서 서양의 근대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고민들,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거기에 전후 일본 현대사에 의미 있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는 도쿄재판이나 안보조약 개정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안보조약 개정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다케우치 요시미가 대학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낸 사직이유서가 신문에 게재되며 크게 회자되었다는 언급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문장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게 되었다. 어쨌든 어려운 책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현대 사상사를 되짚어보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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