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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내용보기
이 얇은 책은 근대 미학의 출발점 하나를 담고 있다. 시인 보들레르가 남긴 미술비평 두 편, 콩스탕탱 기스를 다룬 표제작과 들라크루아론을 묶었다. 분량은 184쪽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보들레르가 벼려낸 현대성이라는 개념은 이후 발터 벤야민과 미셸 푸코를 거쳐 20세기 모더니티 담론 전체의 씨앗이 된다.표제작의 주인공 기스는 오늘날 미술사에서 그리 큰 이름이 아니다. 신문 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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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책은 근대 미학의 출발점 하나를 담고 있다. 시인 보들레르가 남긴 미술비평 두 편, 콩스탕탱 기스를 다룬 표제작과 들라크루아론을 묶었다. 분량은 184쪽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보들레르가 벼려낸 현대성이라는 개념은 이후 발터 벤야민과 미셸 푸코를 거쳐 20세기 모더니티 담론 전체의 씨앗이 된다.


표제작의 주인공 기스는 오늘날 미술사에서 그리 큰 이름이 아니다. 신문 삽화가이자 풍속화가였던 그를 보들레르가 굳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의 전형으로 내세운 이유가 이 책의 핵심이다. 기스는 화실에 틀어박혀 영원한 아름다움을 좇는 대신, 거리의 군중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보들레르는 이 화가를 소요객이라 부른다. 군중이 물고기에게 물이 그렇듯 그의 활동 영역이 되는 존재,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익명으로 숨어 있는 관찰자다. 그는 흘러가는 군중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자, 움직일 때마다 삶의 온갖 표정을 담아내는 만화경 같은 존재다.


여기서 보들레르의 유명한 현대성 정의가 나온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절반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일시적이고 덧없으며 우연한 것이다. 바로 그 덧없는 절반, 곧 유행과 풍속과 시대의 표정이 현대성이다. 과거의 예술이 시대를 초월한 객관적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재현하려 했다면, 보들레르는 정반대를 요청한다. 예술가는 지금 이 순간의 유행 속에서, 하찮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 속에서 시적인 무언가를 길어 올려야 한다. 그가 남긴 문장, 모든 시대는 그 자신의 예술을 요청한다는 말이 이 태도를 압축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대조적인 두 예술가를 나란히 놓는다는 점이다. 표제작의 기스가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세상 속의 인간이라면, 이어지는 들라크루아론의 주인공은 대중을 경멸하는 고독한 천재다.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 고대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동경했지만, 정작 자신의 미학은 기스 쪽에 더 가까웠다. 이 모순이야말로 보들레르라는 인물의 핵심이다. 그는 부르주아를 혐오하고 조롱했지만, 그들이 자신의 주된 독자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원함을 향한 갈망과 덧없음에 대한 매혹이 한 사람 안에서 부딪히는 것이다.


이 책이 네 관심사와 만나는 지점은 여러 겹이다. 우선 앞서 네가 읽은 마네와 모더니티 계보의 사상적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보들레르가 현대의 삶을 그리라고 요청했을 때, 그 요청에 회화로 응답한 화가가 마네였고, 바타유와 클라크와 푸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 마네의 현대성이 이 에세이에서 이미 개념으로 예고된다. 또 하나, 소요객과 군중과 도시라는 주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도시 미학의 원천이다. 거리를 관찰하고 그 표정을 기록하는 자라는 보들레르의 화가상은, 지역의 풍경과 사람을 카드뉴스와 영상으로 담아내는 작업과도 묘하게 겹친다.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가 19세기에 신문 삽화가였다면, 지금 그 자리에 누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이 책은 독자에게 남긴다.


정리하면, 근대 미학과 모더니티 담론의 원천을 얇은 한 권으로 통과하는 책이다. 마네에서 벤야민, 푸코로 이어지는 사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덧없는 표정을 예술로 붙잡는 일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짧지만 오래 남는 물음을 건넨다. 스쳐 지나가는 것 속에서 영원을 길어 올리는 일, 그것이 보들레르가 150년 전에 예술에 맡긴 과제이자 여전히 유효한 숙제다.

YES마니아 : 골드 y*****n 2026.09.14. 신고 공감 0 댓글 0