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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형의 책들이 있다. … 과도할 정도로 많은 인용에 비해 자기 말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는 … 게다가 왜 페이지 편집에서 오른쪽으로는 정렬을 하지 않았는지 …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읽기만 불편하고 페이지 내 글 배열이 그리 이쁘지도 않았다. |
| 요즘 PC(정치적 올바름), 다양성 문제, 다문화, 소수자 인권 문제로 유난히 시끌시끌하다. 개념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가 없지만, 대중 매체에서 이를 반드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내용의 흐름과 상관없이 억지로 이런 요소를 끼워넣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피해자성, 약자성, 소수자성이 이제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자기들은 약자와 소수자를 신경쓰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내세우는 '워크 자본주의(woke capitalism)'가 판을 치면서 다문화, 공존, 상생의 참된 가치가 퇴색돼, 대중이 문화적/인종적/성적 다양성 그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소수자 우대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게 순전히 남들한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면, 그리고 PC 그 자체만을 위해서만 기능한다면, 본래의 취지는 퇴색되고 역차별과 교조주의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겠다. PC와 워크는 이제 좌파적, 진보적 가치하고는 거리가 멀어진 채,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이미지만 두르고서 남들한테 잘 보이고 돈을 빨아먹으려는 수단(이름하여 PC코인, 워크코인 정도 되겠다)으로 변질되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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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명리학에서는 '겁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나를 억누르는 힘이나 나를 옭아매는 힘에 거부하는 걸 넘어서서 그 속박과 억압을 타파하는 반역의 기운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에 양이 있으면 음이 있는것 처럼 겁재는 변혁 뿐만 아니라 내 위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망, 나를 거슬리게 하는 것들은 모두 침묵시키게 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담고 있어서 적절한 제어나 힘을 빼주는 다스림이 필요합니다. 사실 국내에서는 아직은 워크라는 말이 생소하긴 하지만,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넘어서서 피해자를 거슬리게 하는 모든 사상, 집단, 담론을 마치 이슬람 근본주의자 처럼 배격하는 경향이 자라나는 걸 느낍니다. 억압이 해체되고 정의와 인권이 실현되려면 사회가 변화해야 하며, 사회의 변화는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 움직일때만 가능하다는 걸 이 책은 세삼스레 일깨워 줍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아주 또다른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계몽주의가 근대=기계적세계관=인종주의+진보에 대한 무비판적 기대+자본의 자유로운 폭주 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마치 그 주구가 계몽주의인 것 처럼 오해받던 데서 계몽주의를 다시 복원 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근대에서 억압의 근원을 구조적으로 밝혀 낸 것으로 인식되던 푸코의 철학의 핵심이 어떤 철학적 기반을 가지는가에 대한 아주 참신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얼마나 후덜덜한 자인지, 그동안 보편적인 정의와 인권을 주장한 근대 사상가들이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모욕을 당했는지 등등 정말 흥미로운 내용들입니다. 근대=기계적세계관=인종주의+진보에 대한 무비판적 기대+자본의 자유로운 폭주+남근 이런 류의 내용들은 요즘은 아주 익숙해서 식상할 정도이지만 이렇게 깊이 반성 해 볼 기회가 없었던 건 스스로 상식과 진보의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훌륭하게 번역 해 주시고 소개 해 주신 홍기빈 선생님께도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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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계몽주의 1. 인간, 인권의 발명 인간 계몽주의 이전의 유럽인은 프랑스인, 독일인은 있었을지언정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은 상상할 수 없었다. 비 유럽인에 대해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존엄성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온갖 낯선 방식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동일한 인간성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곧 눈앞의 현상 너머에 있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대단한 능력이자 위업인 것이다. 인권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건 무슬림이건 국적, 문화를 초월해 본래부터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며, 이 존엄성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탄생한 인권선언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같은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은 인간은 차별없이 ‘존엄하다’는 실재하지 않은 사실을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 ‘존엄해야 한다’는 당위 주장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가가야 할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톰 키넌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권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 사소한 표현상의 차이로 보이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권 담론에 대해 사유하고 실천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도전을 던질 만한 잠재력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권이 그저 주장일 뿐 그 이상이 아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주장의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주장이 본질주의와 교조주의를 덜어내고, 신성 혹은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우상숭배적이라고 부른 성격도 벗어날 수 있으므로 더욱 강력한 것이 될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 모든 인권은 분할할 수 없다. 생명권, 법 앞에서의 평등, 표현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정치적 권리 그리고 노동권, 사회보장, 교육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이든, 또는 발전과 자기결정권과 같은 집단적 권리이든 모두 분할할 수 없으며,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다. 한 권리를 개선하면 다른 모든 권리의 진전도 촉진된다. 마찬가지로 한 권리를 박탈할 경우에는 다른 모든 권리도 악영향을 받게 된다. 2. 유럽중심주의의 초월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300~400년 동안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 달려나갔고 새로운 여행기와 보고서를 끊임없이 쏟아 놓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유럽인들 이외의 인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신대륙의 여러 민족을 알지 못한다. 이곳을 방문한 유럽인이란 오로지 머리보다는 지갑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있는 자들뿐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전역과 그곳에 있는 수많은 주민들 또한 그 피부색만큼이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구 위를 덮고 있는 여러 나라에 대해 우리는 오로지 이름만 알고 있으며, 그런데도 인류를 판단하는 기만을 저지르고 있다"(루소)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에 대해 디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한 인물에게 정부의 권한을 모두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부도 없으며, 마드리드의 문명과는 다르다는 이유에서 이들에게 문명이 없고, 자기들과 똑같은 종교적 신념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아무런 미덕도 없으며, 자기들과 견해가 똑같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런 이해력도 없다고 멋대로 생각한다" 이마뉴엘 칸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크리스티안 볼프는 1723년에 "중국인이 기독교 없이도 완벽히 도덕적"이라고 공개 주장을 한 덕분에 48시간 안에 할레 대학의 자리를 비우고 프로이센 영토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는다. 어길 시 사형... 3. 유럽 식민주의에 대한 매서운 공격 칸트는 말했다. "문명 국가, 특히 상업적인 우리 세계의 국가들이 행하고 있는 불친절한 행동을 비교해보라. 이들이 방문하는(이는 정복과 같은 말이다) 곳마다 그곳 사람들에게 수행한 정의롭지 못한 짓은 일일이 셀 수 없이 많아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 이 문명화된 침입자들은 미 대륙, 흑인들이 살고 있는 땅, 말라카 제도, 남아프리카 희망봉 등을 발견했을 당시 이곳을 주인 없는 땅이라고 여겼거니와, 이는 그들이 그곳 주민들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 이 국가들은 원주민을 억압하고, 다양한 국가 사이에 광범위한 전쟁을 일으키고, 기근, 반란, 배반 등을 확산시키고, 창세 이래 인류가 짊어져온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이런 손님을 이미 겪은 경험이 있는 중국과 일본은 지혜롭게도 아예 이들의 입국을 거부했다" 칸트는 보통 단어 선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편인데 여기서는 '악행evil'이라는 단어를 아낌없이 구사했다. 디드로의 주장은 더 급진적이다 "호덴토트인들이여, 떨쳐 일어나라! (...) 도끼를 들고, 활시위를 당기고, 이 낯선 자들에게 독 묻은 창을 소나기처럼 쏟아부어라.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본국에 알릴 사람조차 남지 않도록 모조리 죽여버려라" 4. 제국주의 비판 제국을 비판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단지 그 잔혹행위만 지적한 게 아니다. 원주민의 땅과 자원에 대한 도둑질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여러 이론을 해체해버렸다. 그 중 중요한 것이 로크의 노동가치론이었으니, 이는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떠돌이 민족은 자기들 땅에 아무런 청구권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쓰인 이론이었다. 칸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드넓은 면적의 땅 위에서 생계를 해결하는 유목 혹은 수렵 민족이라면(호텐토트족, 퉁구스인, 또는 대부분의 미 대륙 인디언 민족), 이들을 정착시키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그 주민들이 자기들 땅을 양도하는 행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이용하지 않는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5. 인종주의 비판 칸트는 인종화된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적 주장을 겨냥했다. 흑인은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았다가 저주를 받은 함Ham의 자손이라는 의심스러운 신학적 주장인데 칸트는 이성을 활용했다. "어떤 이들은 무어인들의 조상이 함이며 신께서 함에게 벌을 내리셨으므로, 오늘날 그의 자손들이 그 벌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흰색 옷보다 검은색 옷이 더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으며, 이때도 검은색이 저주의 증표라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래도 계몽주의자들이 식민주의자이며 제국주의 옹호자인가? 볼테르는 ‘캉디드’를 통해 유럽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통해 타자의 시선으로 유럽 기독교의 편협성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74~93 편집 그림은 드라클루아가 1830년 7월 혁명에 동참한 이후 거기서 얻은 영감으로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2년 후 왕정 폐지를 요구하는 6월 봉기를 그린 [레미제라블]의 앙졸라와 마리우스, 쿠르페락, 에포닌, 가브로슈들이 연상되는 건 나만 그럴 것이다. 초연이 자욱한 가운데 가슴을 드러낸채 민중을 이끌고 있는 자유의 여신은 에포닌. 누나 옆에 쌍권총을 들고 있는 꼬마가 가브로슈. 엎드려 있는 이는 쿠르페락, 실크햇은 앙졸라, 그 뒤는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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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세상 모순의 본질은 회피하며 표면적인 이슈만 언급하는게 미덕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woke'의 범람도 이런 왜곡된 미덕을 양산하는 큰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수없이 정치적 올바름의 교리를 퍼나른다고 과연 세상이 나아질까요? 이 책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진정한 진보란 정치적 올바름의 탈을 쓴 부족주의나 정체성 정치라는 이름으로 보편적인 가치 자체를 말살하려는 모든 시도에 단언코 거부의사를 표시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사회도 미국처럼 이런 깨어있는 척 하는 사람들의 해악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독을 권할만 한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