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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의 꿈을 안고 바다로, 바다로... **
마네를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순수미술의 혁명가? 앙드레 말로 같은 이들이 찾아내려고 했던 현대 순수회화의 창시자? 19세기 아카데미즘의 파괴자?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 프란스 할스를 이어받은 위대한 회화 정신의 계승자? 섣부른 반항아? 새로운 필법으로 전통의 고리를 이어낸 진정한 화가? 이전 세대의 예술을 뛰어넘은 최초의 모더니스트인가? 그도 아니면 보들레르의 말대로 예술의 쇠퇴기에 태어난 ‘불행한 맏아들’인가?(p11)
1832년 1월 23일 프랑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와 학사원에 위치한 대저택에서 부르주아 법조인 아버지와 스웨덴 왕의 대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에두아르 마네가 태어났다. 스톡홀름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한 외할아버지와 당시 대위로써 특히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외삼촌 에두아르 푸르니에까지, 화려한 가족인맥만 보아도 마네의 화가입문은 다른 어느 화가보다도 쉬울 수밖에 없었다. 마네의 학창시절 성격은 또래 아이답지 않은, 완고한 사색에 빠진 듯 다소 냉담하고 이질적이었다. 훗날 문화부 장관이 된 롤랭 중학교 동창이었던 앙토냉 프루스트의 증언을 보아도, 마네는 자기주관이 뚜렷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때부터 자기만의 세계가 어느 정도 정립돼 있었던 듯하다. 여하튼 집안내력에 걸맞게 아들을 법조인으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의지를 꺽고 배를 탄 마네는 해양학교 시험에 연거푸 낙방해(이로써 가족들은 암묵적으로 마네의 화가입문을 허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교육용 배에 몸을 싣고 현장에서 견습 선원으로서 6개월간의 긴 항해에 오른다(이때 경험한 브라질 여행에서의 강한 인상으로 탄생한 그 유명한 작품이 바로 <올랭피아>이다). 1849년 6월, 파리로 돌아온 그는 쿠튀르의 작업실로 들어가 6년간 그림을 배우며, 고리타분한 아카데미풍보다는 다소 무모하지만 진보적인 젊은 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진다. 그리고 여느 초보 미술학도들처럼 소묘와 캐리커처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마네도 후에 10년 가까이 베네치아 화파의 그림을 모사하는데 몰두한다.
![]() 어린 시절의 마네 1860년 마네가 그린 오귀스트 마네와 외제니 마네 부터의 초상
** 소외된 자들의 순간을 포착해 단숨에 표현해 내는 화가**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하다니, 참 웃기는 얘기군! 중요한 것은 이거야. 첫눈에 본 것을 그리는 것, 그래서 잘되면 그걸로 족한 거고, 혹시 안 되면 다시 그리는 거지. 그 나머지는 죄다 엉터리야. -마네(앙토냉 프루스트의 증언)(p 25)
쿠튀르 화실에서뿐만 아니라 미술관에서의 오랜 현장학습은 마네가 그 자신만의 미술세계관을 구축하는데 공헌한다. 특히, 여러 차례 방문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모사했던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10년 후, 그에게 온갖 추문을 안겼던 <올랭피아>의 전신이었다. 또 그는 코로, 도비니, 용킨트 같은 풍경화가들과 외젠 들라크루아를 좋아했는데, 특히 들라크루아는 시인 보들레르와 함께 1859년 마네의 살롱전 첫 출품작이자 낙선작이었던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이 심사위원들로부터 모욕적인 평가를 받았을 당시, 그를 옹호해주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1856년 쿠튀르의 화실을 떠날 무렵, 그림보다 침착하면서도 농담 잘하고 거기에 확고한 주관이 남달랐던 마네는 화단에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다. 더불어 부르조아 가문의 일원답게 일찍부터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했는데, 특히 그가 살롱전 출품 이후 계속되는 파문으로 시달릴 때마다 마네를 옹호하고 나섰던 보들레르와 바르베 도르빌리, 콩스탕탱 기, 브라크몽, 나다르 등은 모두 그때 친분이 두터워진 사람들이었다. 한편, 마네는 1865년까지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에스파냐를 방문한 이후, 에스파냐풍과 벨라스케스에 단박에 매혹당한다. <발렌시아의 롤라>와 <에스파냐 가수>는 순전히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마네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견학을 감행한 뒤에 탄생된 작품들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악사나 집시 혹은 술집 작부 등과 같은, 소위 거리의 소외된 낭만주의자들이 마네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문의 특권을 이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류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마네는 고루하기 그지없는 기성화단에 반격하며 반항아로서의 기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보들레르와 함께 거의 매일 튈리 공원을 산책하곤 했던 마네를 향해 ‘이 애송이가 벨라스케스인 척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그와 대립했던 쿠르베. 두 고집스런 혁명가들의 대립을 지켜보며 맞장구치는 아카데미파. 부르주아면서 주변에 쟁쟁한 지인들에 둘러싸였는데도 불구하고 ‘한량’ 혹은 ‘사교계의 집시’라고 불렸던 마네가 쿠르베 눈엔 매사에 아니꼬우면서도 견제의 대상이었던가 보다. 어쨌든 개성이 강한 그의 인품에 대한 찬사와는 달리 마네의 작품을 향한 세상의 평가는 잔인하리만치 혹독했다. 그건 그를 추종하는 젊은 화가들 편에선 보수적인 화단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자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열망이고 도전이었다.
![]() <올랭피아>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통해서 마네는 사실주의자로서의 면모와 과감한 필법을 선보인다. 이 두가지는 토마 쿠튀르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파리 거리에 나타난 에드거 앨런 포와도 같은 이런 거렁뱅이 시인, 혹은 술취한 철학자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보들레르였다.(p27)
<발렌시아의 롤라>와 <에스파냐 가수>는 보들레르와 고티에를 사로잡았다.(p31)
**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그림 속에서 화단의 역사로 거듭나다 **
역사의 한 장에서 문장紋章으로 쓰이는, 시대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것을 꼽으면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이 될 것이고, 19세기 후반은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로 대표될 것이다.(p47)
에스파냐와 플랑드르 풍으로 은밀한 사생활의 일단을 드러낸 1860 ~ 1861년에 제작된 작품들 중에선 아내 수잔과 모델 빅토린이 많이 등장한다. 동생들의 피아노 선생으로 인연을 맺게 된 수잔은 마네보다 2살이 많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예술적 감수성과 현모양처로서의 기질을 고루 겸비한 지적이고 현숙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1852년 수잔이 낳은 아들 레옹 에두아르 레엔호프를 마네 쪽에서는 한번도 친자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렘브란트의 <바세바>와 부셰의 <다이아나>를 섞은, 풍만한 여체의 수잔을 <놀란 님프>에 담았고, 당대의 음악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남달랐던 그녀를 <피아노 앞에 앉은 마네부인>에 담아낸다. 한편, “거대한 도시들의 지하를 흐르며 방황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빚어낸 어릿광대와 거지들, 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미지(p41)를 담아내려 했다고 증언한 보들레르의 말처럼, 1860년대 초 마네의 관심은 여급 출신의 모델 빅토린을 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비롯해 <올랭피아>,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 <앵무새와 여인>, <철로> 등에 등장한 인물이 전부 그녀다. <올랭피아>의 빅토린을 본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는 “역마살이 낀 자유분방한 여인네로, 마네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맥주홀의 바람기 있는 여자이다- 그녀의 눈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다.”(p56)고 말했는데, 그녀는 마네가 작품에 의욕적으로 달려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후에 그녀를 담았던 두 작품은 ‘퇴폐풍’의 음란하고 외설적이며 저급한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등의 세간의 줄기찬 악평으로 장차 마네를 무던히도 괴롭히게 된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선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즘, 당시 실세였던 쿠르베에 대한 당당한 도전을 뛰어넘어 16, 17세기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거장들에게 정면승부를 걸면서 마네가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가 된다. 이로써 마네 본인의 의사야 어떻든, 그는 모네를 필두로 한 진보그룹으로부터 새로운 미술운동의 개화의 선두에 선 기대주로 주목받게 된다.
<놀란 님프>에서의 수잔의 모습을 보면 렘브란트의 <바세바> 체리를 먹으며 카바레의 문을 와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가 연상된다- 전해지는 바에 의 나서는 정장차림의 빅토린 하면, 마네는 처음 시도한 대작 <물을 이긴 모세>를 포기하고, 수잔을 모델로 벗은 여인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기 위해 그림을 잘라냈다고 한다.(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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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와 여인>에서 빅토린은 바이올렛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단정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쿠르베가 1866년의살롱전에 앵무새와 시시덕거리며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를 발표함으로써 마네의 <올랭피아>에 맞선 데 반해, 마네는 여인과 앵무새를 한데 모으고 빅토린에게 정장을 입힘으로써 자기 나름의 대응을 하고 있다.(p45)
**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 간결한 터치로 시대를 압축하다 **
마네 역시 이전의 들라크루아와 이후의 피카소처럼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뿐 아니라, 문인들의 글을 통해서도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내보인다. 병과 죽음의 어둠에 몰두하고 있던 보들레르가 선두에 서 있었고, 젊고 우렁찬 에밀 졸라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졸라의 관심이 시들해지자 이번엔 스테판 말라르메가 마네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p67)
자국뿐 아니라 주변국들의 크고 작은 혁명과 전쟁을 경험해야 했던 마네의 1860년대 중후반의 몇몇 작품들은 어둡고 처참할 정도로 엄숙하다. 1866년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작품, <피리 부는 소년>을 본 졸라는 그의 미학적 태도인 자연주의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며, 마네의 재능은 ‘정확성과 간결성’에서 다른 화가들을 능가한다고 평한다. 1866년 <졸라의 초상화>가 1868년 살롱전에서 당선되자, 대중은 화가의 얼굴뿐 아니라 둘의 관계까지 알아차리게 된다. 졸라 외에도 예술가들 사이에서 ‘잘생긴 신사’로 통하는 자샤리 아스트뤽(시인/작가/비평가/조각가) 또한 마네의 가장 오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 마네가 감행했던 에스파냐 여행을 계획해주고 그에게 일본판화를 소개해주는 등 1863년부터 마네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한편, 1869년 <발코니>와 <화실에서의 점심식사>가 당선되어 마네는 또 한번 비평가들의 논란에 휩싸인다. 적지 않은 적을 두어야했던 마네는 인상파 전시회보다는 줄곧 살롱전만을 고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마다 혹평을 피해갈 수 없었다. 투박한 녹색의 발코니와 부자연스러운 세 모델의 포즈를 꼬집는 사람들부터 전혀 관계없는 괴상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등등. 화제의 작품, <발코니>를 보자. 각각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발코니>의 세 인물, 베르트 모리소와 풍경화가 기유메,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파니 클라우스는 모두 마네와 절친한 예술가들이다. 좌측에 앉아있는 베르트 모리소는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한 제수 씨이자 코로의 제자였다. 재능 있는 여류 화가였던 그녀는 <베르트 모리소의 초상화>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작품은 <발코니>가 적지 않은 혹평을 받은 데 반해, 온통 검은색 실루엣만으로 잘 다듬어진, 마네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는데, 폴 발레리는 흑백의 대비와 무심하고 신비스런 모리소의 은근한 미소가 일종의 ‘부재의 존재’를 웅변한다면서 지나치게 모델의 존재감을 추켜세운다.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마네는 판화들, 특히 새로운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일본 판<피리 부는 소년>이다. 발그스레한 회색 화들에 들러싸여 있는 인물을 묘사한 <졸라의 초상화>를 전경 앞에 경찰모와 붉은 바지를 차려입은 그렸다. 졸라의 펜과 마네에게 헌사한 바 있는 푸른색 소책 작은 키의 모델이 도드라져 보인다. - 마네 자 위로 <올랭피아>의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보면, 졸라의 의 그림은 꾸밈이 없다. 부분들에 괘념치 의 글에 대한 마네의 감사표시를 읽을 수 있다. 졸라는 않을 뿐아니라, 인물에 불필요한 덧칠을 이글에서 "이 걸작은 말 그대로 화가의 살과 피이다.(p70) 하지 않는다- 에밀 졸라(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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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나오는 마네의 세 친구들은 서로 다른 <베르트 모리소의 초상>"나는 1872에 그린 베르트 성격의 배역을 맡은 배우들처럼 보인다. 오른쪽 여 모리소의 초상화를 마네 예술의 정수라고 여긴 인은 사랑스럽고 희극적인 멍청이역, 가운데 남자는 다. 무엇보다 나는 그 검은색의 완전한 어둠을 주목 자신감 넘치는 멋쟁이 신사역이 어울린다. 반면 베 하고자 한다. 상모와 턱끈의 검정색은 마네만이 낼 르트 모리소는 체호프나 입센의 연극에 나오는 여주 수 있는 효과이며,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다- 검은색 인공을 닮았다. 1872년 마네는 부채 위에 놓인 <바 의 힘과 단순한 배경, 장밋빛이 도는 백색의 깨끗한 이올렛 다발>을 그려서 베르트 모리소에게 선물했 피부, 가히 '현대적'이며 '신선한' 모자의 독특한 실 다.(p75) 루엣. 즉, 인물의 외면을 감싸고 있는 모자술과 끈, 리본의 형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과 그윽 한 눈빛의 커다란 눈을 지닌 이 모델은 일종의 '부 재의 존재'를 웅변하고 있다." - 폴 발레리(p75)
1865년경, 마네는 친구이자 라이벌인 드가의 영향으로 <롱샹의 경마>를, 1867년 9월 2일 보들레르의 장례식 장면으로 추측되는 작품 <매장>을, 1869년 여름을 보내는 동안 불로뉴 항구의 일상을 그린 <불로뉴 항구에 비치는 달빛>과 <증기선 포그스턴호의 출항> 등의 작품을 그린다. 보자르 미술관에 초청되지 않은 그는 쿠르베처럼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그건 마네가 살롱전 심사에서 이미 너무 많은 불이익을 받아왔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공식적인 인정 따위에 괘념치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1867년 살롱전에서 또 낙선하고, 개인전은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한다. 소득이라면 마네가 차세대 화가들에게는 지난 6년 동안 낙선과 혹평을 받은 것들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는 것.
사람들이 만국 박람회를 즐기는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언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발한다. 이에 분노한 공화주의자 마네는 동병상련의 심정(신문이나 심사위원회의 계속되는 상징적 총살)으로 막시밀리언의 죽음을 폭로하는 <막시밀리언의 처형>를 그린다. 비슷한 시기의 작품 <바리게이트>는 1870년 노동자들의 파리 공략을 목도한 뒤 코뮌의 현장을 담은 석판화다. 여세를 몰아, 역사적 변동기였던 1870 ~ 1871년을 지낸 뒤 처음 열린 살롱전엔 미국의 남북 전쟁을 주제로 1864년에 그린 <키어사지와 앨라배마의 전투>를 출품한다. 주지했다시피, 1870 ~ 1880년 동안 마네가 기도한 것은 모네식의 인상주의 기법으로 살롱전의 문을 고집스럽게 두드리는 것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는 공화주의적 확신에 가득 찬 마네에게 심사위원들이 좋아하는 ‘역사화가’로서의 면모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가 당대의 사건들에 대단히 민감했다는 일종의 방증이었다. 더불어 이 시기의 작품들은 까칠한 섬세함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빛을 발산하는지, 구차한 복잡함보다는 단순미의 절정이란 표현 기법을 통해 역사의 부당함을 겨낭한 마네의 숨은 의도가 기저에 깔려 있음을 잘 보여준다 .
<증기선 포크스턴호의 출항> 이 증기선은 1869년, 전 해 여름에 런던에 잠시 갔을 때 빌렸던 배이다. 그림은 어느 여름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파도가 높고 하늘은 맑은 가운데 뜨거운 볕을 피해 양산을 쓴 여인들의 모습 등 인상주의적인 분위기와 스타일이 느껴진다. 왼쪽에 흰 드레스를 입은 수잔 마네 옆에 펠트 모자를 쓴 레엔호프가 보인다.(p79)
<막시밀리언의 처형>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언에게 멕시코 황제의 직위를 강요한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맞설 충분한 군사력도 주지 않았다. 멕시코로 쫓겨난 막시밀리언이 1867년 7월 1일 처형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파리 시내에 퍼진 날, 마네는 볼로뉴에 머물고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후아레스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끝났다."고 희곡작가인 루도빅 알레비는 이렇게 적었다.(p85)
<키어사지와 앨라배마의 전투> "마네는 2대의 전함을 수평선 쪽으로 밀어놓고, 원근법에 따라 크기를 작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멋을 부렸다. 하지만 바다 위로 넘실거리는 파도는 전투보다도 더 끔찍해 보인다." - 바르메 도르빌리(p88)
** 지인들과의 일화, 그리고 관습타파와 현대회화의 효시를 열고 지는 별 **
14세기 이탈리아인들한테 조토나 치마부에가 중요했던 것처럼, 우리한테는 마네가 중요해. 이해할 수 있겠어? 마네에게서는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나고 있거든.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아들 장에게(p91)
코로가 소심한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반면, 좀 더 대담한 화가들은 쿠르베나 마네에게 몰린다. 그렇다면 젊은 급진파를 비롯한 사회 유명 인사들을 몰고 다녔던 그의 매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화가로서의 재능과 부합되는 냉철함과 다부진 면 외에 마네에겐 번뜩이는 재치와 활기 찬 유머감각, 그리고 따뜻한 정이 있었다. 먼저 세잔은 타고난 떠돌이 기질로 인해 그를 놀래킨 점이 없지 않으나, 그는 마네를 무척이나 존경했다. 또 르누아르와 바질도 마네의 사랑을 받았지만, 누구보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은 모네였다. 모네의 재능과 장래성을 높이 평가한 그는 모네와 함께 여러 차례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린다. 작품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와 <아르장퇴유>는 둘의 돈독한 우정를 증언해준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그들의 움직임을, 빛이 생기 있게 만들지 않는 장소는 마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친분과는 별도로 마네는 이 부분에서 모네와 극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그리고 1873년 <르 봉 복>으로 성공을 거두며, 마침내 살롱전에 모더니즘을 공식적으로 도입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인상파 화가들의 적잖은 눈총을 감수하며 전시회에 불참하면서까지 줄곧 거부해온 살롱전에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 쾌거였다.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아르장퇴유>
<르 봉 복> "몸집이 크고 얼굴이 불그스레한, 이 카페의 쾌락주의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담배와 맥주말고는 세상과 절연한 사람의 분위기를 읽는다." 1873년 살롱전에서 마네에게 처음으로 말 그 대로 성공을 안겨준 그림. 이 사내는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전형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 지만, 실제로는 게르부아 카페에 자주 드나들던 석판화가 에밀 벨로가 모델이다. 얼마 전에 네덜란 드를 다녀온 바 있는 마네는 이 작품을 통해 프란스 할스에 대한 존경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를렘 맥주를 마시고 있군." 화가 스티븐스가 그렇게 비꼴 만하다.(p99)
덜 다듬어진 자연과도 같은 마네에 비해 내성적이고 지적이며 고고하면서도 섬세했던 드가. 그는 마네의 유명세를 가리켜 가리발디만큼이나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비꼬곤 했다. 하지만 평소 마네의 집을 자주 방문해 그림을 교환할 정도로 둘은 각별한 사이였다. 한번은 드가가 그려준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네가 그 그림의 반을 잘라버렸던 일이 있었는데, 그걸 안 드가는 반격으로 마네가 선물한 정물화 <자두>를 되돌려 보내버린다. 중요한 건 그러한 잦은 마찰에도 불구하고, 마네 사후, 드가가 그의 많은 그림을 사들였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마네는 자신을 열렬히 아꼈던 친구로 열 살 연하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에게도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그 작품 역시 토론 중인 친구의 지적인 몽상을 포착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왠지 거나하게 술에 취한 주정뱅이의 모습에 가까워보인다. 그럼에도 말라르메는 “공허함 속에서도, 시들어가는 영혼과 함께 희끗해진 금발 머리와 수염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사티로스(반은 사람이고 반은 염소인 괴인)의 재능이 반짝이고 있다. 토르토니 카페의 익살꾼 마네, 그의 텅 빈 화면을 향해 돌아설 때, 그의 온몸은 그림을 처음 그려보는 사람의 열정에 갑자기 휩싸이는것”(p105)이었다라고 말한 걸 보면, 그 역시 이 화쟁이 친구를 어지간히도 아꼈던 모양이다.
드가는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마네의 초상을 수묵화로 그렸고, <클레망소의 초상화>는 생략적인 기 편안한 자세로 수잔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마네를 유화로 법으로 인물의 정수만을 훌륭하게 표현 그렸지만, 마네는 이 유화가 마음에 안 든다며 반쪽을 잘라냈다. 했지만, 정작 클레망소의 마음에는 들후에 드가는 그 그림을 찾아와 다시 그리기 위해서 천을 대두었 지 않았던 모양이다. (p109) 다 그냥 두기로 마음먹는다.(p101)
<말라르메의 초상> 1876년, 말라르메는 퐁탄 고등학교 영어 교사 시절, 수업이 끝나면 매일 저녁 마네의 화실에 들러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말라르메는 화가들의 천재적 소질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을 뿐 아니라, 마네 개인의 인간적인 매력에도 크게 끌렸던 것 같다. 그는 항상 마네에 대해서 얘기했고, 그 얘기들 속에는 마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 - 앙리 드레니에(p105)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네는 19세기 말의 매혹적인 파리 풍경을 사색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표현해낸다. 파리의 통속성, 파리의 우아함과 고결함, 파리식의 예절과 규범뿐만 아니라 파리의 저항 정신과 새로움에 대한 개방 정신을. 그림을 그릴 때처럼 말을 할 때도 그는 항상 생기에 넘쳤고 경쾌했다. 마네는 경박함을 피하면서도 무거워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는 빨랐다. 곧장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 정확한 터치에 이르는 것 등에서 그는 거침이 없었다.(p107)
“인물을 그리는 데 유의할 것은 가장 어두운 부분과 가장 밝은 부분을 찾는 일이다.” 마네의 초상(인물)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보자. 1870년대와 죽기 직전인 1880년대 초반 그의 초상화에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정비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대머리로 리얼하게 정수만을 부각시킨 탓에 모델 당사자의 마음에 들지 못했던 <클레망소의 초상>과 전형적인 화가의 모습을 한 마네 자신의 초상화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도저히 한 작가의 작품이라곤 믿어지지 않는다. 1877년 살롱전에 내놓은 <햄릿 역의 포르> 역시 비평가들과 풍자화가들의 날카로운 비웃음을 받아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몸에 비해 큰 얼굴과 얼빠진 듯한 표정은 어딘가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모델이었던 장 밥티스트 포르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서 <에스파냐 가수>,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 <풀밭에서의 점심식사>, <발렌시아의 롤라>, <피리부는 소년> 등을 포함해 무려 마네의 작품 67점을 사들인 주 고객이었다(혹 그에게 훗날 마네의 명성을 예감하는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고 몇몇 초상화만으로 그의 실력을 저평가하기엔 너무 이르다. 금발의 여배우 엘렌 앙드레를 그린 <자두>와 온실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고 있는 듯한 부르주아 부부의 모습을 담은 <온실에서> 다시 한번 화가의 저력이 제대로 입증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880년에 출간될 졸라의 유명한 소설의 제목과 같은 작품 <나나>가 1877년 살롱전에서 또 낙선하자, 마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던 듯하다. 이어지는 그의 말을 보더라도. “사티로스에게 몸을 맡기는 님프는 괜찮고, 옷을 벗은 아름다운 여인은 안 된다는 거야?”(p120) 그럼에도 카푸친가에 자리잡은 가게 진열장에다 걸린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던 걸로 보아, 마네의 유명세를 알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온실에서>에서 마네는 부르주아 부부의 모습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잡아냈다. 반지를 낀 두 사람의 손에 그림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p111)
1877년 공개된 <나나>라는 작품에서 마네는 <올랭피 1877년 살롱전에 내놓은 마네의 아>의 주제이기도 한 고급창녀를 다시 등장시켰다. 하 <햄릿 역의 포르>를 보고 비평 지만 그림의 기법으로 치면 이 작품은 당시의 자연주의 가들과 풍자화가들은 웃음을 참지 못 문학관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이었다. 보들레르의 시대가 한다. 한 비평가는 "고집쟁이들의 우 가고 페도의 문학이 빛을 발하게 된 시점이니까. 마네의 두머리인 마네는 가수들의 우두머리를 영감을 불러일으킨 나나의 모습은 마치 졸라의 소설 <선 그리고 싶어했지만, 이 초상화는 그야 술집>의 몇 줄을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p121) 말로 가소롭기만 하다."고 비웃었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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